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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운명]허좌이대(虛左以待)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20.05.02|조회수97 목록 댓글 0

허좌이대(虛左以待)

왼쪽 좌석(상석)을 비워놓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현자(賢者)를 기다리다 또는 선비를 존중하는 자세를 이르는 말이다.

虛 : 빌 허(虍/6)
左 : 왼 좌(工/2)
以 : 써 이(人/3)
待 : 기다릴 대(彳/6)

출전 : 사기(史記) 卷07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전국시대 위(衛)나라의 공자 무기(無忌)는 인재를 존중하여 그 인재가 어질거나 불초하거나를 막론하고 겸손한 예로 교류했다. 자신이 부귀하다고 교만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인재가 앞을 다투어 위 공자에게 모여드니 식객이 삼천에 이르렀다. 이런 위세에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위나라를 침공하지 못했다.

위 공자는 은자(隱者) 후영(侯嬴)을 모시기 위해 직접 수례를 모고 왼쪽자리를 비워 둔 채 그를 맞이하러 가기도 했다. 이로부터 수레의 왼쪽 자리는 상석(上席)을 가리키게 되었다.

인재나 현자를 대우하는 방법이야 많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격식도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위 공자는 격식을 제대로 갖추어 인재를 대했고, 실질적인 대우 또한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성어는 전국시대 유명한 4공자(평원군, 춘신군, 맹산군)의 한 사람인 신릉군(信陵君) 일화에서 연유한다. 사기(史記) 卷07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위(魏)나라 공자 무기(無忌)라는 위(魏)나라 소왕(昭王)의 막내 아들로 위나라 안희왕(安釐王)의 배다른 동생이다. 소왕이 죽자 안희왕이 즉위하면서 공자를 봉하여 신릉군(信陵君)에 봉했다.
魏公子無忌者, 魏昭王子少子而魏安釐王異母弟也. 昭王薨, 安釐王即位, 封公子為信陵君.

공자의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들에게 예의로 대우했다. 선비가 어질던 그렇지 않든 구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사귀고, 자기가 부귀하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았다.
公子為人仁而下士, 士無賢不肖皆謙而禮交之, 不敢以其富貴驕士.

그러므로 선비들이 사방 수 천리에서 앞 다투어 몰려와 공자에게 몸을 의탁 빈객이 삼천 인이나 되었다.
士以此方數千里爭往歸之, 致食客三千人.

그무렵 제후들은 공자가 현명하여 손이 많음을 알고 감히 병사를 보내 위나라를 도모하지 못함이 십년이 넘었다.
當是時, 諸侯以公子賢, 多客, 不敢加兵謀魏十餘年.

위(魏)나라에 숨어 사는 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 이름 후영(侯嬴)이다. 그는 나이 칠십에 집이 가난하여 대량성의 이문(夷門; 동문)의 문지기였다.
魏有隱士曰侯嬴. 年七十, 家貧, 為大梁夷門監者.

공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빈객으로 모시려고 많은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후영은 받으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신이 몸을 닦고 깨끗이 하기를 수 십 년인데, 끝내 문지기의 어려움 때문에 공자의 재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고 했다.
公子聞之, 往請, 欲厚遺之. 不肯受, 曰: 臣脩身絜行數十年, 終不以監門困故而受公子財.

공자는 뒷날 술자리를 베풀어 빈객들을 많이 모이게 했다. 연회장의 자리가 정해지자, 공자는 수레와 가마를 거느리고 자기 수레 왼쪽 자리를 비워놓고(중국에서는 왼쪽을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랜 풍속인데, 수레를 탈 때만 예외다), 스스로 동문으로 후생을 맞이하러 갔다.
公子於是乃置酒大會賓客. 坐定, 公子從車騎, 虛左, 自迎夷門侯生.

후생은 다 떨어진 의관을 단정히 하고, 곧 바로 공자의 상좌에 올라타고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았다.
侯生攝敝衣冠, 直上載公子上坐, 不讓.

후영은 이렇게 해서 공자를 태도를 살펴 볼 속셈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고삐를 잡은 채 더욱더 공손하게 대했다.
欲以觀公子. 公子執轡愈恭.
(史記/卷077 魏公子列傳)


◼ 史記 信陵君傳

魏公子無忌者는 魏昭王少子而魏安釐王異母弟也라.
위(魏)나라 공자 무기라는 자는 위나라 소왕의 작은 아들이면서, 위나라 안희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昭王薨에 安釐王卽位하여 封公子爲信陵君하니 是時范睢亡魏相秦하여 以怨魏齊라.
소왕이 죽자 안희왕이 즉위하면서 공자를 봉하여 신릉군으로 삼으니, 이 때 범수가 위나라에서 도망하여 진(秦)나라에서 재상이 되었는데, 위제를 원망했다.

