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선[李世選]의 묘표(墓表) -박태순(朴泰淳)
공은 휘(諱)가 세선(世選)이요, 자(字)는 선보(選甫)이며 이씨(李氏)로서 선계(先系)는 전의(全義)이다. 공의 증조(曾祖)는 이종훈(李從訓)으로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를 지냈고, 조(祖)는 이진경(李眞卿)으로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선고(先考)는 이지형(李枝馨)으로 통제사(統制使)를 지냈고, 선비(先妣)는 나주 정씨(羅州丁氏)로 참봉(參奉) 정언찬(丁彦瓚)의 딸이다.
공은 숭정(崇禎)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태어나서 30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36세 때 당상관(堂上官)에 승진하였으며, 53세 때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였다. 70세 때 공의 아들이 곤수(閫帥)가 된 까닭에, 전례에 따라 가의 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71세 때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양주(楊州) 동면(東面)의 문한산(文翰山) 서쪽 기슭의 맹동(孟洞)에 장사지냈는데, 축좌 미향(丑坐未向)의 언덕으로 곧 선영(先塋)이 있는 자리이다.
공은 명문가(名門家) 자제(子弟)로서의 중망(重望)을 지니어 내외(內外)의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대부분 영예롭게 선발되었고 여섯 번이나 번곤(蕃閫)을 주관(主管)하였으며, 마지막에는 통제사(統制使)로서 방기(邦畿)를 총융(摠戎)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되어서는 경연관(經筵官)에 특진(特進)하여 총관(摠管)을 겸대(兼帶)하였고, 한성부(漢城府)의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을 지냈으며 병조 참지(兵曹參知)는 특명으로 제수받았다.
공의 아내는 장수 황씨(長水黃氏)로 봉사(奉事) 황대명(黃大鳴)의 딸인데, 매우 영덕(令德)이 있었고 공보다 2년 뒤에 태어나서 공보다 9년 앞서 졸(卒)하여 공의 묘소 왼쪽에 합장(合葬)하였다. 공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長男)인 이창조(李昌肇)도 통제사(統制使)를 지냈으니 통제사는 공의 집안에 3세(世)가 전해온 청전1)(靑氈)인 셈이다. 차남(次男)인 이광조(李光肇)는 생원(生員)이고, 딸들은 생원인 윤관(尹寬)과 정오상(鄭五常)ㆍ윤탁(尹濯)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 소생인 이하조(李夏肇)는 절충위(折衝衛)이고 그 다음은 이문조(李文肇)이다. 이창조는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의태(李義泰)ㆍ이의점(李義漸)ㆍ이의진(李義晋)ㆍ이의복(李義復)ㆍ이의풍(李義豊)이고 딸들은 변익희(邊翼禧)ㆍ서명욱(徐命勗)ㆍ신사임(申思任)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광조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의백(李義白)이고 맏딸은 김시경(金始烱)에게 시집갔으며 그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윤관의 딸은 유형기(柳亨基)에게 시집갔고, 정오상의 아들은 정규(鄭揆)이고, 윤탁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윤득재(尹得栽)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증손자가 30여 명이다.
공은 풍모(豊貌)가 우람하고 도량이 너그러워서 듬직하고 자상한 장자(長者)같은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던 간에 꼭 청렴하고 신중하고 인후(仁厚)한 태도로 뭇사람의 마음을 얻었으며, 우애(友愛)와 돈목(敦睦)은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왔다. 아우와 누이동생의 살림이 궁핍하자 마치 자신이 춥고 배고픈 것처럼 여겨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소원(疎遠)한 족속(族屬)으로서 어디 가서 얻어먹을 곳조차 없는 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공이 그들의 끼니를 해결하여 주었으므로,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집안에 남은 재물이 없었다.
공이 조정에 벼슬할 때 임금이 매우 주의 깊게 공을 중시하여 일찍이 검대(劍帶)를 하사(下賜)하였고, 병이 들었다고 알리자 의원(醫員)을 보내주어 병을 살펴보게 하고 진귀한 약제(藥劑)와 궁중의 음식들을 자주 보내주었으며,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조회(朝會)에 임하시어 탄식하기를, “아무개(이세선을 말함)는 쓸 만한 인재인데 어찌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었단 말인가?” 하고는 별도로 부조(賻助)를 보내주라고 명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제우(際遇)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공의 평생은 참으로 기록할 만한 일이 많은데, 일찍이 수영(水營)에서 허물이 전임(前任) 수신(帥臣)에게 있는데도 엉뚱하게 공을 책망하는 일이 있어서 그 죄로 편배(編配)를 당하기까지 했으나 공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시비를 가리지 않았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털끝만큼도 안 되는 이해(利害) 때문에 이리 저리 따지고 끝까지 계교(計較)하는 자가 있는데, 만약 공의 풍도를 듣는다면 마땅히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될 것이다. 이 한 가지 일만을 갖고서도 족히 공의 도량이 원대(遠大)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상론(尙論)하는 자들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다.
각주
1) 청전(靑氈) : 푸른색 담요라는 뜻으로, 점잖은 선비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소박한 물건을 말한다. 진대(晉代)의 왕헌지(王獻之)가 밤에 서재(書齋)에 누워 있었는데 도둑들이 들어와서 방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가져가려 하였다. 이에 왕헌지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이 사람들아, 푸른색 담요는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게나.”라고 하자, 도둑들이 깜짝 놀라 달아났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嘉義大夫兵曹參判李公墓表
公諱世選字選甫。李氏系全義。曾祖諱從訓都捴府都事。祖諱眞卿節度使。考諱枝馨統制使。妣羅州丁氏。參奉彦瓚之女。公以崇禎戊辰生。三十登武科。三十六陞堂上。五十三陞嘉善。七十以子閫帥。例加嘉義。七十一考終于第。葬于楊州東面文翰山西麓孟洞丑坐未向之原。先兆之次也。公以名門重望。歷踐外內。率由榮選。六主藩閫而終統制。捴戎邦畿而至御營大將。特進於經筵而兼帶捴管。左右於京尹而兵參特命也。娶長水黃氏奉事大鳴女。甚有令德。後公二歲生。先公九秊卒。合葬于公墓左。擧二男三女。男長昌肇統制使。統制公家三世靑氊也。次光肇生員。女生員尹寬,鄭五常,尹濯。側出夏肇折衝。次文肇。昌肇有子女八。男義泰,義漸,義晉,義復,義豐。女邊翼禧,徐命勖,申思任。光肇有子女四。男義白。女金始烱。餘。尹寬女柳亨基。鄭五常男揆。尹濯有子女三。男得栽。餘。內外孫曾三十餘人。公豐貌偉榦。宇量寬洪。恂恂然長者人也。所在輒以淸愼仁厚得衆心。友愛敦睦。出於天性。弟妹窮乏。猶己飢寒。䟽屬之無告仰哺者甚多。旣沒。家無餘財。公之在朝。上注意甚重。甞賜以劒帶。病告。遣毉視之。頻饋珍劑內饌。訃聞。臨朝歎曰。某可用人也。何遽至此。命別致賻物。此可見君臣之際矣。公之平生。固多可書。而甞於水營。有咎在前帥而誤責公者。罪至編配。公受而不辨。噫。世固有利害不啻若毫芒。而爭計較不已者聞公風。宜可自失矣。此一事亦足以見遠且大也。尙論者當自知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