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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 한무제 무릉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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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무제 무릉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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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 ① 조선일보 2013.11.09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이부인의 사랑무릉은 공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0㎞, 서안 시내서 서북쪽으로 40㎞ 떨어진 흥평시(興平市) 무릉촌(茂陵村)에 있다. 이천 여년의 세파에도 불구하고 평지 위의 무릉은 아직도 산처럼 우뚝하다. 능을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은 무제를 호위하는 철갑군 같다. 오랜 시간 무너지고 주저앉았을 터인데 지금도 이토록 웅장하다면 당시에는 어느 정도였을까. 무제 시대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각종 조세를 강화하여 경제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다. 무제는 이를 바탕으로 이제까지 수세에 몰렸던 흉노공략을 시작한다.
천하를 호령했던 무제도 세파의 찌듦이 역력한가. 무릉의 묘비석에는 온통 낙서투성이뿐이다. 흉노를 몰아내고 중국 최고의 영토를 확장한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당도 기념관도 없다. 오직 능만이 벌판에 덩그러니 산처럼 솟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앞뒤 좌우로는 농작물을 심은 밭과 과수원이 좁은 입구를 감싸고 있다. 무릉 주위에는 배장묘가 여럿 있다. 그중 제일 가까운 서북쪽에 무제 말년의 애첩(愛妾)인 이부인(李夫人)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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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무제 무릉 입구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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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때에는 황제와 항후의 능은 나란히 배치를 하였는데 황제릉은 서쪽, 황후릉은 동쪽에 위치했다. 그런데 무릉은 동쪽에 황후의 릉이 없다. 무제에게 진황후와 위황후 두 명의 황후가 있었다. 하지만 진황후는 폐위되었고, 위황후는 무고(誣告)에 휩싸여 자살하고 말았다. 이런 까닭에 황후의 능이 없고 대신 무제가 말년에 의지했던 이부인의 묘가 있다. 그런데 황후의 서열에 오르지 못해 동쪽에 위치하지 못하고 무릉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부인 역시 비천한 출신이다. 그녀의 오라버니인 이연년(李延年)은 가무(歌舞)가 뛰어난 배우였다. 작곡에 뛰어난 자질이 있어서 감미로운 선율로 변주곡(變奏曲)을 만들어 불렀는데, 무제는 물론 모두가 좋아했다. 어느 날 이연년은 무제 앞에서 춤추며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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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 권역 안내도. 좌측에 이부인 영릉, 우측으로 위청 묘/곽거병 묘/김일제 묘 등 주변에 배장 묘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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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에 아름다운 미인이 있어 北方有佳人
이 노래를 들은 무제는 이연년의 누이동생이 노래의 주인공임을 알고 탄복하여 그날부터 이부인을 애첩으로 삼는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는 말처럼 이부인은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황제의 사랑은 식을 줄 모르는데, 경국지색을 보내야 하는 황제의 가슴은 얼마나 미어지겠는가. 어여쁜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 찾아왔으나 이부인은 보여주지 않는다.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거듭 당부하고 어르지만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황제는 속상해하며 떠나고, 자매들은 이부인을 탓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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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사진을 보면 관리가 안된 모습이었는데 현재(2014.09)는 주변 정비를 마치고 관리를 잘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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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알고 계신 얼굴은 예전의 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면 황제는 놀라서 우리 식구들을 절대로 보살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부인의 이 판단은 정확했다. 그녀가 죽자 무제는 이연년을 악부의 장관인 협률도위(協律都尉)에 임명한다. 그리고 또 한명의 오빠인 이광리(李廣利)는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는다. 이부인에 대한 무제의 애틋한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나라의 방사 소옹(少翁)을 시켜 이부인의 혼령을 불러오게 하고, 그 애절함에 겨워 노래까지 불렀다.