故로 秦兵圍大梁하여 破魏華陽下軍하고 走芒卯하니 魏王及公子患之러라.
고로 진(秦)나라 군대가 대량을 포위해서 화양 아래에서 위(魏)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망묘(芒卯; 위나라 장군)를 도망가게 하니, 위왕과 공자 신릉군(信陵君)이 근심했다.

公子爲人이 仁而下士하여 士無賢不肖러니 皆謙以禮交之하여 不敢以其富貴로 驕士라.
공자의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어 선비들이 현불초(賢不肖; 어진 사람과 불초한 사람) 간에 모두 겸손하게 예로서 사귀어 감히 자기의 부귀로서 선비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士以此로 方數千里爭往歸之하니 致食客三千人이러라.
선비들이 이 때문에 사방 수 천리에서 다투어 귀의하니, 모인 식객이 삼천 인이나 되었다.

當是時하여 諸侯以公子賢多客으로 不敢加兵謀魏十餘年이러라.
이때에 있어서 공자가 현명하여 손이 많음으로, 제후들이 감히 병사를 보내 魏를 도모하지 못함이 십년이 넘었다.

公子與魏王博이러니 而北境 傳擧烽하여 言趙寇至하여 且入界라한대,
공자가 위왕과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북 쪽 변경에서 봉화가 올라갔다고 전하며 말하기를 "조(趙)나라가 쳐들어와 장차 국경 안으로 들어 오려합니다" 하니,

魏王釋博하고 欲召大臣謀어늘 公子止王曰 趙王田獵耳라.
위왕이 장기를 그만두고, 대신을 불러서 의논하려 하거늘 공자가 왕을 저지하여 말하기를, "조(趙)왕이 사냥할 뿐이고, 쳐들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했다.

非爲寇也하고, 復博如故하니 王恐하여 心不在博이라
다시 전처럼 장기를 두니, 왕이 두려워서 마음이 장기에 있지 아니하더라.

居頃에 復從北方來하여 傳言曰 趙王獵耳오 非爲寇也라한대,
조금 있다가 다시 북방에서 전언이 와 말하기를, "趙왕이 사냥할 뿐이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했다.

魏王大驚曰 公子何以知之오,
위왕이 크게 놀라 "공자는 어찌 아는가?" 하니,

公子曰 臣之客有能探得趙王陰事者하여 趙王所爲를 客輒以報臣이라 臣以此知之하노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신의 객중에 조왕의 비밀스러운 일을 알아내는 사람이 있어서, 조왕이 하는 것을 객이 그 때마다 그것을 신에게 보고합니다. 신이 그래서 압니다"고 했다.

是後, 魏王畏公子之賢能하여 不敢任公子以國政이러라.
이 뒤로 위왕이 공자의 현능(賢能; 어질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두려워 해서, 공자에게 감히 국정을 맡기지 못했다.

魏有隱士이니 曰侯嬴이라
위나라에 은사가 있었으니, 후영(侯嬴)이라고 한다.

年七十에 家貧하여 爲大梁夷門監者이어늘, 公子聞之하고, 往請欲厚遺之한대 不肯受曰 臣修身潔行數十年이라 終不以監門困故而受公子財하노라.
나이 칠십에 집이 가난하여 대량 동문의 문지기를 하는데, 공자가 듣고, 가서 청함에 많이 보내려 하는데, 받으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신이 몸을 닦고 깨끗이 하기를 수 십 년인데, 끝내 문지기의 어려움 때문에 공자의 재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고 했다.

公子於是에 乃置酒大會賓客하고, 坐定에 公子從車騎, 虛左, 自迎夷門侯生한대,
공자가 이에 곧 술자리를 베풀어 크게 빈객을 모으고, 자리를 정하고, 공자는 수레를 따르게 해서, 수레 왼쪽 자리를 비워놓고, 스스로 동문의 후생을 맞이하는데,

侯生攝弊衣冠하고 直上載公子上坐하고 不讓하여 欲以觀公子하니 公子執轡愈恭이러라.
후생이 떨어진 의관을 단정히 하고, 곧 바로 공자의 상좌에 올라타고, 양보하지 않고, 공자를 살피고자하니, 공자는 고삐를 잡은 채 더욱 공손하더라.

侯生又謂公子曰 臣有客在市屠中하니 願枉車騎過之하노라.
후생이 또 공자에게 말하기를, "신에게 시장 도살장에 사는 친구(객)가 있는데, 원컨대, 번거롭지만 수레를 타고 방문하고자 합니다" 하니,

公子引車入市한대, 侯生下見其客朱亥하고 俾倪故久立하여 與其客語하고 微察公子하니 公子顔色愈和러라.
공자가 수레를 끌고, 시장으로 갔는데, 후생이 내려서 그 친구 주해를 만나, 곁눈질로 살피면서 짐짓 오래서서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 공자를 몰래 살피니, 공자 안색이 더욱 온화하더라.

