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는 뜻으로,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옳은 도리를 행함을 이르는 말이다.
殺 : 죽일 살(殳/7)
身 : 몸 신(身/0)
成 : 이룰 성(戈/3)
仁 : 어질 인(亻/2)
(유의어)
사생취의(捨生取義)
살신입절(殺身立節)
출전 : 논어(論語)의 위령공편(衛靈公篇)
자신의 몸을 바쳐 정의를 구한다는 이 성어를 누구나 쉽게 인용하는데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 해야 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모두 외면할 것이다.
그래서 안중근(安重根) 의사나 유관순(柳寬順) 열사를 비롯한 애국선열과 국토수호를 위해 산화한 영령들이 문자 그대로 살신성인(殺身成仁)에 부합한다.
누구나 자신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하지만 의(義)를 따질 겨를도 없이 위급한 상황에 닥칠 때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은 스러져가는 의인을 종종 본다.
이런 숭고한 뜻을 가진 말이 논어(論語)에서 왔으니 어울린다. 공자(孔子)가 가장 중요시했던 인(仁)은 이후 유가의 중심사상이 됐다.
仁은 등에 짐을 진 사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남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에 바탕한 덕으로 가까운 혈연에서 실천하여 사회적 국가적 평화를 얻는다고 가르친다.
위령공(衛靈公)편에 이렇게 나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기 위해 어짊을 해치지 않는다. 오로지 몸을 죽여서라도 어짊을 이룩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도의심이 강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나 인덕을 갖춘 사람은 목숨과 인 모두를 지킬 수 없을 때 생명을 아끼느라 인을 저버리지 않고 오히려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인을 행한다는 것이다.
⏹ 살신성인(殺身成仁)
살신(殺身)은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고, 성인(成仁)은 ‘인(仁)을 이룬다’는 말이다. 즉, 옳은 일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한다는 뜻으로, 주로 다른 사람이나 큰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정의(正義)를 위해 인의(仁義)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논어(論語)의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말이다.
이 성어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일관시키고 있는 정치상, 윤리상의 이상적인 이념이다. 이것은 인(仁)이라는 한 글자로 집약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인(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仁)을 행할 뿐이다.”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도의심(道義心)이 강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나 인덕(仁德)을 갖춘 사람은 목숨과 仁 모두를 지킬 수 없을 때 생명을 아끼느라 仁을 져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仁을 행한다는 것이다. 仁을 닦는 일은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가(儒家)의 중심사상은 仁이며, 仁은 공자가 가장 중요시했던 덕목이다. 공자는 仁을 충(忠)과 서(恕)라고 규정하였다.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자비와 인간애, 동정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본질인 만큼 군자가 먼저 익혀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살신성인은 반드시 목숨을 바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며 이웃에 봉사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여 남을 위하는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공자도 살신성인을 접근하기 어려운 이상으로 보았던 것 같다. 위령공편(衛靈公篇) 뒤쪽에서 이런 실토를 하는 걸로 보아 그걸 짐작할 수 있다.
백성들의 仁에 대한 필요성은 물과 불보다 절실하건만 물과 불을 건드리고 죽는 사람은 내가 보았지만 仁을 실천하면서 죽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子曰 : 民之於仁也, 甚於水火, 水火, 吾見蹈而死者矣, 未見蹈仁而死者.
仁은 중국 유교사상에서 가장 중심 덕목이다. 공자가 처음으로 강조한 ‘효제(孝悌)는 인의 근본이다’라는 혈연적인 가족 결합의 윤리를 중시하여 거기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스런 애정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仁자는 본래 등에 짐을 진 사람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仁이란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여 사랑을 바탕으로 삼은 조화된 정감에 의거한 덕이며 그것을 가까운 혈연에서 비롯하여 멀리 미치게 함으로써 사회적, 국가적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맹자(孟子)는 그것을 본래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남의 불행을 좌시하지 못하는 동정심의 발전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완성하여 정치에 미치는 왕도론(王道論)을 말하였다.
이와 같이 仁의 德은 원래 정의적이어서 주관적인 성격이 강했으므로 뒤에 이지적인 면을 보충하는 것으로서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등의 덕목이 추가되어 오상(五常)의 德이 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仁은 넓은 뜻으로는 그것들을 포섭하는 최고의 德으로 삼고, 좁은 뜻으로는 애정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면서 넓은 뜻에서는 유교 윤리의 모두를 포괄하는 왕좌에 앉았다.
