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無字碑)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비석이라는 뜻으로, 공적이 너무 크고 많아서 비석에 다 새길 수 없어 무자비(無字碑)로 있다는 말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새길 것이 없어 몰자비(沒字碑)로 뒀다는 말도 있다.
無 : 없을 무(灬/8)
字 : 글자 자(子/3)
碑 : 돌기둥 비(石/8)
(유의어)
몰자비(沒字碑)
백비(白碑)
정조 17년 계축(1793,건륭 58) 4월4일 (병인)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상주(尙州)의 옛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충의단(忠義壇)에 추후 배향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상주 유생 성재열(成載烈) 등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상주의 옛 의사 김일은 만력(萬曆) 임진 연간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옛 진사 김안절(金安節)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왜적이 점차 가까이 다가옴에 미쳐 안절이 어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신하자, 김일이 혼자 의병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많은 군사로 증연(甑淵)에 진을 쳤다가 적의 강성함을 보고 도망치고 종사관 윤섬(尹暹) 등이 죽자, 김일이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 붙이고 향리의 의사들을 더욱 모집하여 왜적을 맞아 북계(北溪)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김일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패해서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나라를 위해 한번 죽는 의리를 본받아서 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친 자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고는 적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고 그의 처자식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 중 17세의 딸 하나가 있어 그의 종 영환(永還)과 곧바로 적진으로 가서 시체가 쌓인 속에서 김일의 시체를 찾아내어 거적으로 싸서 백원(白原)에 장사 하였다가, 적이 평정되자 묘를 다시 쓰고 백비(白碑)를 묘 앞에 세우고서 말하기를,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이 비에 글을 새길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김안절이 기록한 사적과 죽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정(趙靖)의 '진사일록(辰巳日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충의단의 배향하는 반열에서 유독 그만 빠져 있으니, 훌륭한 조정에서 묻힌 것을 드러내 주는 정사에 있어 의당 균등하게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배향하게 하였다.
⏹ 무자비(無字碑)의 공덕
비(碑)만 세우고 묘를 만들지 않았는데 그 덕이 널리 알려져서 찬양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며, 또 한 글이 없더라도 그 사람을 칭송할 수 있기 때문에 비만 세우고 글을 짓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를 일컬어 백비라고 한다.(…)
일찍이 당나라 때 몰자비(沒字碑)가 있어 이 일과 유사하다고 들었으나 나는 고루하여 기억하지 못한다.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또한 '기이한 칭송(異褒)'이라고 할 만하다.
위의 글은 '글자 없는 비(白碑)', 조선 후기 정조의 문체반정에 맞서다가 '자질구레한 글이나 쓴다'고 찍혀 고생했던 글재주 꾼 이옥(李鈺)의 글이다.
마흔 살 무렵 합천에 잠시 귀양 갔을 때 그곳에 집성촌을 이룬 인천 이씨 선조의 청렴과 곧음을 기려 옛날 고려 국왕이 세워 줬다는 맨 비석을 보고 쓴 소품이다.
죽은 이를 기리는 묘비에 응당 있어야 할 글자가 없을 때 이를 보는 산 사람의 심사는 이처럼 기이함을 넘어 대단히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이옥(李鈺)이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은 중국 여황제 무후(武后)의 무자비(無字碑)를 말한다.
무후는 남편인 고종이 56세로 죽자 시안의 건릉에 장사 지내고 입구에 키가 6m를 넘는 쌍둥이 신도비 2개를 마주 보게 세웠다.
서편 돌에는 남편을 기리는 송덕문 8천여 자를 직접 짓고 아들인 중종의 글씨로 새겨 '고종의 성덕을 기록한 비(述聖記碑)'라고 불렀다.
맞은편 돌은 훗날 합장될 자신의 몫으로 남겨 두고 후손이 자신을 마음껏 기려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고종이 죽은 지 2년 만에 이(李)씨의 당 대신 무(武)씨의 주(周) 왕조를 세운 것이 문제였다.
82세로 죽기 직전 왕조를 아들에게 되돌려 주고 '나를 황제가 아닌 일개 황후로 대접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송덕문에 새길 경력에 찬탈이라는 대역 행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들도 외면했고 신하들도 자칫 멸문지화를 부를 일을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맨 비석 그대로 남게 됐다.
