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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운명]주유포욕사(朱儒飽欲死)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20.05.03|조회수91 목록 댓글 0

주유포욕사(朱儒飽欲死)

난쟁이(朱儒)가 너무 많이 먹어 죽을 지경이라는 뜻으로, 남의 사정에 자신을 비교하여 청원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朱 : 붉은 주(木/2)
儒 : 선비 유(亻/14)
飽 : 물릴 포(飠/5)
欲 : 하고자할 욕(欠/7)
死 : 죽을 사(歹/2)

출전 : 한서(漢書) 卷065 동방삭전(東方朔傳)


한(漢)나라 무제(武帝)때 동방삭(東方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 무제가 재능이 있는 선비들을 천거하라 하여 추천된 자들을 파격적으로 대우하였다.

이때 동방삭도 글을 올렸는데, 불손하게도 자신을 높이어 칭찬했지만 무제는 매우 특이한 자라고 생각하여 공거서(公車署; 황제의 조칙을 기다리는 기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녹봉은 적고 황제를 알현할 수도 없이 시일이 한참이나 지난 후 동방삭을 꾀를 냈다. 즉, 대궐의 말을 돌보는 난쟁이들에게 "너희들은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장차 너희 모두를 죽이려 한다며, 황제가 이곳을 지나갈 때 울면서 죄를 청하라"고 했다.
久之, 朔紿騶硃儒, 曰: 上以若曹無益于縣官, 耕田力作固不及人, 臨眾處官不能治民, 從軍擊虜不任兵事, 無益于國用, 徒索衣食, 今欲盡殺若曹.

얼마 후 황제가 지나간다는 전언을 듣고 난쟁이들이 모두 울부짖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居有頃, 聞上過, 硃儒皆號泣頓首. 上問: 何為.

난쟁이들이 대답했다. "동방삭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신들을 모두 죽인다'고 했습니다."
硃儒大恐, 啼泣, 朔教曰; 上即過, 叩頭請罪. 對曰: 東方朔言上欲盡誅臣等.

그러자 동방삭이 언변과 꾀가 많은 줄 알고 있는 무제는 동방삭을 불러서 물었다. "어찌해서 난쟁이들을 두렵게 했느냐?"
上知朔多端, 召問朔: 何恐硃儒為.

이에 동방삭이 이렇게 답했다. "신 동방삭은 살아도 말해야 하고 죽어도 말해야 합니다. 난쟁이들은 키가 3척 남짓한데 녹봉이 좁쌀 한 푸대요, 돈이 240입니다.
對曰: 臣朔生亦言, 死亦言. 硃儒長三尺餘, 奉一囊粟, 錢二百四十.

그런데 신 동방삭은 키가 9척이 넘는데도 좁쌀 한 푸대와 돈 240을 받습니다. 난쟁이는 배불러서 죽을 지경이요, 신 동방삭은 굶어서 죽을 지경입니다.
臣朔長九尺餘, 亦奉一囊粟, 錢二百四十. 硃儒飽欲死, 臣朔饑欲死.

신이 올린 말씀이 쓸 만하면 특별한 예우를 해주시기 바라옵고, 쓸 만하지 못한다면 내쫓아서 부질없이 장안(長安)의 쌀이나 축내게 하지 마십시오."
臣言可用, 幸異其禮; 不可用, 罷之, 無令但索長安米.

황제는 크게 웃고, 금마문(金馬門)에서 다음 조칙을 기다리게 했다. 이후 점차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上大笑, 因使待詔金馬門, 稍得親近.
(漢書/卷065 東方朔傳)


◼ 得微之到官後書, 備知通州之事, 悵然有感, 因成四章 / 白居易
미지가 임지에서 보낸 글을 읽고 통주의 일을 모두 알게 된 뒤에 울적해서 지은 4수 / 백거이

其三

人稀地僻醫巫少(인희지벽의무소)
궁벽진 땅 사람들과 의원 많지 않을테고

夏旱秋霖瘴虐多(하한추림장학다)
여름 가뭄과 가을 장마로 학질은 많을 것인데

老去一身須愛惜(노거일신수애석)
몸이 늙어가는 것은 누구나 슬픈 일이지만

別來四體得如何(별래사체득여하)
죽어버린 몸뚱이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侏儒飽笑東方朔(주유포소동방삭)
아첨 잘하는 사람들 동방삭을 비웃었고

薏苡讒憂馬伏波(의이참우마복파)
복파장군 마원도 율무로 모함 받았으니

莫遣沉愁結成病(막견침수결성병)
시름이 깊어져서 병이 되게 하지 말고

時時一唱濯纓歌(시시일창탁영가)
때때로 큰 소리로 '탁영가'를 불러보게.

