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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운명]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19.04.16|조회수3,751 목록 댓글 0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모두 진리이다는 뜻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놓여도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 진리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隨 : 따를 수(阝/12)
處 : 곳 처(虍/5)
作 : 지을 작(亻/5)
主 : 주인 주(丶/4)
立 : 설 립(立/0)
處 : 곳 처(虍/5)
皆 : 다 개(白/4)
眞 : 참 진(目/5)


처해 있는 곳에 따라 주인이 되라. 그러면 서 있는 곳 모든 것이 참될 것이다는 의미이다. 당나라 임제선사의 법어(法語)이다.

쉽게 표현 하자면, 자신의 환경에 따라 불평말고 열심히 적응해 살다 보면 그 곳이 정도들고 곧 내 고향도 될 것이니 어느 곳인들 맘 먹기 따라 삶의 진실이 있다.

조선조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도 유배 9년의 삶이 결코 원망과 절망의 나날이 아닌 학문과 예술을 승화하는 계기로 삼았고,

정약용 선생은 18년간의 긴 세월을 강진 벽지에서 가족과 이별한 채 지금으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며 값지게 보냈으며,

다산의 형(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가서 16년 동안 설음과 울분으로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라 희대의 저서 박물학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지었다.

따라서 이분들은 수처작주하여 입처개진하는 삶의 긍정적 모델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현대적인 해석으로, 어떤 조직에서 어떤 일을 맡게 되든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하면 내가 있는 위치가 진리, 참된 것이라는 뜻이다.

진실한 삶을 살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한 방법을 이렇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초점(願)을 맞는 대신 현재의 자신이 있는 곳, 자신에 처한 상황에서 좀 더 평화로운 방법을 발견하면 최상의 인생의 행복도 평화도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끌려가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고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주체자가 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중국 명나라 학자 육상객은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기위한 6가지 생활의 덕목을 말하고 있다. 수처작주(隨處作主)를 위한 육연(六然)이라고 한다.

1) 자신에게 붙잡히지 않고 초연하게(自處超然)

2) 남에게 언제나 온화하게(處人超然)

3) 일이 있을 땐 활기에 넘치게(有事超然)

4) 일이 없을 땐 마음을 맑게(無事超然)

5) 성공하여 만족할때는 담담하게(得意浩然)

6) 실패 했을때는 침착하게(失意泰然)

지금 이 자리의 나의 마음가짐과 씀씀이는 내 인생의 씨앗이고 열매인 것이니 앞으로 큰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덕목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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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 성어는 내가 가는(이르는)곳 마다 주인이 된다. 모든 일은 먼 데 있는것이 아니라,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모든것이 풀어진다는 말이다.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깨달음)의 세계이니라. 어디에서나 주체성을 갖고 전력을 다하면 진실된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자기가 처한 곳에서 주체성을 갖고 전심전력을 다하면 어디서나 참된 생명을 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 당(唐)나라 선승 임제선사(臨濟禪師)의 어록인 임제록(臨濟錄)에 있는 말이다.

어느 곳에 가든지 주인이 된다면 그 모든 곳이 그대로 참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인은 다름 아닌 그대의 진실된 자아이며, 곧 자유로운 사람을 뜻한다.

자유로운 사람이란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무엇엔가 의지하여 생각하고 무엇엔가 사로잡혀서 판단한다. 그것이 바로 집착이다.

집착의 근원은 바로 편견과 부질없는 욕심과도 같은 것이고, 그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마음의 투명한 작용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이다.

또한 진리란 우리 눈앞에 항상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바로 평상의 도리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번뇌와 집착의 방해 때문이다. 즉, 번뇌와 집착이 진실된 자아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

주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취하여야 할 중요한 태도는 평상의 삶에서 욕심과 편견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집착을 버렸을 때 늘 깨어 있는 마음이 되어서 눈앞에 나타나는 진실을 그대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 말을 좀 더 알기 쉽게 해석하면, 어디에 가건 자기 자신이 따라간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임제(臨濟) 스님의 말씀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손꼽는 법문(法文)이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건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는 어렵다. 여기저기, 이일 저일 등등의 경계에 이끌려서 자신의 정신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어디를 가건 자신은 늘 따라다니고 있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해서 생활에 원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현재의 위치가 아닌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를 바라고 꿈꾸는 것을 그만두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있으면 지금보다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다른 학교, 다른 직장, 다른 사람, 다른 업종을 늘 기웃거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불만이 많은 사람, 무엇에나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디를 가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늘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좀 더 평화로워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계에 팔려 다니지 말고 현재의 자신이 있는 이 순간 이 자리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중심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라는 말이다.

