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是是非非)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는 뜻으로, 사리를 공정하게 판단함을 일컫는 말이다.
是 : 옳을 시(日/5)
是 : 옳을 시(日/5)
非 : 그를 비(非/0)
非 : 그를 비(非/0)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한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어 밝힌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잘잘못이란 뜻도 있다. 흑백(黑白)
시(是)는 ‘옳다’ 또는 ‘인정하다’의 뜻이고, 비(非)는 ‘그르다’ 또는 ‘아니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여 일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법정(法頂) 스님의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글 속에
是是非非都不關(시시비비도부관)
山山水水任自閑(산산수수임자한)
莫間西天安養國(막간서천안양국)
白雲斷處有靑山(백운단처유청산)
라는 문장(文章)이 있다.
즉, 옳거니 그르거니 상관말고,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 만 극락 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 인 것을.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될 대로 되고, 다 제 갈 길을 가게 되고,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참견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말이다.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분별 망상을 쉬면 본래 자기 모습이 드러난다.
만나는 사람마다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누가 차갑게 대하면, 나 자신은 그렇게 차갑게 대한 적이 없는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세상 모든 만물은 양면성을 띄고 있다. 밝은 구석이 있으면 어두운 구석이 있고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밝음과 어두움은 자연의 빛이 있기 때문이요, 긍정과 부정은 사람의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빛이 없다면 밝음과 어두움도 없고 사람의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긍정이고 무엇이 부정이겠는가.
대체로 도(道)를 깨우쳤다는 성인(聖人)들의 경우 이러한 구속(拘俗)에서 벗어난 상태였을 것이다. 성인(聖人), 혹은 성현(聖賢)들은 긍정(肯定)이니 부정(否定)이니 하는 것에 의거(依據)하지 않고, 자연(自然)의 본성(本性)을 관조(觀照)할 뿐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강조(强調)한 도가사상(道家思想)이 그 대표적(代表的)인 사례(事例)이다.
장자(莊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논쟁(論爭)과 판단(判斷)에 대해 이야기한다.두 사람이 논쟁(論爭)을 하여 어느 한 사람이 이긴다면 그가 옳고 다른 사람이 그른 것일까?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른 것일까?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일까?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장자(莊子)의 생각이다.
“무릇 모든 사람들이란 나름대로의 편견(偏見)을 가지고 있거늘, 우리가 누구를 불러다 그것을 판단케 하겠나? 만약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더러 판단(判斷)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자네와 의견(意見)이 같은데,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나나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어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세상(世上)을 살다보면 우리는 숱한 논쟁(論爭)에 휩싸이게 된다.
매일 매일의 삶이 어쩌면 논쟁(論爭)의 연속(連續)인지도 모른다. 아침밥을 먹어야 건강(健康)하다는 주장(主張)도 있고 아침을 걸러야 건강하다는 주장도 있다. 논쟁(論爭)에 이긴 쪽의 주장(主張)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진 쪽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다. 제3자를 데려다 판단(判斷)을 구하고자 하여도 이미 그의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판단은 무의미(無意味)한 것이다. 혹은 그러한 논쟁(論爭)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답을 하여도 판단 자체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주변 아이들이 몸이 아파 병원(病院)에 입원(入院)하는 일이 잦아지면“그래 건강이 최고야”하며 마치 공부(工夫)는 다소 쳐져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 하다가도 막상 시험(試驗) 기간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문제 하나 가지고 다그치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인 부모(父母)들의 심정(心情)일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자신의 판단조차 상황(狀況)의 변화(變化)에 따라 달라지는데 하물며 진리(眞理)를 구하는 데 왕도(王道)가 있을 수 없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원래 실상(實狀)이 없다.
愚濁生嗔怒는 皆因理不通이라. 休添心上火하고 只作耳邊風하라.
우탁생진노는 개인리불통이라. 휴첨심상화하고 지작이변풍하라.
長短은 家家有요 炎凉은 處處同이라. 是非無實相하여 究竟總成空이니라.
장단은 가가유요 염량은 처처동이라. 시비무실상하여 구경총성공이니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 성내는 것은 모두가 이치(理致)에 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불길을 더하지 말고 다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결로 여기라. 장점(長點)과 단점(短點)은 사람마다 있게 마련이고 세상의 인심(人心)은 어느 곳이나 한결같다. 옳고 그른 것은 원래 실상(實狀)이 없이 마침내 모두가 다 부질없는 것이 된다.
