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익[趙釴]의 묘갈명(墓碣銘) -송시열(宋時烈)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을 말함)이 파산(坡山, 파주(坡州)를 말함)에서 도학(道學)을 강마(講磨)할 때 진실로 문학과 행실에 뜻이 있는 선비들은 그 문하에 올라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은 이때 문인(門人)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는데도 총명 영특하고 선량 온순하여 비록 난리로 인하여 뿔뿔이 헤어지고 죽어가는 때에도 학업을 오히려 중지하지 않았으므로 성 선생이 자주 칭찬을 하였다.
공의 아버지인 참판공(參判公) 조의도(趙毅道)가 사건에 연좌되어 풍천(豐川)에 유배되자 공이 부친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선생께서 공의 형제가 환난(患難)을 당하여 걱정하고 우려하느라고 인순(因循)ㆍ태타(怠惰)할까 염려하고서 학문에 힘써 자립(自立)하도록 면려(勉勵)하였다. 이윽고 공은 약관(弱冠)이 되자 문사(文思)가 더욱 향상되어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을 말함)에서 반드시 상등(上等)에 뽑혔으므로, 한때의 인재와 준걸들이 모두 공의 얼굴을 알고 지내려고 하였으며, 잠곡(潛谷) 상국(相國) 김육(金堉)공은 공의 집에 와서 공이 지은 글을 보더니 입이 마르도록 칭상(稱賞)을 하였다.
공이 외간상(外艱喪)과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을 때 왕모(王母, 할머니를 말함) 백 부인(白夫人)이 아직 집에 살아 계셨는데, 공은 갖은 효도를 다하여 봉양하였다. 백 부인의 명을 받들어 과거 공부를 하여 만력(萬曆)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그 당시 간흉(奸凶)이 국정(國政)을 독단(獨斷)하여 고시(考試)가 더욱 공정하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 때문에 끝내 대과(大科)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인조(仁祖)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공을 천거한 사람의 말에 따라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를 말함)에 제수되었고, 정상적으로 승진하여 직장(直長)과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 제천 현감(堤川縣監)이 되었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공의 정사(政事)를 신명(神明)하다고 칭송하였다. 그해에 흉년이 들자, 조정에서 고을의 저축(貯蓄)이 많고 적음을 고찰(考察)하여 상벌(賞罰)을 시행하였는데, 사인(使人)이 공에게 말하기를, “공은 저축해둔 것이 참으로 많으니 마땅히 사실대로 조정에 상신(上申)하겠소.”라고 하였으나,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백성들이 굶지 않으면 됩니다. 이것을 인하여 뭔가를 노려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윽고 임광(任絖)공과 김광현(金光炫)공이 어사(御史)로서 서로 잇달아 공의 치적과 행실을 조정에 천거하여 재차 은상(恩賞)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공이 마음속에 생각해둔 일이 아니었으므로 공은 더욱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감사(監司)가 왔는데 공은 내심 즐겁지 않은 바가 있어서 그날로 당장 관인(官印)을 내던지고 집에 돌아갔다. 이에 주민으로서 어린애나 노인을 막론하고 모두 깜짝 놀라 달려와서 감사에게 나아가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수령을 잃게 하십니까?”라고 호소하였으며, 이윽고 요청한 대로 되지 않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공의 선정(善政)을 추사(追思)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전리(田里)에서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내면서 더욱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졌는데, 숙씨(叔氏)가 서울에 살며 벼슬을 하고 있었으므로 간간히 도성에 들어가 그와 서로 의지하였다. 공의 종질(宗姪)이 공을 위하여 선영(先塋) 아래에 초가집을 지었는데, 겨우 무릎을 들여놓을 만큼 비좁았으나 공은 조금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편안하게 그곳에서 지냈으며, 오직 부모를 생각하며 제사를 받들었고 거친 반찬과 물을 마시는 가난한 생활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이윽고 숭정(崇禎)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 8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52세였고 묘소는 교하(交河)의 덕수곡(德水谷) 갑좌(甲坐) 언덕에 있다.