물론 이설도 있다. 당시 유행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함을 극대화 한다(無爲而無不爲)'는 도가 풍조에 따라 필설로 다 못할 업적을 무자(無字)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훗날 술성기비가 바람에 무너져 동강이 났어도 무자비는 1300년 동안이나 건재하다는 점, 그리고 중국 역대 황릉 중에 건릉만이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아 문화재 호사가들의 입맛을 당기게 하고 있는 것이 이런 무자비의 공덕이라는 속설도 있다.
있어야 할 것을 비움으로써 오히려 그 뜻을 드러내는 무자비의 정신을 온전하게 구현한 것은 이보다 300여년 앞선 동진(東晉)의 명재상 사안(謝安)의 묘비다.
그는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대륙을 거의 통일하고 한족 왕조의 명맥을 끊어 놓을 찰나에 이를 좌절시킨 영웅이다. 북방 다섯 오랑캐(五胡)의 하나인 전진의 부견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 준 인연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사안의 묘비는 난징에 있는데, 비석은 있으되 글이 없는 까닭을 후세 기록은 '그의 공덕은 말과 글로써 나타낼 수 없으므로 맨 비석을 세웠다(以安功德,難以稱述,故立白碑)'고 전하고 있다.
⏹ 무자비(無字碑)
중국 최초의 여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세상을 떠날 무렵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너무나 많으므로 비석 하나에는 다 기록할 수 없을 테니 그저 아무 것도 새기지 말고 비워 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건릉에 이르는 길가에는 120여 개의 석상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석상의 길이가 500미터에 이르는 이 능에는 당나라 고종과 그의 황후 측천무후가 묻혀 있다.
한편 이 길 가장 안쪽에는 무자비(無字碑), 즉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까닭은 이렇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세상을 떠날 무렵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너무나 많으므로 비석 하나에는 다 기록할 수 없을 테니 그저 아무것도 새기지 말고 비워 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 유언을 충실히 지킨 후대인들은 이런 비석을 세워 그녀의 업적을 기렸다.
그렇다면 죽음에 직면해서도 야망을 감추지 않았던 측천무후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중국 역사를 보면 모든 황제는 남성이었는데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당나라 고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나중에는 황후에 올랐으며, 결국에는 놀라운 야망을 이용해 중국에서 전무후무한 황제에 오른 인물, 그가 바로 측천무후(則天武后)다.
사실 측천무후는 고종의 어머니뻘이었다. 열세 살에 고종의 아버지인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 무사확은 당나라 시조인 고조 이연의 부하였는데, 아리따운 딸 무측천이 그런 연유로 이연의 아들 이세민, 즉 당 태종의 후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고작 11년 후,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스물넷 되던 해 태종은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뒤를 잇는다. 이에 무후는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절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 생전부터 고종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던 만큼 고종이 절을 자주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다른 이야기도 전해 오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는 고종의 황후 왕씨가 고종이 후궁 소숙비를 총애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무후를 궁으로 다시 끌어 들였다고 한다.
여하튼 무후는 쫓겨났던 궁으로 귀환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그녀의 놀라운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무후는 우선 궁중 내의 후궁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결국에는 황후까지 폐위시킨 후 서른한 살이 되던 655년에는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종과 자신 사이에 낳은 자식을 죽인 후 이 사건이 황후의 짓이라고 세상에 알려 황후를 폐위시켰으니 그 사실 여부를 가릴 필요도 없이 그 시대에 무후가 어떤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한편 황후에 오른 무후는 이번에는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원로인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이 무후가 고관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와 함께 태종의 후궁임을 내세워 이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며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한편 병약한 고종이 정사를 소홀히 하자 무후는 전권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태는 683년 고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무후가 그동안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챙긴 것은 아니었다.
한편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태자 철이 즉위했으니 그가 중종이다. 그러자 중종의 황후인 위씨는 중종의 무능함을 이용해 자신 또한 무후와 같은 위치에 오르고자 노력했다.
이를 안 무후는 중종을 폐위시키고 둘째아들 단을 즉위시키니 그가 예종이다. 이로써 중종은 고작 54일 동안 제위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은 여전히 무후의 손아귀에 있었고,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다.
690년, 급기야 무후는 명목상의 황제 예종을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 해에 수많은 백성들이 국호 변경을 청했고, 봉황과 공작 등의 상서로운 조짐들이 나라 곳곳에서 보고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무후를 비호하는 세력의 공작이었다.
