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립정려비(崔震立旌閭碑)
이 비는 1708년에 건립된 최진립정려비(崔震立旌閭碑)로 황감(黃㦿)이 비문을 지었고, 신익전(申翊全)이 글씨를 썼다.
최진립(崔震立, 1568~1636년)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사건(士建)이며, 호는 잠와(潛窩)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1594년 무과에 급제, 부장(部長)을 제수받았으나 신병으로 사퇴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조직, 서생포(西生浦)에 침입한 왜적을 무찌르고, 이어 도산(島山)싸움에서 권율(權慄) 등과 함께 전공을 세웠다.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呂島萬戶兼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가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를 지내고, 1615년(광해군 7년) 부사(府使) 때 능창군(綾昌君) 전(佺)의 추대사건에 연루,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면되어 가덕진절제첨사(加德鎭節制僉使)에 복직,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630년(인조 8년) 경기 수사(水使)로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1634년(인조 12년)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용인(龍仁)에 이르러 싸우다 전사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경주(慶州) 숭렬사(崇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현재 이 정려비는 유실되고 없다.
충신증병조판서최공정려비(忠臣贈兵曹判書崔公旌閭碑)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행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行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 최공(崔公) 정려비명(旌閭碑銘) 서문을 병기하다.
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지제교(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 황감(黃㦿)이 찬술하였고,
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신익전(申翊全)이 글씨를 썼으며,
자헌대부형조판서겸지의금부사예문관제학세자좌부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 김광욱(金光煜)이 전액을 썼다.
오호라. 이것은 고(故) 참판(參判) 최공(崔公)의 정려문이다. 상께서 정려문을 세울 것을 명하니 그의 고향 사대부들이 이 문을 세웠다. 그리고 이 비를 세우는 것은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도모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의 의열(義烈)은 해와 별과 같이 빛나고 그 깨끗한 기운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니 어찌 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 날을 돌아보건대 절개에 죽은 신하는 평소에 그 군주가 알아주지 않는다. 그 군주도 그 실상을 몰랐기 때문에 군자가 상해를 입은 것이니 이에 지금 공에게 군신을 본 것이니, 서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우리 성상께서 계해년에 반정을 일으켜 주관(周官)의 정치를 본받아서 사라져간 문신과 무신들의 공적을 다시 변별하여 풍속을 일으킬 수 있어서 드디어 이미 잊혀진 공을 일으키셔서 덕진첨사(德鎭僉使)를 더하셨다. 어사(御史) 이경여(李敬輿)가 포상할 것을 청하여 상께서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시기도 하였고 병인년에 경흥부사(慶興府使) 및 기순변사(朞巡邊使) 우치적(禹致績)이 순찰사(巡察使) 이명(李溟)에게 포상할 것을 아뢰니 그 실질을 자세히 조사할 것을 계하하셨다. 그 높은 절개가 가상하므로 상께서 표리(表裏) 1습(襲)을 내리셨다.
어사(御史) 이행원(李行遠) 이 돌아와서 공이 청백을 매우 상세히 아뢰었고 재상인 윤방(尹昉)과 김류(金瑬) 가 번갈아 가며 추천하니 상(上)께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경오년 여름에 상(上)께서 특별히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에 제수하였다가 채 부임하기도 전인 가을에 특별히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제수하였다. 조정의 제도에 아경(亞卿)에 무신(武臣)을 임명하는 것은 드물다고 하여 공이 사양하였다. 상이 비답을 내려 말하기를 “계해년 이후로 국중에서 모두 생각을 고쳐먹을 것을 생각하였지만 더러운 것에 깊이 물들어 있어 고치기 힘들었는데 경(卿)만이 홀로 염치있고 청렴하게 우리 백성들을 사랑하니 나는 심히 가상하다. 그에게 준 바 아경의 직임은 경에게는 실로 합당하다. 지금 특별히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제수한다.”고 하였다. 상께서는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장려하고 “청렴한 자를 얻어서 수사(水使)로 삼았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계유년에 삼도통사(三道統禦使)를 겸대케 하셨지만 공은 사양하시니 상이 비답을 내려, “나는 경이 재화를 좋아하지 않고 염치 있고 성실하였으므로 경(卿)을 서용한 것이다. 경은 이 뜻을 알고 사양치 말고 자기 직분을 다하여라.”라고 하였다. 갑술년에 다시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를 제수하고 상이 또 인견하여 위로하였다. 대개 공이 스스로 상과 맺은 것은 상이 알아준 것이니 다른 것이 아니라 상이 공을 대우함이 이와 같이 한 까닭이다.
