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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운명]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19.04.09|조회수461 목록 댓글 0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春 : 봄 춘(日/5)
來 : 올 래(人/6)
不 : 아닐 불(一/3)
似 : 닮을 사(亻/5)
春 : 봄 춘(日/5)


漢道初全盛
朝廷足武臣
何須薄命妾
辛苦遠和親
한(漢)나라 국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조정에는 무신도 넉넉했다네.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掩涕辭丹鳳
銜悲向白龍
單于浪驚喜
無復舊時容
흐르는 눈물 가리고 단봉성을 떠나,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선우(單于)는 놀라 기뻐했으나, 더 이상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 동방규(東方) 소군원(昭君怨) 삼수(三首)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昭君怨)에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유래했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의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匈奴傳), 그리고 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에 간략하게 보이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다듬어 놓은 왕소군의 슬픈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BC. 38),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본명 왕장 王嬙)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 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다.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원제는 연회가 끝난 후 급히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원제는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흉노 땅에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여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호한야의 본처 아들인 복주루(復株累) 선우가 왕소군을 취하려 하자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성제(成帝)에게 서신을 올렸으나 성제는 흉노의 습속을 따르라고 명했다.

왕소군은 다시 복주루의 연지(閼氏, 선우의 황후)가 되어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9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총(靑塚)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나온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 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등의 각종 문학 양식을 통해서 그 형상이 끊임없이 재창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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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절기로는 봄이 왔어도(春來) 날씨가 계속 추워 봄 같지가 않을 때(不似春) 흔히 쓰는 성어다.

봄이 왔지만 날씨보다 마음이 아직 더 추워 봄을 느끼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기도 하는 쓰임이 많은 말이다.

이 성어의 유래를 보면 더욱 안타까운 감정이 느껴지는데 중국 4대 미인인 왕소군(王昭君)이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4대 미인은 서시(西施),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왕소군(王昭君)을 든다.

전한(前漢)의 원제(元帝)때 전국서 모집한 후궁들 중에 절세의 미인 왕소군도 끼어 있었다.

왕은 당시 걸핏하면 쳐내려오는 흉노(匈奴) 족을 달래기 위해 반반한 궁녀를 선우(單于)에 시집보내기로 하고 궁중화가에게 후보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대부분의 후궁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바치며 제 얼굴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청탁하기 바빴다.

그러나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던 왕소군은 화공을 찾지 않아 가장 못나게 그려졌다.

황제는 가장 추한 후궁을 뽑아 오랑캐 땅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왕소군이 떠나는 날 실물을 보게 된 원제는 뒤늦게 절색임을 알아보고 화가 나 화공을 참형하고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漢)나라를 떠난 왕소군의 사연은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 등의 사서에는 간략하게 언급 되었어도 서경잡기(西京雜記) 등 많은 문학양식을 통해 이야기가 보태져 재창조됐고 후대의 이백(李白), 노조린(盧照隣) 등 시인들에게도 좋은 소재가 되어 많은 동정의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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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이 아니다’라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입니다.

절기로는 분명 봄이지만 봄 같지 않은 추운 날씨가 이어질 때도 쓰지만, 좋은 시절이 왔어도 상황이나 마음이 아직 여의치 못하다는 은유적인 의미로 더 자주 사용하는데요. 이 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요?

당나라의 시인 동방규가 쓴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중국 고대의 4대 미인이라고 하면 서시와 왕소군, 초선, 양귀비를 꼽습니다. 미모도 미모려니와 그녀들의 삶이 중국 역사를 대변할 만큼 파란만장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지요.

특히 이백과 두보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그녀들을 소재로 시를 지었는데 그중 동방규가 전한시대의 미인 왕소군을 소재로 지은 시가 이렇습니다.

오랑캐 땅에는 화초 없으니
봄이 와도 봄은 아니리
저절로 허리띠 느슨해지는 것은
허리 날씬하게 하려던 것 아니라네

- 동방규, 〈소군의 원망〉

동방규가 시에서 오랑캐 땅이라고 지칭한 곳은 흉노의 땅입니다. 흉노는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미 북방의 강국이었습니다. 전쟁도 치렀지만 한나라가 참패했지요.

그래서 대대로 술과 비단, 쌀 같은 공물은 물론 왕실의 공주를 흉노의 군주에게 배우자로 보냈는데 11대 황제였던 원제는 공주 대신 궁녀를 공주로 속여서 보내기로 합니다.

원제는 평소에도 화공을 시켜 궁녀들의 얼굴을 그리게 한 다음 화첩에서 마음에 드는 여인을 선택했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못생긴 궁녀를 골라서 공주라 속여 흉노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궁녀에게 공주의 예를 갖춰 흉노에 시집보내는 날, 실물을 본 원제는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절세의 미인이었으니까요.