어떤 왕(王)이 현자(賢者)에게 물었다.
“가장 성질(性質)이 나쁜 동물(動物)의 이름은 무엇인가?”
현자(賢者)가 대답(對答)했다.
“거친 녀석은 폭군(暴君)이고, 점잖은 녀석은 아첨(阿諂)꾼입니다.”
그렇다. 폭군(暴君)이나 아첨(阿諂)꾼 따위라면, 그들이야말로 어리석고 못난 사람 축에 드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우둔(愚鈍)한 인간(人間)일수록 항상 철면피(鐵面皮)한 폭력(暴力)을 휘두르기 마련이고 못난 사람일수록 간(肝)에 붙고 쓸개(膽)에 붙기를 즐겨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화를 내고 성내는 것은 정도(正道)로 살아가는 방법(方法)을 모르고 있는 탓이다. 생각(生角)하고 행동(行動)하는 것들이 그들의 방식(方式)으로는 이치(理致)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行爲) 앞에서는 차라리 못 본 척, 못 들은 척, 귓가를 스치는 바람처럼 여기면 된다. 그들을 상대로 마음의 불길을 더하다간 그대 자신을 태워 버리게 된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원래 실상(實狀)이 없다. 장점(長點)과 단점(短點)은 사람마다 있게 마련이고 세상(世上)의 인심(人心)은 어느 곳이나 한결같다
중국(中國) 명(明)나라 말기(末期) 홍자성(洪自誠)의 저서(著書) 채근담(菜根譚)의 다음 말을 음미(吟味)해 둘 필요가 있다.
“꾀꼬리 우는 소리는 아름답다 하고 개구리 우는 소리는 시끄럽다고 하는 것이 보통 인정이다. 아름답게 핀 꽃은 귀여워하고 잡초가 우거진 것은 보기 싫다고 뽑아 버리는 것이 인정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고 어느 것이 밉다는 것은 다 사람의 감정이 정한 것이지 대자연의 큰 눈으로 본다면 꾀꼬리 울음소리나 개구리 울은 소리나 각기 생명의 노래일 뿐, 아름다운 꽃이나 꽃 없는 잡초나 다 같이 생명 있는 자의 모습일 뿐이다.”
어떤가 ? 아직도 시시비비에 끌려 다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만나거든 비켜갈 줄 알면 그만이다. 다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결로 여기면 그만인 것이다.
내가 그대와 논쟁(論爭)을 한다고 가정(假定)해 보자.
그대가 만약 나를 이기고 내가 그대에게 졌다면 과연 그대가 옳고 나는 그른 것일까?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가 내게 졌다면 내가 옳고 그대는 그른 것일까? 그 한쪽이 옳으면 다른 쪽은 그른 것일까? 모다 다 옳거나 모두 다 그른 것은 아닐까? 나도 그대도 알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은 말할 여지(餘地)도 없이 잘 모를 것이니 누구에게 판정(判定)해 달라고 할까?
그대와 의견(意見)이 같은 사람에게 부탁(付託)하면 그는 이미 그대와 같으니 어찌 올바로 판정(判定)할 수 있으며 나와 의견(意見)이 같은 사람에게 부탁(付託)하면 그 또한 이미 나와 같으니 어찌 올바로 판정(判定)할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와 의견(意見)이 다른 사람에게 판정(判定)해 달라고 하면 이미 나와도 그대와도 의견(意見)이 다르니 어찌 올바로 판정(判定)할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와 의견(意見)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判定)해 달라고 하면 나와도 그대와도 의견(意見)이 같으니 어찌 올바로 판정(判定)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나 그대나 다른 사람이나 모두 알수 없으니 어찌 누구에게 판정(判定)을 기대(期待)한다 말인가 무엇을 자연(自然)의 공평(公平)한 입장(立場)으로 모든 것을 조화(調和)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옳다고 하는 의견(意見)과 옳지 않다고 하는 의견(意見), 그렇다고 하는 의견(意見)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의견을 말한다. 옳다고 하는 의견이 참으로 옳은 것이라면 곧 옳다고 하는 의견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또 구별(區別)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하는 의견이 참으로 그렇다면 곧 그렇다는 의견이 그렇지 않다는 의견과 다르다는 것을 또 말할 필요가 있는가. 변화하는 소리가 서로 대립(對立)한다는 말은 아무 대립(對立)도 없다는 말이니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누군가와 시시비비(是是非非)를가릴 때는 분명히 어떤 판정(判定)의 기준(基準)이 있어야 하고 그 타당성(妥當性)을 증명(證明)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논쟁(論爭)의 과정(過程)을 거치더라도 완전한 결과를 도출(導出)해 낼수 없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논쟁(論爭)에서는 명확한 정(正).부정(不正)의 판단(判斷)이 아니라 상대편(相對便)을 이기기 위한 목적(目的)을 갖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의견까지도 객관적(客觀的)인 시선(視線)으로 바라보라. 참다운 진실(眞實)은 논쟁(論爭)이 없이도 마침내 승리(勝利)하게 마련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오는 말이다.