한대(漢代)부터 시작한 이 사상은 그대로 후세까지 유지되지만 주자학(朱子學)은 또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해석을 가하였다. 즉 ‘仁은 성(性)이며 사랑은 정(情)이다’라고 현실적인 애정과는 구별하여, 정(情)을 낳게 하는 본성(本性)으로서의 고차적(高次的)인 입장에서 고찰하여 ‘仁이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이(理)다’라고 하였다. 仁은 여기에서 이념적인 성격을 강화해서 체계적인 유교 윤리 철학의 근본 원리가 되었다.
유가의 중심사상이 仁이며 공자가 가장 중시했던 덕목 또한 바로 그 仁이었음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仁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공자는 충(忠)과 서(恕)라고 해석했다. 쉽게 말해 타인에 대한 자비나 인간애, 동정심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仁은 군자가 먼저 익혀야 할 덕목이기도 했다.
君子去仁, 惡乎成名?
군자가 仁을 버리고 어찌 이름을 이룰 수 있으랴?”
곧 仁은 몸소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공자의 가르침 자체가 실천도덕이 아니었던가.
물론 仁이 최고의 덕목인 만큼 仁 자체에는 대소(大小)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행하는데 있어 경중과 귀천의 구별 또한 있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심지어 여기에는 생사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것이 된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의심이 강하고 의지가 깊은 사람이나, 인덕을 갖춘 사람이라면 목숨과 仁이 양립할 수 없을 때 생명을 아끼느라 仁을 해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일신을 희생 하면서까지 仁을 실천하지 않을까(成仁)? 그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사와 인인은 살기 위해 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몸을 죽여 仁을 행할 뿐이다.”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맹자(孟子)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생선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원하는 것이지만 둘을 함께 추구할 수 없다면 생선보다는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生)도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원하는 것인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유명한 사생취의(捨生取義)다. 인의(仁義)가 같은 덕목일진대 공자나 맹자는 인의(仁義)를 목숨보다도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곧 살신성인이라면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것을 뜻한다.
비늘만한 자비에도 인색한게 요즘 세태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이 사회에는 그래도 그런 분들이 적지 않아 어둠과 각박한 세상에 한 줄기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숭고하다 하겠다.
또한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말이 있다. 이(利)가 눈앞에 보일 때에는 의(義)로움을 생각하며 남의 위태로움을 보고는 목숨을 내놓는다.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에 나오는 한 대목인데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의 휘호로 널리 알려져 있는 문구다. 말이 쉽지 범인은 흉내내기도 힘든 경지다.
⏹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죽음은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언젠가는 반드시 한 번은 맞아야 만하는 숙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어느 생명체이고 간에 이를 피하고 싶은 것이 예외없는 본능이다.
인류가 가진 신앙은 궁극적으로 이 숙명적인 일(죽음이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 제시하고 이끄는 길이라 할 것이다.
불교도 궁극적으로는 생(生)과 사(死)의 문제에 대한 답에 도달하려는 노력이고, 카톨릭도 영원한 생명을 목적으로 한다.
인명은 소중한 것이다. 어느 철학이나 종교나 간에 인명의 소중함을 말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가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했고, 유가에서도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天地之間 萬物之衆 唯人最貴)라 했고, 카톨릭에서는 ‘하느님이 자신의 모상을 본 따서 사람을 지어셨다’고 했다.
심지어 염세주의(厭世主義) 철학이라 하더라도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못됨을 안타가워 함이지 인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서정주(徐廷柱)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 천둥은 먹구름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 노오란 네 곷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미물인 국화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이렇게 천지만물의 조화의 기운이 응결되어야 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 있어서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생명은 하늘이 준 것(天賦人命)이니, 이 소중한 생명은 그 생명을 준 이가 거두어 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를 훼손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천수(天壽)를 다한 자연사(自然死), 질병사(疾病死), 사고사(事故死), 타살에 의한 죽음, 전사(戰死), 형 집행에 의한 죽음, 이타적(利他的)인 죽음, 조국과 민족 등 대의(大義)를 위한 헌신(殺身成仁), 자살(自殺) 등등이 있을 수 있겠다.
모든 죽음은 슬프다. 지위의 고하나, 재산, 업적의 다소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슬프다. 그것은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이다.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생명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한결같이 슬프기는 하나, 천수를 다한 자연사 등에는 호상(好喪)이란 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음의 내용에 따라, 고인(故人)과의 친소관계 등등에 따라 다소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사고사(事故死)나 질병사(疾病死) 등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한 죽음에는 원인이나 나이에 따라 애통함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게 마련일 것이다.