부인이오, 아니오? 是邪非邪
뛰어난 문인이었던 황제였기에 이부인의 죽음은 그를 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한서』「이부인전」을 보면 총희(寵姬)에 대한 무제의 애타는 마음이 한 편의 부(賦)에 절절하게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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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 비석까지 한참 걸어 들어 갑니다. 비석이 앞뒤로 2기가 있는데 작은 비각 안에 박혀있는 모습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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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토록 밝은 세상 두고 去彼昭昭
사랑은 권력보다 강하다. 권력은 처음 잡을 때는 무한한 힘을 가지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진다. 사랑은 다르다. 처음엔 밋밋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틋한 그리움이 수시로 요동쳐 보고픈 마음은 한시도 식을 줄 모른다. 권력은 사랑을 버릴 수 있지만 사랑은 권력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지만, 가장 두려운 것도 사랑이다. 천하의 제왕 무제도 평생 많은 여인을 거느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그리웠다. 많은 여인들 속에서 무제가 원하는 사랑은 이부인이었다. 하지만 정들 무렵 이별이라면 그 사랑은 애가 끊어지는 처절함이 된다. 천하의 권력을 다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크지 않은 이부인묘가 광활한 벌판에 홀로 다소곳하다. 무제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황후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묘를 ‘영릉(英陵)’으로 불렀다. ‘꽃’처럼 어여쁘고 ‘옥’처럼 귀한 여인이 잠든 곳이라는 의미다. 무제의 애끊는 사랑이 최고의 예우를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부인묘는 그러한 예우에 개의치 않고 일편단심 동남쪽의 무릉만 바라보고 있다. 산 같은 무릉도 고적한 동풍이 싫어 서북쪽의 영릉을 향해 앉았다. 525m. 오작교 없는 벌판엔 철책이 가로 막고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손잡고 있을 수 없어 애틋한 그리움으로, 절절한 아림으로 오늘도 영원히 마주보아야만 하는 사랑. 그 사이를 오가는 바람만이 흐느낌으로 애절함으로 사랑의 언어를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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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 입구 좌우로 세워져 있는 한무제 관련 안내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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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 ② 조선일보 2013.11.13 한무제 첫부인의 애가(哀歌) "한번만 더 사랑해주세요"진황후의 질투와 실연, 흔적 없는 무덤…
한무제의 이름은 유철(劉徹)이다. 어린 시절, 고모인 관도(館陶) 장공주(長公主) 앞에서 그녀의 딸인 아교를 황후로 삼겠다고 약속한다. 장공주는 유철의 약속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서 황제이자 오라버니인 경제(景帝)에게 유철이 14명의 황자 가운데 가장 영명하다고 끊임없이 간언한다. 장공주의 부단한 노력은 경제로 하여금 유철을 새로운 황태자로 옹립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울러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졌음에 뛸 듯이 기뻤다. 황태자 유철은 16세에 황제에 오른다. 아교를 황후로 맞이하여 장공주와의 약속도 지킨다. 아교는 무제의 첫 번째 황후인 진(陣)황후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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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먼저 만나는 비석에는 '무릉 한무제 유철지묘'가 새겨져 있으며,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에서 1963년 세웠다고 새겨져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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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도 어찌 못한 황후 아교
진황후는 예뻤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질투심도 많은 여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 장공주는 선황제와 각별한 사이인데다 남편을 황제로 만든 주인공이기에 진황후는 무척 거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제는 자신의 권력으로 정치를 개혁하고 싶었다. 하지만 초기 10년은 힘겹게 보낸다. 관도 장공주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황제에 앉혀준 데다 고모이자 장모였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구세력의 정치적 보루인 진황후와 개혁으로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려는 젊은 황제. 이 둘의 관계는 일반적인 부부 사이와는 달리 미묘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물론 소년시절 황태자 유철은 아리따운 아교의 모습에 반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황금으로 만든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던 것도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진황후를 앞세운 외척들의 견제가 강해지자 무제는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황후의 성격도 나긋나긋하지 않았으니 부부 사이는 이미 허울뿐이었고 자식이 생길 리 만무하였다. 황후보다 더 초초한 사람은 장공주였다. 그녀는 황후를 위해 9,000만 냥이나 들여 온갖 용하다는 처방을 써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부부의 애정을 어찌 약이 대신할 수 있으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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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방의 비석을 지나서 무릉 앞에 위치한 비석으로 가까이 가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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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없고, 밖으로 나도는 무제…파탄조짐