是非終日有(시비종일유)라도 不聽自然無(불청자연무)니라
하루종일 시비(是非)가 있다 해도 듣지 않으면 자연히 없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시시비비(是是非非)는 거의 대부분이 하잘 것 없는 비방(誹謗)에서 비롯된다. 남을 헐 뜯어서 욕(辱)을 하는 것이 바로 비방(誹謗)이며, 남의 잘못이나 흠을 나무라는 것을비난(非難)이라고 한다. 이 비난(非難)과 비방(誹謗)이 함께 어우러지면 적훼소골(積毁銷骨)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적훼소골(積毁銷骨)이란 헐뜯는 말이 쌓이고 쌓이면 뼈도 녹일만큼 무서운 힘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읍견군폐(邑犬群吠) 고을에 개가 많이 모여 들어 짖는다 즉 많은 소인배(小人輩)들이 남을 비방(誹謗)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시비(是非)의 말을 차라리 듣지 않거나 그것에 개의(介意)치 않으면 마치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에 침을 뱉거나 소피(所避:오줌)를 보는 것처럼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용운(韓龍雲)은 시인(詩人), 소설가(小說家),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서 28세에 승려(僧侶)가 되어 삼일운동(三一運動)당시 33인(人)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詩) 비방(誹謗) 가운데 아래와 같은 구절(句節)이 있다.
“세상(世上)은 비방(誹謗)도 많고 시기(猜忌)도 많습니다. 당신에게 비방(誹謗)과 시기(猜忌)가 있을지라도 관심(關心)치 마셔요. 비방(誹謗)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태양(太陽)에 흑점(黑點)이 있는것도 다행(多幸)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대하여는 비방(誹謗)할 것이 없는 그것을 비방(誹謗)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지사지(易之思之:처지를 서로 바꿔서 생각함)의 지혜(知慧)가 필요하다.
그 사람과 같은 처지(處地)에 서 보지 않았거든 그를 비난(非難)하지 말라.
아무것도 아닌 생각과 생각의 차이(差異)가 사단(事端)이 되어 옥신각신 싸움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죽고 못 살 정도로 살갑던 오랜 우정(友情)이 깨어져 원수(怨讐)보다도 더 험악(險惡)한 관계(關係)가 되는 것을 우리는 주변(周邊)에서 종종 볼수 있다.
이웃지간에는 말 할 것도 없고, 죽마지우(竹馬之友)인 어릴 적 친구 사이도, 수학(修學)을 같이한 동문(同門)이나 한솥밥을 먹는 직장(職場) 동료(同僚) 선후배간(先後輩間)에도, 혈연(血緣)으로 맺어진 일가친척간(一價親戚間)이나, 가족간(家族間)에도, 한 이불을 덮고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지간(夫婦之間)에 이르기 까지 아주 사소(些少)한 생각(生角)의 차이(差異) 하나로 서로 으르렁 거리며 남남 보듯 하고 모래알처럼 모여 살면서도 끈끈한 정(情)으로 어우러지지 못 하고 제 각기 소 닭 보듯 하며 살아가는 사례(事例)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끈끈한 정(情)으로 매듭 지어진 인연(因緣)과 관계(關係)의 끈이 끊어져 나가면서 사회공동체(社會共同體)는 점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국가기강(國家紀綱)은 썩은 고목나무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있게 되고 가정(家庭)은 가정(家庭)대로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상태(狀態)로 하나 둘 빠져 들어가 여인숙(旅人宿)으로 전락(轉落)해 가니 심히 이 나라가 걱정된다.
