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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운명]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20.08.09|조회수184 목록 댓글 0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

장경식 추천 0 조회 67 20.07.19 07: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왕과 제후와 장수와 대신이 씨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뜻으로, 사람의 신분은 운이나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王 : 임금 왕(玉/0)
侯 : 제후 후(亻/7)
將 : 장수 장(寸/8)
相 : 서로 상(目/4)
寧 : 편안 영(宀/11)
有 : 있을 유(月/2)
種 : 씨 종(禾/9)
乎 : 어조사 호(丿/4)

출전 : 사기(史記) 진섭세가(陳涉世家)

1️⃣
왕과 제후 그리고 장수와 정승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는 말로 사람의 신분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사기(史記)진섭세가(陳涉世家)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진(秦)나라 때 최초로 난을 일으킨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한 말이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죽고 호해(胡亥)가 즉위 하였으나 그는 환관 조고(趙高)의 손에 놀아나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문(里門) 왼쪽에 살고 있는 빈민들을 변방 근처의 어양(漁陽)땅에 옮겨가도록 하였는데 진승과 오광이 이들을 통솔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들이 대택향(大澤鄕)에 이르렀을 때 큰비가 쏟아져 도로가 무너져 기한 내에 간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기한 내에 가지 못하면 참수(斬首)를 당하게 되었으므로 달아나거나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도망가다가 잡혀 죽느니 차라리 난을 일으켜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장위(將尉)를 살해하고 농민들을 주축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비를 만났으므로 모두 기한을 어기게 되었다. 기한을 어기면 마땅히 죽음을 당해야 한다. 만약 죽임을 면한다 해도 변방을 지키다 죽는 사람이 본래 10명 가운에 6,7명에 달한다. 하물며 남아로 태어나 쉽게 죽지 않는다 했는데 만약 죽으려면 세상에 커다란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겠소.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평소 폭정에 시달려온 사람들이라 이 말을 듣고 모두 이들을 따랐다.

2️⃣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2세 황제 호해(胡亥)가 즉위했으나, 그는 어리석은 임금이어서 환관 조고(趙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러니 정치가 제대로 시행될 리가 없었고, 국정 문란은 백성들의 고난으로 이어져 그 원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골칫거리인 빈민들을 멀리 변방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그 지휘 통솔을 맡은 사람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란 자였다. 그들 역시 미천한 출신으로 이주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대택향(大澤鄕)이란 곳까지 갔을 때 큰 비가 와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한동안 움직일 수 없는 형편에 빠져 버렸다. 따라서 관에서 정해 준 기한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만약 기한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법에 따라 참수형을 받게 되어 있었다. "가도 죽고 가지 않아도 죽을 판이니, 차라리 큰일 한번 저질러 보는 게 어떻겠나?"

진승이 묻자, 오광도 찬성이었다. "그래. 기왕 죽을 목숨이라면 이놈의 세상을 뒤집어 버리자구."

이렇게 의논을 모은 그들은 암암리에 동조자를 모았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감시역으로 따라가는 장위(將尉) 두 명을 처치하고 나머지 병사들을 꼼짝 못하게 제압했다.

다음 일행들에게 호소했다. "우리가 이제부터 아무리 밤낮없이 부지런히 간다 해도 기한 안에 목적지인 어양(漁陽)에 도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거요. 그러니 가 봤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참수형뿐이오. 설령 참수의 칼날을 면한다 하더라도 그 척박한 변경을 지키다 보면 열에 일곱 여덟은 얼마 안 가서 황야에 해골을 굴려야 할 운명이외다. 기왕 죽을 목숨이라면 한번 큰일을 도모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이 어디 씨가 정해져 있소?' 누구든지 세상을 얻으면 다 될 수 있는 것이오."