황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황후라도 권력의 심장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자식을 갖지 못한 진황후는 급기야 히스테리까지 부렸다. 무제의 관심은 더욱 밖으로 향한다. 자신의 정치역량 부족과 부부관계의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수렵에 몰두한다. 신하들이 보기에는 무제가 바깥으로 나도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황제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시간이었던 것이다.어느 봄날, 무제는 장안 동쪽을 흐르는 패수(覇水)에서 불계(祓禊․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첫째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 집을 방문한다. 평양공주는 열여덟 살의 동생 무제가 적적해함을 알고 비녀(婢女)들을 알현시킨다. 무제의 마음에 든 여인은 위자부(衛子夫)라는 가희(歌姬)였다. 아비가 누군지 몰라 어미의 성을 딴 사생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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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으로 걸어 들어가는 좌우로 곽거병과 위청에 대한 안내판이 걸려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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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희(歌姬)와 화장실에서 나눈 사랑
무제는 이 여인과 ‘헌중(軒中)’에서 사랑을 나눈다. 헌중은 곧 ‘화장실’을 의미하니, 화장실에서 정사(情事)를 벌였다는 말이다. 당시 화장실은 욕조와 간이 휴식용 침대까지 갖춰져 있었다. 황제의 사랑은 받은 위자부는 그날로 궁궐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무제의 두 번째 황후인 위황후가 된다. 누이 평양공주가 동생의 마음을 든든히 지켜줄 배필을 마련해 준 것이다. 무제의 사랑을 듬뿍 받은 위황후는 1남 3녀를 낳았다. 넷째로 황자 거(據)를 낳자 무제는 기쁨에 겨워 동방삭(東方朔)에게 황태자 탄생을 기념하는 부(賦)까지 짓도록 하였다.
무제의 기쁨이 클수록 진황후의 가슴은 질투로 타올랐다. 불안해진 진황후는 무제의 이궁(離宮)인 건장궁(建章宮)의 사인(舍人)으로 있던 위자부의 남동생 위청(衛靑)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위청은 친구 공손오(公孫敖)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무제는 위청을 건장궁 소속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임명한다. 이는 무제의 특기인 인재발탁의 지혜가 번뜩인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더 이상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당당한 황제라는 사실을 외척세력들에게 간접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위청은 이후 무제의 흉노정벌에 일등공신으로 활약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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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김씨 시조라는 설이 있는 김일제의 안내판도 걸려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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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황후는 점점 더 깊은 실의에 빠진다. 어머니 관도 장공주도 마찬가지다. 초초하고 위태롭고 불안하면 일을 벌이는 법. 무제가 즉위한 지 12년째인 기원전 130년, 진황후가 무고(巫蠱)의 요술로 위자부를 저주한 것이 발각된다. 무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외척세력을 뿌리 뽑고 명실 공히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로 결심한다.
쫒겨나는 첫 부인 진황후
진황후는 처형은 면했지만 폐위되어 장문궁(長門宮)으로 쫓겨난다. 장문궁은 장안성의 동남쪽에 있는 이궁으로, 관도 장공주가 자신의 별장이었던 것을 황제에게 헌상한 것이다. 황제가 자신의 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갈망하며 바쳤을 터인데, 딸이 갇히는 감옥으로 변할 줄이야. 어머니 장공주의 마음이 한없이 아팠으리라. 무제 또한 장공주의 은의(恩義)를 잊을 수 없었기에 그나마 진황후를 살려준 것이리라. 진황후는 장문궁에서 10여 년을 칩거하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문궁에서 멀지 않은 패릉(覇陵) 낭관정(郎官亭) 동쪽에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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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 바로 앞에 위치한 비석은 청나라 건륭 황제때 세운 것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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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진황후의 기구한 운명을〈첩박명(妾薄命)〉이라는 시로 표현하였다.