사람들이 저마다 얼굴 모양새가 다르듯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와 생각이 좀 다르다고 해서 틀린 생각이라거나 잘못된 생각이라고 단정(斷定)을 해버리고 내 생각만 옳다고 내 주장(主張)만 하는 것이 잘못돼는 시발(始發)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욱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나를 반대(反對)하고 심지어는 적대시(敵對視)하는 것이라는 극단적(極端的)인 예단(豫斷)을 하고 선제적(先制的)으로 적대적(敵對的) 감정(感情)을 일으키며 공격(攻擊)을 하는데서 문제(問題)의 화근(禍根)이 되는 것 같다.
그러니 같은 한 사안(事案)을 두고도 각자 처지(處地)와 입장(立場)에 따라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고 그 다른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며 더구나 나를 반대(反對)하거나 적대시(敵對視)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넓은 마음으로 인정(認定)을 하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나와 다른 남들의 생각이 옳고 더 좋을 수도 있고 내가 옳다고 믿는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간의 생각과 생각의 차이(差異)를 조금씩이나마 좁혀나갈 수는 없을까?
살면 얼마나 산다고 짧게 한번 사는 인생(人生), 무슨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怨讐)라도 되는 양, 그리 찌푸리고 살 필요가 있을까? 시시비비(是是非非)야 가리며 살아야하겠지만 나와 다른 생각들을 틀린 생각으로 단정(斷定)하고 내 주장(主張)만 하는 것은 그 것이 바로 이기심(利己心)에서 빚어지는 독선(獨善)과 아집(我執)이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도 유불리(有不利)와 이해관계(利害關係)를 떠나서 이기심(利己心)으로 움튼 아집(我執)과 독선(獨善)을 버리고 나와 너 우리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나아가서 사람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하고 생명(生命)을 생각하고 사회(社會)를 생각하고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고 자연(自然)과 환경(環境)을 생각하고 미래(未來)를 꿈꾸는 마음들을 모으고 길러나가야 할것이다.
조그마한 생각과 생각의 차이(差異)로 빚어지는 앙금은 애초에 훌훌 털어내 버리고 선(善)함으로 정직(正直)함으로 한 마음이 되어 각개약진(各個躍進)으로 난맥상(亂脈狀)을 이루는 살벌한 세상으로부터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素朴)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다듬어 나가는 일에 매진(邁進)해야겠다. 이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다음은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풍자(風姿), 방랑(放浪) 시인(詩人) 김삿갓 김병연(金炳淵)의 시(詩)이다. 시시비비(是是非非)란 제목(題目)의 시(詩)인데 시(是)자와 비(非)자 두 글자만 가지고 철학적(哲學的)인 경구(警句)를 남겨준 시(詩)이다.
시시비비(是是非非) / 김병연(金炳淵)의 시(詩)
年年年去無窮去 日日日來不盡來(년년년거무궁거 일일일래부진래)
年去月來來又去 天時人事此中催(년거월래래우거 천시인사차중최)
이 해 저 해 해가 가고 끝없이 가네.
이 날 저 날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해가 가고 날이 와서 왔다가는 또 가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 가운데 이뤄지네.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시시비비비시시 시비비시비비시)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시비비시시비비 시시비비시시비)
옳은것 옳다하고 그른것 그르다 하는 것이 꼭 옳지는 않고
그른것 옳다하고 옳은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것 옳다하고 옳은것 그르다 하는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옳은것 옳다하고 그른것 그르다 하는 이것이 시비일세.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이다.
김익순(金益淳)이라는 사람은 방어사(防禦使)라는 높은 직위(職位)에 있었다.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洪景來)에게 포로(捕虜)로 잡히게 되었는데, 심한 고문(拷問)에 못 이겨 반란(叛亂)에 협조(協助)할 것을 약속(約束)하고 만다. 난(亂)이 진압(鎭壓)되고 난 후(後) 김익순(金益淳)은 역적(逆賊)에 협력(協力)했다는 이유로 참형(慘刑)을 당하였고, 그 후손(後孫)들은 뿔뿔히 흩어져 숨어 살아야 했다.
김익순(金益淳)의 손자(孫子)였던 김병연(金炳淵)도 평민(平民)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김병연(金炳淵)은 20세 되던 해에 영월(寧越) 고을에서 실시된 백일장(白日場)에 나가 장원(壯元)을 하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합격(合格) 후일담(後日譚)을 이야기 했다.