최상의 인생도 지금 바로 여기에 있고 행복도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뜻이다. 진리도 도(道)도 극락도 화장세계(華藏世界)도 역시 지금 바로 이 곳이라는 사실이다.

다음은 임제선사(臨濟禪師)의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구절이다.

師示衆云 道流 佛法無用功處 是平常無事 아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사시중운 도류 불법무용공덕 시평상무사 아시송뇨 착의끽반 곤래즉와
愚人笑我 智乃知焉
우인소아 지내지언
古人云 向外作工夫 總是癡頑漢 爾且隨處作主立處皆眞
고인운 향외작공부 총시치완한 이차수처작주 입처개진
境來回換不得
경래회환부득

임제 스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중에게 설법을 하셨다.

납자(衲子)들이여, 불법(佛法)은 애써 힘쓸 필요가 없다.

다만 평소에 아무 탈없이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자면 그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길,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짓일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의 수처작주(隨處作主)가 곧 그대로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경계를 맞이하여 회피하려 하지 말라.

임제선사는 중국 당(唐)나라 때의 선승(禪僧)으로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다. 어느 날 선사는 대중에게 위와 같이 말했다.

수처(隨處)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고 삶터이다. 작주(作主)란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아라는 뜻이다. 부연해 말하자면 자기가 처한 곳에서 전심전력을 다하면 어디서나 참된 생명을 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주체성을 가지라는 말을 하는데, 주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서나 전력투구를 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디서나 참된 생명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여기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고불총림(古佛叢林) 방장(方丈) 서옹(西翁) 큰 스님이 늘 말씀하시는 ‘절대, 현재, 참사람’이 이 의미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 속에서도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최고의 행복한 세계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늘 변화의 흐름 위에서 살아간다. 변화하는 인생의 흐름 속에서 분명한 것은 나는 나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받고 즐거움을 받는 주인은 바로 나이다. 아울러 고통과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주인도 다름 아닌 나이다.

그러므로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자기야 말로 가장 사랑스런 존재’라고 노래한다. 부처님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아집, 교만, 독선으로 나를 내세우며 자존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생의 참된 주인공은 이런 편견과 오만에서 벗어나 있다.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학자 육상객(陸湘客)은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생활의 덕목을 여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를 육연(六然)이라 한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자신에게 붙잡히지 않고 초연하게,

처인초연(處人超然)
남에게 언제나 온화하게,

유사초연(有事超然)
일이 있을 때에는 활기에 넘치게,

무사초연(無事超然)
일이 없으면 마음을 맑게,

득의담연(得意澹然)
성공하여 만족할 때에는 담담하게,

실의태연(失意泰然)
실패했을 경우에는 침착하게 살아라고 한다.

분명히 육연(六然)은 수처작주 주처개진(隨處作主 住處皆眞)에 포함되며, 이 말을 풀이하면 육연이 된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소도구로서, 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고 그 공간에 살아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곳이 극락이고 천당이든지 어디서든 당당하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주체적 인간으로 살면 무엇을 하든 그 하는 일과 그 있는 자리가 모두 나의 진실한 진리의 삶이다.

어떤 일이라도 주체적 역할을 할 때 그 일은 곧 온전한 내 일이고, 온전한 나의 삶이다. 이것이 철저히 살고 철저히 죽는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이다.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삶이다.

어디에 가든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다.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상황이든 만족하고 행복해라.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어 행복을 누리라.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하고 넉넉하게 부자로 살아라.