한무제가 아교를 총애한 나머지 漢帝寵阿嬌 |
▲ 10여년전 무릉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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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 능역 입구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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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武帝) 능묘 발굴 탐사 일부 마무리 온바오 2008.03.18
무릉 건설에 참여했던 인부들 공동묘지 발견되기도
중국 역사상 가장 걸출했던 황제 한무제(汉武帝)의 능묘에 대한 일부 발굴 탐사가 최근 마무리 됐다. 산시성(陕西省)과 셴양시(咸阳市) 고고학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서한 황제릉(西汉帝陵)'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와 탐사 계획 가운데 50만㎡에 이르는 한무제 능묘 중 현재까지 15만㎡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서한시대 능묘 중 최대 규모로 조성된 한무제릉은 산시성 싱핑시(兴平市) 난웨이진(南位镇)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 국가 '11차 5개년 계획' 중 유적 보호 항목에 포함되면서 대대적인 발굴 탐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탐사 팀에 따르면 이번에 탐사된 15만㎡에 이르는 능묘는 한무제가 직접 조성했던 무릉(茂陵)의 기본 구도와 조성 부문, 문물의 성격과 의미 등을 밝히기 위해 진행됐다.
능묘를 둘러싼 안과 밖에는 두 개의 큰 담이 설치돼 있으며, 동남서북으로 각각 한 갈래씩 길이 뻗어 '아(亞)자형'을 이룬다. 이번 조사에서 한무제 능묘는 중국 고대 '아자형' 왕릉 중 최대 규모인 것이 밝혀졌다. 한무제 능묘 지하궁전에는 각종 순장품이 묻혀 있는 4백 개의 방과 사찰을 비롯한 크고 작은 건축물이 모여 있는 유지가 14곳이나 발견됐고, 한무제 능묘를 지키기 위해 설치된 28만㎡에 이르는 현성과 장군 곽거병(霍去病), 위청(卫青), 곽광(霍光)을 비롯해 이부인(李夫人), 평양공주(平阳公主) 등 무덤 120여 개가 발견됐다.
또한 이번 발굴에서는 한무제의 무릉 건설에 참여했던 인부들을 묻은 4만㎡에 이르는 공동묘지도 함께 발견됐는데 그 규모를 감안할 때 능묘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은 2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은 "이번 탐사는 무릉을 보호하기 위한 프로젝트는 물론 능묘 건설 등에 대한 과학적인 기초 자료 조사도 동시에 이루어져 중국 고대 능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사용될 것"이라면서 "한무제 능묘에 대한 발굴 탐사는 앞으로도 계속 될 계획"이라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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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봉우리 만한 무릉은 출입을 못하도록 사방을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습니다. 서편에 이부인묘가 있는데 당시는 몰라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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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사후의 도굴 과정 글 : 수은하(水銀河)
한무제(漢武帝)는 웅재대략(雄才大略)의 황제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는 위풍당당했지만, 사후에는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되었다. 그가 묻힌지 4년후에 벌써 장안에는 그의 묘(茂陵)에서 도굴해낸 경서(經書)를 판매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왕망의 신(新)나라가 들어선 후 일어난 농민군이 장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규모나 부장품이 가장 크고 많았던 한무제의 무릉은 적미군(赤眉軍)에 의하여 큰 구멍이 났고, 수만명이 1달동안 물건을 날랐다. 그래도, 무덤 안에 부장된 물건의 절반도 반출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적미군이 곤경에 처해지자, 군수물자조달을 위하여 다시 한무제의 능을 파헤쳤다.