當是時하여 魏將相宗室賓客滿堂하여 待公子擧酒하고, 市人皆觀公子執轡하고 從騎皆竊罵侯生이러라.
이때를 당하여 위나라 장군, 재상과 종실의 빈객이 집에 가득하여 공자가 술잔을 들어 잔치를 시작하기 기다리고, 시장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직접 고삐를 잡은 것을 보고, 수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몰래 후생을 욕하더라.

侯生視公子色終不變하고 乃謝客就車하여 至家하다.
후생이 공자의 안색이 끝내 변하지 않음을 보고, 이에 친구에 인사하고, 수레에 올라서 집에 이르렀다.

公子引侯生坐하여 上坐하고 徧贊賓客하니 賓客皆驚이러라.
공자가 후생을 인도하여 상좌에 앉게 하고, 두루 빈객에게 소개하니, 손님이 모두 놀랐다.

酒酣公子起爲壽侯生前에 侯生因謂公子曰, 今日嬴之爲公子亦足矣라.
술을 붓고, 공자가 일어서서 후생 앞에서 축수함에 후생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금일 제(영)가 공자를 위하여 한 짓 또한 충분하다(한 일이 잘 되어 만족한다).

嬴은 乃夷門抱關者也어늘 而公子親枉車騎하여, 自迎嬴於衆人廣坐之中하니, 不宜有所過今公子故過之러라.
나는 동쪽 성문의 문지기거늘, 공자께서 친히 영광스럽게도 수레를 몰고 많은 사람들이 널리 앉아 있는 가운데서 스스로 영을 맞이했고, 마땅히 갈 곳이 아닌 곳도 공자가 오늘 지나갔다.

然이나 嬴欲就公子之名이라. 故久立公子車(거)騎市中하고 過客以觀公子하니 公子愈恭이라.
그러나 나는 공자의 명예를 높이고자 했다. 일부러 공자가 차를 몰고 시중에 오래 서 있게 헸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공자의 모습을 보니 공자는 더욱 공손했다.

市人皆以嬴爲小人하고 而以公子爲長者니 能下士也라.
시장 사람들이 모두 저를 소인이라 하고, 공자를 장자라고 여기게 되었으니, 이는 선비에게 낮출 수 있어서 그렇다" 하였다.

於是에 罷酒하고 侯生遂爲上客하다.
이에 술자리를 파하고, 후생을 상객으로 삼았다.

侯生爲公子曰 臣所過는 屠者朱亥니 此子은 賢者라 世莫能知하니 故隱屠間耳니라.
후생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제가 방문한 백정은 주해니, 이 사람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그를 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푸줏간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

公子往數請之호대 朱亥故不復謝하니 公子怪之러라.
공자가 가서 여러 번 청했는데, 주해가 일부러 답례하지 않으니, 공자가 괴이하게 여겼다.

魏安釐王二十年에 秦昭王已破趙長平軍하고 又進兵圍邯鄲하니 公子姊爲趙惠文王弟平原君夫人이라
위(魏) 안희왕 이십년에 진(秦)나라 소왕이 이미 조(趙)나라 장평의 군사를 격파하고, 다시 진군하여 한단을 포위하니, 공자(신릉군)의 누나가 조나라 혜문왕의 동생 평원군의 부인이라.

數遺魏王及公子書하여 請救於魏어늘, 魏王使將軍晉鄙로 將十萬衆救趙러니, 秦王使使者하여 告魏王曰吾攻趙하여 旦暮且下하니 而諸侯敢救者를 已拔趙에 必移兵先擊之하리라.
자주 위왕에게 공자의 편지를 보내 위왕의 도움을 청하거늘, 위왕이 장군 진비를 시켜 십만 군사로 조나라를 구하는데, 진(秦)나라 왕이 사자를 보내 위왕에게 고하거늘, "내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짧은 시간 안에 장차 함락시키고, 조나라를 감히 도운 제후를 조나라 함락 직후에 군사를 옮겨 먼저 칠 것이라" 했다.

魏王恐하여 使人止晉鄙하여 留軍壁鄴하니 名爲救趙요 實持兩端하여 以觀望이러라.
위왕이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진비를 중지시켜 군사를 업에 머물게 하니, 이름은 조나라를 구원하나, 실지로는 양쪽을 잡아서(양다리를 걸치고) 관망하였다.

