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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운명]비연향풍(斐然嚮風)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20.05.03|조회수51 목록 댓글 0

비연향풍(斐然嚮風)

덕풍(德風)이나 위풍(威風) 따위에 따른다는 뜻으로, 군자의 뛰어난 덕과 위엄이 있는 풍채나 모양을 따른다는 말이다.

斐 : 문채날 비(文/8)
然 : 그러할 연(灬/8)
嚮 : 향할 향(口/16)
風 : 바람 풍(風/0)

출전 : 사기(史記) 卷121 유림열전(儒林列傳)


이 성어는 사마천(司馬遷)이 유림열전(儒林列傳)에서 유학(儒學)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지금 황제가 즉위할 무렵 조관(趙綰)이나 왕장(王臧) 등이 유학에 밝고 효무제도 유학에 관심이 있으므로 방정(方正; 곧고 바름), 현량(賢良; 어질고 착함), 문학(文學)의 선비들을 불렀다.
及今上即位, 趙綰王臧之屬明儒學, 而上亦鄉之, 於是招方正賢良文學之士.

그 뒤로 시경(詩經)을 강론하는 사람으로는 노나라의 신배공(申培公), 제나라의 원고생(轅固生), 연나라의 한 태부(韓太傅; 한영)가 있었고, 상서(尚書)를 강론하는 것은 제남의 복생(伏生)에서 비롯했으며, 예(禮)를 강론한 사람은 노나라의 고당생(高堂生)이었다.
自是之後, 言詩於魯則申培公, 於齊則轅固生, 於燕則韓太傅, 言尚書自濟南伏生, 言禮自魯高堂生.

역경(易經)을 강론하는 것은 치천(菑川)의 전생(田生)에서 비롯되었으며, 춘추(春秋)를 강론하는 것은 제나라와 노나라에서는 호무생(胡毋生)으로부터 시작되고, 조나라에서는 동중서(董仲舒)로부터 시작되었다.
言易自菑川田生, 言春秋於齊魯自胡毋生, 於趙自董仲舒.

두 태후(竇太后)가 죽자 무안후 전분(田蚡)이 승상이 되어 황로(黃老; 도교사상)와 혁명(刑名; 법률) 백가의 학설을 배척하고 문학하는 유학자 수백 명을 불러들였다.
及竇太后崩, 武安侯田蚡為丞相, 絀黃老刑名百家之言, 延文學儒者數百人.

그래서 공송홍은 춘추로써 평민에서 삼공이 되었고 평진후로 봉해졌다. 천하의 학자들은 한쪽으로 쏠려 바람을 따라 일어났다.
而公孫弘以春秋白衣為天子三公, 封以平津侯. 天下之學士靡然鄉風矣.
(史記/卷121 儒林列傳)

秦滅周祀, 幷海內, 兼諸侯, 南面稱帝, 以四海養. 天下之士斐然嚮風, 若是, 何也?
(新書/卷一)


⏹ 원칙과 덕풍(德風)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따져 보거나 아니면 사람이 행한 일을 놓고 옳고 그름을 재어 보는데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그 관계를 따지고 사람의 일을 시비로 걸어서 결정을 내릴 자가 없다는데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문제 탓으로 자주 시비가 일어난다. 시비라는 것은 네가 잘했는지 내가 잘했는지 한번 따져 보자는 것이고 네가 옳은지 아니면 내가 옳은지 파헤쳐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是)이고 저것은 비(非)라고 재어볼 수 있는 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원칙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유심히 보게 마련이다. 그 원칙이라는 것이 자기에게 적용하려는 자인지 아니면 남에게만 적용하려는 자인지 분명치가 않는 까닭이다.

좋은 말은 골라하면서 뒤로는 허튼짓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대는 위인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흔하다. 그래서 그러한 인간이 말하는 원칙이 자기를 방어하려는 엄포이고 남을 노리는 작살에 불과함을 발견하게 될 때 사람이 얼마나 영악하고 무서운 존재인가를 눈으로 보게 된다.

남을 판단하려 덤비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자기 오지랖은 그냥 두고 남의 겨드랑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상대를 쓰러뜨릴 급소를 노리기 때문이다.

도둑들이 도둑을 재판하는 것을 아는가? 떼도둑들이 도둑질을 해오면 전리품을 놓고 분배를 하게 된다. 저마다 몫이 제대로 돌아가면 다행이지만 두목이 독식을 하게 되면 졸개들이 배반한다.

그래서 도둑이 도둑을 밀고하는 일이 생긴다. 밀고당한 도둑은 감옥으로 가고 밀고한 도둑은 현상금을 받아 챙긴다. 그렇게 되면 어떤 놈이 진짜 도둑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도둑이 도둑을 재판하는 경우는 시비를 엉망으로 흔들어 버린다. 시비를 흔들어 버리면 세상은 무엇이 가짜이고 진짜인지를 갈라내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썩었다고 흉보게 된다. 썩은 세상을 흉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옳은 것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仁)과 의(義)가 있는 군자(君者)인 것이다.

그래서 통치자는 군자여야 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는 것이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것이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정치는 엉망이 되고 위아래의 질서는 파괴되어 세상이 어지럽게 되어 버린다.

백성이 대통령을 뽑지 못하고 입을 맞춘 몇 백명, 몇 천명이 모여 대통령을 추대하는 것 때문에 권부의 정통성이 문제가 되어 거리는 항상 데모로 시끌하고 경찰은 최루탄을 내질러 죄 없는 백성들은 눈물을 흘린다.