일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된 연유를 알고 보니, 화공 모연수가 자신에게 뇌물을 준 궁녀들은 실물보다 더 예쁘게 그려주고 그 궁녀는 한 번도 뇌물을 주지 않아 일부러 못나게 그린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원제가 모연수의 목을 쳤다는 후일담이 전해집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고향을 떠난 여인이 바로 왕소군입니다. 그녀의 삶은 흉노의 땅에서도 기구했습니다. 아무리 외롭고 그리워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저절로 허리띠가 느슨해질 만큼 야위어갔으니 봄이 와도 봄이 아니었습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만약에 왕소군이 화공에게 뇌물을 넉넉히 주었더라면 그녀의 일생이 달라졌을까요? 물론 그랬다면 왕소군의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가난한 다른 여인이 왕소군과 같은 삶을 살았겠지요.

그래서 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이 아니라는 말은 단순히 외롭고 힘든 마음의 표현을 넘어 자신의 현재 처지나 환경에 대한 비관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 인물보다 못나게 그린 모연수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수많은 초상화들은 과연 실제 인물과 똑같았을까요?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터럭 한 올, 사마귀 한 점까지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하니 대부분 믿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국에는 본모습보다 못나게 그렸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을 당한 화공 모연수가 있고, 영국에는 본래 얼굴보다 예쁘게 그리도록 주동해서 왕에게 처형당한 유명한 정치인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헨리 8세는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 세상이 떠들썩하게 이혼한 후 앤과 결혼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자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을 맞아 드디어 아들을 낳았는데 곧 숨을 거두는 바람에 네 번째 부인을 맞아야 했지요.

이때 헨리 8세의 최측근인 토마스 크롬웰이 중매를 맡았습니다. 그는 클레베 공국의 공주 앤을 추천했고 헨리 8세는 궁정화가인 한스 홀바인을 클레베에 보내 초상화를 그려오도록 했습니다.

완성된 앤 공주의 초상화를 본 헨리 8세는 흡족해하며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날 신부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기겁했던지 신방에 들기는커녕 6개월 후 이혼해 버렸습니다.

사건의 여파는 컸습니다. 40년 동안 영국 정치를 주도했던 크롬웰이 쫓겨났고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한 달 후 처형당하고 맙니다.

사실 크롬웰은 캐서린과의 이혼 여파로 정치적으로 고립된 영국을 위해 개신교인 클레베 공국과 동맹하기 위해 일을 꾸민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정치적인 목적보다 아내의 외모가 훨씬 더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이 일은 화가 한스 홀바인으로서도 큰 오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사들〉과 같은 명작을 그린 홀바인이 정계 거물의 압력을 받고 실물과 다른 초상화를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모연수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한스 홀바인은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사실과 다른 일종의 거짓 보고를 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가짜 초상화의 주인공인 클레베의 앤 공주는 헨리 8세에게 어처구니없이 이혼당한 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녀도 왕소군처럼 봄이 와도 봄이 아닌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천만에요. 비록 외모 때문에 버림받았지만 현명하게 처신해서 약소국인 조국 클레베를 지켰을 뿐 아니라, 헨리 8세로부터 왕의 사랑받는 여동생이라는 공식 칭호와 함께 하버 성을 하사받고 영국에 정착했습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여섯 부인 중에 가장 별일 없이 살았고, 그 덕에 천수를 누린 여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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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한(漢)나라 원제(元帝)는 색(色)을 밝힌 인물이었다. 장안(長安)의 미인이라는 미인은 모두 궁(宮)으로 불러들여 궁녀로 삼았다. 그렇게 들인 여인이 3000여 명.

원제는 궁녀를 바꿔 가며 밤을 보냈다. 고르는 것에 지친 그는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림을 보고 여인을 간택하기 위해서다.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이름의 궁녀도 있었다. 절세 미인이 따로 없었다. 후대인들이 그를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초선(貂蟬)등과 함께 중국 고대의 4대 미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왕소군은 이미 고령이 된 원제에 별 뜻이 없었다. 다른 궁녀들은 모연수에게 돈을 줘가며 잘 그려달라고 매달렸지만, 왕소군은 그러지 않았다. 당연히 그림 속의 얼굴은 실물보다 이쁘지 않았다.

어느 날 북방의 흉노족 족장이 원제를 만나 한족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흉노족을 잘 보듬어야 했던 원제는 가장 이쁘지 않은 궁녀를 그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가 바로 왕소군이다.

원제는 작별 인사 차 온 왕소군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림과는 달리 절세 미인이었던 때문이다. 모연수의 비리 행각을 알게 된 원제는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잘랐다. 그럼에도 흉노와의 약속은 지켜야 했다. 왕소군은 눈물로 떠나게 된다.

이국 땅으로 가는 길, 왕소군은 고향 생각이 나 금(琴)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한 무리 기러기가 날개짓을 잊고 그만 땅으로 고꾸라질 정도였다.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겼다.

훗날 많은 화가들이 왕소군을 그렸고, 시인들은 그의 애달픈 삶을 노래했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게 바로 당(唐)나라 측천무후의 좌사(左史)였던 동방규가 쓴 소군원삼수(昭君怨三首)다.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어
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되 봄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나도 모르게 옷 띠가 느슨해졌나니
非是爲腰身
몸이 약해진 때문만은 아니리니

이 시에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나왔다.

1980년 신군부 등장 때 JP(김종필)가 읊어 더 유명해진 글귀다. 또 봄이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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