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過猶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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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이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過 : 지날 과(辶/9)
猶 : 오히려 유(犬/9)
不 : 아닐 불(一/3)
及 : 미칠 급(又/2)
무슨 일이거나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른들이 집안 자녀들을 훈계하는 말씀 중에 꼭 들어 있다. 공자(孔子)님 말씀이라며 두고두고 가르쳤다.
그런데 일을 처리하거나 수행할 때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이 모자란 것과 같다는 말인데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반 회사에서의 실적을 두고 보면 목표를 넘겼을 때 표창할 텐데 모자란 것과 같다니.
물론 이 말은 물질적 성과만 가지고 성패를 따지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것도 모자라는 것도 경계한 중용(中庸)의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고생도 함께 하고 각 분야에 뛰어난 10명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한다.
이들을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의 사과(四科)로 나누어 평가를 한 내용이 선진편(先進篇)에 나온다.
바로 德行 顔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 言語 宰我 子貢, 政事 冉有 季路, 文學 子游 子夏(덕행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 재아 자공, 정사 염유 계로, 문학 자유 자하)이다.
過猶不及에 거론되는 자하와 십철에는 빠져있는 자장(子張)을 비교해 자공이 묻는 것에 대해 공자가 답한다.
師也過 商也不及.
사야과 상야불급.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설명한다. 師(사)는 자장, 商(상)은 자하의 이름이다.
공자는 자장의 극단적인 경향과 자하의 소극적인 면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중용의 깨우침을 주기 위해 평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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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이 중요함을 이르는 말이다.
過 : 지날 과
猶 : 오히려 유
不 : 아닐 불
及 : 미칠 급
(유의어)
소탐대실(小貪大失)
교왕과직(矯枉過直)
교왕과정(矯枉過正)
교각살우(矯角殺牛)
과불급(過不及)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도리어 안한 것만 못함이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나오는 말로,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사(師:子張의 이름)와 상(商:子夏의 이름)은 어느 쪽이 어집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사(師)는 지나치고 상(商)은 미치지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그럼 사(師)가 낫단 말씀입니까?” 하고 반문하자,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말하였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중용(中庸)의 도(道)를 지킨다는 말을 흔히 한다. 어떠한 상황에도 한 곳으로 치우침이 없는 도리 진정한 삶의 중심을 지키면서 자신의 주체를 잃지 않는 자세를 중용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개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사욕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이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거창한 철학적인 정의를 논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의 중용의 도(道)를 지켜 나가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고사에서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는 평범한 구절 속에 우리가 어렵게 지키려고 하는 중용의 도(道)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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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커다란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결과 일생토록 3000명의 제자에 현인 72명, 철인 10명을 두었다.
대표적인 철인으로 자장(子張)이 있다. 공자는 그의 세속적인 명예욕을 나무라면서 군자로서 진정한 양명(揚名; 이름 날리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덕겸비(智德兼備), 언행일치(言行一致)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또 하나의 철인 중에 자하(子夏)도 있다. 공자는 그에게 지식만을 추구하는 데 급급하는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고 인격수양에 치중하는 군자유(君子儒)가 될 것을 강조했다.
한번은 이 두 사람을 두고 제자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자장과 자하 둘 중 누가 더 현명하다고 보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공자도 당황했지만 평소 제자들의 성품을 꿰뚫고 있던 터라 즉석에서 답했다. “자장은 과(過)하고 자하는 불급(不及)이니라.”
추상적인 대답에 자공은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낫다는 말씀인지요?”
하지만 공자의 대답은 이번에도 추상적이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라(過猶不及).”
공자에게는 자장이나 자하 둘 다 눈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즉 그가 바라는 것은 지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인격, 다시 말해 중용의 경지였을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것 아니면 저것,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 이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흑백논리(黑白論理)가 판을 치고 있다. 그래서 건전한 비판이 설 자리가 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양쪽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여유있는 사고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우리나라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성 중에서 좋은 점도 많지만 쉽게 흥분한다거나 종종 극단으로 흐르는 것은 단점이라고 하겠다.
그동안 수십년 겪어온 노사분규가 대화로 원만하게 해결되기 보다는 극한 투쟁으로 끝장을 본 경우가 더 많다.
개인은 물론, 사회적 국가적인 낭비일 뿐만 아니라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 그 손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특징을 두고 혹자는 반도국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민족정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기 보다는 지금 우리에게는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상태, 그런 마음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중국 사람들이 조화를 중시한다. 그래서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이 나왔다면 공간과의 조화에서 풍수가, 시간과의 조화를 위해 팔자(八字)가 나왔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조화를 위해서 예의라는 것을 만들었다.
중국사람들이 무척 중시하는 관계 즉 인간관계도 결국은 예의를 통해 서로간에 조화를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화관념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중용이다. 본디 예기(禮記)의 편명이었던 것이 후에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면 중용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흔히들 우리는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중용에는 보다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숫자 10을 놓고 보자. 단순히 가운데를 취한다면 5가 바로 중용의 숫자가 된다. 그러나 중용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보다 중용에 가까운 숫자는 1과 10 두 개일 수도 있고 4, 5, 6이 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1에서 10까지 모두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중용이란 수학적,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 화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굳이 우리말로 쉽게 표현한다면 모자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 즉 치우침이 없는 과유불급의 상태가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단이 배격되어야 한다. 중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과격, 내지는 극단적인 것이다.
일도양단(一刀兩斷)이라는 말은 마치 칼로 두부 모를 자르듯이 단칼에 결판내는 것을 말하며, 쾌도난마(快刀亂麻)는 복잡한 문제를 칼로 자르듯 속 시원히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
물론 중국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방법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용이란 양극단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 쉽게 말해 독선이 아닌 겸선, 배타가 아닌 포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조화란 결국 두 개의 극단을 동시에 취함으로써 중용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음양사상(陰陽思想)은 조화의 좋은 예이며 심지어 의술과 약, 음식에서까지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이런 예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드러나는데 건축물을 보면 거의가 좌우 대칭형이다. 어느 한 곳에만 치중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