수처작주 주처개진(隨處作主 住處皆眞)이 되면 설사 옛날에 익힌 업장(業障)과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즉 부모를 죽인 일이나, 성인을 죽인 일이나. 부처님의 몸을 해치거나, 청정한 승단(僧團)의 화합을 깨뜨리거나 하는 따위의 죄를 지었다 하더라고 저절로 해탈의 대해에 노니는 것이 된다.

어떤 상황에 있든 주인이 되라(隨處作主)는 말은 타인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든 자신은 거기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큰 곤경에 처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고 자신은 그것에 동요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 타인이 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주체자가 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행복하다. 그것이 진정한 수처작주 입척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선천성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 최창현씨는 입에 문 파이프 하나로 전동 휠체어를 조종해 하루 70~80km씩 달려 유럽대륙을 누볐다. 그렇게 달려온 거리만 20개국 1만3천km였다.

그런데도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목마를 때 물잔 하나 들어 올릴 수도 없는 손과 몸을 갖고 있어요. 다들 살기 어렵다고 호소하지만, 나 같은 사람도 이만큼 해내는데 이 악물고 살면 못해낼 일이 뭐가 있으며, 이리 간절히 염원하면 통일인들 안 이루어 지겠습니까?”

신문과 방송에서 읽고 본 최씨의 기사는 매일 같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답답하고 어려운 정치와 경제, 사회 기사를 대하던 사람들에게 신선하고도 감동적인 소식이었다.

멀쩡한 몸과 마음으로도 살기 어렵다고 하소연하며 불평불만으로 날을 보내는 보통사람들에게 최씨의 인생은 역경을 이기고 살아가는 한 중증장애인의 이야기만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기에는 생사를 오가는 큰 도전과 인간승리가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던져주었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境來回換不得.
수처작주 입처개진 경래회환부득.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

임제 스님께서는 중생들에게 인생의 크나큰 지침을 내려 주셨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에 대해 무비스님은 임제록(臨濟錄) 강설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시며, 이것이 철저히 살고 철저히 죽는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며,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삶이라고 하셨다.

어디에 가건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다. 그러므로 현재의 위치가 아닌,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를 바라고 꿈꾸지 말라.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상황이든 만족하고 행복하라.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어 행복을 누리라.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 언제나 배고픈 아귀가 되지 말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하고 넉넉하게 부자로 살아라.

태어나서 30년 동안 1급 중증장애인으로 방안에서만 주검 같이 살다가 새로운 인생을 산지 10여년, 죽어야 만 할 운명을 극복하고 자기와 같은 장애인의 희망이 되고자 휠체어를 타고 유럽대륙 종단에 나선 최씨는, 그의 종교가 무엇인지, 더군다나 그의 부모의 삶이 자식으로 인하여 얼마나 힘들고 희생되었는지, 이웃으로부터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받고 조그만 힘이라도 얻을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의 부모의 30년 세월과 최씨의 10년 인생 도전은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과 냉대와 무관심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자신을 바로 세우며 삶의 의연한 주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한 삶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쉽게 좌절하고 생을 포기하는 정상인들에게 큰 가르침과 경종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도전과 극의 얘기가 많은 사회는 온전하고 바른 삶의 현장으로서, 바로 임제 스님께서 중생들에게 주신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이 살아 숨 쉬는 곳일 것이다.

부처님께서 사왓티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였다. 아누룻다는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다가 눈병이 생겨 실명하게 되었다.

아누룻다가 옷을 기우려고 했으나 바늘에 실을 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에 복을 구하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실을 꿰어주십시오”라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소리를 들으신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바늘을 가져오너라. 내가 꿰어 주리라. 이 세상에서 복을 얻고자 나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여섯 가지 일에 힘쓰며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 여섯 가지는 남에게 베푸는 것이요, 남을 가르치는 것이며, 억울함을 참아 견딤이요, 계를 가르침이요, 중생을 감싸고 보호함이요,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 여섯 가지 일에 만족하는 일이 없이 항상 힘쓴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섯 가지 가르침 중에 남에게 베푸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억울함을 참고 견디는 것과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빈부, 귀천, 학식과 성한 자와 성치 못한 자에 관계없이 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씨와 그의 부모의 삶은 곧 그렇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곧 배품이며 가르침이고, 억울함을 인욕(忍辱)하며 키워 온 값진 생의 표본이기도 하다.