공은 일찍부터 도(道)가 있는 스승을 가까이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익힌 까닭에, 비루하고 패만(悖慢)한 짓과 게으름을 피우는 버릇은 한번도 없었다. 젊었을 때에 비창(臂蒼)을 몹시 좋아하였으나 참판공(參判公, 아버지 조의도를 말함)이 그것을 좋지 않게 여기자 단호하게 그만두고 다시는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용기를 탄복하였다. 비록 일찍 부모를 여의어 효도를 하지는 못하였으나 형제간 우애의 돈독함은 나이가 늙어서까지 쇠(衰)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소학(小學)≫으로 모범을 삼았다. 만일 혹시라도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낯빛을 바로잡고 서로 마주 앉은 채 더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로 하여금 스스로 두려워서 복종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정대(庭對)할 때에도 다른 조사(朝士)들은 어지럽게 왔다갔다 하였으나, 공은 홀로 임금을 향하여 꼿꼿하게 앉아 있으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남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성실하게 근무하고 일심(一心)으로 근신하고 결백하게 처신하면서 시종일관 태도를 변하지 않았다. 그 조용하게 지내는 방에다가 ‘자오(自娛)’라고 편액(扁額)을 걸고서 가야금ㆍ바둑ㆍ서책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느긋하게 지냈으며,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종신토록 깊이 연구하였다. 청음(淸陰) 김 선생(金先生, 김상헌(金尙憲)을 말함)이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하기를, “세상이 훌륭한 선비를 팽개치는 것을 항상 아쉽게 여겼는데, 도리어 무덤에 호인을 가둔 것이 애석하구나![每憐世路抛佳士, 還惜泉扃閉好人]”라고 하였으니, 이야말로 공을 불후(不朽)하게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아! 공은 나이와 관위(官位)가 모두 그 덕망에 부족하였으니, 장차 공의 후손에게서 발복(發福)하려는 것인가?
공의 휘(諱)는 익(釴)이고 자(字)는 계중(季中)이다. 조씨(趙氏)는 관적(貫籍)이 함안(咸安)으로, 고려 때에 원윤(元尹)을 지낸 조단석(趙丹碩)으로부터 본조(本朝)의 진사(進士) 조여(趙旅)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름난 행적(行蹟)이 있었는데, 진사(進士)는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과 더불어 지향(志向)이 같았다. 그에게 조순(趙舜)이라는 손자가 있었는데 벼슬은 참판(參判)을 지냈고 기묘 사류(己卯士類, 기묘 명현(己卯名賢)을 말함)였다. 증조(曾祖)는 조정견(趙庭堅)으로 참봉(參奉)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조감(趙堪)으로 주부(主簿)를 지냈는데, 휴암(休菴) 백 선생(白先生, 백인걸(白仁傑)을 말함)의 사위로 들어가서 휴암을 사사(師事)하였으며, 성 선생(成先生, 성혼을 말함)이 그와 더불어 지우(執友)가 되었고 그 딸을 취하여 며느리로 삼았다. 휴암은 정암(靜庵)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를 말함)의 문인(門人)이다.
참판공(參判公, 아버지 조의도를 말함)은 광주 김씨(光州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선무랑(宣務郞) 김원경(金遠慶)이 부인의 선고(先考)이다. 공은 모두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전취(前娶)는 상국(相國)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손녀이자 부사(府使) 정종명(鄭宗溟)의 딸인데, 일찍 죽었고 딸 하나를 낳아 경력(經歷) 박세기(朴世基)에게 시집갔다. 계취(繼娶)는 평양백(平壤伯) 조인규(趙仁規)의 후손으로 현감(縣監) 조호(趙浩)의 딸이다. 두 숙인(淑人)이 모두 명문가(名門家)의 여자로서 자질이 얌전하여 함께 현숙한 행실이 있었다. 조 숙인(趙淑人)은 아들 조순원(趙淳源)을 낳았는데, 지금 덕산 현감(德山縣監)으로서 선친의 모범을 제대로 따르므로 사우(士友)들이 그를 추중(推重)하고 있다. 장녀는 사인(士人) 한상로(韓相老)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직장(直長) 성중기(成重器)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딸은 군수(郡守) 김광식(金光烒)에게 시집갔다. 박세기의 아들 박태징(朴泰徵)은 좌랑(佐郞)이고, 박태정(朴泰定)은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어 부위(副尉)가 되었으며, 사위는 사인(士人) 신유만(愼有萬)과 현감(縣監) 윤서적(尹叙績)이다. 조순원의 아들은 조식(趙植)ㆍ조격(趙格)ㆍ조박(趙樸)이고 사위는 진사(進士) 김현(金睍)과 참봉(參奉) 구문수(具文洙)이다. 한상로의 아들은 한유경(韓裕慶)이고 사위는 이봉기(李鳳紀)이다. 성중기의 아들은 성항(成杭)이고 사위는 이홍(李)이다. 김광식의 사위는 이택(李澤)이다.
현감(縣監, 아들 조순원을 말함)이 좌랑(佐郞, 박태징을 말함)이 지은 가장(家狀)을 갖고서 나를 찾아와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하였는데, 내가 병이 들어 짓지 못하였다. 그 뒤에 공의 조카인 첨지(僉知) 조봉원(趙逢源)이 서찰을 나에게 보내 독촉하기를, “숙부(叔父)의 지극한 성품과 아름다운 행실을 그대가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 바이다.
백 휴암(白休菴, 백인걸을 말함)과 성 우계(成牛溪, 성혼을 말함) 두 노사(老師)는 정암(靜庵, 조광조를 말함)을 연원으로 하였는데, 공은 그 여서(餘緖)를 계승하여 마치 지남거(指南車)와 같았네. 독실한 뜻으로 실천을 하였고 문채와 행실이 있었으니, 집에 있으면서 수양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정사(政事)였네. 민락(閩洛, 정주학(程朱學)을 말함)의 서적들을 늙어서까지 받들어 지니었네. 안정(安定)의 문인(門人)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으나1), 마침내 낮은 벼슬에 침체되었으니 식자들이 탄식을 하였네. 소유한 것이 고상하였으니 누가 벼슬이 낮았다고 말하리오. 나는 그 사람됨을 공경하여 이 묘비에 명을 지었노라.