염치있고[廉簡], 청렴하고[淸簡], 염치있고 근면하다[廉勤]고 하신 것은 비록 원래의 공이지만 상에게서 하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병자년 가을에 조정에서 병조에게 명령을 내려 공을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옮기게 하였고 겨울에는 북쪽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상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을 때, 공과 순찰사(巡察使) 정세규(鄭世規)가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아갔다. 세규가 공에게 이르기를 공은 나이가 지극하니 다른 장수로 바꾸겠다고 하고 공을 물러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포위되어 있는데 노신(老臣)이 감히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내가 늙어서 장군을 맡을 수 없다면 행군을 맡을 수 있습니다.”고 하고 말에서 뛰어 내려 분개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군중(軍中)에서 이것을 본 사람들은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대가 용인(龍仁)의 험난한 내에 이르렀을 때 적이 철기(鐵騎)로 대적하니 공 한사람만이 서서 활을 쏘는 대로 적군이 죽어 넘어갔다. 적군이 점점 불어나서 종자가 급하다고 고하니 공께서 “내가 죽을 곳은 이곳이다.”고 하시면서 드디어 그곳에서 죽었다. 다음해 정축(丁丑) 년에 시체를 얻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였고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있었다. 그 뜻이 상의 신하로서 그 은혜를 흠뻑 입은 자가 아니겠는가. 봉록과 자리를 탐낸 자였다면 새나 쥐처럼 숨었을 것이다. 무릇 신하는 평소에 이익을 보고 의를 보지 못하였다면 그 급하고 어려운 때를 만나 살 줄은 알아도 죽을 줄은 몰랐을 것이 뻔하다.
염치있는 자들은 구차하게 살지 않고 깨끗한 자들은 절개에 죽을 줄 아니 상께서 매우 공을 잘 알아 주셨다. 지난 번에 공이 한번 죽은 것이 아닌 것은 천리가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심이 생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둡구나. 비록 전쟁에서 이겨 적을 물리치더라도 그 전공이 이 공에게 더하여져 상이 알아주신 것을 보답하는 것이 어찌 이와같이 적단 말인가. 사건이 점점 분명해 져서 마을에서 공이 죽어 대적한 양상을 소로 아뢰니 상이 예관(禮官)의 의논에 의거하여 특별히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를 추증하고 본도로 하여금 특별한 일로 다루게 하여 관을 파견하여 치제하게 하였다.
예조판서(禮曺判書) 김시양(金時讓)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그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는 뜻이 본디 마음 속에서 정한 것이었지, 갑자기 전사한 사람과 비할 것이 아니니, 문을 세워 그의 충성을 드러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정려를 세우라는 명이 있었다. 정세규(鄭世規)는 이로 인하여 올라서 대하여 아뢰고 또 그 아들 동량(東亮)에게 관직을 명하였다. 아아 지극하구나. 상(上)의 은혜는 시종 변함없으니 여기에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성이 최(崔)요, 휘(諱)가 진립(震立)이며 자가 사건(士建)이고 본관이 경주이다. 애초에 공은 포의(布衣)였는데 당시 임진왜란을 난하여 붓을 버리고 의를 부르짖으며 적을 소탕하여 베어 죽인 것만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의 공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으므로 상급이 미치지 않았다. 갑오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정유년에 원수(元帥) 권율(權慄) 좇아 서생보(西生堡)에서 싸워 공을 세웠다. 도산(島山)의 싸움에서 양호(楊鎬)가 공의 이름을 본디 알고 있었으므로 공을 곤궁한 데에서 구원하였다. 전후 싸움에서 창상을 입고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으나 기운을 더욱 떨치니 사람들이 그의 용기에 감복하였다. 경자년에 선조는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힘껏 싸우는 병사들을 호궤함에 공도 그로 인하여 궁궐에 이르러 선조에게 사례하자, 상께서 특별히 자방(咨訪)을 내리시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셨으며 수령을 제수하실 것을 명하셨다. 이것은 우리 선조께서 공의 재목을 배양하셔서 뒤를 도모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무신년에 마량진첨사(馬梁鎭僉使)를 제수하여 그의 업적을 드러내니 도신에게 들리었다.
