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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운명]선시선종(善始善終)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19.04.16|조회수253 목록 댓글 0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잘한다

善 : 착할 선(口/9)
始 : 처음 시(女/5)
善 : 착할 선(口/9)
終 : 끝날 종(糹/5)

(유의어)
관철시종(貫徹始終)
시종불해(始終不懈)
시종여일(始終如一)
시종일관(始終一貫)
신종여시(愼終如始)
초지일관(初志一貫)


성인(聖人)은 하늘을 본뜨고 하늘은 도(道)를 본뜨며, 도(道)는 자연을 본뜬다. 장자(莊子)의 대종사편(大宗師篇)은 곧 이 도(道)를 말한 글이다. 여기서 생(生)과 사(死)에 관한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무릇 배(舟)를 골짜기에 숨기고, 산을 못(澤)에 숨기고서, 이를 고(固)라고 한다.

然以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
그러나 야반에 힘있는 자 이것을 지고서 달아난다. 그런데도 매자는 알지 못한다.

藏大小有宜, 猶有所遯.
若夫藏天下於天下, 而不得所遯.
是恒物之大情也.
대소를 숨기는 마땅한 곳이 있어도 역시 달아날 곳이 있다. 그러나 만일 천하를 천하에 숨긴다면 곧 달아난 곳을 얻지 못한다. 이는 항물의 대정이다.

特犯人之形, 而猶喜之.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其爲樂可勝計邪.
사람의 형체를 취하여 태어났어도 이것을 기뻐한다. 그러나 사람의 형체와 같은 것은 천변만화하여 처음부터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故聖人將游於物之所, 不得遯而皆存.
그러므로 성인은 장차 만물이 달아나지 못하는 곳에서 노닐면서 모두를 그대로 두려한다.

善夭善老, 善始善終.
그러나까 요절하는 것도 좋고 오래 살아도 좋으며, 생의 시작을 좋다 하고 끝남도 또한 좋다고 한다.

人猶效之, 又況萬物之所係, 而一化之所待乎.
사람들은 오히려 이것도 효(效)하려 하거든, 하물며 만물이 매이고 일화가 의거하는 것에 있어서랴.

(解說)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산을 못 속에 감추어 두고서, 이것으로 도둑맞을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밤중에 힘있는 자, 때의 변화가 이것을 지고서 달아난다. 어리석은 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크고 작은 물건들을 각각 적당한 곳에 감추어 두어도 때의 변화를 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역시 자기의 손에서 없어져 가는 것이다. 만일 천하를 그대로 고스란히 천하 속에 감추고 일체를 자연 그대로 해 둔다면, 자기의 손에서 달아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일에 통하는 큰 진리이다.

무한한 자연 속에서 오직 유일한 인간의 형체를 얻어 온 일에 대해서 조차 기쁨을 느끼는 제 보통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체라는 것은 천변만화하기 끝이 없는 것이다. 만일 다 하나의 모양에만 집착하지 않고 천변만화하는 전부를 즐긴다면 그 즐거움도 무한히 계속 되리라.

그러므로 성인은 아무것도 잃을 염려가 없는 경지, 일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지에서 놀고 모든 걸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다.

요절하는 것도 좋다 하고, 장수하는 것도 좋다 하고,인생의 시작도 좋다 하고 인생의 끝남도 좋다고 한다.


원래 선종(善終)이란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선생복종이란 임종(臨終)할 때 성사(聖事)를 받아 대죄(大罪)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므로 선종(善終)은 ‘시작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잘함’이라는 뜻도 있으며 지켜내기 참 어려운 일이다.

이 말의 처음 유래는 좀 다른 것 같다. 이탈리아 예수회 로벨리선교사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선생복종정로(善生福從正路)로 옮기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선종(善終)이라는 천주교 용어가 쓰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선종(善終)은 선시선종(善始善終)의 준말로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에 붙이는 천주교식 수사(修辭)다. 기독교에서는 신(新), 구교(舊敎)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으로 소천(召天)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예기(禮記)의 곡예하(曲禮下)에는 천자사일붕 제후일훙(天子死曰崩 諸侯曰薨) 대부일졸 사일불록(大夫曰卒 士曰不祿) 서인일사(庶人曰死)라고 했다.