平原君使者冠盖相屬於魏하여 讓魏公子曰 勝所以自附爲婚姻者는 以公子之高義爲能急人之困이러니, 今邯鄲旦暮降秦이어늘 而魏救不至하니 安在公子로 能急人之困也리오. 且公子縱輕勝하여 棄之降秦이나, 獨不憐(련)公子姊耶아.
평원군의 사자 행열이 위나라로 계속 와서 위공자를 꾸짖어 가로대, "내가 스스로 부쳐서 혼인을 한 까닭은 공자가 고상한 의리로 남의 어려움을 급히 여길 수 있다고 여겨서다. 지금 한단이 곧 진(秦)나라에 항복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위의 구원병이 오지 않으니, 어디에 공자가 남의 곤란한 점을 급히 여길 수 있다하겠는가. 또 공자가 비록 나를 가벼이 여겨 진나라에 항복하게 버려둘지라도, 유독 그대의 누나가 불상하지 않은가" 하였다.

公子患之하여 數請魏王하며, 及賓客辯士로 說王萬端호대 魏王畏秦하여 終不聽公子러라.
공자가 근심하여 자주 위왕에게 요청하여 빈객, 변사로 더불어 왕에게 만 가지 방법으로 말하나, 위왕은 진나라가 두려워서 끝내 공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公子自度終不能得之於王이라, 計不獨生而令趙亡이라 하고 乃請賓客하여 約車騎百餘乘하여 欲以客往赴秦軍하여 與趙俱死할새, 行過夷門하여 見侯生하고 具告所以欲死秦軍狀하고 辭決而行한대 侯生曰公子는 勉之矣어다 老臣不能從하다.
공자는 스스로 끝내 왕의 허락을 얻을 수 없음을 헤아리고, '혼자 살고 조나라가 망하게 해서는 안된다' 하고, 곧 빈객에게 청하여 거기 백여 승을 내어 객과 같이 진(秦)군 진영을 공격해서 조나라와 함께 죽자할 때, 행차가 동문을 지나고, 후생을 만나 진나라 군대에서 죽고자 하는 상항을 이야기하고, 이별을 말하고 가려 하는데, 후생이 "공자는 가서 애를 쓰시오, 나는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公子行數里에 心不快曰吾所以待侯生者備矣라 天下莫不聞이러니 今吾且死호대 而侯生曾無一言半辭로 送我하니, 我豈有所失哉아.
공자가 몇 리를 가서 마음이 불쾌하여, "내가 후생을 대우한 것이 갖추었음을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는데, 지금 내가 장차 죽으려 하매, 후생이 일찍이 한마디 짧은 말도 없이 나를 보내니, 내가 무슨 잃은 것(잘 못한 것)이 있는가?" 하였다.

復引車還問侯生한대 侯生笑曰 臣固知公子之還也호라 曰公子喜士, 名聞天下러니, 今有難에 無他端而欲赴秦軍하니 譬若以肉投餒虎니 何功之有哉리오. 尙安事客가.
다시 수레를 끌고 후생에게 가서 물으니, 후생이 웃으면서, "신은 진실로 공자가 돌아 올 줄 알았습니다. 공자가 선비를 좋아한다는 명성이 천하에 있는데, 지금 어려움에 특별한 방법이 없이 진(秦)나라 군대 앞으로 가려고 하니, 비유하건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지는 것과 같으니, 무슨 공이 있으리오, 오히려 빈객을 어디에 쓸려고 하십니까?" 하였다.

然公子遇臣厚호대 公子往而臣不送하니 以是知公子恨之復返也호라.
그러나 공자가 "신을 후히 대접했는데도, 공자가 감히 감에 신이 가지 않으니, 이것으로 공자가 유감스럽게 알고, 다시 올 줄 알았습니다" 하였다.

公子再拜因問한대, 侯生乃屛人閒語曰, 嬴聞晉鄙之兵符, 常在王臥內하고, 而如姬最幸하여 出入王臥內라하니, 力能竊之리다.
공자가 다시 절하고 인하여 물으니, 후생이 곧 사람을 물리고, 사사로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진비의 병부가 항상 왕의 침실에 있고, 여희가 가장 귀여움을 받아 침실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으니, 힘쓰면 능히 훔칠 수 있을 것입니다."

嬴聞如姬父가 爲人所殺이어늘, 如姬資之三年하며 自王以下로 欲求報其父仇호대 莫能得이라
또 내가 듣자니 여희의 아버지가 남에게서 죽임을 당했거늘, 여희가 그것을 마음에 둔지 삼년이 되었으며, 왕 이하 모두 원수를 찾아 갚으러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如姬爲公子泣이어늘, 公子使客으로 斬其仇頭하여 敬進如姬하니, 如姬之欲爲公子死하여 無所辭로대 顧未有路耳라.
여희가 공자를 대하여 울거늘, "공자가 객을 시켜 원수의 머리를 베어 여희에게 삼가 올리니, 여희가 공자를 위하여 죽어도 사양할 바가 없을 것이나, 다만 길이 없을 뿐입니다.

