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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운명]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19.04.16|조회수5,125 목록 댓글 0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 사람만이 가정을 다스릴 수 있고,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수 있다.

修 : 닦을 수(亻/7)
身 : 몸 신(身/0)
齊 : 가지런할 제(齊/0)
家 : 집 가(宀/7)
治 : 다스릴 치(氵/5)
國 : 나라 국(囗/8)
平 : 평평할 평(干/2)
天 : 하늘 천(大/1)
下 : 아래 하(一/2)


수신(修身)은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도록 심신을 닦음을 뜻하고, 제가(齊家)는 집안을 잘 다스려 바로잡음을 뜻하며, 치국(治國)은 나라를 다스림을 뜻한다. 이국(理國)과 같은 말이다. 평천하(平天下)는 천하를 평정함, 또는 온 천하를 편안하게 함을 뜻한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제일 먼저 자신을 수신(修身)한 연후에 제가(齊家)하며, 제가(齊家)한 연후에 치국(治國)하며, 치국(治國)한 연후에 평천하(平天下)할 수 있다는 뜻으로 세상사를 다스리는 모든 일은 순서가 있으며 그 단계를 밟아가야 그 이치를 깨닫고 이치에 그르지 않으며 순리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해석 내용이다.

진리란 현실성으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해석에 현실성이 빠져있다면 그것은 환상을 쫓는 설교가 될 뿐이다.

어느 한명의 훌륭한 지도자가 수신제가(修身齊家)후에 치국(治國)하고 그 다음에 세상을 다스리면 평천하(平天下)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다. 평천하(平天下)가 어느 한사람의 훌륭하고 도덕적인 지도력으로 이루어 질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2천년전의 예수님이나 3천년전의 석가모니님 시대에 이루어 졌을 것이다.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들이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치면서까지 나라의 평안을 위해 노력했어도 평천하(平天下)는 커녕 한 나라의 평화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현실속에선 한나라의 평화도 이렇듯 어려운 일인데 한사람이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을 이루었다 하여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원문을 훼손하지 않고 속뜻을 제대로 본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핵심은 수신(修身)이다.

자식은 자식으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몸 가짐를 바르게 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몸 가짐를 바르게하는 것이다.

수신(修身)이 되면 자연적으로 제가(齊家) 즉 화목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식과 아내와 남편이 몸가짐을 바르게(修身)하면, 제가(齊家) 화목한 가정이 안 될래야 안 될수가 없는 것이다. 나라의 각 가정마다 수신(修身)으로 제가(齊家)를 이루게 되면 나아가 치국(治國)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그릇됨을 지적하며 싸워서 바꾸려 할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데 힘을 쓴다면 평천하(平天下)는 저절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평천하(平天下)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한몸을 바르게 하는데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만물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작위하지 않고 그 스스로 완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세상을 바꾸려하지 않고 백성 한사람 한사람이 제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르게 할때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나아가 세상이 편안해 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무위사상은 처음에 도가의 사상이었으나 후에 유가에서도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 고차적인 자연행위, 완성적 행위라고 인식하여 받아들이게 되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수신(修身)이 가장 앞에 있는 것은 각 의미의 크고 작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근본이 내 한 몸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윗물이 아무리 맑아도 바닥에 오염된 침전물이 깔려있다면 그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수 없듯이,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다스린다 하더라도 백성이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면 결코 평화롭다고 할수 없는 것이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고 어머니는 집안일에 아무리 힘을 쓴다고 해도 자식은 효도를 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면 그 가정은 제가(齊家), 화목함이 이루어 졌다고 할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같이 도리를 다할 때 제가(齊家)가 이루어 지는 것이며, 백성과 임금이 서로 각자의 도리를 다할때, 비로소 그 나라는 평화롭고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수 있는 나라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은 자식으로서 부모는 부모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修身), 학생으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修身), 회사원으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修身), 가정주부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修身), 정치인으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면(修身),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가 저절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며, 고로 수신(修身)을 이루는 것이 곧 평천하(平天下)를 이루는 일과 같다는 뜻이다.

중국의 고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다. 사서(四書)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말하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그리고 역경(易經; 周易)을 말한다.