신해년에 경상도좌수우후(慶尙道左水虞候)에 제수되어 치적이 마량(馬梁)에서 많아서 또 조정에 보고되었다. 황응양(黃應暘)이 적을 좇아 돌아와서는 자주의 공의 청렴함을 일컬었다. 갑인년에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통정대부에 이르렀는데 북쪽 지방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얼음에 움이 돋았다는 소리를 외고 있다. 신유년에 융관(戎關)의 서쪽으로부터 연좌되어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데도 울산에 2년동안 유배되었다가 우리 성상의 윤음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 이르기를 공은 평생 스스로 수립한 것이 이와 같이 크고 걸출하며 또 만년에 큰 운수를 만나기는 하였지만 끝내 병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베푸는 일이 어찌 시운과 관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융경 무술년에 태어나서 숭정 병자년에 돌아갔으니 수명이 69세였고 언양현(彦陽縣) 동오지연(東烏池淵) 묘향의 산에 장사지냈다. 공은 일찍이 판서(判書) 이시발(李時發), 권음(權吟), 참찬(參贊) 윤의립(尹毅立)과 지기(知己)를 허여하였고, 참찬공(參贊公) 나와는 외왕고(外王考)가 되므로 곁에서 그의 유풍(遺風)을 들었다. 그 실마리를 받들어 그의 우아함을 논한다. 다만 그의 맑고 충성스러우며 큰 절개를 제일로 쳐서 서를 지어 뒤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식(式)하여 절을 하게 할 것이다. 어찌 감히 군더더기말로 명을 말할 것인가. 명은 다음과 같다.
유명조선국충신의 정려(有明朝鮮國忠臣之閭)로다. 오호라.
숭정 기원후 80년 정해년(숙종 33, 1707년) 5월 일
忠臣贈
兵曹判
書崔公
旌閭碑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
知義禁府事行嘉善大夫
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
摠管崔公旌閭碑銘幷序
通政大夫司諫院大司
諫知製 敎黃㦿撰
嘉善大夫行承政院都
承旨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藝文館
直提學尙瑞院正申翊
全 書
資憲大夫刑曹判書兼
知義禁府事藝文館提
學 世子左副賓客五
衛都摠府都摠管金光
煜 篆
嗚呼此故參判崔公之門
上命旌以棹楔而其鄕
之大夫士樹之貞珉爲不
朽圖者不侫㦿則謂公之
義烈晣如日星精爽蔽於
霄壤又奚用鐫鋤爲顧迬
昔伏節之臣居平不見知
于其主主亦不知何狀君
子傷焉迺今于公觀君臣
矣斯可無述繫我 聖上
癸亥改玉之初倣周官六
廡之政而弊文武臣之治
疇能敬辨以興于俗遂起
廢公爲加德鎭僉使旣至
御史李敬輿啓褒淸謹
上賜內廐馬丙寅拜慶興
府使及朞巡邊使禹致績
啓褒巡察使李溟啓覈其
實苦節可尙 上賜表裏
一襲已又御史李行遠還
奏公淸白甚悉相尹昉金
瑬交口蔚薦 上特陞嘉
善階庚午夏 上特除全
羅道右水使未赴秋特除
工曹參判朝制亞卿鮮以
武弁選公辭 上批曰癸
亥以後國中皆思改心易
慮而染汙旣深獨卿廉簡
愛我民生予甚嘉尙所授
亞卿之任卿實合宜今特
除京畿水使 上引見勞
奬而曰得淸簡者爲帥予
無憂矣癸酉兼三道統禦
使公辭 上批曰予不屑
好貨廉勤叙欽卿知此意
勿辭盡職甲戌再除全羅
道右水使 上又引見慰
諭盖公之自結▨ 上知亡
他而▨上所以待公如此
其曰廉簡淸簡廉勤者雖
大相元功有能得一于
上哉丙子秋朝廷爲飭兵
遷公公州營將冬北▨大
訌 上駕次南漢公與巡
察使鄭世規將帥師赴難
而世規謂公年至易以 他
將且使公後公奮曰君父
在圍之謂何而老臣敢圖
生爲吾老不任將能任行
耳迺躍馬顔行忼慨血泣
軍中見者莫不洒然感激
軍至龍仁險川敵以鐵騎
▨公獨立射射輒殪敵軍
漬從者以急告公曰吾得
死所矣遂死之明年丁丑
得屍貌如生身蝟集矢簇
意孰非 上臣子而涵濡
渥澤貪饕祿位者率鳥鼠
竄矣夫人臣平日見利而
不見義方其急難知生而
不知死固爾惟廉者不苟
生淸者能徇節卽 上之
知公深矣向非公一死者
天理不遽熄而人心不長
晦哉雖戰勝剋敵其功何
以加此公所以報 上知
者實不淺尠也事稍定舊
部曲疏陳公死敵狀 上
用禮官議特贈資憲大夫
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命本道庀▨事遣官致祭
如禮判書金時讓上箚以
爲其爲國捐生之志素定
於胸中非倉卒戰死者比
請表其門於是有旌閭之
命鄭世規因登對白之又
命官其子東亮於乎至矣
上恩終始靡替此所謂
觀君臣者非耶公姓崔諱
震立字士建鷄林人始公
爲布衣時當壬辰島夷之
難投筆糾義旅出奇勦賊
所斬殺甚衆不言功故賞
不及甲午中武科丁酉從
元帥權慄戰于西生堡有
功島山之役楊經略鎬素
知公名救公于戹先後戰
被創刮骨而氣益振人服
其勇庚子 宣廟遣御史
犒力戰將士公因詣闕謝
宣廟特加咨訪就賜上