그렇잖아도 술렁거리던 군중 심리는 그 열변 때문에 불이 당겨졌다. 그리하여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민중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3️⃣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

진승이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며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노력하고 실력을 쌓으면 왕후장상 즉 임금이든 제후든 장수든 재상이든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진시황이 죽고 그의 아들 호해가 환관 조고의 계략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진나라는 조고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나라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무렵 진승과 오광은 강제 노역에 차출된 고향 사람들을 인솔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큰 비가 내려 대오는 지체되었고, 결국 기한 내에 도착하기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자 진승은 오광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기한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인솔 책임자는 사형이다. 그렇다면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니 세상을 한번 뒤집고 죽는 게 어떠냐?"

이렇게 해서 진승과 오광 무리는 순식간에 반란군이 되었습니다. 진승은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단 말인가? 우리 같은 농민도 왕이 되지 말란 법이 없소. 자, 이 썩어 빠진 세상을 한번 뒤집어 봅시다"고 하였고,

탐관오리들과 국가의 강제 노역에 힘겹게 살아가던 농민들은 일제히 호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진승과 오광은 얼마 가지 않아 내분으로 죽습니다.

하지만 진승과 오광이 내건 새로운 세상의 깃발은 결국 유방에 의해 빛을 보게 되어 진나라의 멸망과 한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집니다.

진승의 이런 의지는 한나라에서 결실을 맺죠. 유방을 비롯한 한나라의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이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이었거든요.

그렇지만 출신이 뭐가 중요합니까? 훗날 그들이 이룬 결과가 중요하지. 한편 유방처럼 한 나라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요즘도 자주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진승이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며 한 말이다. 그렇다. 누구나 노력하고 실력을 쌓으면 왕후장상 즉 임금이든 제후든 장수든 재상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옛말에 '씨도둑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아비와 자식은 용모나 성질이 비슷하여 속일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조가 떵떵거리는 집안이라도 대대로 후손들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 능력까지 물려받을 수는 없어 '씨가 따로 있나'는 속담을 낳았다.

똑 같은 말로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王侯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寧有種乎)라는 명구가 있다.

능력은 뛰어나고 포부도 큰데 주위의 여건이 따라주지 못해 뜻을 펴지 못하면서 울분을 토하는 표현이다. 왕후장상 하유종(王侯將相 何有種)으로 쓰기도 한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품팔이꾼으로 지내던 진승(陳勝)과 빈농 출신의 오광(吳廣)이었으니 더욱 와 닿는 표현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도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호해(胡亥)가 즉위한 뒤로는 간신 조고(趙高)가 권력을 좌우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빈민들을 국경으로 징집할 때 통솔하던 진승과 오광은 도중 대택향(大澤鄕)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큰 비를 만나 길이 끊기고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정해진 기한 내에 가지 못하면 목이 달아나고 도망치더라도 잡힐 것이 뻔했다. 900여 명을 이끌던 두 사람은 죽는 게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난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다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무리들을 소집했다.

진승이 앞으로 나서 나라의 명을 어기게 되어 꼼짝없이 모두 죽게 됐는데 앉아서 당할 수 없다며 일장 연설을 했다. "목숨을 건다면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死即擧大名耳 王侯将相寧有種乎)!"

이렇게 해서 반란의 기치를 높이 들자 주위에서 크게 호응했고 지나는 지역마다 연전연승했다. 이들은 국호를 장초(張楚)로 명명하고 세력을 떨치다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의 조직적인 반격에 몰락하고 말았다.

반란군 우두머리 진승이 제국을 망하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진섭세가(陳涉世家)에 기록했다. 세가(世家)는 제후나 왕의 기록이다.

진승은 잘 알려진 또 다른 명언을 남겼다. 바로 "참새나 제비가 어찌 고니의 뜻을 알리요(燕雀安知 鴻鵠之志)"란 말이다. 평범한 사람이 영웅의 큰 뜻을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진승도 세력을 잡았을 때 가까운 사람을 내쳐 마부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오늘날 더 답답해할 사람들이 온갖 자격증을 갖춘 젊은이들일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날 가능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빈부의 차는 더 커진다. 재력가와 권력층이 자신들만의 더 탄탄한 성을 구축한다면 큰 뜻을 펴 볼 도리가 없다.