이에 힘입은 무후는 나라 이름을 주(周)라 개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그런 후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했으니, 이를 역사에서는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고 부른다. 이때 무후의 나이 65세였다.
그때부터 나라의 권력은 무씨 집안 출신들이 다른 관료들과 합의해 좌지우지 했다. 무후의 국가는 한동안 평온을 유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후는 노쇠해졌고, 698년에는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궐 밖으로 추방했던 중종을 불러 태자로 책봉했다.
705년에는 무후가 중병에 걸린 틈을 타 여러 대신들이 모반을 일으켜 무후에게 양위를 강요했고, 그 뒤를 이어 중종이 황제에 올랐다. 한편 이궁하여 머물던 무후는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고 이로써 당나라 왕조는 재건되었다.
그러나 중종은 결국 제2의 무후가 되고자 했던 위황후에게 독살당했다. 그러자 예종의 셋째아들 이륭기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위후 일파를 제거하고 혼란을 마무리 지었다. 이륭기는 훗날 '개원(開元)의 치(治)'라 불리는 당나라 제2의 전성기를 가져온 현종이다.
◼ 무측천(武則天)이 무자비(無字碑)를 남긴 이유는?
산서성 건현(乾縣)의 현성 북쪽에 있는 양산(梁山)에 위치한 건릉(乾陵)은 당고종 이치와 여황제 무측천의 합장묘이다. 중국역대제왕의 능원중 유일한 부부황제 합장묘이다.
묘앞에는 두 개의 거대한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술성기비(述聖記碑)'로 무측천이 글을 짓고, 당중중 이현(李顯)이 글을 썼으며, 주로 당고종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이 비는 일곱 마디로 구성되어 있고, 일곱마디를 서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예로부터 '칠절비(七節碑)'라고 불렀다.
그런데, 동쪽에 있는 비석은 무측천 자신이 스스로를 위하여 세운 '무자비(無字碑)', 즉, 아무런 비문도 쓰여있지 않은 비석이다.
비석의 머리부분은 8마리의 서로 얽히고 섥힌 이수(螭首)를 조각했으며, 천운룡문(天雲龍紋)으로 장식했다. 비석의 하단부분에는 준마음수(駿馬飮水), 웅사(雄獅), 운문(雲紋)등을 새겨두었다.
건릉건축에서의 대칭적인 배치라는 특징으로 볼 때, '무자비'와 '술성기비'는 분명히 당고종이 서거한 후 무측천이 동시에 세우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초 이 비석에는 글자 한 자 새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륭년간의 '옹주금석기'의 기록에 따르면, "비석의 측면에는 용과 봉을 새겼지만, 그 정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았다." 1938년에 편찬된 '건현신지'에서도 "원래 글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다.
'무자비'에는 왜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까? 천여년 이래,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각종 견해를 내놓았다. 종합해 보면 다섯가지이다.
첫째는 공덕이 너무 커서 새길 필요가 없었다는 설, 둘째는 스스로 죄악이 큰 것을 알고 기록하기 곤란했다는 설, 셋째는 시비공과는 후세인들에게 맡기겠다는 설, 넷째는 후계자가 불만이 있어 글을 새기지 않았다는 설, 다섯째는 글자를 새겼었는데, 후인들이 지워버렸다는 설이 그것이다.
첫째, 공덕이 높고 커서 글자로 새길 필요가 없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무측천이 '무자비'를 세운 것은 스스로를 자랑하고, 공덕이 크고 높아서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는 것이다.
무측천은 655년에 황후가 되고부터 705년 퇴위당할 때까지 50년간 최고권력의 자리에 있었다. 만일 당고종이 죽은 때로부터 계산한다면, 그래도 21년이나 된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고 걸출한 여황제이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명문세족을 타파하고, 과거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대량의 인재를 정치무대로 끌어 들였고, 문벌귀족의 독점을 저지했다.
그녀는 농사, 잠업을 일으키고, 수리사업을 벌였으며, 요역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균전제를 정돈하여, 사회경제를 계속 발전시켰고, 인구수를 증가시켰다.
그녀는 사람을 잘 뽑아서 일을 맡겼고, 파격적으로 등용하며, 각급 관리들이 인재를 추천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건의를 잘 받아들여 이후 당나라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인물들이 이때 등용되었다.