尊弓矢命除守令寔我
宣廟我培公材以燕貽後
耶戊申拜馬梁鎭僉使大
著厥績道臣以聞辛亥拜
慶尙道左水虞候績多于
馬梁又聞于朝黃指揮應
暘從偵賊還亟稱公淸白
甲寅拜慶源府使始陟通
政北人至今誦氷蘖聲辛
酉從戎關西坐非罪謫蔚
山二年而遇我 聖明論
者謂公平生所自樹立若
是其魁傑而又晩歲遭際
大奇竟不授之兵柄而有
所施者豈關諸時運歟公
生于隆慶戊辰歸于崇禎
丙子壽六十九葬在彦陽
縣東烏池淵卯向之山公
嘗與判書李公時發權公
吟參贊尹公毅立許以知
己參贊公於不佞㦿爲外
王考側聞遺風而奉緖論
雅矣第最其淸忠大節而
爲之叙俾後之過者而式
而拜曷敢以贅語銘銘曰
有明朝鮮國忠臣之閭嗚
呼
崇禎紀元後八十年丁亥
五月 日
최진립[崔震立]의 묘갈명(墓碣銘) -조경(趙絅)
공조참판 정무 최공 묘갈명 工曹參判貞武崔公墓碣銘
숭정(崇禎) 9년인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겨울 12월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는데, 전 참판(參判) 최진립(崔震立)공은 공주 영장(公州營將)으로서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시양(金時讓)이 건의하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난(難)에 나아갈 때 최진립이 몹시 늙어 전장에 나가기는 마땅치 않다 하여 다른 장수로 대신하니, 최진립은 곧 몸단속하고 활과 칼을 차고 말을 타고 나서며 말하기를, ‘내가 늙어 전장에 적합하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늙은 자는 유독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 없단 말인가?’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습니다. 병자년의 난에 절의를 세움은 최진립이 제일입니다. 감히 표창의 은전(恩典)을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옳다.”고 하였다. 이에 예조와 의정부에서 예장(禮葬)과 사제(賜祭) 및 정문(旌門) 내리기를 모두 일급(一級)으로 할 것을 청하니, 모두 다 옳다고 회보하였다.
금년 가을 공(公)의 아들 최동량(崔東亮)이 학사(學士)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공의 행장(行狀)을 갖고 불녕(不佞)의 문에 와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아버지의 충절을 현양하고 죽음을 높이는 은전이 지극합니다. 불초(不肖)가 저의 아버지를 위하는 도리는 오직 영구히 전하게 하는 일이 곧 급합니다. 선생은 직책이 사관(史官)으로서 현재 붓을 잡고 계십니다. 충신 열사(忠臣烈士)의 사적을 찾아서 책에 쓰지 않는다면 이는 저의 아버지의 영혼을 방황하게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묘비(墓碑)의 명(銘)을 지어 주실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불녕은 예로 사양했으나 되지 않았다.
삼가 행장을 상고해 보면, 공은 경주(慶州) 사람이요 사건(士建)은 그 자(字)이다. 황고(皇考, 아버지) 증 병조 참판(兵曹參判)공이 정언(正言) 평해(平海) 황정(黃汀)의 손녀와 혼인하여 공을 경주(慶州)의 견곡촌(見谷村)에서 낳으니 곧 명나라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이었다. 겨우 3세에 황 부인(黃夫人)이 몰(歿)하였고 10세에 참판공이 또 몰하였으니, 당시 공의 약소(弱小)함을 무어라 말하겠는가? 그런데도 예에 따라 장례와 제사지내기를 성인에 견주어 더함이 있었으니, 이웃에서 감화하여 달라지는 자가 있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공의 나이 25세였는데, 곧 분발하여 의를 내세우고 부윤(府尹) 윤인함(尹仁涵)에게 말하기를, “왜적(倭賊)은 큰 돼지나 큰 뱀처럼 욕심이 많아 영남의 여러 고을을 잠식(蠶食)하였으므로 그 칼날을 당할 자가 없고 지금 우리 고을을 육박해 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촌(南村)으로 가면 곧 언양(彦陽)으로 달리는 길입니다. 길 왼쪽에 저의 선인(先人)의 집이 있는데, 듣자니 왜적이 그곳에 모여 있으며 때로 노략질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비록 미욱하고 겁은 있으나 마을 건아(健兒)들과 시험해 보겠습니다.” 하니, 윤인함이 장하게 여겨 허락하였다.