⏹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

왕후장상에 무슨 씨가 있느냐?

1️⃣ 로마의 스파르타쿠스와 진제국의 진승

유럽의 로마제국과 동아시아의 진(秦)제국은 여러 모로 닮은 점이 많다. 로마는 유럽 역사상 일찍이 유례없는 대제국을 이루었고, 진제국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는 통일 전쟁의 대업을 이루었다.

로마는 그리스와 함께 유럽 문화의 기본적인 문법을 일구어냈고, 진제국은 왕조 교체에도 불구하고 2000년간 존속된 황제 지배체제의 모형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로마와 진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문명의 틀을 가꾼 제국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로마와 진은 최하층의 민중 봉기를 겪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스파르타쿠스(Spartacus)와 진의 진승(陳勝)은 인간 해방의 목소리를 내기 전에 제국의 질서를 뒷받침했지만 이름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반면 제국의 질서를 뒤흔들자 이름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소설, 영화, 드라마, 철학 등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의 출신과 이력 등 모든 정보가 분명하지 않다.

그의 존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 있었지만 글로 기록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그의 존재는 위협적이었던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를 닮은 추종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 정보를 종합하면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검투사(gladiator) 양성소에서 무예를 익혔다.

그는 BC 73년에 약 70여 명의 검투사와 바티아투스가 운영하던 양성소를 탈출했다. 스파르타쿠스 일행은 탈출 뒤에 성공을 자축하고서 그냥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처럼 로마 제국의 최하층에 있는 농노(農奴), 빈농(貧農) 등을 규합하여 한 때 12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맹위를 떨치며 진압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스파르타쿠스는 3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를 오르내리다가 전략을 두고 내분이 발생했고, 결국 강한 진압군에 의해서 최후를 맞이했다.

진승은 스파르타쿠스보다 약 130여 년 전에 비슷한 인생행로를 겪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을 땅을 가지지 못해서 용경(傭耕), 즉 품팔이꾼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품팔이꾼으로 전전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불만을 가지며 '지금과 다른 미래'를 꿈꾸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진영에 가담했을 빈농과 같은 신분인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변경의 수자리로 징집을 당했다. 이동 중에 비가 내려서 길이 진창길로 변하자 진승 일행은 계획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 결과 아무리 계산을 해도 징집된 일자에 맞춰 도착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진승 일행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스파르타쿠스는 알지만 진승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 아닐까?)

2️⃣ 진승, 밭두둑에서 말한 꿈을 실현할 때를 만나다

진승은 품팔이꾼으로 살면서 남들이 절망을 느낄 때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한참 일하다가 밭두둑에서 잠깐 쉬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만약 우리가 출세하여 잘 먹고 잘 살게 되더라도 서로를 잊지 맙시다(苟富貴, 無相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동료를 죽여야 살 수 있는 극악한 조건에 있었지만 서로 동료를 죽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진승도 하루아침에 확 달라질 게 없는 품팔이꾼이지만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갈망했으리라. 두 사람이 처한 삶의 조건은 다르지만 더 나빠질 게 없는 지금을 뒤집는 희망을 가꾸었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동료들은 진승의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지금 품팔이꾼 주제에 어떻게 출세를 할 수 있겠는가(若爲傭耕, 何富貴也)?" 보통 이러한 말을 들으면 기가 꺾이기 마련이다.

진승은 자신의 미래를 믿었던 만큼 풀이 죽지 않고 정면으로 되받아쳤다. "참새(조그만 새)가 어찌 홍곡(큰 새)의 뜻을 알리오(燕雀安知鴻鵠之志哉)!"

자신을 얕보는 사람들을 향해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백조의 뜻을 알겠는가?"고 일갈했던 진승의 말은 역사에 남아 현재까지로 전해지고 있다.

다시 진승 일행이 징집 시간에 맞춰갈 수 없어서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진승 일행은 모두 900여 명이다.