그녀는 봉건국가의 변방도 잘 관리하고, 변방 각 민족과의 관계도 잘 처리했다. 결론적으로, 무측천은 정치적인 재능과 이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녀의 통치기간 동안 민중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들을 많이 처리했고, '정관지치'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역사가 일대 진보를 이루게 되며, 나중의 '개원지치'를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 스스로 죄악이 깊고 무거워 말로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무측천이 '무자비'를 세운 것은 스스로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 잘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문을 아예 쓰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① 무측천은 애교의 수단으로 저급의 '재인'에서 '황후'에까지 올라 후궁의 권력을 장악하고, 결국은 '황제'에 올라 천하의 대권을 훔쳤다.
② 당파를 조장하고, 궁중에 간사한 무리들을 끌어 모아서, 이씨 당나라 조정을 무너뜨렸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제거했다.
③ 혹리를 기용하여, 밀고와 남형의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④ 당나라초기 사회경제 발전은 말안장형인데, 무측천이 정권을 잡았을 때가 가장 낙후한 시기였다.
⑤ 그녀가 정권을 잡은 동안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잃어, 국가통일이 위태로웠다.
이러한 이유로 무측천은 스스로를 위하여 글을 남기기 곤란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자비'를 세운 것이다.
셋째, 시비공과는 후세인들이 판단하도록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무측천은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었다. '무자비'를 세운 것은 아주 총명한 조치였다. 시비공과를 후세인들에게 논하라고 남겨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무측천에게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부정적인 요소도 있다. 무측천이 정권을 잡은 기간동안, 정관지치 이래로 경제는 발전하는 추세가 계속 되었다.
당고종이 사망한 후의 복잡한 국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비범한 재능을 드러냈다. 건의를 받아들이고 인재를 등용하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는 봉건 정통사상을 지닌 인사들마저도 감탄하여 마지 않는다.
다만, 무측천의 부정적인 면도 아주 두드러진다. 그녀는 개인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혹리(酷吏)'를 등용했고, 무고한 자들을 많이 죽였다. 불교를 깊이 믿어 사치낭비가 심했다.
특히 통치후반기에는 조정의 정치가 날로 부패하고, 무측천이 등용한 새로운 특권귀족들이 등장한다. 무측천이 어쩔 수 없이 권력을 내놓게 되고, 정권을 당중종에게 넘기는데,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잘 알았다.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평가를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냥 '무자비'를 남겨서 후세인들에게 평가를 남긴 것이다.
넷째, 후계자가 원한을 품고 있어 비문을 쓰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당중종 이현은 비록 무측천의 친아들이지만, 장기간 그녀의 위세에 눌려 공포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여러번 독수에 당할 뻔도 했다. 이현은 모친이 혹형을 남발하고,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데 대하여 아주 싫어하고 미워했다.
무측천은 태자 이홍, 즉 효경황제를 독살하고, 태자 이현(李賢)을 폐위시켰다. 즉, 장회태자는 서인으로 되었고, 나중에 자살한다.
당중종 이현은 당초에 즉위한지 1년도 되지 않아 무측천에 의하여 황위에서 쫓겨났고, 경성에서 축출된다. 20여년간, 이현은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리하여 매번 무측천이 보낸 사람이 왔다는 말만 들으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의 장남인 이중윤(李重潤), 즉 의덕태자, 딸인 이선혜(李仙蕙), 즉 영태공주는 모두 말을 실수하는 바람에 무측천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외에 무측천은 만년에 황위를 조카인 무씨(武氏)에게 넘겨주려고 기도했다. 이렇게 온갖 고통을 겪은 당중종이 다시 황위에 오른 후에 비록 공개적으로 모친에 대한 원한을 털어 놓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공덕을 기리는 말을 하기는 힘들었다.
그리하여 아예 글자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무측천에게는 '무자비'가 남겨지게 되었다.
다섯째, 새겨졌던 비문을 후세인들이 제거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원래 비문을 새겼었는데, 나중에 당현종이 지워 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목적은 무주(武周)정권이 이당(李唐)정권에 준 치욕을 철처히 씻어버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무측천이 병사한 후, 당중종이 복위했다. 당중종은 비록 정치적 포부는 없었고, 연약하고 무능했지만, 그의 노력하에, 모친의 비문에 그녀의 공덕을 새기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비문을 새겼다면, 나중에 왜 없어졌는가?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나중에 집권자가 비문의 내용을 다시 지워버린 것이다.