公子誠一開口하여 請如姬면 如姬必許諾하리니 則得虎符하여 奪晉鄙軍하여 北救趙而西却秦이면 此五霸之伐也라,
공자가 진실로 한번 입을 열어서 여희에게 청하면, 여희가 반드시 허락할 것이니, 그러면 병부를 얻어서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서, 북으로 조나라를 구하고, 서쪽로 진(秦)을 물리치면, 이로서 오패의 공적이 있을 것입니다."

公子從其計하여 請如姬한대 如姬果盜晉鄙兵符하여 與公子하다.
공자가 그 계책을 따라 여희에게 청하는데, 여희는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 공자에게 주었다.

公子行이러니 侯生曰 將在外에 主令有所不受하여, 以便國家하나니, 公子卽合符, 而晉鄙不授公子兵하고 而復請之면 事必危矣리니, 臣客, 屠者朱亥를 可與俱니 此人은 力士라 晉鄙請이면 大善이어니와 不聽이어든 可使擊之니라.
공자가 떠나려는데, 후생이 말하기를, "장군이 밖에 있으매 임금의 명령을 받지 않을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이익을 도모합니다. 공자가 곧 부절을 맞추어 보고나서도 만일 진비가 공자에게 병력을 주지 않고, (진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왕명을 청한다면, 일이 반드시 위태롭게 됩니다. 신의 객중에 백정 주해는 함께 데리고 갈만 하니, 이 사람은 힘이 센 사람이라, 진비가 들어주면 아주 좋으나, 듣지 않으면 쳐야 합니다" 하였다.

於是에 公子泣이어늘 侯生曰公子畏死邪아 何泣也오.
이에 공자가 울거늘, 후생이 말하기를, "공자는 죽음이 두렵습니까?, 왜 우십니까?" 하니,

公子曰 晉鄙는 嚄唶宿將이니, 往恐不聽이면 必當殺之라 是以泣耳니 豈畏死哉리오.
공자가 말하기를, "진비는 위엄이 넘치고, 경험이 많은 장군이니 아마도 듣지 않으면 마땅히 반드시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는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리오" 했다.

於是에 公子請朱亥한대 朱亥笑曰臣은 乃市井敲刀屠者어늘 而公子親數(삭)存之로대 所以不報謝者는 以爲小禮無所用이러니 今公子有急하니 此乃臣效命之秋也라하고, 遂與公子俱하다.
이에 공자가 주해에게 청했는데, 주해가 웃으며, "저는 곧 시장에서 칼을 움직여 짐승을 잡는 사람인데, 공자가 친히 자주 문후했는데, 답례를 하지 않은 까닭은 작은 예의는 쓸데없는 것이라 여긴 것인데, 지금 공자가 급한 일이 있으니, 이는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하고, 마침내 공자와 더불어 갔다.

公子過謝侯生한대 侯生曰臣宜從이나, 老不能이라하고 請數公子行日以至晉鄙軍之日에 北鄕自剄하여 以送公子호리라하다.
공자가 가다가 후생에게 인사를 하는데, 후생이 말하기를, "신이 마땅히 따라가야 하지만 늙어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공자가 가는 날을 따져 보아서, 진비군에 도착하는 날에 북쪽을 향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배웅하려 합니다" 했다.

公子遂行至鄴하여 矯魏王令하여 代晉鄙한대 晉鄙合符疑之하여 擧手視公子曰 今吾擁十萬之衆하여 屯於境上하니 國之重任을 今單車來代之는 何如哉오.
공자가 드디어 떠나 업땅에 도착하여 위왕의 명령을 사칭하여 진비를 대신하려 하는데, 진비가 부절을 맞추어 보고 의심하여 손을 들고 공자에게 말하기를, "지금 내가 십만 병사를 거느리고 국경에서 주둔하고 있는데, 나라의 중요한 임무를 지금 수레 하나를 타고 와서 교대하려 하니, 어인 일인가?" 하고,

欲無聽이어늘, 朱亥袖四十斤鐵椎로 椎殺晉鄙하다.
들어 주지 않으려 하니, 주해가 소매에 숨겼던 사십 근 철추를 꺼내 진비를 쳐서 죽였다.

公子遂將晉鄙軍하여 勒兵하고 下令軍中曰父子俱在軍中이어든 父歸하고 兄弟俱在軍中이어든 兄歸하고 獨子無兄弟어든 歸養하라
공자가 마침내 진비군의 장군이 되어서 군대를 거느리고, 군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아비 자식이 함께 군중에 있으면, 아비가 돌아가고, 형제가 같이 있으면 형이 돌아가고, 독자로서 형제가 없어도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고,

得選兵八萬人하여 進兵擊秦軍한대 秦軍解去하니 遂救邯鄲存趙하다.
병사 팔만 인을 골라 얻어서, 진(秦)군을 공격하니, 진군이 (포위를) 풀고 떠나니, 마침내 한단을 구하고, 조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趙王及平原君自迎公子於界할새 平原君負韊矢하여 爲公子先引이러라.
조왕과 평원군이 스스로 공자를 국경에서 맞이하는데, 평원군이 란시(韊矢; 화살통)를 짊어지고 공자를 위하여 먼저 길을 인도한다.