아래는 제5구에 나오는 주유(侏儒)와 동방삭(東方朔), 그리고 한무제(漢武帝) 사이에 있었던 전고에 관한 내용이다.

上知朔多端, 召問朔, 何恐朱儒爲.
황제가 동방삭의 못된 심뽀에 대해 알고 동방삭을 불러 나무라듯 물었다. "너는 어쩐 일로 어리고 키도 작은 배우들을 두려워 하는 것이냐?"

對曰: 臣朔生亦言, 死亦言.
동방삭이 말했다. "신 동방삭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朱儒長三尺餘, 奉一囊粟, 錢二百四十. 臣朔長九尺餘, 亦奉一囊粟, 錢二百四十.
주유는 키가 석 자인데 곡식 한 자루와 이백사십 전의 돈을 녹봉으로 받습니다. 신 동방삭은 키가 아홉 자인데도 녹봉은 역시 곡식 한 자루와 돈 이백사십 전입니다.

侏儒飽欲死, 臣朔飢欲死. 臣言可用, 幸異其禮; 不可用, 罷之, 無令但索長安米.
주유는 배가 불러 죽을 판인데 신 동방삭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만약 제가 드린 말씀을 채납하신다면 저에 대한 대우를 달리 해주시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 장안의 쌀을 먹을 수 없게 하소서."

上大笑, 因使待詔金馬門, 稍得親近.
황제(한무제)가 크게 웃고 나서 동방삭을 금마문에서 기다리게 한 뒤에 점차 황제의 곁 가까이에 있게 하였다.

- 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 중에서

이후 주유포(侏儒飽)는 능력 없는 소인들이 총애를 받고, 어진 이들이 누명을 쓰고 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아래는 제6구에 나오는 마원(馬援)과 율무의 전고에 관한 내용이다.

初援在交阯, 常餌薏苡實, 用能輕身省欲, 以勝瘴氣.
처음에 마원이 교지(현재의 북베트남)에 있을 때 항상 율무를 먹었는데, 장독을 제거하고 몸을 가볍게 하며 정욕을 줄이는 효능이 있어서였다.

南方薏苡實大, 援欲以爲種, 軍還載之一車. 時人以爲南土珍怪, 權貴皆望之.
남방의 율무는 열매가 커서 그것을 중원에 심을 생각을 한 마원은 회군할 때 수레 하나에 율무를 싣고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남방의 진기한 토산물을 받아온 것으로 여기고 권문세가들도 모두 그것을 부러워 하였다.

援時方有寵, 故莫以聞. 及卒後, 有上書潛之者, 以爲前所載還, 皆明珠文犀.
그러나 당시 마원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누구도 감히 조정에 보고를 하는 사람이 없다가, 마원이 세상을 뜨자 마원이 이전에 남방에서 돌아올 때 진주와 무소뿔 등 진귀한 보물들을 (뇌물로) 챙겨 왔다고 무고하는 글을 올렸다.

馬武與於陵侯侯昱等皆以章言其狀, 帝益怒.
마무와 어릉후 후욱 등이 모두 그 형상을 설명하는 상주문을 올리자 황제가 더욱 노했다.

援妻孥惶懼, 不敢以喪還舊寶, 裁買城西數畝地槁葬而已. 賓客故人莫敢吊會.
마원의 부인과 자식들은 두려운 마음에 마원의 관을 오래된 묘지에 안장하지 못하고 성문 밖 서쪽에 땅을 조금 사서 덤불 속에 겨우 장사를 지냈고 사람들도 감히 조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嚴與援妻子草索相連, 詣闕請罪.
마엄과 마원의 처와 자식들은 풀로 엮은 끈으로 서로를 묶고 조정으로 나아가 죄를 청했다.

