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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운명]마정방종(摩頂放踵)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20.05.03|조회수657 목록 댓글 0

마정방종(摩頂放踵)

정수리부터 닳아서 발꿈치까지 이른다는 뜻으로,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남을 깊이 사랑함을 이르는 말이다.

摩 : 문지를 마(手/11)
頂 : 정수리 정(頁/2)
放 : 놓을 방(攵/4)
踵 : 발꿈치 종(足/9)

출전 : 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 上 26章


이 성어는 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 上 26장에서 맹자가 묵자를 평한 말에 나온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孟子曰: 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맹자 말하기를, "양자는 자신을 위하는 것을 택해 자신의 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로워진다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墨子兼愛, 摩頂放踵利天下, 爲之.
묵자는 사랑을 다하는 겸애를 택해 자신의 이마를 갈아 발꿈치에 이른다해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 그렇게 하려했다.

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자막은 중도를 잡았다. 중도를 잡음은 성인의 도에 가까운 것을 행하는 것이다. 중도를 잡지만 저울추가 없는 것은 한쪽에 치우치는 것과 비슷하다.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舉一而廢百也.
한쪽을 잡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 성인의 도를 해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도 하나를 높이고는 백가지를 없애는 일이다."

(解說)
양주와 묵적은 맹자 등문공 상편에 이미 등장했던 이름이다.

楊朱墨翟之言 盈天下.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에 가득찼다.

天下之言 不歸楊則歸墨.
천하의 말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갔다.

楊氏 爲我 是無君也.
양주는 나를 위하니 이는 군주가 없음이다.

墨氏 兼愛 是無父也.
묵적은 모두 사랑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음이다.

無父無君 是禽獸也.
아버지와 군주가 없으니 이는 금수이다.
(맹자/등문공하)

양주는 자신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사람이 희생해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 한 사람을 위해 천하가 봉사하는 것, 모두를 취하지 않고 자신을 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묵자는 맹자보다 앞세대 사람으로 생몰연대가 BC 476~390이다. 맹자 태어나기 20여년 전에 죽었다. 양주는 묵자보다는 늦고 맹자보다는 빠른 시대의 사람이다.

묵자는 이름이 적(翟)으로 어릴 때 목동을 했고 목공일을 배웠다. 초기에는 공자의 유학을 따랐으나 귀신과 운명에 대해 불확실한 유학의 태도와 장례와 예악에의 사치 등을 비판하고 더욱 철저한 인(仁)의 실천을 주장하며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다하는 겸애(兼愛)를 주창하였다. 자신은 낮추고 절약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등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자막(子莫)은 노나라의 현자로 양주와 묵적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다 하여 그 중도를 잡은 사람이라고 한다.

권(權)은 저울추를 뜻한다. 저울추를 장악하여 경중을 정하는 힘을 권세(權勢)라고 한다. 저울추를 놓아 저울대를 수평으로 하듯이 미묘하게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도를 권도(權道)라고 한다.

◼ 孟子 盡心章句 上 26章

中庸의 道

道之所貴者中, 中之所貴者權.
도(道)의 귀중한 것은 중용(中庸)이고, 중용의 귀한 것은 권(權; 저울 추, 균형)라는 말이다.

맹자(孟子)가 말했다. "양자(楊子)는 자신만을 위하여 생활하니, 털 하나를 뽑아 천하(天下)를 이(利)롭게 한다 할지라도 아까워 하지 않는다.

묵자(墨子)는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兼愛)하여 이마부터 발꿈치까지 갈아서라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 실천하였다.

자막(子莫)은 중용(中)을 취하니, 중용 취함이 도(道)에 가까우니, 중용을 취하나 기울지 않으니 전체를 취함과 같다.

한 가지만을 취함을 미워하는 까닭은 그 도(道)를 해(害)하기 때문이니, 한 가지를 취함으로 백(百)가지(나머지 모두)를 폐기(廢棄)하기 때문이다."

○ 도(道)가 귀(貴)하게 여기는 바는 중용이요, 중용이 귀하게 여기는 바는 저울추(權)와 같이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盡心章句 上 26章

孟子曰: 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맹자가 말했다. "양자는 나(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살았기에, 털 하나라도 뽑아 천하를 이롭한다고 해도 하지 않았다.

楊子, 名朱. 取者, 僅足之意. 取爲我者, 僅足於爲我而已, 不及爲人也.
양자(楊子)의 이름은 주(朱)이다. 취자(取者)는 겨우 만족한다는 의미이다. 취위아자(取爲我者)는 겨우 자신에게만 만족할 뿐이고, 다른 사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列子稱其言曰, 伯成子高不以一毫利物, 是也.
열자(列子)는 그 말을 칭하여 이르기를, '백성자고(伯成子高)는 털끝만치도 물건에 이로운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다.

墨子兼愛, 摩頂放踵利天下, 爲之.
마정방종(摩頂放踵)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닳아 없어진다'는 뜻으로 온몸을 바쳐 남을 위해 희생하는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묵자는 모든 것을 사랑했는데,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갈아 천하를 이롭게 함을 실천하였다.