그래도, 이때의 피해는 죽은 한무제에 있어서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신은 여전히 편안히 호화로운 관 속에 누워있었기 때문이다(부패여부는 사서에 기록이 없다). 이후 들어선 동한왕조는 그들의 조상인 한무제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다시 무릉을 수리하였다. 점차 한무제의 무릉은 왕년의 화려함을 되찾아갔다. 이로써 한무제의 악운이 그쳐야 했지만, 하늘은 그를 그냥두지 않았다. 동한말기에 이르러 역사상 유명한 악인 동탁(董卓)이 등장했다. 그는 다시 무릉을 파헤쳤을 뿐아니라, 대명천지에 그의 시신을 파내서 벌판에 며칠간 내버려 두었다. 그 후에 다시 관 속에 집어넣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건원2년 한무제는 자신을 위한 무릉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87년에 죽은 후에 그는 이 곳에 매장된다. 앞뒤로 50여년이 걸려, 진시황의 능과 나란히 언급될 정도인 무릉이 비로소 완공되었다. 그가 재위하던 시절은 한나라제국의 전성기였다. 기본적으로 중화민족의 생존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는 통일, 번영, 강대한 모습으로 동방에 우뚝선 제국이 되었다. 이름을 날리기 좋아하는 한무제는 자기의 위업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했고, 자신의 능묘도 역사에 우뚝 그 이름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매년 국가수입의 1/3씩을 떼어내서 무릉을 건설했고, 나중에는 아예 1/2까지 늘려버렸다. 그가 매장될 때의 무릉은 규모도 거대하고, 건축물도 웅장했으며, 묘안이 순장품들은 아주 호화롭고 풍성했다.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금전재물, 조수어별, 우마호표 살아있는 날짐승 등 무릇 190여가지 물건들을 모두 묻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한무제의 금루옥의(金鏤玉衣), 옥상(玉箱), 옥장(玉杖) 등이 모두 묘안에 묻혔다고 한다.
당시 능묘안에는 제사지내는 편전, 침전이 있고, 궁녀와 능묘를 지키는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 있었으며, 5000명이 능묘를 관리했다. 이들은 나무에 물을 주고, 청소하는 등의 일을 담당했다. 그리고 무릉의 동남쪽에 무릉현성을 두고, 많은 문무대신과 명문호족들이 이 곳으로 이주해서 살았는데, 인구가 277,000명에 달하였다. 무릉의 봉토는 복두형(覆頭形)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만 하더라도 높이가 46.5미터에 달하고, 묘총의 아랫부분의 변길이가 240미터에 달한다. 능원은 정방형이며, 변의 길이는 약 420미터에 달한다. 지금도 동, 서, 북의 삼면에는 토궐(土闕)이 남아 있다. 능묘의 주위에 배장된 묘들로서 아직도 이부인(李夫人), 위청(衛靑), 곽거병, 곽광, 김일제 등의 묘들이 남아있다. 무릉은 한나라역대 제왕능뇨중 규모가 가장 크고 건축기간이 가장 길었으며 부장품이 가장 풍부한 능묘였고, '중국의 피라미드'로 일컬어질 만했다.
놀라운 수량의 부장품으로 무릉은 도굴자들이 가장 먼저 노리는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동탁으로 하여금 한무제의 시신을 벌판에 버려두게 만든 것은 금은재보가 아니라 약방(藥方)이었다. 동한말기, 머리가 맛이 간 대장군 하진(何進)은 자기와 갈등이 있던 십상시(十常侍)를 제거할 생각으로 멀리 양주에서 서북바람을 맞고 있던 동탁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게 된다. 동탁은 원래 양주의 지방호족이었고, 그의 부하는 모두 지방의 토박이들과 강족, 호족의 추장들이었다. 동탁을 우두머리로 한 아주 흉악한 승냥이같은 도적들은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파괴자였다. 당시 인구, 문화, 재물이 가장 집중되어 있던 낙양, 장안은 모두 이들 야수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동탁은 일찌기 대장군 여포(呂布)에게 서한의 황릉들을 발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중에는 막 회복된 한무제의 무릉도 포함되었다. 다른 황제의 묘를 발굴하는 것은 당연히 재물을 위한 것이었지만, 한무제의 능을 발굴한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여포가 무릉을 발굴할 때, 동탁은 그에게 비밀임무를 하나 내린다. 그것은 바로 무릉에 남겨진 비방묘약(秘方妙藥)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원래, 동탁에게는 손녀가 있었는데, 이름이 동백(董白)이었다. 그녀는 화용월태의 미인이었고, 셩격도 좋아서 동탁이 아주 좋아했고, 장상명주로 여겼다. 10살때 동탁은 그녀를 위양군에 봉했고, 그녀를 위하여 성대한 의식도 거행해 주었다. 의식을 거행할 때, 동탁은 특별히 병사들에게 명하여 너비6미터, 높이 2미터의 단을 만들게 하였고, 동백은 귀한 헌금화청개거(軒金華靑蓋車)에 앉아서 여러 관리들이 뒤따르며, 단에 올라서 작위를 받았으니, 아주 융중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동백이 벙어리라는 것이었다. 이것때문에 동탁은 아주 고민이 많았다. 천하의 명의를 불러모아서 치료하게 하였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나중에 동탁은 부하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한무제는 일생동안 신선을 공경하여, 선약을 많이 달였다. 무릉에는 분명이 벙어리를 치료하는 영단묘약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탁은 여포에게 이 임무를 맡긴 것이다.