한자 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어린아이가 학문에 처음 입문하면 맨 먼저 배우는 것이 천자문(千字文)이고, 다음이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이다. 여기까지를 기초과정이라고 한다면 본격적인 학문에 드는 첫 단계가 대학(大學)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대학(大學)의 첫 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사람은 원래 밝은 덕(明德)을 타고 태어나는데 살다보니 욕심이 가려 밝은 덕(德)에 때가 묻고 혼탁해지므로 본래의 밝은 덕(德)을 갈고 닦아 더욱 밝게 만드는 것이 대학(大學)의 첫번째 목표이고(在明明德), 밝은 덕(德)을 잘 밝혀서 새로운 사람이 됐으면 세상 사람들 또한 새롭게 해 줘야 하고(在親民), 저울추가 오락가락하면 무게를 잴 수가 없듯이 사람 또한 경지에 오르면 그칠 줄 알아야 한다(在止於至善).

이것을 대학(大學)의 삼강령(三鋼領)이라고 한다. 삼강령을 이루기 위해 여덟조목(八條目)이 있는데, 사물에 직접 부딪치는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를 아는 치지(致知), 뜻을 세우는데 온 정성을 바치는 성의(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 자신을 닦는 수신(修身), 집안을 엄하게 단속하는 제가(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 마침내 천하를 공평하고 편하게 한다는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게 된다.

이 팔조목(八條目) 가운데 끝의 네 조목(四條目)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따로 떼어 남자의 처신술로 인용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단어는 수신(修身)이라 하겠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마른다는 우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나오듯이 주변 상황이 어떻게 변하여도 자기 자신의 중심만 확고하다면 의심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는 교훈이다.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나’를 깨끗이 못했기 때문에 가족이 부정과 비리에 쉽게 물들고 결국은 나라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힌다는 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유학(儒學)의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인데 모두 여덟개로 되어 있어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이라고 한다.

대학(大學)은 이 팔조목을 해설한 책이다. 또 대학(大學)은 덕에 관한 책이지 정치서적이 아니어서 팔조목은 집안을 다스리고 천하를 지배하는 내용이 아니라 덕을 어떻게 닦을 것이며 천하에 어떻게 덕을 펼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 대학(大學)의 8조목(八條目)

⚪ 격물(格物) : 사물의 바탕에 대해 궁구하고 자신의 주관을 가짐.

⚪ 치지(致知) : 그리하여 그 앎을 투철히 함.

⚪ 성의(誠意) : 명료하고 투철해진 앎을 통해 그 뜻을 성실하게 함.

⚪ 정심(正心) : 성실한 뜻을 통해 마음을 바르게 함.

⚪ 수신(修身) : 마음이 바루어져야 몸이 바루어짐.

⚪ 제가(齊家) : 몸과 마음이 선명해지면 집안이 바로 잡힘.

⚪ 치국(治國) : 자신이 닦은 덕을 나라와 나누어야 함.

⚪ 평천하(平天下) : 나라를 떠나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힘. 여기서 평(平)은 평정의 뜻이 아니라 평화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예로부터 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양심의 불을 밝혀주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려 할 경우는 먼저 자신의 씨족집단(氏族集團)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자신의 씨족집단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할 경우는 먼저 자신의 인격을 닦았다.

개인적 삶에 충실한 사람들 말고 소위 정치적 소명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잘 저지르는 실수는 자기 단속, 집안 단속의 실패이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적, 역사적 소명의식에 불타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불의(不義)와 잘못을 해소하고 타파하기 위해서라는 미명아래 자기 자신을 자주 치외법권 지역에 두곤 한다.

그러나 대학(大學)은 말한다. 커다란 다스림은 사실 작은 마음의 보살핌에서 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양심의 불을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들도 같은 양심의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작은 행동, 즉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행위와 생각을 맑고 깨끗하게 닦는 데서 출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이 점층적 논리전개는 이런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런 이유로 오래도록 동양정치의 주요 덕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가(齊家)를 흔히 집안을 가지런하게 한다고 풀이한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가(家)를 요즈음의 핵가족화된 가족 정도로 이해하고 만다.