왜 몇몇 대표를 뽑아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인가? 백성으로부터의 믿음이 불안한 까닭에 억지를 쓰는 셈이다. 그러니 억지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고 내가 정신적인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다.

정치가 올바름의 것(正治)이 아니고 억누름의 것(征治)이 되면 중앙정보부 같은 것이 생겨난다. 법에 따라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하면 특권과 특혜가 날도둑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그래서 권부는 복마전이 되고 도둑의 소굴이 되는 것이 아닌가.

통치자는 군자의 덕으로 해야 한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다. 그리고 백성의 덕은 풀과 같다. 풀은 바람이 부는 대로 쏠리고 따른다.

덕풍(德風)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산들바람과 같다. 그러나 권문세도의 바람은 폭풍일 뿐이다. 폭풍이 불면 민초(民草)는 꺾이고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통치자는 군자라야 한다.


(考)

◼ 장자의 소요유 사상

장자의 사상은 대표적으로 소요유(逍遙遊)로서 마음이 가는대로 이리 저리 자유롭게 거닐면서 자연을 벗삼아 풍취를 즐기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소요유는 단순히 한가하게 일없이 노니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에 짐을 지우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자세를 말한다.

만약 어떤 경영자 CEO가 일에 매여 있을때 너무 일에만 몰입하면 마음과 몸의 건강이 악화될 수 있다. 그래서 현명한 CEO라면 반듯이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일을 소요유를 하듯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공자도 일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을 즐긴다는 것은 바로 일에 빠져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서 심신을 수양하고 마음의 안정과 정신적 평온을 얻는 것을 말한다.

철학적으로 살펴보면 실재(Reality)는 두 가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가 존재계의 표면에 해당하는 현상계에서의 실재이고, 둘째가 존재계의 이면에 해당하는 정신계에서의 실재이다.

장자의 사상은 지극히 정신계에서의 실재(Reality)를 강조한다. 당연히 정신계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물욕에서 자유롭고 자연과 친화하고 따라서 소요유의 정신을 희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책에서는 소요유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예를 들어 CEO가 경영을 통해서 경영의 즐거움을 자유롭게 얻어가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경영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것을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의 유희처럼 하나의 유희로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그 유희는 진지함과 여여한 마음이 중용을 이루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계발서 핑(Ping)에서는 선가(禪家)의 최상승 가르침을 피력하고 있는데 내용인 즉 '세상의 흐름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경영이라는 것도 소요유 정신을 따른다면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오는 사람마다 않고 가는사람 마다않는 것 유유자적한 정신이 경영의 근저에 자리해야할 것이다.

또 한가지 기술자로서 프로그래머의 예를 들다. 프로그래머에게도 장자의 소요유 정신이 매우 중요하다. 일이라는 것은 자기가 인위적으로 수행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직 그리고 개발문화 전체가 거대한 흐름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이 시간을 타고 유유히 흐릴때 그 흐름 속에서 명료하게 자신의 일을 맡아 해결해 낼때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조직, 사회, 개발문화, 기술여건 그리고 환경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명료하게 목도하고 이러한 영향과 흐름에 무위할 수 있고 그 위를 장자의 소요유 정신으로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필요하다.

소요유 정신은 일안하고 빈둥빈둥 노는 정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을 적극적으로 즐기면서 일이라는 힘든 노동 위에서 춤추듯이 기술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 장자의 소요유에 가장 가까운 것은 춤추듯이 자유로운 정신으로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이다. 기술자들도 어려운 수학공식과 기술적 문제에 정신을 몰입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몰입을 자유정신 속에서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누군가가 소요유 정신을 춤에 비유했는데 춤이란 어디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소요유는 어디에도 걸림 없는 대자유의 정신이다.

그의 말대로 '궁극적 자유' 그리고 '자유의 절대 경지'를 이른다고 할 수 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면 해탈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의미한다.

연극이나 영화에는 카타르시스라는 것이 있다. 이 카타르시스는 마음의 정화를 의미한다. 마음이 순간적으로 깨끗해 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카타르시스 추구는 순간적이고 영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장자의 소요유는 영원한 것이며 지속적이며 항구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근원적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CEO는 돈을 벌음으로써 즐거움을 누리고 기술자는 주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즐거움을 누린다.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을 완성했을때 성취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와같은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영원한 행복은 무위행을 닦아 소요유의 정신을 얻는데 있다.

어디를 가나 어디에 있거나 항상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하고 명료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가 아니다. 장자는 소요유 정신을 이야기했지만 지극한 즐거움은 담백하다고 하였다. 즉 무색, 무취, 무미, 무청, 무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절대정신으로서의 순수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극히 윤리적이어야 한다. 재물욕에서 벗어나고 물질적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며 올바르지 못한 명예욕이라면 그것은 똥을 보듯 대해야 한다. 이렇게 했을때 장자의 소요유 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장자의 우화는 지극히 윤리적이며 도덕적이다. 장자의 전체사상을 꿰뚫고 있는 소요유 정신은 가진 것없이 그냥 자연처럼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렇게 살다가는 것이다.

어느 고승(高僧)께서 설하신 대로 "청산은 말없이 살다가라 하네"의 시가 가장 장자의 소요유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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