마침내 많은 화구(火具)를 갖고 곧바로 적이 있는 곳으로 가 밤을 틈타서 적을 섬멸하니 죽은 자가 수백이었다. 병갑(兵甲)과 기계(器械)를 모두 거두어 가지고 고을로 가져가니 윤인함이 탄복하였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가슴을 펴고 나와 공을 따라 적을 무찌르기를 원하니 무리가 거의 수천이었다. 동시에 응모한 자 김호(金虎)와 언양 경내에 매복하였다가 측면에서 공격하여 적을 파하였고, 또 계연(鷄淵)에서 싸우다가 김호가 탄환을 맞고 죽자 공은 더욱 병사를 단속하여 적의 뒤로 돌아나가 또 적을 격파하였다. 이때에 공이 언양의 요해처를 점령하고 적을 막았으므로 적은 위축되어 감히 방자하지 못했으니, 경주의 사방이 별 탈이 없었음은 공의 힘이었다. 수급(首級)을 바치는데 공은 전사자와 사졸들에게 사양하니 사람들은 이러므로 더욱 공을 훌륭하게 여겼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호방(虎榜, 무과)에 올라 부장(部將)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였다. 3년 뒤 정유 재란(丁酉再亂)에 적장 청정(淸正)이 울산(蔚山)의 서생포(西生浦)에 보루(堡壘)를 쌓고 병사를 풀어 사방으로 약탈하니 주위 10여 고을이 모두 그 피해를 입었으나 병권(兵權)을 장악한 장수는 감히 그 왼쪽을 엿보지 못하였다. 부윤(府尹)이 공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서생포를 공격하게 하였다. 공은 비산(萆山)으로 나아가 굴 안에 병사를 숨기고 스스로 나아가 적을 유인하였다. 적이 굴 가까이 오자 활을 가득 당겨 쏘니 활시위 소리와 함께 거꾸러졌다. 공도 배꼽 밑에 탄환을 맞았으나 기운은 양양하기 평소와 같았다.
겨울에 중국의 경략(經略) 양호(楊鎬)가 우리 원수(元帥) 권율(權慄)과 큰 병력을 몰아 도왜(島倭)를 공격하였다. 경주 부윤 박의장(朴毅長)도 종군(從軍)하여 공도 이에 속하였는데, 공이 자기와 다름을 미워해서 과오를 범했다 무함하여 참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경략 양호가 본래 공의 명성을 들었기에 구하여 벗어날 수 있었다. 공은 분히 여기며, “내가 허물없이 꺼리는 장수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적에게 죽겠다.” 하고 적진(賊陣)에 달려 들었다. 오른쪽 볼에서 왼쪽을 관통하는 탄환을 맞아 뼈를 긁고 탄환을 빼냈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조정에서 선무공(宣武功)에 책정하고 공을 원종(原從)에 기록하였으며, 훈련원 정(訓鍊院正)에 임명하니 군자(君子)가 크게 풍기(風紀)를 세웠다고 하였다. 상신(相臣) 이덕형(李德馨)이 양남(兩南)을 체찰(體察)할 때 명을 받들고 힘을 다해 싸운 장사(壯士)들에게 크게 상을 내렸는데, 살찌고 건장한 말 하나를 가려 공에게 주니 사양하여 말하기를, “이는 적이 침입하자 관(官)에 소속된 자로서 한 일이니 의리상 감히 받을 수 없다.” 하니, 이상(李相)이 깊이 탄식하며 칭찬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선묘(宣廟)가 또 어사(御史)를 보내 경주와 울산의 전사(戰士)들을 장려하였는데, 여러 장사(將士)들이 서로 인솔하여 궐하(闕下)에 나아가 공이 창의(倡義)하여 적을 토벌한 정황을 상소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불러 공이 들어가니 당시의 일을 물었다. 공은 머뭇거리며 사양하다가 오늘의 긴요한 사무를 아뢰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술을 내리고 또 활과 화살을 내렸으며 또 명하여 벼슬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또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 임명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마량 첨사(馬梁僉使)에 임명되었고, 3년 뒤 신해년(辛亥年)에 경상좌도 우후(慶尙左道虞候)에 제배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황폐한 곳을 기름지게 하고 고갈된 곳을 비옥하게 하는 일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성지(城池)와 기계(器械)가 질서 있게 정돈이 되니 감사(監司)와 병ㆍ수사가 모두 장문(狀聞)하여 표창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명나라 지휘사(指揮使) 황응양(黃應暘)이 나와 왜노(倭奴)를 염탐하려고 부산(釜山)을 지나갔는데, 이때 공은 우후(虞候)로서 부산 별장(別將)의 일을 겸임하였다. 공이 청고(淸苦)하다는 명성을 익히 듣고, 또 농사를 권하고 무술(武術)을 연마하고 식량을 쌓고 창을 날카롭게 하는 것이 다른 진(鎭)과 다름을 보았는데, 서울에 도착하자 끊임없이 칭찬하였다. 이윽고 비변사(備邊司)에서 공을 품계에 관계없이 발탁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경원 부사(慶源府使)에 임명되면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였다. 경원은 변경이다. 그 백성들은 사납고 양순함이 고르지 않았으나 역시 공의 조정(調整)에 복종하고 순치되어 안정되었다. 임기가 차 돌아오다가 경성(鏡城)을 지나게 되었다. 판관(判官) 이윤우(李潤雨)는 문사(文士)로서 공과 본래 친한 사이였으므로 공을 시험하려고 이름 있는 기생(妓生)을 꾸며 공의 술자리에 모시게 하기를 수일이었으나 공이 끝내 눈을 돌리지 않자, 이공(李公)이 감탄하기를, “오늘 비로소 강장(剛膓) 남자를 보겠다. 악 무목(岳武穆, 송(宋)나라의 악비(岳飛))이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하였다. 북병사(北兵使) 김경서(金景瑞)가 공의 복도(復陶, 우설(雨雪) 막는 외투)가 해진 것을 보고 새 담비가죽으로 만들어 주었으나 공은 받지 않았다.