하지만 고대의 가(家)는 일종의 씨족집단을 뜻한다. 따라서 그 숫자가 몇백명은 된다. 즉 대학(大學)의 제가(齊家)란 바로 수백명 씨족집단의 욕구와 갈등을 해소해 나갈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언행의 합리성, 즉 언행일치에 있다. 말과 행동의 일치는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일 때만 가능하다. 해서 수신(修身)의 필요조건은 마음을 올바르게 다잡는 것이다.

한편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이중 격물(格物)에서 정심(正心)까지가 빠져 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이후에 해당하는 ‘몸이 다스려지면 집이 다스려지고, 집이 다스려지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지면 천하가 다스려진다(身爲而家爲, 家爲而國爲, 國爲而天下爲)’라는 말이 나오는데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말인 걸로 보아 전국시대(戰國時代) 당시에는 교양인의 상식이 아니었나 보여 진다.

대학(大學)이건 여씨춘추(呂氏春秋)건 다같이 단계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고, 초(楚)나라 임금이 첨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묻자 단계를 무시한 임금의 질문이 불쾌한 첨자가 퉁명스레 “나는 내 몸을 다스리는 방법밖에 모르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들어본 일이 없소”라고 내뱉았을 만큼(여씨춘추) 반드시 순서에 입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사물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개념이 정립이 안된 사람이 집안을 다스리려하면 불화가 일어나는 법이며, 집안이 화목하지 않는데 그를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4가지 행실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들의 순서가 어떠하냐가 관건인데 대체로 작은 범위의 분야로부터 차례대로 성취시켜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기가 쉽다.

앞의 문장은 그러한 순서에 따라서 나열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그 순서대로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4가지 행실 가운데 수신(修身)만은 일단 지켜야 한다고 보지만 그 외에의 경우, 성취시키는 것이 이상적일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모두 유가(儒家)의 목표이며 덕목일 뿐이다.

다른 항목들도 그러하지만 수신(修身)이나 제가(齊家)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가 심히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제가(齊家)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해 보면 과연 제가(齊家)의 한계는 어디일까?

단순히 결혼하는 것만으로 제가(齊家)를 성취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자녀를 낳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면서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부부간에 금실이 좋아 서로 화합해야 (옛날이라면 부모도 효성스럽게 모셔야 되고 일가친척들 간에도 화목해야 한다) 제가(齊家)라고 할 수 있겠다.

각각의 한계가 대단히 고차원적이라고 한다면 수신(修身)하는 것만으로도 일생이 모자랄지 모른다. 언제 수신(修身)을 다 끝내고 제가(齊家)를 하며 제가(齊家)를 끝내고 치국(治國)을 하며 치국(治國)을 끝내고 평천하(平天下)할 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특히 현대에 이러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고 이어 치국(治國)하고 평천하(平天下)할 만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야말로 인생은 짧은데 할 일은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순서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도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차례대로 성취시켜 나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보지만 평천하(平天下)를 위해 가정을 돌보지 못할 수도 있고 치국(治國)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다. 또 치국(治國)을 위해 제가(齊家)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순서를 유감없이 성취시키면서 평천하(平天下) 아니 치국(治國)이라도 한 사람이 있었을까? 결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大學)은 중국 고대 철학서로서 4서(四書) 중의 하나이다. 몸을 닦아 천하를 다스리는 원칙을 기술했다.

원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는데, 송(宋)나라 주자(朱子)가 원문의 순서를 고쳐 전문을 경(經)과 전(傳)으로 정리하고, 또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지선(止至善)의 세강령(三綱領)과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八條目)의 체계를 세워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지어, 그 해석이 유행했으나, 명(明) 나라 왕양명(王陽明)은 이에 대하여 원문에 복귀할 것을 주장, 대학고본방주(大學古本旁注)를 지었다.

대학(大學)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특지 조선은 과거시험의 중요한 과목으로 삼는 한편, 양반층에 널리 읽혀졌다.

중국에서 유교(儒敎)가 국교로 채택된 한대(漢代) 이래 오경(五經)이 기본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송대(宋代)에 주희(朱熹)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禮記)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四書)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였다.

49편으로 구성된 예기(禮記) 중 제42편이 대학(大學)에 해당한다. 주희(朱熹)는 대학(大學)에 장구(章句)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이는 한편, 착간(錯簡; 책장 또는 편장의 순서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았다.

