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疏外)
사귄 사이가 점점 멀어짐 또는 따돌려 멀리함을 말한다.
疏 : 소통할 소(疋/7)
外 : 바깥 외(夕/2)
(유의어)
소외(疎外)
소외(疏外)는 철학 또는 경제학 용어이다. 인간이 만든 것 상품, 화폐, 제도 등이 인간 스스로부터 멀어져 반대로 인간을 지배하는 같은 생소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를 통해 인간이 지닌 자기의 본질을 잃는 상태를 말한다 .
외로움의 사전적 정의는 혼자가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을 뜻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격리되었을 때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낯선 환경에서 혼자서 적응 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였을 때 등 혼자가 되었다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외로움의 어원은 하나를 뜻하는 '외'와 '그러함' 또는 '그럴 만함'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 '~롭다'를 붙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내성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서 있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외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주위에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외향적인 사람이 내성적인 사람보다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말로는 '고독'이 있으며 외로움을 오랫동안 겪다보면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수도 있다.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다고 느낄 때 실제로 뇌의 통증을 느끼는 부분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따돌림'도 여러 사람이 한사람을 심리적, 사회적으로 소외시켜 외롭게 만듦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주는 행위이다.
사회적 고립은 인간을 포함한 사회적 동물이 그 사회의 관계, 예컨대 사람이면 인간관계에 참여하지 않고 고립되는 것이다.
집단에 속해 있지 않으며 고립되고 소외되어 있다 느낀다. 주변에 맴돌거나 집단으로 함께 어울리기를 피하고 혼자 하는 활동에 몰입한다. 대인관계를 맺을 돈도 없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독거노인에게 나타난다.
고독사(孤獨死)는 주로 혼자 사는 사람이 돌발적인 질병 등으로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도시화와 문명화로 각종 편의시설의 발달과 개인주의 가치관의 확산, 인권, 권리에 대한 정보 및 인지 상승, 이런저런 성격차이 등으로 혼자 생활하는 사람이 급증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홀로 살다가 홀로 죽어서 대부분 오랫동안 시신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실직이나 경제적 능력으로 인한 중장년 남성의 고독사가 대부분이었지만 개인주의 가치관 확산 및 인권, 권리의식, 가치관 충돌 등으로 독신자가 늘면서 경제력과는 상관없는 고독사, 연령과 상관 없는 고독사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가족 간의 갈등, 지인 간의 갈등에 있어서 서로 양보, 타협하거나 한쪽이 양보하였지만 점차 인권, 권리의식과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확산으로 일방적 양보나 타협은 거부하는 사례도 급증하였고, 성격차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려는 현상도 점진적으로 확산되어갔다.
가족 간의 의견대립이나 종교문제, 가치관의 차이, 각종 시설, 다 제도의 확충으로 가족이 있어도 시체 인수를 거부하는 사례도 급증하였다.
현대사회에서 고독사가 증가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고령화, 개인주의, 인간관계 스트레스, 핵가족화 등을 그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다만 경우에 따라 가족이나 지인 등은 있지만 본인 이외에 외출 등으로 부재중일 때 본인이 갑작스럽게 급병이나 건강악화로 인해서 절명하게 되거나 의식을 잃어서 숨졌을 경우에도 고독사에 해당된다.
가족이나 지인이나 간호인이 있기는 해도 이들이 잠시 부재중이거나 장기 부재중에 본인이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인한 병세나 건강악화 등이 발생한 경우 본인 혼자만 있기 때문에 이 경우도 고독사에 해당될 수 있다.
이쪽은 가족들이나 지인들이 뒤늦게 발견이라도 하여서 신고를 하거나 시신을 운구라도 할 수 있지만 가족이나 지인도 없이 완전히 혼자살면서 실내나 바깥에서 고독사한 경우는 그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려스러운 면이 있다.
