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양]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 조득중(趙得重) 묘표 계사년(1713, 숙종39) -명재 윤증

작성자雲影(禹顯)|작성시간16.12.09|조회수73 목록 댓글 0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 조공(趙公) 묘표 계사년(1713, 숙종39)

 


금상(今上) 13년 정묘(1687)에 회천상(懷川相)이 상소하여 우리 선친을 터무니없이 비방하자 선친의 문하생 세 사람이 소장을 올려 변론하였는데, 그들은 나양좌 현도(羅良佐顯道)와 성지선 여중(成至善汝中), 그리고 한 사람은 공이다.
공의 휘는 득중(得重), 자는 사위(士威)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시조 양기(良琪)는 고려 때 대대로 북쪽 변경을 수비하여 공을 세웠고, 본조에 들어와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양렬공(襄烈公) 인벽(仁璧)과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온(溫)은 모두 훈공(勳功)이 뛰어났다. 6대를 내려와 휘 옥(玉)은 현령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시고, 증조 휘 양정(揚庭)은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위한(緯韓)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호는 현곡(玄谷)인데, 문장(文章)과 기절(氣節)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부친 휘 억(億)은 군수이고, 모친 숙인(淑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이목(李楘)의 따님이다.
공은 숭정(崇禎) 정축년(1637, 인조15) 4월 27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조부 지추공(知樞公)이 여든 살의 노인으로 살아 계시니 항상 곁에서 모시면서 잠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말과 행동을 가르쳐 주는 대로 한결같이 따르니 지추공이 기특하게 여겼다.
장성하여 책 상자를 지고 우리 선친의 문하에 와서 학문을 배우더니,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경술년(1670, 현종11)에 부친상을, 계축년(1673)에 모친상을 연이어 당했는데, 초상을 치르는 동안 슬픔을 다하여 곡읍(哭泣)하고 제수(祭需)를 올리는 예를 6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수를 장만하면 반드시 몸소 점검하니, 비복(婢僕)들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그들도 마음을 다해 정결하게 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여(扶餘)에 우거(寓居)하였다. 시골집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오로지 책을 강독(講讀)하는 일로 소일하고, 시골사람들을 신분의 귀천(貴賤)을 떠나 모두에게 공손하게 대하자 이웃 사람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임술년(1682, 숙종8)에 상국(相國) 이상진(李尙眞)이 경술(經術)에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였는데, 공이 그 속에 들었다. 계해년(1683)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현석(玄石) 박공(朴公)이 이조 참의로 있으면서 등용한 것이다. 병인년(1686)에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듬해는 앞서 말한 정묘년(1687)이다.
상소를 올리자 나공(羅公)은 소두(疏頭)로 지목되어 원찬(遠竄)되었고, 공과 성공(成公)은 모두 삭직(削職)되었다. 당시 요로(要路)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회천(懷川)에 빌붙어 있었으므로 상소를 올리면 화가 닥칠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공은 그때 나이 51세로 참하직(參下職)에만 5년 재직하고 6품에는 오르지도 못했는데 조금의 아낌도 없이 관직을 던져 버리자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결심을 했다고 칭찬하였다. 승지 오도일(吳道一), 부제학 최석정(崔錫鼎), 사간 이숙(李塾) 등이 연이어 공을 구원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자, 공은 마침내 고양(高陽)의 촌사(村舍)로 돌아왔다. 그리고 노년을 이곳에서 마칠 요량으로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경전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나이가 들었다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갑술년(1694, 숙종20)에 조정이 갱화(更化)되자 돌아와 전설서 별검(典設署別檢)에 제수되었고, 무인년(1698)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로 자리를 옮겼으며, 기묘년(1699)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겼다. 그해 6월에 가평 현감(加平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한 자세로 공직에 임하였고 정성을 다해 백성을 사랑하였다. 신사년(1701) 가을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니, 고을의 백성이 모두 수레를 잡고 유임해 주기를 원하였고, 공이 떠난 뒤에 비석을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시골집으로 돌아오자 집안이 텅 비어 끼니조차 잇지 못할 형편이었으나 본분을 잘 지켜 편안한 마음으로 지냈다. 공은 성품이 차분하고 겸손하여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고, 사는 집도 또한 당호를 내걸지 않았다. 나의 아우 자서(子恕)가 ‘수정재(守正齋)’ 석 자를 손수 써서 보내 주자, 공이 말하기를,