趙王再拜曰 自古賢人이 未有及公子者也로다.
조왕도 재배하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현인이 많아도 그 중에 공자에 미치는 자는 없다"고 말하였다.

當此之時하여 平原軍不敢自比於人하니라.
이때를 당하여 평원군은 공자를 감히 다른 사람에 비교하지 않더라.

公子與侯生決하고, 至軍에 侯生果北鄕自剄하다.
공자가 후생과 작별하고 진비군에 이르매 후생이 과연 북향하여 자결했다.

魏王怒公子之盜其兵符하여 矯殺晉鄙하고, 公子亦自知也하여 已却秦存趙에 使將將其軍, 歸魏하고 而公子獨與客으로 留趙라.
위왕은 공자가 병부를 훔치고 속여서 진비를 죽임에 화가 났고, 공자 역시 스스로 알고, 진(秦)이 물러가고 조나라가 보존되어 장군이 그 군사를 몰고 위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공자는 혼자 식객과 같이 조나라에 머물렀다.

趙孝成王德公子之矯奪晉鄙兵而存趙하여 乃與平原君으로 計以五城封公子어늘 公子聞之하고 意驕矜而有自功之色이러니,
조나라 효성왕이 공자가 진비의 군대를 사칭하여 빼앗아 조나라를 보존한 것을 덕으로 여겨, 평원군과 함께 계획하여 다섯 성으로 봉하려 함에, 공자가 듣고, 교만하고 자랑해서 스스로 공으로 여기는 낯빛이 있으니,

客有說公子曰 物有不可忘이오 或有不可不忘이오 夫人有德於公子라도 公子不可忘也오 公子有德於人이어도 願公子忘之也하라. 且矯魏王令하여 奪晉鄙兵以救趙하니, 於趙則有功矣어니와 於魏則未爲忠臣也어늘 公子乃自驕而功之하니, 竊爲公子不取也하러라.
빈객 중 공자에게 유세하는 자가 있어 가로대, "일은 잊어서는 아니되는 것이 있고, 잊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릇 사람이 공자에게 덕이 있다면, 공자는 잊으면 아니되고, 공자가 다른 사람에게 덕이 있다면, 공자는 잊도록 하십시오. 또 위왕의 명을 사칭하여 진비군을 빼앗아 조나라를 구했으니, 조나라에 대해서는 공이 있지만, 위나라에 대해서는 충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공자가 이에 스스로 공으로 여겨 자만하니, 진실로 공자가 취할 바가 아닙니다" 했다.

於是에 公子立自責하여 似若無所容者러라 趙王掃除自迎하여 執主人之禮하고 引公子就西階어늘 公子側行辭讓하여 從東階上하여 自言罪過, 以負於魏오 無功於趙라
이에 공자가 당장 자책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조왕이 소제하고 손님을 맞이하며 주인의 예를 행하는데, 공자를 인도하여 서쪽 계단으로 (최상 대우를 하여) 나오게 하거늘 공자가 측행하여 사양해서 동쪽 계단으로 올라와서, 스스로 죄과를 말하대 위나라를 배반하고 조나라에도 공이 없는 것으로 말했다.

趙王侍酒至暮에 口不忍獻五城은 以公子退讓也일새라.
조왕이 술을 마시며 저녁 때 까지 이르매, 입으로는 차마 다섯 성을 바치겠다고 말하지 못하는데, 이유는 공자가 사양하기 때문이다.

公子竟留趙를 趙王以鄗爲公子湯沐邑하고, 魏亦復以信陵으로奉公子하다.
공자(신릉군)가 마침내 조나라에 머무르니, 호지방을 탁목읍으로 삼았다. 위왕 역시 신릉군을 다시 공자로 받들었다.