⏹ 소외(疏外, alienation)
개인이 그가 속해 있는 사회와의 관계에서 통합되지 못하거나 거리가 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소외현상은 개인이 사회로부터 거의 완전한 감정적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무력(無力), 무의미, 무규범, 고립, 자아소외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주변적, 또는 사회와의 격리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소외의 원인과 형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과 주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소외현상은 현재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급격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사회변동, 사회구조의 복잡성, 과학과 기술의 발달, 조직화와 도시화 등에 따른 가치갈등 현상은 현대인의 현실에 대한 원만한 적응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들로 하여금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소외현상에 빠지는 사회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사회해체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 소외(疏外, alienation)
코로나19의 위세가 한풀 꺾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종료됐지만 지난 6일부터 생활 속 거리두기는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保持一定的社會距離) 캠페인이 한창이다.
거리두기에는 부작용이 있다. 소외(疏外)는 외로움을 넘어, 따돌리고 냉대하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인간 소외(疏外)'는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을 가리지 않는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유영전(劉永傳)은 "유영(劉永)이 모함을 당해 황제가 그를 소외(疏外)시켰다. 그 탓에 그는 10년간 황제를 알현하지 못했다"고 소개한다.
永憎宦人黃皓, 皓既信任用事, 譖構永於後主, 後主稍疏外永, 至不得朝見者十餘年.
송(宋)대 정치가이자 사학자인 사마광(司馬光)도 "문제(文帝)는 비서(秘書)를 중서(中書)로 개명하고 인사권과 감찰권을 주었다. 상서(尙書)는 폐(廢)하지 않았으나 중서(中書)만 가까이 했기 때문에 상서(尙書)는 자연 소외(疏外)당했다"고 전했다.
유대인은 세상 사람을 '유대인과 개들'로 나눴다. 문화적 수준이 높았던 헬라인은 세상을 '헬라 영토와 야만인의 땅'으로 쪼갰다.
칼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이 자본가에 귀속되는 탓에(생산물로 부터의 疏外) 노동자는 자기 뜻과 계획이 아닌, 자본가의 지시에 따라 노동(노동으로 부터의 疏外)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노동은 노동자에게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지루함과 고역의 원천이 됐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소외(疏外)됐고, 그 결과 불행해졌다고 본다. 저명한 설교가인 영국의 찰스 스펄전 목사는 소외(疏外)의 이유를 "거대한 무지의 구름, 험준한 죄악의 산맥, 거룩한 진노의 협곡, 광대한 두려움의 바다"로 풀었다.
이번 총선에서 한층 분명해진 영남의 야당 몰표와 호남의 여당 몰표도 동서 간 거리두기의 다름 아니다. 거리두기는 안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마음의 거리두기는 소외(疏外)를 낳고, 소외(疏外)는 결국 증오와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소외(疏外, alienation)
일반적인 뜻으로는 사람들과 사귐이 멀어진 상태를 말한다. 소외의 개념은 심리학적, 사회학적, 철학적 관점에 따라 그 정의가 다르다.
사회 현상으로서의 소외의 개념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사회 활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산물(産物), 예컨대 기계, 기술, 제도, 조직, 관념, 사상 등이 마치 그 자체가 생명력을 발휘나 하듯 나타나, 그것을 창조한 인간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은 그 본래의 인간성이 박탈당하고 비인간화(非人間化)되는 상태라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외 현상이 오늘날 현대 산업사회에 자주 일어나고 있는 원인은 기술의 발전과 기계화, 조직의 지배, 매스커뮤니케이션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행정학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조직의 지배로 인한 소외이다.
조직은 그 구성원에게 많은 노동과 기여를 요구한다. 반면 조직의 구성원은 일이나 기여를 통하여 인정, 보수 등의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받으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이 그들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욕구불만에 빠져들며, 때로는 조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특히 관료제 조직 내에 있어서는 그 엄격한 위계질서와 명령 때문에 하위층일수록 욕구불만이 심화되고 자유의 상실, 비인격화, 원자화(原子化) 등 소외의식을 가지게 된다.
조직 구성원들이 가장 소외의식을 가지는 조직의 유형은 강제적 조직을 지적할 수 있다.