墨子, 名翟. 兼愛, 無所不愛也. 摩頂, 摩突其頂也. 放, 至也.
묵자(墨子)의 이름은 적(翟)이다. 겸애(兼愛)는 사랑하지 않음이 없다. 마정(摩頂)은 정수리의 뾰족이 나온 부분을 가는 것이다. 방(放)은 이르는 것이다.

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자막은 중용을 잡으니, 중용을 잡음은 (법도에) 가까운 것이고, 중용을 취함은 저울질함이 없으니, 오히려 한쪽을 잡는 것이다.

子莫, 魯之賢人也. 知楊墨之失中也, 故度於二者之間而執其中. 近, 近道也.
자막(子莫)은 노(魯)나라 현인이다. 양자와 묵자가 중용을 잃음을 알고, 양쪽 사이를 헤아려 가운데(중용)을 잡았다. 근(近)은 도에 가까움이다.

權, 稱錘也, 所以稱物之輕重而取中也. 執中而無權, 則膠於一定之中而不知變, 是亦執一而已矣.
권(權)은 저울의 추이니, 물건의 경중을 달아 중립을 취한 것이다. 중용을 잡고 저울질이 없으니, 중용을 정하여 붙이고 변함을 알지 못하니, 이것 역시 한쪽을 잡은 것일 뿐이다.

程子曰: 中字最難識, 須是默識心通. 且試言 一廳 則中央爲中. 一家, 則廳非中而堂爲中. 一國, 則堂非中而國之中爲中, 推此類可見矣.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中字가 제일 알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말없이 마음을 통하여 알아야 한다. 시험삼아 말하면, 대청은 중앙이 가운데가 된다. 한 집안에는 청이 가운데가 아니고, 집이 가운데가 된다. 나라에는 집이 가운데가 아니고, 나라의 중심이 가운데가 되니, 이런 류로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又曰: 中不可執也, 識得則事事物物皆有自然之中, 不待安排, 安排著則不中矣.
또 이르기를, "중용은 잡을 수 없으므로, 인식하여 알게 되면,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 스스로 가운데가 있어, 안배를 기다리지 않으니, 안배를 하게 되면 가운데가 아닌 것이다.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擧一而廢百也.
한쪽을 잘못 잡는 것은, 도(道)를 해치는 것이므로, 하나를 들어 백(百)을 폐하는 것이다.

賊, 害也. 爲我害仁, 兼愛害義, 執中者害於時中, 皆擧一而廢百者也.
적(賊)은 해치는 것이다. 나를 위하면 인(仁)을 해치고, 두루 사랑함은 의(義)를 해치니, 중용을 잡는 것이, 때로 중용을 해치니, 모두 하나를 들어서 백가지를 폐하는 것이다."

○ 此章言, 道之所貴者, 中; 中之所貴者, 權.
이 장은, 도의 귀중한 것은 중용이고, 중용의 귀한 것은 저울추라는 말이다.

楊氏曰: 禹稷三過其門而不入, 苟不當其可, 則與墨子無異. 顔子在陋巷, 不改其樂, 苟不當其可, 則與楊氏無異.
양씨가 말했다. "우직이 문 앞을 세 번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음은 진실로 그 옳음이 타당하지 않으면, 묵자와 차이가 없다. 안자가 누항에 있을 때,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진실로 옳음이 타당치 않으면 양씨와 다름이 없다.

子莫執爲我兼愛之中而無權, 鄕隣有鬪而不知閉戶, 同室有鬪而不知救之, 是亦猶執一耳, 故孟子以爲賊道. 禹稷顔回, 易地則皆然, 以其有權也. 不然, 則是亦楊墨而已矣.
자막은 나만을 위하는 것과 두루 사랑하는 것의 가운데를 골라 잡으나, 저울질이 없는 것은, 마을의 이웃이 서로 다투어도 문을 닫을 줄을 모르고, 한 집의 다툼이 있어도 구할 줄 모르니, 이 역시 한 쪽을 잡는 것과 같을 뿐인데, 고로 맹자가 도를 해침이 된다고 하였다. 우(禹), 직(稷), 안회(顔回)가 처지를 바꾸면 다 그러함은 저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역시 양자와 묵자일 뿐이다."


⏹ 마정방종(摩頂放踵)

코로나 확산되자 전국 의료진 대구로
한쪽에서는 마스크 매점매석 적발
잇속 챙기기보다 서로 돌보고 배려
인류애 실천 마정방종의 자세 가지길

코로나19로 인해 온 국민이 몸살을 앓고 있다. 감염자는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힘들고 의료인은 감염자를 치료하느라 힘들고 일반 국민도 감염 확산을 방지하느라 기본적인 생활조차 힘들다.

이 가운데 의료인의 상황이 특이하다. 보통 사람은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게끔 가급적 감염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한다. 하지만 구급대원을 포함해서 의료인은 아픈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야 하는 운명이다.

신천지로 인해 코로나19가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다수의 감염자를 낳고 있다. 초유의 일이 벌어지다 보니 당연히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감염자를 돌볼 의료인도 부족하고 의료 물자도 언제 바닥이 날지 몰라 걱정되기 마련이다.