帝乃出松書以示之, 方知所坐, 上書訴寃, 前後六上, 辭甚哀切, 然後得葬.
황제가 양송이 무고한 글을 가져와 보여주자 비로소 원한에 따른 무고였음을 알게 된 마원의 식구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는데, 모두 여섯 차례나 올린 글의 애절함이 받아들여진 다음에야 마원을 안장할 수 있었다.

- 후한서(後漢書) 마원열전(馬援列傳) 마원(馬援) 중에서

이후 복파의이(伏波薏苡), 의이지방(薏苡之謗), 의이명주(薏苡明珠) 같은 성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비방을 듣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백거이(白居易, 772~846)
당조唐朝의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으로 자는 낙천樂天이고 만년의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하남(河南) 정주(鄭州) 신정(新鄭) 사람이다.

그의 시가는 제재가 광범위하고 형식이 다양하며 언어는 평이하고 통속적이었다. 시왕(詩王)과 시마(詩魔)로 불리기도 했다. 벼슬은 한림학사, 좌찬선대부에 이르렀다.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이 전하는데 장한가(長恨歌), 매탄옹(賣炭翁), 비파행(琵琶行) 등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향산(香山)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뜬 뒤 낙양(洛陽) 남쪽 향산의 비파봉(琵琶峰)에 묻혔다.

● 원진(元稹, 779~831)
당조唐朝 때 시인으로 자는 미지(微之) 또는 위명(威明)이고, 낙양(洛陽) 사람이다. 북위(北魏) 종실인 선비족 탁발부의 후예로 부친 원관(元寬)과 모친 정씨(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신악부(新樂府)를 제창한 그를 사람들이 원백(元白)으로 병칭하였다. 어려서 부친이 세상을 뜬 뒤 모친을 따라 봉상(鳳翔)에 있는 외가로 가서 자랐다.

정원(貞元) 9년(793)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제수한 뒤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다. 직간을 잘하여 보수적인 관료와 환관들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구세력과 타협하여 벼슬을 살았다. 무창군절도사(武昌軍節度使)를 지내던 중 진중에서 병사했다.

염시(艶詩)와 도망시(悼亡詩)에 특히 능했다. 원씨장경집(元氏長慶集) 60권과 소집(小集) 10권을 남겼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 蘇東坡詩船 戱子由
-東坡 蘇軾 作-

戱子由
(자유를 희롱하여)

宛丘先生長如丘
완구선생은 키가 커서 언덕 같은데

宛丘學舍小如舟
완구학사는 집이 작아 조각배 같으네

常時低頭誦經史
완구선생은 언제나 고개 숙인 채 경전과 사서를 낭송하는데

忽然欠伸屋打頭
갑자기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쿵 하고 천전에서 머리를 받도다

斜風吹帷雨注面
장막에 바람이 불어 얼굴에 비가 치면

先生不愧旁人羞
선생은 태연한데 옆 사람이 부끄럽네

任從飽死笑方朔
배가 터져서 죽을 난쟁이야 동방삭을 비웃어

肯爲雨立求秦優
빗속에 섰을망정 진나라 가수야 되겠느냐!

眼前勃蹊何足道
눈앞의 다툼이야 말 할 것이 없고요

處置六鑿須天游
감정을 다 죽이고 천상에서 놀아야지

讀書萬卷不讀律
책을 만 권을 읽었어도 법률은 읽지를 않아

致君堯舜知無術
우리 임금 요순으로 만들 수 없음을 잘도 아네.

勸農冠蓋鬧如雲
권농의 갓과 수래가 구름처럼 부산해도

送老虀鹽甘似蜜
늙은이에겐 나물과 소금이 꿀같이 달도다.

門前萬事不挂眼
문 앞의 모든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요

頭雖長低氣不屈
고개를 항상 숙였어도 기개는 높도다.

餘杭別駕無功勞
항주의 통판은 공로도 없이

畵堂五丈容旂旄
오장기 들어가는 으리으리한 단청집에 사는데.

重棲跨空雨聲遠
허공에 걸린 겹겹의 누각에 빗소리도 아련하고

屋多人少風騷騷
인적 드믄 수많은 건물에 바람소리 스산하다

平生所慚今不恥
평생토록 부끄럽게 여겨 온 일이건만 지금은 오히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요

坐對疲氓更鞭箠
편안하게 앉은 채로 지친 백성 대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채찍질도 한다네.