수졸들을 인솔하는 두 명의 장위(將尉)가 일행을 진두에서 지휘하는 책임자였다. 진승은 오광(吳廣)과 함께 오늘날 분대장급에 어울리는 둔장(屯長)이었다.

그들은 징집 시간을 어겼으니 늦게 도착해도 죽고 아예 지금 도망을 가도 잡히면 죽기 마련이었다. 행위는 다르지만 결과는 똑같다. 이것이 행위의 결과를 엄격하게 묻는 법가의 내재적인 결함이었다.

그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다음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지금 도망가도 결국 죽고 큰일을 벌여도 죽는다. 죽는 게 마찬가지라면 나라를 세우다 죽는 게 낫지 않은가?(今亡亦死, 擧大計亦死, 等死, 死國可乎)?"

이것은 스파르타쿠스가 애초 도망을 결행할 때 마음에 먹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검투사를 하면서 실력이 좋으면 좀 더 오래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결국 죽기 마련이다.

이렇게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거나 아예 도망을 가서 싸우다가 죽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스파르타쿠스는 자유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승과 스파르타쿠스는 100년을 사이에 두고 진제국과 로마제국에서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3️⃣ 실패의 미끄럼틀을 급히 내려가다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마음에 떠올리고 발설했을 때 그들도 놀랐다. 반란은 입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그들은 900여 명을 자유를 찾으려는 전사로 만들 수 있어야 했다.

그들은 군중의 심리를 흔들어놓을 정도로 주도면밀했다. 그들은 먼저 비단에다 주사(朱砂; 붉은색 수은)로 "진승이 왕이 된다(陳勝王)"는 글귀를 써놓고 물고기의 뱃속에 집어넣었다.

다음날 수졸(戍卒)들이 뭣도 모르고 이 물고기를 사서 요리하다가 이 글귀를 발견하고서 진승이 보통 인물이 아니란 걸 눈치 채고 서로 수군거리게 되었다.

또한 어느 날 저녁, 오광이 이동 중에 임시 주둔지의 근처에 위치한 신사(神祠)에 들어가 여우 목소리로 위장하고는 "초나라가 크게 일어난다, 진승이 왕이 된다(大興楚, 陳勝王)"고 소리를 냈다. 이렇게 상황을 몰아가자 수졸들은 진승을 예사 인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아울러 오광은 평소 수졸들을 잘 대해줘서 그들의 인심을 얻었는데, 900여 명의 인솔을 책임지는 장위 두 명을 자극하자, 장위 두 명은 오광을 모욕하고 급기야 채찍으로 때렸다. 그 자리에서 이를 본 화난 군중들은 두 명의 장위를 살해했다.

이로써 진승과 오광은 900여 명 수졸의 통제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이렇게 진승과 오광은 품팔이꾼에서 점차 900여 명의 군사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스파르타쿠스가 검투사에서 장군으로 변신한 것과 매우 닮았다.

지도자로 변신한 진승은 대중을 선동하는 뛰어난 연설을 펼쳤다. "여러분들은 비를 만나서 모두 징집 기일을 어기게 되었다. 기일을 어기면 모두 참수형을 당한다. 정상 참작을 받아 참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자리를 서다가 60~70%는 죽는다.

장사(壯士)가 죽지 않는다면 그로써 괜찮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남겨야 할 것이다. 제왕이나 제후, 장군이나 재상이라고 해서 어찌 다른 씨를 가지고 태어났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

진승과 오광은 이 연설로 900명의 통제권을 장악한 뒤 주위에서 군사를 더 모집하여 자유를 찾는 반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들은 이동 중에 연전연승을 거두며 진현(陳縣) 지역을 장악했고, 진승은 왕위에 올라 국호를 장초(張楚)라고 명명했다.