풀어보면, 임금의 죽음을 붕(崩)이라 하고, 제후의 죽음을 훙(薨)이라 하며, 대부의 죽음은 졸(卒)이라 부르고, 선비의 죽음을 불록(不祿)이라 말하고, 서인(庶人)들의 죽음을 사(死)라고 했다.

옛 주(周)나라의 죽음에 대한 예법(禮法)이 오늘과 같을 수는 없으나 오늘날에도 죽음은 생시(生時)의 신분에 따라 격위(格位)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임금의 죽음은 승하(昇遐) 혹은 훙(薨)이라 했고, 중전이나 대비의 죽음은 훙(薨)이나 서거(逝去)라 했으며, 서거(逝去)라는 말은 최근에는 국가나 세계적인 인물이나 혹은 훌륭한 분의 죽음에 흔히 쓰는 말이다.

선시선종(善始善終), 즉 유종(有終)의 미(美)를 강조한 중국 고대의 시(詩)를 보자

시(詩) 대아(大雅) 탕(荡)

蕩蕩上帝, 下民之辟.
무도하신 하느님이지만, 천하 백성을 이끄시는 임금님이라네.

疾威上帝, 其命多辟.
포학한 하느님이시여, 그 명령이 치우신 바가 크시네.

天生烝民, 其命匪谌.
하늘이 무수한 백성을 낳으셨지만, 그 명령이 믿음이 가질 않네요.

靡不有初, 鲜克有终.
시작이 있지 아니한 것이 없거늘, 유종의 미를 얻기란 참으로 드물다오.


이 시(詩)는 시경(詩經)에서 유명한 역사를 경계하여 읊은 영사시(詠史詩)에 속한다.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은(殷)나라의 걸(桀)임금이 포학하고 무도한 정치를 행하여 이에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앞장서서 폐단을 제지하고 혁명의 시작을 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신흥 왕조를 일으켰지만, 주(紂)임금에 이르러 타락과 말세의 정치를 행하여 그 끝이 좋지 못하였다.

주(周)나라 무왕(武王)과 문왕(文王)이 선정을 베풀었으나 결국 말대(末代)의 여왕(厲王)에 이르러 은(殷)나라와 상(商)나라의 전철(前轍)로부터 다시 경계를 삼아야 할 결과를 낳았다.

참으로 인간의 역사는 과오를 지나치게 반복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나의 과오를 후대의 사람이 따라 하지 말 것을 거듭 당부 하였지만 그러나 후대 사람은 그러한 과오를 거울로 삼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짧은 안목에 집착과 탐욕으로 물들어 자승자박(自繩自縛), 자기기인(自欺欺人)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할 것이다.

조선의 한명회(韓明澮)가 노자(老子)의 명언인 신종여시(愼終如始)란 말을 세조(世祖)에게 전한 일은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종여시(愼終如始)는 ‘끝을 신중하게 하는 것을 마치 처음 같이 한다’는 뜻으로, 일의 종말에 이르러서도 처음과 같이 마음을 늦추지 않고 애쓴다는 의미이다.

官怠於宦成, 病加於小癒.
관직에 있으면 지위가 높아질수록 게을러지고, 병(病)은 조금 낫는 듯 싶으면 더해진다.

禍生於懈怠, 孝衰於妻子.
화(禍)는 게으름에서 비롯되고, 효도하는 마음은 처자식 때문에 줄어든다.

察此四者, 愼終如始.
이 네 가지를 잘 살펴서, 마지막을 처음과 같이 하라.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현상을 보인다. 무슨 일이건 처음에는 성심껏 하다가 점차 게으름과 방심으로 일을 그르치고 만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효자라는 말을 듣다가도 차자식이 생기면 그 쪽으로 정이 더 많이 쏠리므로 부모에 대해서는 등한해 진다.

게으르지만 않으면 높아지는 지위를 지킬 수 있고 질병은 보다 일찍 고칠 수 있으며 모든 화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리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효의 근본인 부모의 마음을 편안히 해 드릴수가 있다. 게으르지만 않다면 누구라도 마지막을 처음과 같이 할 수가 있다.