“친구의 후의를 저버릴 수도 없으니 장차 이 말로 나 자신을 면려하는 것도 괜찮겠다.”
하고는 웃으며 편액을 내걸었다.
정해년(1707, 숙종33)에 조정의 신하가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을 경학(經學)과 행실이 뛰어난 사람으로 가려서 차임하자고 건의함에 따라, 그해 겨울에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에 제수되었다. 마지못해 조정에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몇 달 만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신묘년(1711, 숙종37) 3월 7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75세였다. 교하(交河)의 양절공(良節公) 묘소 아래 해좌(亥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평소 부모를 섬길 때에는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지나쳐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으며, 매번 기일(忌日)이 되면 초상 때처럼 슬피 울며 그리워하였다. 백형(伯兄)이 일찍 죽고 종질(宗姪)마저 요절하여 종부(宗婦)가 아비 없는 자식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내려오자 공이 가묘(家廟)를 옮겨와 제사를 대신 지냈는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평생토록 극진히 모셨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임시방편의 조치였으나 이를 통해 죽은 이를 산 사람을 섬기듯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사랑을 아끼지 않은 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집안에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지내는 열 살 먹은 한 아이가 있었다. 공이 그 집에 조문을 갔다가 아이를 보고는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려와 양육하고 공부시켰다. 그가 성장하자 폐백을 장만하여 혼인시켜 그 집안을 잇게 하였다. 그리고 내외의 친족과는 아무리 촌수가 먼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친목을 유지하였다.
평소 《논어(論語)》 읽기를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말은 어눌하게 행동은 민첩하게 하는 것은 증자(曾子)의 공부 방법이요, 우리 스승님이 일찍이 훈계하던 말씀이다.”
하며 자제들을 가르칠 때 매번 이 말로 간곡히 타일렀으니, 이를 통해 공이 평소 마음속에 지닌 생각을 알 수 있다.
부인은 숙인(淑人) 남원 윤씨(南原尹氏)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장령(掌令)에 추증된 영유(令柔)의 따님으로, 현감을 지내고 대사헌에 추증된 형갑(衡甲)의 손녀이며,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영의정(領議政) 문절공(文節公)에 추증된 섬(暹)의 증손이다. 숙인은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생일만 공보다 늦다. 열네 살 때 공에게 시집을 왔는데 단아하고 온순하였다. 시부모를 모시면서 공경과 예의를 다하였고, 동서들 사이에 한결같이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온 집안사람이 칭찬하였다. 비복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였고, 의복과 기물은 반드시 검소한 것으로 사용하여 화려한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가난한 생활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을 조금도 가지지 않았고, 머리가 희도록 해로하고 부부의 정이 돈독하여 규문(閨門) 사이에 항상 화기(和氣)가 충만하였다. 공의 상을 당해서는 염습하는 의복과 도구들을 모두 직접 보살펴, 간소하고 검소하게 하라는 공의 유언에 따라 사치하지 않고 정결하게 치렀다.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음식을 예를 다해 직접 받들었으며, 늙었다 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해 11월 6일에 공을 따라 별세하였고 이듬해 임진년(1712, 숙종38) 2월에 공의 묘소 왼편에 부장(祔葬)되었다.
공은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요절하여 아우 만중(萬重)의 아들 흠(欽)으로 후사를 삼았고, 큰딸은 현감 성효석(成孝錫)에게 시집가고 작은딸은 생원 이도명(李道明)에게 시집갔다. 흠은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성효석의 두 아들은 성덕호(成德浩), 성덕해(成德海)이고 딸은 생원 이의형(李宜衡)에게 시집갔다. 이도명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하였다.
아, 공은 우리 형제와 약관의 나이 때부터 서로 어울려 골육처럼 정이 들었고, 또 나현도, 성여중과 우의가 돈독하였다. 현석 박공의 양모(養母)가 공의 고모이므로 형제 관계에 있으나 공은 사우(師友)로 대하였다. 현석의 말년에 공이 벼슬에 나오자 세상에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공은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지금 친구들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만 홀로 살아남았다. 공의 사자(嗣子)가 내가 공을 잘 안다 여겨 묘문(墓文)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늙고 병든 쇠약한 몸으로 이미 붓을 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 청을 사양하지를 못하고 삼가 그 본말을 적고 명(銘)을 붙이는 바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명문(銘文)을 바꾸었는데, 그 명문은 미처 탈고하지 못하였다. -