그는 전체를 경(經)1장, 전(傳)10장으로 나누어 경(經)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제자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傳)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학(大學)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이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주희(朱熹)는 전(傳)을 증자(曾子)의 사상을 그의 문인이 기술한 것이다라 하였는데, 자사(子思)가 바로 증자(曾子)의 문인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도 대학(大學)은 자사(子思)의 저작이라는 견해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청대(淸代)에 오면 실증적, 고증적으로 검토, 비판하는 학풍이 일어나면서, 종래의 자사(子思) 저작설도 비판되어 진한(秦漢) 사이에 또는 전국시대 어느 사상가의 저작이라는 설, 자사(子思)가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설 등이 있으나, 유가(儒家)의 학자가 지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대학(大學)의 내용은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니며,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이 이에 해당되고, 팔조목(八條目)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대학(大學)은 예기(禮記) 가운데 한 편의 형태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7세기경의 신라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예기(禮記)를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함께 습득할 것을 맹서하는 화랑(花郞)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72년(소수림왕 2)에 세운 태학(太學)을 관장한 사람이 오경박사(五經博士)였으니, 고구려에서도 일찍부터 예기(禮記)가 교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統一新羅) 때에도 국학(國學) 3과정과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과목으로 예기(禮記)는 중요시된 경전이었다.

고려 유교의 학풍은 경전 중심이어서 예종(睿宗) 때의 국학칠재(國學七齋)와 사학 등에서도 경연의 주요과목으로 예기(禮記)가 자주 강론되었다.

조선(朝鮮) 태조(太祖)는 대학(大學)의 체재를 제왕의 정치귀감으로 편찬한 송대(宋代)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유창(劉敞)으로 하여금 진강하게 하였다. 그 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어전에서 강의하는 전통이 마련되었다.

주희(朱熹)가 독립시킨 대학(大學)은 1419년(세종 1) 성리대전(性理大全),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이 명(明)나라로부터 수입될 때 함께 들어왔다.

주희(朱熹)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대한 최초의 비판은 이언적(李彦迪)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에서 주희(朱熹)의 일경십전(一經十傳)을 일경구전(一經九傳)으로 산정하면서 편차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주자학(朱子學)이 관학(官學)으로 정립되고 성현의 편언척구(片言隻句)가 신성시되던 조선중기에는 주희(朱熹)의 체계를 긍정한 바탕에서 나름의 해석을 모색하는 데 그쳤다.

박세당(朴世堂)은 대학사변록(大學思辨錄)에서 철저한 고증에 의해 대학(大學)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희(朱熹)가 가한 해석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고답적(高踏的)이라 비판하면서, 구체적 실천의 관점을 강조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정조(正祖)와의 문답을 정리한 대학강의(大學講義), 그리고 고본대학(古本大學)에 입각해 대학(大學) 본래의 정신을 탐색한 대학공의(大學公議)를 저술해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만으로도 강령이 될 수 있으며 격물(格物), 치지(致知)는 팔조목(八條目)에 들 수 없다 하여, 격물(格物), 치지(致知)에 입각한 성리학적(性理學的) 사유의 재검토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예기(禮記)는 이미 유포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유입과 전파 경로는 알 수 없다.

1045년(정종 11) 왕이 당(唐)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이 찬한 신간예기정의(新刊禮記正義) 한 질을 어서각(御書閣)에 두고 나머지는 문신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희(朱熹)의 대학장구(大學章句)가 처음 반입된 것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명(明)나라에서 대통력(大統曆), 육경(六經), 통감(通鑑)과 함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있다.

1423년(세종 5) 대학(大學)을 포함한 사서오경(四書五經) 10부를 성균관(成均館), 오부학당(五部學堂)에 분급하였고, 1435년 각 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것을 향교(鄕校)에 비치하라고 하였다. 개인이 자비로 갖추고자 할 때는 종이를 보내면 주자소(鑄字所)에서 찍어주게 하였다.

15세기 말 함경도(咸鏡道), 평안도(平安道), 제주도(濟州道)에까지 대학(大學)이 보급되었다. 선조(宣祖) 때부터 진행된 언해사업(諺解事業)은 1576년(선조 9) 이이(李珥)가 왕명(王命)을 받아 13년만에 완성, 간행하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하사되었으며, 1605년에 재반포 되어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다음은 대학장구(大學章句) 주희(朱熹)의 내용이다.