愼終如始, 則無敗事.
종말에 가서 조심하기를 처음 시작할 때 같이 한다면 실패하는 일은 없다. 즉 일 마무리를 할 때 그 일을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이 조심성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사례)
모든 일은 시작이 있다. 그러나 끝이 좋아야 한다. 시작과 끝이 모두 좋기를 바라는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진말(秦末) 한초(漢初)의 인물인 진평(陳平)은 임기응변에 뛰어났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궐기했을 때, 그가 위왕(魏王) 구(咎)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후에 항우(項羽)를 따라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유방(劉邦)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유방에게 이간책을 써서 항우와 범증(范增)이 멀어지게 하고, 대장(大將) 한신(韓信)을 작위(爵位)로 구슬리라고 건의하였다. 여후(呂后)가 죽자 계책을 써서 조정안의 여씨(呂氏) 세력을 소멸시키고 유가(劉家)의 세력을 회복시켰다.

진평은 책략을 절절히 사용하여 한혜제(漢惠帝), 여후(呂后), 한무제(漢武帝) 시대에 계속 승상(丞相)을 역임하면서 영예롭게 일생을 마쳤다.

이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잘 마무리 하였다(善始善終)"라고 그를 평가하였다.

물론 진평(陳平) 개인의 삶을 이야기 하자면 어쩌면 구차한 내용일 수도 있다. 허나 진평이 모진 세파를 견디고 자신의 삶을 의미있는 삶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선시선종(善始善終)

연초 훌륭한 목표를 세우시고 연말에 그 목표를 무리 없이 마무리 하시면 아마 그 일 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선시선종(善始善終)이라 한다.

이 말은 장자(莊子) 第6 대종사편(大宗師編)에 나오는 말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결 같이 잘 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힘을 다 한다’는 뜻의 시종불해(始終不懈),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는 시종여일(始終如一), 시종일관(始終一貫) 등의 말이 있다.

장자의 대종사편에 나오는 말이다. ‘성인은 하늘을 본뜨고, 하늘은 도를 본뜨며, 도는 자연을 본뜬다.’

사람들은 어쩌다가 사람의 모양을 얻게 된 것을 몹시 기뻐한다. 그러나 사람의 모양은 수 없이 변해서 끝이 없는 것이니, 그때 그때의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特犯人之形, 而猶喜之.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其爲樂可勝計邪.

그러므로 성인은 아무것도 빠져나갈수 없는 곳에서 노닐며 모든 것을 그대로 둔다.
故聖人將遊於物之所, 不得遯而皆存.

그는 일찍 죽는 것도 오래 사는 것도 좋다고 하고,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좋다고 한다.
善夭善老, 善始善終.

사람들은 이런 성인을 존경하는데, 더구나 만물이 다 그에게 매이고 큰 조화가 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어찌 본받으려 하지 않겠는가.
人猶效之, 又況萬物之所係, 而一化之所待乎.

우리들이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일을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시작한 일도 중도에 수많은 걸림돌을 만나 목적한 결실을 보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많은 문제를 안고 시작한 일들이 대부분 결실을 맺기는커녕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다. 이러한 관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우리의 삶 자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모습이 이런 비관론으로 뒤덮인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 중에 성공률이 열중에서 한둘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 삶의 대부분이 늘 이러한 십중팔구 실패의 반복이다. 그래서 성공하는 한둘의 가치보다 실패하는 팔구가 있어 살아갈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에겐 당장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당장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절망한다. 그것은 지금 당장 이루어 낼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장 할 수 없는 일 중 대부분의 일들이 시일을 두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 나간다면 거의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할 수 없다는 절망은 바로 우리 마음의 성급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당장 하려하는 성급함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믿는 부정적 사고 때문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목표와 계획조차 세워보지 못한다.

그 소극적 태도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들 때문에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현재의 안일함 속에서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일이 즐거우면 세상은 낙원이요, 일이 괴로우면 세상은 지옥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은 축복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힘이 있으며 게으른 자에게는 힘이 없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니까.

사람이 무슨 일을 시작하여 한 가지도 그르침이 없을 때에는 그 일을 잘 해보려는 정성이 계속된다. 그러나 중간에 한두 번 실수를 하고 보면 그만 본래 마음을 다 풀어버리고 되는대로 하는 수가 허다하다.

철저한 생각과 큰 경륜(經綸)을 가진 사람은 무슨 일을 하다가 어떠한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교훈삼아 미래를 더욱 개척할지언정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지난 해는 어차피 흘러간 과거이다. 밝아오는 새 해에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을 찾아 계획을 세우자. 그렇게 ‘선시(善始)’를 하는 것이다. 그럼 내년 세모(歲暮)에는 모두 ‘선종(善終)’을 거둘 수 있다. 선시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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