公子留趙러니 公子聞趙有處士毛公은 藏於博徒하고 薛公은 藏於賣漿家하고, 公子欲見兩人호대 兩人自匿하여 不肯見公子하니,
공자가 조나라에 머물러 있는데, 조나라의 처사 모공이 박도에 숨어 있고, 석공은 술파는 집에 숨어 있다함을 듣고, 공자가 두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데, 두 사람은 스스로 숨어서 공자를 만나려 하지 않으니,

公子聞所在하고 乃間步하여 往從此兩人游를 甚歡이러니, 平原君聞之하고 謂其夫人曰 始吾聞夫人弟公子天下無雙이러니, 今吾聞之하니 乃妄從博徒賣漿者游하니 公子는 妄人耳로다.
공자가 있는 곳을 듣고, 몰래가서 이 두 사람을 따라 노니는 것을 매우 기뻐했는데, 평원군이 듣고, 부인에게 말하기를, "전에 부인의 동생인 공자가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내가 들으니 함부로 도박군과 술 장사치와 교유한다니, 공자는 망인(몹쓸 사람)일 뿐이다" 했다.

夫人以告公子에 公子乃謝夫人去曰, 始吾聞平原君賢이라 故로 負魏王而救趙하여 以稱平原君이러니, 平原君之游는 徒豪擧耳라 不求士也라. 無忌自在大梁時로 常聞此兩人賢하고, 至趙에 恐不得見하니 以無忌從之游라도 尙恐其不我欲也어늘 今平原君乃以爲羞하니, 其不足從游로다.
부인이 그 말을 공자에게 고했거늘, 공자가 누나에 고하고 떠나려 하며 말하기를, "전에 나는 '평원군이 현명하다'고 들었다. 고로 위왕을 배반하고 조나라를 구했는데, 평원군의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평원군의 교유는 호걸스러운 행동하는 사람은 맞이하고, 선비는 구하지 않는구나. 내가 대량에 있을 때부터 항상 듣기를 '이 두 사람이 현명하다' 했는데, 조나라에 와서 못 만날까 걱정했고, 내가 그들과 노니더라도 오히려 그들이 나와 교유하기 싫어할까 근심했는데, 평원군이 그들과 교유함을 부끄럽게 여기니, 그는 어울리기 부족하다" 하였다.

乃裝爲去한대 夫人具以語平原君하니 平原君乃免冠謝하고 固留公子하니 平原君門下聞之하고 半去平原君歸公子하며 天下士, 復往歸公子라, 公子傾平原君客이러라.
이에 짐을 꾸려 떠나려 하는데, 부인이 갖추어 평원군에게 말하니, 평원군이 곧 관을 벗고 사죄하고 억지로 공자를 잡으니, 평원군 문하의 식객이 이를 듣고, 반이 공자에게 귀의하니, 천하의 선비들이 다시 공자에게 모이니, 공자의 객이 평원군의 객을 능가했다.

公子留趙十年不歸러니 秦聞公子在趙하고 日夜出兵東伐魏하니 魏王患之하여 使使(시)往請公子어늘 公子恐其怒之하여 乃誡門下호대 有敢爲魏王使하여 通者는 死라
공자가 조나라에 머문지 십년에도 돌아가지 않는데, 진(秦)은 공자가 조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군사를 내어 동으로 위(魏)나라를 치니, 위나라는 두려워서 사신을 보내 공자가 귀국할 것을 청하니, 공자는 (위왕이) 자기에게 노한 것을 두려워해서 이에 문하 식객에 말하기를, "감히 위왕의 사자와 나를 통하게 하는 자는 죽이겠다" 했다.

賓客皆背魏之趙인데 莫敢勸公子歸러니 毛公薛公兩人이 往見公子曰, 公子所以重於趙하며 名聞諸侯者는 徒以有魏也니, 今秦攻魏하여 魏急이어늘 而公子不恤하니 使秦으로 破大梁而夷先王之宗廟면 公子當何面目으로 立天下乎이리오.
빈객도 모두 위나라를 배반하여 조나라로 온 사람인데, 감히 공자에게 돌아가기를 권할 사람이 없는데,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공자에게 가서 말하기를, "공자를 조나라가 중히 여기고, 제후에게 이름이 난 것은 다만 위나라가 있기 때문이니, 지금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가 급한데, 공자는 근심하지 않으니, 만약 진나라가 대량을 쳐서 선왕의 종묘를 평정한다면 공자는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나설 것입니까?" 했다.

語未及卒에 公子立變色하고 告車趣駕歸救魏한대 魏王見公子하고 相與泣而以上將軍印으로 授公子어늘, 公子遂將하다.
말이 채 그치기도 전에 공자가 안색을 바꾸고 수레에 일러 멍에 메기를 재촉하여, 돌아가 위나라를 구하려 하는데, 위왕이 공자를 보고 서로 울면서 상장군의 인끈을 공자에게 주거늘, 공자가 마침내 장군이 되었다.