여포는 병사를 가득 이끌고 무릉으로 들어갔다. 대량의 보물을 운반하는 동시에, 자세하게 영단묘약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능묘를 다 뒤졌고, 한무제의 관을 뒤집어보기까지 하였지만, 영단묘약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여포는 동탁이 부여한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게 되자, 마음이 조급하고 우울해졌다. 바로 이때 한 사병이 비단종이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찾았습니다. 찾았습니다"를 외쳤다. 여포는 그 말을 듣고 기뻐했으며, 사병이 보고하기도 전에 비단종이를 빼앗아서 살펴보았다. 펼쳐보니, 그 위에는 단정한 예서로 12글자가 적혀 있었다.
천리초(千里草) 하청청(何靑靑) 천리의 풀이 어찌 푸를 것인가
여포는 무장이었으니 이 몇 글자를 알아보는 것만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안에 내포된 의미까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것이 아마도 동탁이 찾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쁜 마음으로 병사를 데리고 조정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온 후, 이 비단종이를 동탁에게 건넸다. 동탁은 한참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 뜻이 해석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신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대신들도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동탁은 대노하여,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열 두 글자의 의미조차도 알아내지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들을 길러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화를 내자 대신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동탁은 화가나서 대전을 걸어내려와서, 두 눈을 부릅뜨고 가장 앞자리에 서있는 대신들을 노려보았다. 그 대신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겨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신이 모르는 것이 아니라 감히 말씀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탁은 "말해봐라. 책임은 묻지 않겠다. 빨리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말은 대왕을 저주하는 말입니다". 동탁은 "어째서 그런가?"라고 물었다. 그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 대신은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이 천리초(千里草)를 합하면 '동(董)'이라는 글자가 되지 않습니까. 십일복(十日卜)을 합치면 탁(卓)이라는 글자가 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당신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저주하는 말입니다" 동탁은 그 말을 다 듣고는 화가나서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그 비단종이를 빼앗아 와서 찢어버리려고 하였으니, 비단종이는 질겨서 찢어지지 않았다. 화가 난 끝에 비단종이를 땅바닥에 내팽겨치고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는 여포를 욕했다: "네가 뭘 가져온 거냐. 밥통. 꺼져라..." 나중에, 화가 가라앉지 않은 동탁은 사람을 보내어서 한무제의 시신을 벌판에 며칠간 버려두게 하였다. 조정대신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채옹을 보내어 동탁을 설득시켰다. 동탁은 그제서야 화가 풀려, 시신을 제 자리로 되돌려 놓게 하였다.
이후에도 무릉은 편안하지 못하였다. 당나라말기에 다시 한 명의 파괴자를 만났다. 바로 황소(黃巢)이다. 1천여년후, 국민당의 장군 손련중(孫連仲)도 검은 마수를 무릉에 뻗쳤다. 지금은 휘황찬란했던 무릉에 금조가리 은조가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고, 예로부터 황제들은 생전에 천하를 가지고, 사후에도 무덤속에 가득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탐욕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고, 도굴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운 도굴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많은 보물을 독차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결국은 재물도 지키지 못할 뿐아니라, 시신마저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이것보다 멍청한 일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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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무릉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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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어스에서 바라 본 한무제 무릉. 하단이 무릉 입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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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좌측에 이부인 묘, 중앙에 한무제 무릉, 지도 우측에 무릉박물관/곽거병 묘/위청 묘/ 김일제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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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 유적지 중에서 지도 중앙에 한무제 무릉이 위치. 우측의 진시황릉 등 다른 유적지들과 거리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