당나라 개원2년, 714년 삼월, 당현종 이융기는 조서를 내려 천추(天樞)를 없애도록 한다. 이를 보면 당현종이 무측천이 남긴 잔존한 무씨집단을 제거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당현종은 병사를 이끌고 부친 이단, 즉 당예종을 다시 황제위에 올린 후,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를 천후(天后)로 명칭을 되돌리게 한다."
그리고, 무삼사, 무숭훈의 시호를 박탈하고, 부관참시하며 묘를 갈아서 평지로 만든다. 무씨 숭은묘(崇恩廟)와 호릉(昊陵), 순릉(順陵)을 없애버린다. 그는 자신이 등극한 후, 대거 무주정권이 남긴 문제를 처리한다.
개원 2년, 그는 "천추를 훼멸시키고, 그 쇠를 녹여서 돈을 만들게 했다." 그 목적중 하나는 바로 철저히 무씨가족이 이씨가족에 준 치욕을 씻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로써 미루어볼 때, 무씨정권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기 위하여, 그가 무측천의 능묘에 있는 석비에 이미 새겨진 비문을 지워버리게 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역사상 이런 다섯 가지 견해가 남아 있다. 이들 각각의 견해는 모두 각자의 근거를 지니고 있어, 어느 한 설이 정설로 굳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무자비'가 남긴 수수께끼는 아마도 후세인들이 계속 탐구하고 추측해야할 이슈일 것이다.
⏹ 무자비(無字碑)를 아십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인생을 마치는 때가 온다. 세상을 떠나게 되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있게 된다. 만약, 적지 않은 생애를 살았음에도 기록할 만한 선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면, 그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본다.
더욱이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 업적은 하나도 없이 사치와 방탕, 향락으로 일생을 보내다 그것 때문에 국가가 멸망 하였다면, 그 사람은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을 뻔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런 황제가 있다. 중국 명나라의 13대 황제인 신종 만력제(萬曆帝)가 바로 그 사람이다.
북경에서 북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장평현이라는 곳에 명나라 황제 13인이 묻혀있는 13왕릉이 있다.
13왕릉 가운데 3대 영락제의 장릉과 13대 만력제의 정릉이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는데, 장릉이 외관만 공개되어 있는데 반해, 정릉인 만력제의 묘는 내부까지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가 있다.
그 정릉 입구에 커다란 비석이 하나 있는데 높이가 5m나 되는 신종 황제의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이다. 그런데 그 비석에는 글자가 단 한 자도 새겨져 있지가 않다.
보통 앞면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위를 새기고, 뒷면에는 공덕을 새긴다. 공덕을 새기는 곳에 글자 없이 공백을 두는 것을 무자비(無字碑)라고 한다.
그런데 신종 황제의 비에는 뒷면은 고사하고 앞면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지가 않다. 밋밋한 돌만 말없이 서 있어서, 일명 신종 황제의 무자비(無字碑)라고 불리운다.
무자비가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만력제는 1572년 10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라 1620년까지 무려 48년간 재위하여 명나라 황제 가운데 통치기간이 가장 길다.
재상인 장거정이 어린 신종 황제를 보필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보위에 오른지 10년 만에 장거정이 죽자 정사를 돌보지 않고 향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음주가무와 미색에 빠져 조정의 일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수천에 달한 궁녀들과 밤마다 향락으로 지새웠다. 조정의 일은 환관에게 맡겨 조정 대신을 접견하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해 궁중의 기물은 거의 날마다 새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죽은 후 묻힐 능을 조성하는데는 온 힘을 기울였다. 능 조성을 위해 하루에 2-3만명을 동원하다 보니, 그러지 않아도 흉흉한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다.
오랜 기간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과 향락, 그리고 무리한 능 건축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나서 명나라는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그가 죽고 24년이 되었을 때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명나라 멸망의 결정적 역할을 만력제가 한 것이다. 그러니 그의 비문에 단 한 글자도 적을만한 공덕이 없었던 것이다.
만력제는 4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나라를 다스렸지만 성덕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적을만한 공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신종 황제의 무자비(無字碑)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방탕한 생활로 48년 세월을 허송하고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명나라의 13대 황제 신종, 여기 잠들었다"고 새겨 두는 것보다,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은 무자비가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 같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인데, 우리가 지금 세상을 떠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신종 황제의 무자비를 보면서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