경신년(庚申年, 1620년 광해군 12년)에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평양(平壤) 진영에 있으면서 공을 이끌어 별장(別將)으로 삼아 군무(軍務)를 띠고 왔다갔다하게 하였는데, 다음 해 고사리 첨사(高沙里僉使)의 명이 내리자 이공(李公)이 말하기를, “첨사는 사람마다 할 수 있으나, 이때의 별장은 공이 아니면 될 수 없다.”고 아뢰어 유임시키고, 이어서 공에게 무사(武士) 2백을 거느리고 양책(良策)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 한인(漢人)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금(金)나라 군사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흩어진 군졸이 우리에게 투입(投入)해 오는 자가 많았다. 하루는 금나라 병사가 한인을 뒤쫓아 갑자기 양책에 이르렀다. 공이 비장(裨將)과 다짐하기를, “저들이 만일 우리를 깔아 뭉개려 하면 나는 마땅히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금나라 사람은 한인만을 베고 갔다. 모장(毛將, 모문룡)의 접반사(接伴使) 이형원(李馨遠)이 조정에 아뢰었다. 이에 공은 치대(置對, 조사함)에서 사실대로 답변하니 율(律)을 감하도록 명하여 울산(蔚山)에 유배되었다. 처음에 찬획공(贊畫公, 이시발)이 공이 나치(拿致)되었다는 말을 듣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최모(崔某)의 주머니가 씻은 듯하여 옥중에서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 하고 영(營)에 비축된 베[布]를 베어 보내니 공이 사양하기를, “나의 허물이 무거운데 어찌 공가(公家)의 비축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반정(反正)이 있자 곧 풀리어 돌아와서 가덕 첨사(加德僉使)에 임명되었는데,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어사(御史)가 되어 공이 청렴하고 성근(誠勤)하다고 포장하니 임금이 특별히 내구마(內廐馬)를 내려 주었다. 다음 해에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옮겼는데, 순변사(巡邊使) 우치적(禹致績)과 순찰사(巡察使) 이명(李溟)이 앞뒤로 으뜸이라 아뢰었고, 상신 이행원(李行遠)은 어사가 되어 공의 청렴함이 특이하다고 첫째로 아뢰었는데, 들어와 아뢰게 되자 더욱 칭찬이 입으로 아뢸 뿐만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자급(資級)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 후 임금이 경연(經筵)에 임어하였을 때 대신(大臣)이 모두 있었는데, 임금이 조용히 말하기를, “북변(北邊)은 아득히 멀어 백성들이 교화(敎化)에 젖지 못한다. 자목(字牧, 수령)에 간약(簡約)하고 청렴한 관리를 임용해야 한다.” 하니,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이 번갈아 답하기를, “경흥 부사 최진립(崔震立)은 나이 거의 60세이나 손을 씻고 직무에 있으며 일찍이 절조(節操)를 바꾼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진립이 변장(邊將)이 되었을 때의 일을 나도 들었다.”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에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공조 참판에 발탁되었는데, 공은 진정(陳情)하여 굳이 사양하니 임금은 더욱 가상히 여겨 더욱 힘쓰라고 비답(批答)하였다. 공은 그러나 힘을 기울여 피하려 하니 임금은 그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을 알고 윤허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특별히 경기 수사(京畿水使)에 임명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효유하기를, “경기 수사에 경(卿)을 얻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임기가 되자 교동(喬桐)의 온 백성들이 서울로 달려와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원하였으므로 임금은 이어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를 겸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또 글을 올려 사양하니,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나는 재물 탐하는 사람을 임용하지 않고 청렴 성근한 사람을 임용한다.” 하였다. 