魏安釐王三十年에 公子使使遍告諸侯한대 諸侯聞公子將하고 各遣將, 將兵救魏어늘
위나라 안희왕 30년에 공자가 사신을 보내 제후에게 두루 알렸는데, 제후는 공자가 장군이 되었음을 듣고, 각각 장수를 파견하여 장병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구원하러 보내거늘,

公子率五國之兵하여 破秦軍於河外하여 走蒙驁하고, 遂乘勝逐秦軍하여 至函谷關하여 抑秦兵하니 秦兵不敢出이라.
공자가 다섯 나라 병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군대를 하외에서 격파하고, 진나라 장군 봉오를 달아나게 하고, 마침내 이김을 틈타 진나라 군을 축출하여 함곡관에 이르러 진나라 병사를 억누르니 진나라 병사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當是時하여, 公子威振天下러라. 諸侯之客進兵法이어든 公子皆名之라. 故로 世俗稱魏公子兵法이러라.
이때에 이르러, 공자의 위엄이 천하에 떨쳤다. 제후의 객중에서 병법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공자는 모두에 이름을 붙이니 이것이 이른바 세속의 '위공자(魏公子) 병법(兵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秦王患之하여 乃行金萬斤於魏하여 求晉鄙客하여 令毁公子於魏王曰 公子亡在外十年矣라 今爲魏將에 諸侯將皆屬하니 諸侯徒聞魏公子요 不聞魏王이라.
진왕이 근심하여 이미 금 만근을 위나라에 뿌려서, 진비의 객(과거 진비와 한 패거리들)을 구해서 공자를 위왕에게 헐뜯어 말하기를, "공자가 도망하여 외국에 머문 지 십년이나, 장수가 됨에 제후와 장수가 모두 그에게 속하니 제후들은 다만 위공자만 들었지 위왕은 못 들었다 합니다."

公子亦欲因此時하여 定南面而王하니 諸侯畏公子之威하여 方欲共立之하나니라.
공자는 이때를 인하여 정이 남면하여 왕이 되니, 제후가 위엄을 두려워 하여 바야흐로 (두 사람의 왕을) 함께 세우고자 하니라.

秦數使反間으로 僞賀,公子得立爲魏王가 未也아한대, 魏王日聞其毁하고 不能不信이러니 後果使人으로 代公子將이어늘,
진나라가 자주 반간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축하하고, 공자가 능히 서서 위왕이 되었는지 말았는지 살피는데, 위왕이 날마다 헐뜯는 말을 듣고, 믿지 않을 수 없으니, 나중에 사람을 보내 공자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게 하니,

公子自知再以毁廢하고 乃謝病不朝하고 與賓客爲長夜飮하여 飮醇酒하며 多近婦女하여 日夜爲樂飮者四歲에 竟病酒而卒하니 其歲에 魏安釐王亦薨하다.
공자가 스스로 다시 헐뜯음으로서 폐위되었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조회에 불참하고, 빈객과 더불어 밤 내내 술을 마시고, 순주를 마시고, 부녀를 가까이 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신지 사 년 만에 마침내 병이 나서 죽으니, 그 해에 위나라 안희왕도 역시 죽었다.

秦聞公子死하고 使蒙驁攻魏하여 拔二十城하고 初置東郡하다. 其後 秦稍蠶食魏하여 十八歲而虜魏王하고 屠大梁하다.
진나라는 공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봉오를 시켜 위나라를 공략하여 이십 성을 뺏고, 처음으로 동군을 설치하고, 그 뒤에 진나라는 차츰차츰 위나라를 잠식하여 십팔 년에는 위왕을 사로잡고, 대량을 함락시켰다.

高祖始微少時에 數聞公子賢이러니 及卽天子位에 每過大梁할새 常祠公子러다.
고조가 처음 미소할 때, 공자가 현명함을 자주 들었는데, 천자의 자리에 나아감에 미쳐서, 매양 대량을 지날 때마다 항상 공자에게 제사지냈다.

高祖十二年에 從擊黥布還할새 爲公子置守冢五家하고, 世世에 歲以四時로 奉祠公子하다.
고조 12년에, 경포를 치고 돌아 올 때에 공자를 위하여 무덤을 지키는 다섯 집을 두고, 해마다 사시로 받들어 공자 제사를 지내게 했다.

太史公曰 吾過大梁之墟하다가 求問其所謂夷門하니 夷門者는 城之東門也라
태사공이 이르기를, "내가 대량의 옛 터를 지나다가 이른바 이문이란 것을 묻는데, 이문이라는 것은 성의 동문이다.

天下諸公子亦有喜士者矣로대 然이나 信陵君之接巖穴隱者하여 不恥下交하니 有以也라.
천하 제공자가 또한 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신릉군이 암혈은자를 접해서, 낮추어 자신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으니, 그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名冠諸侯不虛耳로다. 高祖,每過之할새 而令民으로 奉祠不絶也하시니라.
이름이 제후의 으뜸이 된 것이 헛된 것이 아니다. 고조가 매양 그 곳을 지나갈 대, 백성으로 하여금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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