이렇듯 어떤 죽음이나 간에 안타까움과 슬픔은 매 한가지라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 정도에 차이가 있듯, 죽음에 부여되는 의미 또한 큰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예부터 병사(病死)나 사고사(事故死)나 간에 부모에 앞서 죽음을 맞게 되면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한 불효를 했다고 하여 그 장사(葬事)를 간략히 하였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이 있듯, 거룩하고 고귀한 생명을 희생 헌신하여 의(義)를 도모한 죽음은 그 뜻을 높이 기려 숭앙하고 기념한다.
그런가 하면 취중 실수나 사소한 다툼 등으로 인해 그만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는 참으로 의미없는 죽음이라 할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 자살(自殺)이다. 오죽했으면 이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뿐인 생명을 스스로 끊었을까마는 그 행위 자체는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 안타가운 상황들을 상고해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실패에서 오는 좌절로 인해, 자신이 가졌던 재물, 명예, 권세를 모두 잃었을 때,
변절(變節:실연 포함)에 대한 배신감을 견디지 못해,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모욕을 당했는데도 호소나 해명을 할 길이 없을 때,
자기가 한 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인해, 참담한 파멸이 눈앞에 닥쳤을 때,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후회하면서, 말과는 달리 자신의 어두운 내면이 탄로가 났을 때,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해서 속죄하면서, 자신의 채무를 살아서는 다 변제할 길이 없을 때, 역으로 자신의 재산이 압류되고 나면 빈털터리가 될 것이 우려될 때,
자기에 의하던 타(他)에 의하든 자신의 명예가 회복될 수 없이 실추되었을 때, 자신의 지위가 회복될 수 없이 파멸 되었을 때,
자신에 대한 많은 지지나 성원을 보내던 세력이 사라지고 오히려 지탄하고 규탄하는 세력으로 돌라설 것이 자명할 때,
자신의 과오가 점차 더 밝혀져서 치부가 천하에 더 드러날 것이 두려울 때, 앞에 확실히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 놓여 있을 때, 조국의 치욕과 멸망을 슬퍼하면서, 정신질환으로 인해 등등 …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그 어떤 명분으로도 위에서 가상해 본 그 어떤 경우라도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설령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국운이 기우는 것을 통분하여 자결로서 백성과 임금의 각성을 촉구한 민영환(閔泳煥)의 우국충정도, 감동적이긴 해도 그 행위가 합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천하도 내가 있은 연후에라야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천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아무리 자살(自殺)을 미화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죽음의 허망함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위에서 가상해 본 경우들을 대별해 본다면 첫째, 직면한 상황이 고통스러운 경우와 둘째, 억울하고 분한 경우와 셋째는 책임 회피나 실상 은폐 및 자기 이권 보전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의 경우는 마음을 바꾸어 죽을 각오로 시련을 극복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며, 둘째의 경우는 죽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보다는 살아서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세째의 경우는 참으로 비열한 짓이다.
겸허히 자신의 책임을 속죄하고 죄 값을 치르고 회개하는 것이 당당한 자세이다. 견디기는 힘든 일이긴 해도 그러는 것이 사회에 경종을 주어 사회를 바르게 하는 데에 기여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난,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세상살이가 각박해짐으로 해서 스스로 삶을 포기해 버리는 사례가 허다하다. 특히 청소년들이 참으로 사소한 문제 앞에서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저질러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참으로 생명은 소중하다. 그 삶이 귀한 삶이었거나 평범한 삶이었거나 욕된 삶이었거나 간에 하늘이 준 그 생명은 꼭 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허락한 이가 그 생명을 거두어갈 때까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생명을 훼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삶에도 귀한 삶, 평범한 삶, 욕된 삶이 있을 수 있듯, 그 죽음도 그 사람의 삶에 따라 평가가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귀한 죽음이 있는가 하면 예사스런 죽음, 욕된 죽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삶도 잘 살아야겠지만 죽음도 잘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국충정에서 나온 의로운 희생이 아닌 바에야 자살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욕된 죽음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작금의 어떤 사회 현실로 인해 이를 모방하는 이들이 늘어날까가 두렵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안정이 시급하다. 청소년(들에 대한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교육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