 

[주D-001]금상(今上) : 숙종(肅宗)을 가리킨다.
[주D-002]회천상(懷川相) :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주D-003]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 대본에는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으로 되어 있는데, 《태종실록》 17년 윤5월 19일 한천부원군 조온(趙溫)의 졸기(卒記)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조인벽(趙仁璧)의 부친인 조돈(趙暾:1308~1380)의 봉호가 용성군(龍城君)이다.
[주D-004]훈공(勳功) : 조선을 개국한 공로를 가리킨다. 조인벽(趙仁璧:?~1393)은 고려 말의 무인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누이 정화공주(貞和公主)와 혼인을 하였다. 동북병마사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는 공을 세웠으며, 이후 함주(咸州), 북청(北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8년(우왕14)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회군 공신(回軍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조선이 개국된 이듬해인 1393년(태조2)에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아들 조온(趙溫:1347~1417)은 외삼촌인 이성계와 부친을 따라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회군 공신에 책록되었고, 1392년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개국 공신(開國功臣) 2등과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정사 공신(定社功臣) 2등에 봉해졌고,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좌명 공신(佐命功臣) 4등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주D-005]현석(玄石) 박공(朴公) : 현석은 박세채(朴世采)의 호이다.
[주D-006]갑술년에 조정이 갱화(更化)되자 : 1694(숙종20)에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廢妃) 민씨(閔氏)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閔黯)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도리어 화를 당한 사건으로, 갑술환국(甲戌換局), 갑술옥사(甲戌獄事), 갑술갱화(甲戌更化)로 불린다.
[주D-007]자서(子恕) : 윤추(尹推:1632~1707)의 자이다.

 


翊衛司翊贊趙公墓表 癸巳 

 