진승은 한편으로 장초를 근거지로 삼아 전국시대의 조나라와 연나라 지역으로 병사를 파견하여 진(秦)제국에 저항하는 전선을 만들고자 했다. 다른 한편으로 오광을 파견해서 서쪽 제국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공략하고자 했다.

하지만 처음 기의(起義)를 할 때 진승과 오광 군의 기세가 드높았지만 상황이 뜻대로 전개되지 않자 그들은 차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진제국은 초기의 실수를 만회하고서 각지의 반란군과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장한(章邯)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정도로 진승의 군대를 각지에서 격파하며 진현으로 침공해왔다.

아울러 진승이 조나라와 연나라의 옛 지역에 파견했던 장군들은 진승의 기대와 달리 왕으로 자립해 버렸다. 진승은 진현을 중심으로 군사를 사방으로 파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새나라 건설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진승은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진현에 고립되면서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

이는 스파르타쿠스가 이탈리아 반도를 오르내렸지만 더 이상 자신들에게 호응하는 세력을 얻지 못하자 고립되면서 자멸에 이른 상황과 닮았다.

자유를 향한 열기는 뜨겁고 진지했으나 사태가 장기전으로 진행될수록 반군은 자유의 실현을 널리 확산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의 한계라기보다 시대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4️⃣ 사마천의 '진승' 인물 분석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승을 '진섭세가(陳涉世家)'에서 다루면서 그를 제후로 취급했다. 사마천의 기록화는 훗날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에 의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사마천의 기록으로 인해 진승은 들판에 쓰러져간 무명의 용사가 아니라 역사에 족적을 남긴 유명의 인물이 되었다. 사마천은 진승에게 기록을 남기는 애정을 보이면서도 그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냉정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다시 진승이 밭두둑에서 했던 맹세를 떠올려 보자. 진승이 왕이 되자 그 소문은 빛의 속도로 널리 퍼졌을 것이다.

품팔이꾼이었던 옛 친구가 왕이 된 친구 진승을 만나러 왔다. 그는 궁문에서 진승의 이름을 불렀고 진승을 만난 뒤에도 궁정을 무시로 출입했다.

주위 사람 중 한 사람이 옛 친구로 인해 진승의 위엄이 깎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진왕은 옛 친구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진승의 옛 친구 중에 누구 하나 진승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고 찾았던 이들도 진승을 떠나갔다.

또 진승은 왕이 된 뒤 여러 신하들의 직무 수행을 감찰하는 사람을 두었다. 그들은 신하들이 천신만고 끝에 군공을 세워서 돌아오더라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감찰이 가혹해지자 진왕과 감찰관에게 충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없는 죄도 만들어서 처벌을 했다. 이로써 유능한 사람이 진승을 찾지도 않고 찾았던 이들도 진승을 떠나갔다.
진승은 진제국 장한의 거듭된 공격으로 진현을 벗어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마부 장고(莊賈)에 의해 살해되었다.

자유가 이념이 아니라 환상으로 느껴지면 제일 가까운 사람이 지도자의 등에 칼을 꼽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진승은 자신의 주위에 사람들을 내치면서 죽음을 자초했다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진승의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최초의 기의를 하고서 그가 파견한 왕후와 장상에 의해 진제국이 무너진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반도를 오르내리다 레기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발이 묶인 뒤 로마의 장군 크라수스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지만 결국 최후의 일전에서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크라수스에게 패배한 것을 1차 죽음이라고 한다면 역사에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록이 한 줄이라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더 처참한 2차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구전과 기억이 없었더라면 그는 1차 죽음으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전하는 이야기꾼에 의해 영원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혁혁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말이 전해지지 않는다. 훗날 문인의 손에서 번역된 말이 그의 말로 대신 전해질 뿐이다.

하지만 진승은 사마천의 손을 만나서 생생한 그의 육성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진승과 같은 인물의 이야기를 전해줄 사마천도 죽은 지 이미 오래다.

우리가 모두 사관일 터인데, 오늘날 사마천이 했던 역할을 대신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지금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먼 훗날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인물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그이를 기록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이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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