여름에 부총관(副摠管)으로 옮겼고 곧 덕원 부사(德源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또 인견하고 위로해 보냈다. 상신 김유(金瑬)가 당시 체찰사(體察使)의 직무를 띠고서 차자(箚子)를 올려 유임시켜 별장(別將)으로 삼았고, 얼마 아니되어 공주 영장(公州營將)으로 옮겼다. 이때 청(淸)나라에서 기회를 노려보는 포악 탐욕스러운 마음이 있었으므로, 공을 요해지(要害地)에 있게 하여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였다. 과연 두어 달 만에 서쪽의 일이 급하게 되어 대가(大駕)는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하였는데, 위험은 봉천(奉天)의 경우와 같았다. 사방에서 근왕(勤王)하는 병사가 있었으나 정돈되지 않아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중간에 적에게 차단된 경우도 있었으나, 유독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는 적은 병사를 이끌고 외로이 나아갔는데, 공은 곧 의분(義憤)에 차 앞서 나아가 걸어서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 이르렀다. 남한산성과의 거리는 30리가 못되었으므로 좌ㆍ우군으로 나누어서 공은 앞에 있고 감사는 뒤에 있으면서 적을 기다렸는데, 적은 밤에 그 후군(後軍)을 이끌고 합세하여 우리를 공격하였으므로 우리의 선군(先軍)이 먼저 무너지고, 철기(鐵騎)의 기세는 비바람과 같았다. 군중(軍中)에는 사람의 모습조차 없었는데 공은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적들이 쓰러졌다. 화살이 다하자 따르는 자를 돌아보며, “너희들은 굳이 나를 따라 죽을 것은 없다. 나는 이에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겠다. 너희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적이 물러나자 여러 아들과 공을 따르던 아전이 과연 그곳에서 공의 시신을 찾았다. 몸에 수십처의 상처를 입었고 화살이 고슴도치 침처럼 박혔으나 얼굴은 산사람과 같았다. 일이 알려지자 임금은 한참 동안 애석히 여기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병조 판서를 증직(贈職)하고, 또 경상 감사에게 명하여 관(官)에서 장사를 치러주게 하여 그해 12월에 언양현(彦陽縣)의 오지연(烏池淵) 묘향(卯向)의 산에 장사지냈다.
그 뒤 15년이 지난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은 금상(今上)이 즉위한 첫 해였는데, 공의 옛 비장(裨將) 김우적(金禹績) 등이 상소하여, “절의에 죽은 신하와 청백(淸白)의 관리는 선조(先朝)에서 으레 시호(諡號)를 내리고 공(功)을 추록(追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의 옛 장수 최진립은 족히 이에 견줄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에 대한 논의를 묻자 모두 옳다 하였다.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정무(貞武)’라 의정(議定)하였고, 해부(該部)에서 또 청백리(淸白吏)에 기록하였다.
우리나라가 열성(列聖)의 삼강(三綱)에 대한 교화에 젖어 대부사(大夫士)가 변고를 맞이해서 몸을 절의와 바꾸는 자가 이어짐은 그 옛날은 논할 것도 없고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의 난에 남이흥(南以興)ㆍ김준(金浚)은 안주(安州)에서 죽었고,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의 싸움에 김응하(金應河)는 심하(深河)에서 죽었으며, 병자년(丙子年)에 김상용(金尙容)ㆍ심현(沈睍)ㆍ이시직(李時稷)의 죽음은 뚜렷한 일이라고 하겠으나 논자(論者)가 유독 최공(崔公)을 특출하다 함은 어째서인가? 대장에 제배되어 한 지역을 담당하는 자가 적에게 죽지 아니하고 법에 의해 죽게 된다면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명을 받고 보익(輔翼)한 신하이겠는가? 오직 김응하는 한 비장(裨將)으로 이역(異域)에서 명예를 수립하였으니, 공에 견주어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김응하는 한창 장년이었으나 공은 늙었고, 김응하는 명령에 속박되었으나 공은 주수(主帥)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며,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음은 나의 재량에 있었으나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조용히 진(陣) 앞에 서서 한번의 죽음을 해냈으니, 이는 의(義)에 마음이 안주(安住)하기 70년을 하루같이 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의열(義烈)을 실천한 바가 천고(千古)에 뚜렷하다 하겠다. 공의 평생을 돌아보면 기(旗)를 세우고 병부(兵符)를 나누어 갖고서 큰 고을 큰 번진(藩鎭)에 임하고 주장하기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 천금(千金)을 하찮게 보았으니 사람들이 그 누가 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그러나 공의 천성에서 나온 것은 충렬(忠烈)이지 염결(廉潔)은 특히 나머지의 일이다.