⏹ 소외(疏外, alienation)
하루를 밝히는 태양은 매일 새롭게 떠오르지만, 사람의 감성은 항상 의지하고 싶은 대상을 찾아 허둥댄다. 소외라는 것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우주가 만들어낸 에너지의 결정체인 독존이시다. 소외는 외톨이가 아니라는 것과. 제멋대로 놀아나는 성품이 있어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진화하며 자학이라는 업의 화신으로 변하게 된다.
소외란 사회와의 관계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거리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회로부터 완전한 감정적 단절, 무기력, 무의미, 고립, 자아 소외 상태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복잡화된 사회 기능의 해체 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라는 원 안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회의 구성 요소를 보면 원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세상이 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문에 그것은 소외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할인 것이다.
마차는 스스로 자국을 만들고 삶이 있는 곳에는 역사라는 기록이 남는다. 사람이 모인 곳에선 허세든 존재감이든 소외에서 벗어나려 애를 태운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정상 정복 후 내려오는 기쁨이 있기에 험한 산을 오를 수 있는 것. 허나 인생사는 내려오는 길이 없으니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귀향하려는 본성이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을 때 소외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시간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한 소외나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말이다.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없다. 에너지의 파동으로 존재 자체이다. 따라서 중력상태에서만 작동한다.
내 딴에는 뭔가 해보려 하는 데 주목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하든 자연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역할들로 온통 세상을 다 얻는 것처럼 떠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부여된 역할일 뿐이므로 그렇다는 것이다.
혼돈의 시대에 서서 그대는 분노하는가. 스스로 소외라 자처하지 마라. 조금은 차분하게 세상을 내려다 볼일이다. 분노의 덧 앞에 차분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용기라 할 수 있다.
생과 극을 한 화폭에 담는 조화, 이것이 자연이 원하는 균형의 세계이다. 이 세상은 천재들만의 세상이 아니다. 그대처럼 절대다수의 평범이 세상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산속 생활 10년의 김某 씨가 말한다. 사람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 매일 산정에 올라 멀리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라도 봐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것만 보아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다는 것이다. 얼굴을 보고 말을 건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한데 무슨 얼어 죽을 소외를 논하는가. 대문호 버나드 쇼는 94세에 생을 마감하면서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묘비명을 남겼다 한다.
허상인 소외를 붙들고 허송세월만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대 선택에 달렸다. 적당한 무관심은 약이 될 수 있다는 것. 관심은 충돌로 이어지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존재 그대로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오직 사람만이 관심을 가져주지 안는다고 소외라는 이름으로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하면서 스스로를 침몰시키는 것이다.
낙엽이 지는 늦은 가을 홀로 산을 오르거나 수평선이 내다보이는 바닷가를 걸어보면 스스로 홀로됨을 가슴 아프게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인 외로움에서 오는 것이지 소외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문을 열어놓고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을 뿐이다. 주변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모두에게 귀를 열어놓아야 한다. 긍정이란 색안경을 쓰고 말이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산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서로 하나로 통하는 동반자이지만 각기 자신의 세계에서 존재한다는 것. 하찮은 잡초나 발부리에 걸린 돌맹이 하나라도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무관심으로 보이는 것은 자신의 좁은 소견일 뿐 소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를 벗어나려면 끊임없는 자아의 성찰과 사람과의 어울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의 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만남은 필연이면서 혼돈이다. 충돌하면서 소외를 긍정으로 승화시키고 불균형을 균형으로 진화시키는 과정이다.
평정심의 본은 긍정이고 균형에 있다. 때문에 자연과 맥을 같이한다.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소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화상이며 실상은 외로움이다.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불균형에서 외로움이 온다. 보다 더 자연과 가까이에서 그 답을 물어야 할 것이다.
⏹ 인생 막바지 꼭 지켜야 할 6가지 삶의 태도
누구나 늙음은 처음 가는 길이다. 무엇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 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하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때도 많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다.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다.
요즘 내가 먹는 것이 시원치 않다. 끼니마다 먹는 밥이 겨우 반 공기 정도다. 거기에다가 매운 것만 입에 들어가면 온통 기침이 튀어나와 견딜 수가 없다.