道逢陽虎呼與言
길에서 양호를 만나면 그를 불러 이야기 하네

心知其非口諾唯
속으로는 그른 줄 알면서 입으로는 맞장구 치네

居高志下眞何益
지위만 높고 뜻이 낮으면 무슨 보탬이 되랴

氣節消縮今無幾
의기와 절개가 쪼그라들어 이제 얼마 않남았네

文章小技安足程
문장은 잔재주라 칠 게 없지만

先生別駕舊齋名
선생과 통판이 다 옛날에는 이름을 날렸으니

如今衰老俱無用
지금은 노쇠하여 둘 다 쓸모가 없을지라도

付與時人分重輕
세인들에게 맡기어 경중을 가려 보자구나

이 작품은 희령(熙寧) 4년(1071년) 항주(杭州)에서 지은 것이다. 이때 소식의 아우 소철(蘇轍)은 완구(宛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진주(陳州)에서 학관(學官), 즉 오늘날의 교관으로(敎官)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그 고생이 매우 심했던 것으로 전한다.

제목에 '戱(희롱할 희)'자를 쓰고 있지만 아우 소철을 위로하는 뜻으로 시를 지었을 것인데, 시의 후반에는 시인 자신의 자조와 불만의 소리를 늘어 놓았고, 특히 끝 네 구절에서는 쓰임이 없는 두 사람의 처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소식은 결국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독서만권부독률(讀書萬卷不讀律)'이라는 구절 때문에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는 필화사건을 겪으며 백일 넘게 투옥되기도 했다.

법보다 위에 두어야 할 것으로 요순시대의 태평한 시대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반대당에서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소식의 뜻으로 해석한 때문이었다.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배경이라 하면서도 자료들이 모두 '독서만권부독률(讀書萬卷不讀律)'이라는 한 구절만 소개하고 있을 뿐이어서 그 구절이 들어있는 작품 전체를 읽어보고 싶었다.

● 소식(蘇軾, 1037~1101)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 서화가로 자는 자첨(子瞻)과 화중(和仲),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미주(眉州) 미산(眉山; 지금의 사천성 미산현) 사람이다.

그는 문학에서 시와 사, 부와 산문 등 모든 분야에서 고른 성취를 보였으며 서법과 회화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중국문학 예술사상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걸출한 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산문에서는 구양수(歐陽脩)와 이름을 나란히 하며 구소(歐蘇)로, 시(詩)에서는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소황(蘇黃으로, 사(詞)에서는 신기질(辛棄疾)과 함께 소신(蘇辛)으로 불렸고, 서법에서는 황정견, 미불(米芾), 채양(蔡襄)과 함께 북송사대서법가라는 의미의 송사가(宋四家)로 꼽혔으며, 그림에서는 호주화파(湖州畵派)의 개창자가 되었다.

부친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삼부자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세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글이 명대(明代)와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과거(科擧)의 제목으로 채용되는 때가 많아서 사람들이 "소식의 문장에 익숙하면 양고기를 먹고, 소식의 문장에 서툴면 나물국이나 먹게 된다(蘇文熟, 喫羊肉, 蘇文生, 喫菜羹)"고 까지 하였다.

시문집만 해도 동파칠집(東坡七集, 동파집(東坡集), 동파사(東坡詞) 등이 있는데, 시가 2700여 수, 사가 300여 수에 이를 뿐만 아니라 다량의 산문을 함께 남겼다.

● 소철(蘇轍, 1039~1112)
자는 자유(子由)와 동숙(同叔)을 썼고, 만년에는 영빈유로(穎濱遺老)를 자호로 삼았다. 미주(眉州) 미산(眉山; 지금의 四川省 眉山市) 사람이다.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식(蘇軾)의 동생이다.

가우(嘉祐) 2년(1057) 형 소식과 함께 진사시험에 급제하였다. 삼부자가 함께 당송팔대가의 반열에 들었는데, 사람들이 이들 세 사람을 부를 때는 '삼소(三蘇)'로, 소철만을 부를 때는 '소소(小蘇)'라고 하였다. 난성집(欒城集), 후집(後集), 삼집(三集) 등이 전한다. 사후에 문정(文定)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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