여기에 조금 더 나아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섭법(四攝法)과 육화경(六和敬)을 마음에 담고 지키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한결 부드럽고 화평하고 다툼과 분노가 없는 곳이 될 수 있으라 확신한다.

사섭법(四攝法)
보살(菩薩)이 중생을 제도할 때에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를 말한다. 사섭사(四攝事)라고도 한다.

① 보시(布施)
: 진리를 가르쳐 주고(法施), 재물을 기꺼이 베풀어 주는 일(財施),

② 애어(愛語)
: 사람들에게 항상 따뜻한 얼굴로 대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는 일,

③ 이행(利行)
: 신체의 행위(身業), 언어행위(口業), 정신행동(意業)의 3업에 의한 선행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

④ 동사(同事)
: 자타(自他)가 일심동체가 되어 협력하는 일, 즉 형체를 바꾸어 중생에 접근함으로써, 중생과 사업을 같이 하여 제도하는 일이다. 원시불교의 중요한 수행과 실천 덕목인 37각지(覺支)의 일부이다.

육화경(六和敬)
불교 교단의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며, 사원생활에서 생기는 불화나 분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 가운데 승(僧)을 승가(僧伽)라 하고 화합중(和合衆)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육화경(六和敬)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는 뜻이다.

첫째, 신화경(身和敬)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서로 기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부처를 대하듯 서로 공경하고 화목하라는 뜻이다.

둘째, 구화경(口和敬)은 말로써 서로를 기쁘게 하라는 뜻이다.

셋째, 의화경(意和敬)은 마음으로 화합하라는 뜻이다.

넷째, 계화경(戒和敬)은 율법을 서로 지키라는 뜻이다.

다섯째, 견화경(見和敬)은 성스런 지견으로 화합하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이화경(利和敬)은 이익을 함께 나누라는 뜻이다.

순서는 기록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뜻에는 변함이 없다.

다음은 육화경(六和敬)의 실천을 구체화시켜 표현한 것이다.

신화공주(身和共住)는 몸으로 화합하여 같이 살라는 말이다.

구화무쟁(口和無諍)는 입으로 화합하여 다투지 말라는 말이다.

의화동사(意和同事)는 뜻으로 화합해 함께 일하라는 말이다.

계화동수(戒和同修)는 계율로 화합해 같이 수행하란 말이다.

견화동해(見和同解)는 바른 견해로 화합하여 같이 해탈하라는 말이다.

이화동균(利和同均)은 이익을 균등히 나누라는 말이다.

곧 사섭법(四攝法)과 육화경(六和敬)은, 아무리 힘들고 복잡한 세상살이라 하더라도 조금만 마음을 열면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가르침이며, 계속하여 함께 할 수 있는 생활의 지침이다.

선원장 스님께서 새해 법문에서 금년 안국선원의 캐치프레이즈로 ‘화 내지 않는 생활’을 내려 주셨다. 화두가 분명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지닌 사람은 화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셨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모두 삼계(三戒)의 온갖 번뇌를 포섭하고, 온갖 번뇌가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毒蛇)나 독용(毒龍)과 같다고 한 옛 성인의 말씀(大乘義章)을 생각하면, 화냄은 삼독(三毒) 중에서도 스스로의 몸과 마음, 가족과 이웃의 관계를 크게 해치고 사회 질서의 혼란과 파괴를 가져오는 삶의 가장 큰 적이다.

자신의 어려운 환경과 부족함과 실패를 부모와 이웃과 사회와 국가의 배려 부족으로 돌려 화를 내고 같은 입장의 사람들끼리 패를 지어 분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스스로는 물론이고 이웃에 크나큰 피해를 입히고 더욱더 자신을 소외 시키고 좌절하게 하고 말 것임은 자명하다.

화를 내지 않고 화를 다스리며 살 수 있는 길, 그래서 이 어렵고 부족하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세상을 인욕하고 자족하며 작지만 베풀고 돕고 살 수 있는 길은 자성을 요달(了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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