주희(朱熹)의 대학(大學) 해석은 리(理)와 기(氣), 성(性)과 심(心), 체(體)와 용(用)의 이원론적(二元論的) 틀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대학(大學)의 첫 문단(그가 경1장으로 칭한 부분)을 대학(大學)의 전체 구조를 밝혀주는 핵심으로 파악했다.

이에 따라 전체 내용을 3강령(明明德, 新民, 止於至善)과 8조목(致知, 格物,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형식으로 이해하며, 이런 맥락속에 고본대학(古本大學)의 전체를 재배열, 교정, 보완하는 방식으로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완성했다.

명명덕(明明德)을 개인적 수양의 완결로, 신민(新民)을 사회적 실천으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을 대학(大學)의 궁극적 이상으로 본 주희(朱熹)는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의 양 강령에 8조목(八條目)을 분할, 배치하여, 8조목(八條目)을 3강령(三綱領)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실천의 밑그림으로 이해했다.

주희(朱熹)에 있어 수신(修身; 明明德)의 차원으로 부터 치인(治人; 新民)에 이르는 실천과 참여의 이론은 앞서 언급한 이원론적 틀에 근간하고 있다. 이에 따르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理(리)나 性(성)등의 본질적, 실체적인 것에 대한 주체의 각성이란 계기이다.

여기에서는 사대부(士大夫; 지식인)가 수신(修身)의 과정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하늘로부터 품수(稟受) 받은 본연(明德)의 理(리)나 性(성)을 통찰한 후 타자들을 교화(去其舊染之汚)시킨다는, 수신(修身)으로부터 치인(治人)으로의 순차성(循次性; 本-末)과 연속성,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성격이 부각된다.

물론 주희(朱熹)의 수양과 실천의 이론에 있어 근본에 놓여 있는 격물(格物)의 개념이란, 物(물)이 지시하듯,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의 탐색과 실천, (경전에 의한 학습과) 축적의 과정을 통한다는 점에서, 불교와는 날카롭게 구분되는 인간관계의 그물망 안에서의 자기실현으로서의 성인의 길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당연지리(所當然之理), 또는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 즉 이미 주어진 선험적(先驗的)인 실체와 같은 것으로 상정된 理(리)나 性(성)등의 개념은 항상적으로 주지적인 수신(修身)의 과정(窮理/格物致知)을 선결적으로 요구하는데, 이는 어떤 사회가 안정화되고 질서화 된 경우에 있어서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제시될 사회적 상태를 근거로 현실적 변화나 새로움의 출현을 기질의 차원인 것으로, 즉 교정해야 할 것으로 파악하고, (기존의 세계에 대한 질서감각일 수 있는 理를 기준으로) 환원시키는 정적주의적(靜寂主意的) 요소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판단과 행위의 근거란 이미 확정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 경문(經文)

경문(經文)은 대학(大學)의 총론으로 주희(朱熹)가 본편(本篇)을 경문(經文)이라 하고 나머지 편을 전문(全文)이라 이름 지었으며, 공자(孔子)의 말씀을 증자(曾子)가 기술했다고 한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
대학(大學)의 도(道)는 밝은 덕(德)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善)에 머무르는데 있다.

知之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머무를 곳을 안 뒤에야 정함이 있고, 정해진 뒤에야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한 뒤에야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한 뒤에야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할 바와 나중에 할 바를 알면 곧 도에 가까운 것이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나라를 다스렸고,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집안을 바로잡았고,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자기의 집안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몸을 닦았고, 자기의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마음을 바로 하였고,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 在格物.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뜻을 성실히 하였고, 자기의 뜻을 성실히 하려는 사람은 먼저 앎을 이르게 하였고, 앎에 이르게 되는 것은 사물을 구명(究明)함에 있다.

物格而后, 知至,
知至而后, 意誠,
意誠而后, 心正,
사물을 구명한 뒤에 앎에 이르고, 앎에 이른 뒤에야 뜻이 진실하게 되고, 뜻이 진실하게 된 뒤에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心正而后, 身修,
身修而后, 家齊,
家齊而后, 國治,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야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야 집안이 바로 잡히고, 집안이 바로 잡힌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國治而后, 天下平.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야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몸을 닦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았다.