정부와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 다른 지역의 의료인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왔다. 의료진은 방호복을 입고 진료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이중 삼중으로 힘들다.

방호복을 입으니 땀이 나서 온몸이 흥건히 젖은 상태로 일하기도 하고 마스크에 코가 눌려서 상처가 나기도 한다. 잠깐 휴식을 취하느라 방호복을 입고 의자에 기댄 모습과 코에 반창고를 붙인 모습이 사진으로 알려지면서 의료진의 노고를 여실히 실감하게 됐다.

하지만 의료진의 헌신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마스크와 관련해 볼썽사나운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마스크 구입이 어려워지자 평소보다 비싼 가격에 마스크를 대량으로 구입한 뒤 더 비싼 가격으로 되팔기도 하고, 경로당에 보관 중인 마스크를 훔치기도 하고, 정부의 단속이 시작되자 판로를 찾지 못해 창고에 몇 십만 장 또는 몇 백만 장의 마스크를 보관하는 일도 있다.

심지어 안전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불량 마스크를 만들어 시중에 내다 팔기도 했다. 온 국민이 마스크를 구하느라 판매처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고, 그러고도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한 장을 며칠씩 재활용하는 와중에 추하게 제 잇속만을 차리려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의료인의 헌신과 일부 사람의 잇속 차리기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는 전국시대에 활약한 묵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여러 사람이 불행을 겪을 때 서로 돕기보다 이 틈을 이용해 제 잇속을 차리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 사이가 나빠지고 결국 공동체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잇속만을 차리는 삶을 별애(別愛)로 보고, 공동체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고려해 타인을 돕는 삶을 겸애(兼愛)로 보았다. 사람이 별애에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 사회의 위기를 이용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끊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묵자는 겸에 따라 별을 바꾸자는 겸이역별(兼以易別)을 주장했다. 예컨대 마스크가 부족한 상황에서 너도나도 사려고 하면 마스크를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마스크를 미리 구입해서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마스크를 살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마스크 부족 현상을 극복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빨라질 수가 있다. 실제로 SNS에서 이러한 제안을 하는 사람이 있다.

묵자는 겸애에 따른 삶을 확산시키기 위해 무진장 노력을 했다. 이 때문에 묵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맹자마저도 "묵자는 겸애를 주장해 머리 꼭대기부터 발꿈치까지 다 닳아 없어지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한다(墨子兼愛 摩頂放踵 利天下爲之)"고 인정했다.

여기서 마정방종(摩頂放踵)은 몸이 바스러지도록 일해 기진맥진하니 자신이 닳아 없어진다는 느낌을 겪는다는 것이다.

최근에 전국 각지에서 감염자를 돌보기 위해 대구와 경북으로 달려간 모든 사람의 노고를 표현한다면 바로 마정방종(摩頂放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코로나19는 끝나고 싶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의 세계적 텍스트가 됐다.

현재 우리는 코로나19의 검진키트를 개발, 양산해 그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신속한 확진 판정과 체계적인 방역이라는 세계적 텍스트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다.

앞으로도 추하게 잇속을 차리는 일보다는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서로 돕는 마정방종(摩頂放踵)의 인류애를 확인하는 글을 텍스트에 많이 담았으면 좋겠다.


⏹ 마정방종(摩頂放踵)

물건의 분류와 가격은 바코드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가치는? 숫자로 이루어진 점수가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데에는 모든 부문에서 숫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어 능력은 면접을 볼 필요도 없이 자격시험의 점수를 물어보면 된다.

그렇다면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는 지지자의 득표수를 보면 된다? 과연 이렇게 단순한 공식으로 복잡다단한 한 개인의 정신과 지식, 능력과 인품을 아우를 수 있는가?

다들 득표수에 매달려 선거의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이 딱지치기 구경하는 맛이라 그 맛이 애매하다. 단순한 개인의 점수마저도 지위와 재력을 합하여 나눈 것으로 점수를 매기는 세상이 아닌가.

게다가 결과 만능주의에 정신적으로 매몰되어 과정에서 이룩한 것을 잘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과정이 훌륭하면 점수로 넣을 방법도 있을 텐데 법적 강제 외에는 과정 점수를 넣을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공자는 "군자는 의를 분명히 하고, 소인을 이를 분명히 한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고 강조하며 정의(義)와 이익(利)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모름지기 군자라면 개인의 이익보다는 사회적 정의에 우선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의 유교적 전통이나 선비 문화에서는 무척이나 강조되어 왔던 바다. 개인적 이익의 전쟁터를 정의실현이라는 명분으로 가장한 사람도 보이니 가히 난장판이다.

묵자는 "정의와 이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고 주장 하였는데, 아마도 이러한 묵가사상의 공리주의자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겉만 핥고 사물의 첨부 하나만 떼어서 자기합리화만 하면 되겠는가.

다시 묵자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갈아 없애도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하겠다(摩頂放踵 利天下 爲之)"고 말한 바를 아는지 모르겠다.

득표수가 많다고 폼 잡을 일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의 정의를 위하여 헌신할 각오를 다져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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