上之十三年丁卯。懷川相上疏。誣毀吾先君子。先君子之門下三人。抗章辨斥。曰羅良佐顯道。曰成至善汝中。其一則公也。公諱得重。字士威。其先漢陽人。始祖良琪。高麗時。世守北邊有功。入本朝。龍城府院君襄烈公仁璧。漢川府院君良節公溫。並著勳閥。六世而至諱玉。縣令贈參判。是公高祖也。曾祖諱揚庭。贈判書。祖諱緯韓。知中樞。號玄谷。文章氣節。有名於世。考諱億。郡守。妣淑人全州李氏。大司憲贈136_247b領議政楘之女。公以崇禎丁丑四月二十七日生。自幼不喜遊戲。知樞公以大耋在堂。常侍傍。未嘗暫離。言語動止。一遵訓誨。知樞公奇愛之。及長。負笈受學於吾先君子之門。遂廢擧子業。專意爲己之學。庚戌。丁外憂。癸丑。連丁內艱。執喪致哀。哭泣之節。饋奠之禮。六年不懈。祭需必親目檢看。婢僕。感其誠。亦盡心精潔。服闋寓居扶餘地。守靜鄕廬。唯以講讀自娛。鄕人無貴賤。一以泰謹待之。隣里莫不敬服。壬戌。李相國尙眞。薦經術士。公與焉。癸亥。拜健元陵參奉。玄石朴公。佐銓所擧也。丙寅。遷廣興奉事。明年爲丁卯也。疏上。羅公以疏頭遠竄。公與成公。並削職。時當136_247c路者。皆黨於懷川。人皆知疏出則禍至。公時年五十一。在參下五年。未及陞六品。而棄之不少吝。人以爲最難。承旨吳公道一,副提學崔公錫鼎,司諫李公塾等。相繼論救而不能得。公遂歸高陽村舍。爲終老計。淨掃一室。終日端坐。沈潛經籍。老而不怠。甲戌。朝廷更化。始復拜典設別檢。戊寅。遷司圃別提。己卯。轉義禁府都事。其年六月。拜加平縣監。居官廉簡。愛民以誠。辛巳秋罷歸。一境之民。皆攀轅願留。立石以表去後思。及還鄕居。籬落蕭然。蔬糲不繼。而守其素分。處之晏如。公性恬靜謙約。不求人知。所居齋舍。亦不揭號。家弟子恕。手書守正齋三字以寄之。公謂故人厚136_247d意不可孤。且以自勉亦好。笑而揭之。丁亥。廷臣啓東宮官僚。以經學操行之人擇差。其年冬。拜翊衛司翊贊。強起謝恩。數朔。以老病呈遞而歸。辛卯三月七日。終于正寢。享年七十有五。葬于交河良節公墓下亥坐之原。公孝友篤至。平日事父母。盡其愛敬。居憂。哀毀幾滅性。每遇忌辰。號慕如初喪。伯兄早歿。宗姪又夭。宗婦將孤兒。流寓鄕莊。公移奉家廟。替行祭祀。誠敬備至。沒身不衰。雖出於不得已權宜之義。而亦可見其事死如事生。愛慤之至誠矣。同宗有十歲兒。失其怙恃。孑孑無依。公往弔其家。見而愍之。率育于家。敎以學業。及長。爲之具幣成婚。俾承某家。內外136_248a族黨雖疏遠。必加敦睦。平居好讀論語。常曰。訥言敏行。曾子之所用功者。而吾師之所嘗訓戒者也。敎誡子弟。每以此諄諄焉。於此。公之平生所存者可知矣。配淑人南原尹氏。進士贈掌令柔之女。縣監贈大司憲衡甲之孫。弘文校理贈光國功臣領議政文節公暹之曾孫也。淑人與公同年生而月日後於公。年十四。歸于公端潔溫順。事舅姑。盡其敬禮。處妯娌姊姒之間。終始無失。一門稱之。待婢僕。有恩意。衣服器用。必從儉約。不喜華鮮。安於貧實。少無厭苦之意。白首借老。內外怡然。閨門之間。和氣常滿。及遭公喪。襲斂衣具。一皆親視。淨潔無侈。以遵簡儉之遺志。136_248b朝夕饋奠。親奉盡禮。不以篤老自處。竟以其年十一月六日繼歿。明年壬辰二月。祔葬于公墓之左。生二女一男。男早夭。以弟禹重之子欽爲嗣。女長適成孝錫。縣監。次適李道明。生員。欽一男二女。皆幼。孝錫二男。德浩,德海。一女李宜衡。生員。道明一男。夭。嗚呼。公與拯兄弟。自弱冠相從。情如骨肉。又與顯道,汝中。友誼篤至。玄石朴公之養母。卽公之姑也。與公有兄弟之義。公待以師友。玄石末年一出。世多疑之。公爲明其心事。今諸友皆已先逝。而余獨後死。公之嗣子。以余爲知公。託以墓文。老病耗寒。已廢筆硯事久矣。而不容辭謹敍其本末。而係以銘。未幾易銘。銘文則未及脫稿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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