각주
1) 안정(安定)은 북송(北宋)의 경술 교수(經術敎授) 호원(胡瑗)의 존칭임. 그는 남을 가르치는 법도가 있어 과조(科條)를 세밀히 갖추고 자신이 솔선수범하며 제생(諸生)을 자제(子弟)처럼 보았으므로 제생들도 그를 부형(父兄)처럼 신애(信愛)하였음. 당시 사람들이 제생의 언행을 보고 물어보지 않아도 안정의 문인(門人)임을 알았다는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는 묻지 않아도 성 우계의 제자임을 알 수 있다는 비유임.
工曹佐郞趙公墓碣銘 幷序
牛溪成先生講道坡山。苟有志文行之士。無不登炙焉。公時在門人中年最幼。穎悟祥順。雖流離喪亂之際。學業猶不廢。成先生亟稱之。考參判公諱毅道。坐事謫豐川。公隨往。先生慮公兄弟患難憂虞。因循怠惰。勉以力學自立。弱冠。文思益進。場屋必居上列。一時才俊。皆願識面。潛谷金相公堉來見所作。嘖嘖稱賞。遭外內喪。王母白夫人尙在。孝奉備至。以命治博士業。中萬曆丙辰進士。時奸兇專國。考試尤不公。公以故卒於無成。仁廟甲子。用薦者除金吾郞。平進爲直長,主簿。移工曹佐郞。出監堤川縣。吏民稱爲神明。歲饑。朝家考察儲㣥多寡。以行賞罰。使人曰。公所儲實多。當以實申。公笑曰。民無捐瘠斯可矣。可因而有邀耶。任公絖,金公光炫。以御史相繼擧公治行。再蒙恩賞。然匪公思存。公益不安。未幾監司至。公意有所不樂。卽日投紱歸。民稚耋聞之。驚駭奔走。赴監司訴。奚爲使我失此慈母。旣不能得。則立石追思焉。公自此優游田里。益無仕宦意。以叔氏從仕在京。略入城相依。公宗姪爲結茅於先壟下。僅可容膝。而公處之夷然。惟霜露薦享。不厭蔬水。崇禎乙亥八月十七日卒。得年五十二。墓在交河德水谷甲坐之原。公早親有道。擩染耳目。鄙悖惰慢。未嘗有焉。少時酷好臂蒼。以參判公不善也。斷置不復爲。人服其勇。雖早喪二親。孝則不及。而友愛之篤。至老不衰。訓誨家人。一以小學。如或不率。則正色相對。不與之語。使自畏服。廷對之際。多士紛沓。而獨危坐拱北。不少動焉。不喜交游。爲官專務誠實。一心謹潔。終始不渝。其幽居之室。扁以自娛。琴棋冊書。玩心閒適。心經近思等書。終身溫繹。淸陰金先生以詩挽公曰。每憐世路抛佳士。還惜泉扃閉好人。斯可以不朽公矣。噫。公之年位。皆歉於德。豈將發之於後耶。公諱釴。字季中。趙氏籍咸安。自高麗元尹丹碩。至本朝進士旅。皆有名跡。進士與東峯金時習志同。有孫舜官參判。己卯士類也。曾祖諱庭堅參奉。祖諱堪主簿。入休菴白先生甥館。師事休菴。成先生與爲執友。而娶其女爲子婦。休菴,靜菴趙文正公門人也。參判公娶光州金氏。宣務郞慶其考也。公凡再娶。前媲松江鄭相國,澈之孫。府使宗溟女。早歿。生一女。適經歷朴世基。繼媲平壤伯趙仁規之後。縣監浩女。二淑人皆以名門淑質。咸有賢行。趙淑人生男曰淳源。今德山縣監。克遵先範。士友推重焉。女長適士人韓相老。次適直長成重器。季適郡守金光烒。朴世基男泰徵佐郞。泰定尙主爲副尉。女壻士人愼有萬,縣監尹敍績。淳源男植,格,樸。女壻進士金睍,參奉具文洙。韓相老男裕慶。女壻李鳳紀。成重器男杭。女壻李。金光烒女壻李澤也。縣監以佐郞之狀。來徵余銘。余病未能焉。公從子僉知逢源以書督之曰。叔父之至性懿行。子不可不闡。遂爲之銘曰。
白成二老。淵源靜菴。公承餘緖。如車指南。篤志實踐。有文有行。在家而脩。是實爲政。閩洛之書。至老奉持。安定門人。不問而知。卒沈下僚。識者興咨。所有者高。孰謂之卑。我敬其人。銘此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