매워도 못 먹고, 시어도 못 먹고, 짜도, 달아도 먹을 수 없으니 집사람 보기가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다. 또 그 투정을 견뎌주는 아내에게 미안하기가 그지없다.
늙어서 그럴까 아니면 이제 몸의 한계가 와서일까? 거기에다가 언제나 배가 더부룩하다. 무슨 고장이 난 것은 아닐까?
노년(老年)은 새로 전개되는 제3의 삶이라고 한다. 그 동안 나이와 화해(和解)를 배우며, 불편과 소외(疏外)에 적응하고, 감사생활과 사랑에 익숙해지는 수행에 열심이었다. 그 덕분에 그런대로 인생을 잘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다.
이렇게 노년이라는 제3의 삶을 아름답게 살기위해서 힘과 여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한 덕화만발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이와 같이 노년에게 주어진 제3의 삶을 사랑과 감사로 막을 내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노년은 새로운 삶의 시작일 수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노년은 황혼처럼 사무치고 곱고 야무지고 아름답다. 누가 노년을 추하다고 할까?
서녘하늘에 불타오르는 낙조(落照)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저녁하늘도 마땅히 아름다워야 하지 않는가?
황혼은 아름답다. 위대한 교향곡(交響曲)의 마지막 악장(樂章)처럼 장려(壯麗)하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으로 몸과 마음 다 태우는 열정으로 살다가 떠나가면 좋겠다.
노년은 누구에게나 모범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는 나이다. 노인은 언제, 어디서나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다. 노인은 그냥 무기력하게 스러지면 안 된다. 마지막 성취와 결실을 향한 장엄한 팡파르를 울릴 때인 것이다.
우리가 어쩌다 혼자가 된다 해도 고독과 싸우지 말고 고독과 어깨동무하고 즐기며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추(醜)하고 치사(恥事)하게 보이면 안 된다.
수행을 통해 내생을 준비하며, 돌부처처럼 묵묵하고 진중(鎭重)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을 갈고 닦으면 권위와 인품도 저절로 생기고 어느 누구에게서나 존경받는 원로(元老)가 되는 것이다.
몇년 전부터 지팡이가 없으면 걸을 수가 없다. 이제는 무명초(無明草)라고 하는 머리칼도 시원하게 밀어버렸다. 사시사철 한복 한벌에다가 흰 운동화 그리고 중절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老慾)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거리다가 찾은 것이 덕화만발(德華滿發)이다. 이젠 가족들이 무척 애틋하고 절실하다. 또한 덕화만발 가족들이 이렇게 그리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은 우리이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 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보다 아름다운 황혼 길을 아름다이 걸어가고 싶다.
내가 요즘 생각하는 나의 만년의 삶이다.
첫째, 건강에 안달하지 않는다.
넉넉하고 윤택하지 않아도 삶이 그윽하고 만족스러워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입어도 어디에 살아도 즐겁게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고마워하며 살겠다.
둘째, 죽음의 보따리를 쌓는다.
언제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한다.
셋째, 욕심을 내려놓는다.
욕심은 끝내 충족될 수 없다. 그것을 채우는 것보다 욕심을 줄이는 것이 현실적이다.
넷째, 자랑하지 않는다.
자기를 애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자기 확신이 없고 속이 텅 빈 사람의 짓이다. 늙음을 초조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추하고 딱한 모습인가.
다섯째, 항상 중도를 잃지 않는다.
들리지 않던 것도 더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노인이다. 큰 소리가 반드시 옳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침묵 속에서 그 침묵의 소리를 듣고 중도를 잃지 않겠다.
여섯째,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길 바란다.
바위가 이야기하는 것도 들리고 꽃의 숨소리도 들리는 노인이 되어보겠다. 늙음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그래서 마침내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잔잔한 평화가 서서히 마음을 적셔오는 것을 온몸으로 들을 수 있는 그런 노인 말이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 모든 것, 그래서 자신의 삶 자체를 스스로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노년은 또 하나의 삶이다. 이 여섯 가지로 살면 우리의 노년이 얼마나 아름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