其本, 亂而末治者, 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그 근본이 문란한데도 말단이 잘 다스려지는 일은 없으며, 두터이 할 곳에 엷게 하며, 엷게 할 곳에 두터히 함은 있지 아니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무식한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고 못생긴 얼굴을 탓하는 사람같이 무능하고 못난 사람은 없다.

비록 생활이 빈곤하다 하여 마음까지 빈곤한 것이 아니며, 배움이 부족하여 무식하다고 양심마저 무식한 것이 아니요 얼굴이 밉다고 생각하는 마음씨까지 미운 것이 아니다.

얼굴이 예쁘고 미모가 아름다운 사람은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방자함이 스며들지만 얼굴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며 산다.

가난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돈을 주어도 돈보다 귀한 보화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나 가난한 사람은 조그마한 도움에도 감격을 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은 음식의 맛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밥 한 숟갈이 입에 들어가는 그 자체가 바로 생명의 환희와 기쁨이 되는 것이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모금은 천하에 감로주(甘露酒)로서 모래알로 황금을 맛보는 것과 같으며 자갈로 옥을 만드는 묘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배운 사람은 유식함을 뽐내며 거만하기 쉬워 자기의 분수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나 무식한 사람은 자기의 무식을 부끄러이 여기여 언제나 낮은 자세로 임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우러러 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배움이 많다고 잘난 것이 아니요 똑똑한 것이 아니다 비록 신체에 장애가 있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얼마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인간답게 삶을 살았느냐, 그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충실하며 인간답게 삶을 살아간 사람이 진정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생활이 괴롭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괴로워지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지고 슬프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관이요 도덕관이며 삶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하고 냉철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렇게 슬프고 괴롭고 불행하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며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려면 스스로 자신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사람은 오로지 자신을 지배 할 줄 알아야 남을 지배 할 수 있으며 자신을 지배하려면 쉽게 흥분하지 말고 침착한 마음부터 가져야 한다.

즉 병이 들면 조용히 누워서 안정을 취하듯 솟아오르는 흥분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 바로 자신을 지배한 것이다. 자신의 가는 길이 험하다고 포기하면 한발자국도 옮기지를 못한다.

또한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평생을 가도 행복 할 수가 없다 행복이라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나에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는 어려운 것을 쉽게 생각해서 실패하고 현명한 사람은 쉬운 것을 어렵게 생각해서 실패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어리석은 듯이 보이면서 속내는 현명해야 성공하며 나를 지배하고 남을 지배하는 것이다.

내가 초라하고 내가 빈곤하다 생각하기 전에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한번쯤 생각하여, 나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 생활인지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모두가 만족한 행복이라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불행은 누구나 있는 것이며, 오히려 가진 자와 풍요로운 자가 불행은 더욱 많다는 것을 생각하고, 세상에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위안을 가져야 한다.

어느 날 토끼들이 모여 세상을 비관하는데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나도 약한 존재다. 그러기에 모든 동물들이 우리보다 강자이기에 날마다 우리를 공격하니 그들의 손에 죽기 전에 차라리 우리 모두 한꺼번에 물에 빠져 죽자고 의결을 본다.

그래서 모두 강가에 죽으러 가는데 마침 강가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던 개구리들이 혼비백산하여 강물에 뛰어들어 몸을 숨기니, 풀밭에 있던 벌레들이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강물에 물고기들마저 덩달아 비상이 걸려 쏜살같이 도망친다.

이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토끼 한 마리가 풀벌레와 물고기는 물론이고 개구리를 가리키며 외친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약한 동물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많은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욱 무서움을 타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같은 강자가 세상을 버린다면 어디 살아남을 짐승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모두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 있다.

그렇다 토끼들이 자기보다 못한 풀벌레들을 생각 못하고 자살하려 했던 것은 자신들이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 내듯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고통과 불행은 나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을 평화롭게 가지고 어려움이나 고통같은 것들을 즐겁게 맞아드려야 하며 즐겁게 맞아드리려는 마음들이 바로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을 현명하게 만들며 현명해 진다는 것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기에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어도 평화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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