그 때의 시제(詩題)가‘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의 충성(忠誠)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金益淳)의 죄(罪)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痛歎)해 보아라.’였다. 김병연(金炳淵)은‘당연히 법(法)대로 극형(極刑)에 처하고 기강(紀綱)을 잡아야 한다.’고 제출(提出)했다며 자랑삼아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기겁(氣怯)을 했다.
어머니는 사랑채에 안치(安置)된 위패(位牌)를 보여주며 기막힌 사실을 알려 주었다. 사실을 알게 된 김병연(金炳淵)은 사죄(謝罪)를 하고,‘필(筆)로써 할아버지를 두 번 죽인 불효자(不孝子)가 어찌 하늘을 보겠는가’하며 극심(極甚)한 마음의 고통(苦痛)을 겪었다고 한다. 역적(逆賊)의 자식(子息)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조상(祖上)에 대한 불효(不孝) 사이에서 어쩔 도리(道理)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삿갓을 쓰고 방랑(放浪)길에 올라 갖가지 행적(行蹟)을 조선팔도(朝鮮八道)에 남기며 사람들에게 글로 웃기기도 하였고, 기이(奇異)한 행동(行動)으로 수많은 서민(庶民)들의 친구가 되어, 가는 곳마다 실소(失笑)를 자아내는 행적(行蹟)을 남기며 떠돌아 다녔으니, 훗날 우리들은 그를‘방랑시인(放浪詩人) 김삿갓’이라 부르며 그를 기리고 있다.
다음은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지은 팔죽시(八竹詩)이다.
차죽피죽화거죽(此竹彼竹化去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풍취지죽낭타죽(風吹之竹浪打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반반죽죽생차죽(飯飯粥粥生此竹)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대로
시시비비부피죽(是是非非付彼竹) 시시비비는 저에게 맡긴 대로
빈객접대가세죽(賓客接待家勢竹) 빈객 접대는 가세대로
시정매매시세죽(市井賣買時勢竹) 시정 매매는 시세대로
만사불여오심죽(萬事不如吾心竹) 만사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연연연세과연죽(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살리라.
이 시(詩)는‘대 죽(竹)’자(字)를 이두식(吏讀式)으로 풀이하여‘대로’로 해석(解釋)하는 특이(特異)한 시(詩)로 한시(漢詩)의 격(格)을 무시(無視)한 파격(破格) 시(詩)다.
불가(佛家)에서는 예로부터 이 시(詩)를 신라시대(新羅時代)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지은 것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이 시(詩)가 김삿갓(김병연)의 시집(詩集)에 수록(收錄)되어 현재 전해지고 있다. 이는 후인(後人)이 김삿갓의 시(詩)를 수집(收集)하여 시집(詩集)을 만들 때 일부의 시(詩)가 잘못 김삿갓의 시(詩)로 착각(錯覺)되어 포함되었으리라 여기고 있다.
부설거사(浮雪居士)는 어려서 출가(出家)하여 불국사(佛國寺)에서 스님이 되었는데 총명(聰明) 영특(英特)하여 식견(識見)이 뛰어났다고 한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스님과 도반(道伴)이 되어 두류산(頭流山)에 가서 경론(經論)을 연구(硏究)하고 법왕봉(法王峰) 아래 묘적암(妙寂庵)을 짓고 10년간 정진(精進)하다가 오대산(五臺山)으로 가던 도중 두릉(杜陵)의 백련지(白蓮池)에 있는 구무원(仇無寃)의 집에 며칠 머물다 주인(主人)의 딸 묘화(妙花)가 스님에게 연정(戀情)을 품고 병(病)이 나게 되어 구무원(仇無寃)의 청(請)에 의해 숙세(宿世)의 업연(業緣)을 어찌할 수 없다 하고 묘화(妙花)를 아내로 맞아 들여 환속(還俗)을 하여 거사(居士)로 도(道)를 닦았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스님의 만류(挽留)를 뿌리치고 세속(世俗)에 남아 공부(工夫)를 하다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도 도(道)를 이루었다고 한다. 죽은 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스님이 찾아와 화장(火葬)을 하고 사리(舍利)를 수습(收拾)하여 묘적암(妙寂庵) 남쪽에 부도(浮屠)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