공은 서산 유씨(瑞山柳氏)와 혼인하여 5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최동윤(崔東尹)은 승사랑(承仕郞)으로 공보다 먼저 몰(歿)하였다. 최동열(崔東說)은 통덕랑(通德郞)이요, 최동량(崔東亮)은 현감이며, 최동길(崔東吉)은 승사랑인데, 공의 형 최진흥(崔震興)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막내 최동경(崔東璟)은 승의랑(承議郞)이요, 딸은 윤종향(尹宗享)에게 출가했는데 사인(士人)이다. 최국철(崔國哲)ㆍ최국형(崔國衡)ㆍ최국범(崔國範)은 최동윤의 소생이고, 사위는 권대현(權大賢)ㆍ정희현(鄭希賢)ㆍ서유후(徐裕後)이다. 최국정(崔國楨)ㆍ최국환(崔國桓)은 최동열의 소생이고, 사위는 전이박(全爾璞)ㆍ김건준(金建準)이다. 최국선(崔國璿)ㆍ최국침(崔國琛)ㆍ최국원(崔國瑗)ㆍ최국순(崔國珣)은 최동량의 소생이고 딸은 어리다. 최국진(崔國鎭)ㆍ최국전(崔國銓)ㆍ최국현(崔國鉉)은 최동길의 소생이고, 사위는 김우진(金宇振)이다. 최국영(崔國英)은 최동경의 소생이고 딸은 어리다. 증손 남녀는 약간 명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옥설(玉雪) 같은 지조로 염결(廉潔)을 지켰으며 철석(鐵石) 같은 심장이어서 여러 명기(名妓)들도 마음 사로잡지 못하였네. (임진왜란 때는) 분발하여 우뚝히 일어나 경주(慶州)를 방어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백발 펄펄 날리며 적진(敵陣)에 보내져 청(淸)나라 오랑캐 억제하였네. 처음에는 나의 뜻이었고 끝에 가서는 나의 절의였다네. 뜻과 절의 돌아가듯 죽음을 보았다오. 어디에 죽음이 없으랴만 그 충절 높이 뛰어났도다. 늠름한 그 정백(精魄) 언양의 땅에 묻혔는데, 장사지내지 못하였을 때 밤마다 긴 무지개가 우성(牛星)과 두성(斗星) 사이를 꿰뚫었네.
工曹參判貞武崔公墓碣銘 幷序
崇禎九年丙子冬十二月。翟侵我。前參判崔公震立以公州營將。與戰于龍仁之險川死之。越明年丁丑。判中樞府事金時讓建白。忠淸監司鄭世䂓之赴難也。謂震立甚老。不宜戰陣。代以他將。震立輒結束佩弓刀。騎馬而前曰。吾老不合戰陣。固也。顧老者獨不能一死報國哉。卒如其言。丙難之立節。震立爲最。敢請褒美之典。敎曰可。於是禮曹及議政府請葬祭贈旌俱一級。咸報可。今年秋。公胤東亮手金學士應祖所爲公狀。踵不佞之門曰。國家於吾父。顯忠崇終之典至矣。不肖之爲吾父道。惟不朽是急。先生職太史。方秉筆求忠臣烈士蹟如不逮書諸筴。是用籍吾父之靈跣。以請徼惠于墓樹之銘。不佞禮辭不得。則謹按狀。公慶州人。士建其字也。皇考贈兵曹參判公娶正言平海黃汀之孫女。生公於慶州見谷村。卽皇明隆慶戊辰歲也。甫三歲。黃夫人歿。十歲。參判公又歿。時公弱小之謂何。而猶持禮葬祭。譬成人有加。隣里有感而化者。及壬辰亂作。公年二十五。卽發憤倡義。謂府尹尹仁涵曰。倭爲封豕長蛇。荐食嶺南列邑。無敢嬰其鋒者。今且迫吾州矣。此去南村。卽走彥陽道也。道左有民之先人室廬在。聞倭蟻雜其中。時出摽掠。民雖駑怯。請與里中健兒嘗之。尹壯而許之。遂多持火具。直往賊處。乘夜熸賊。賊死者數百。盡得兵甲器械輸之官。尹歎服。州人之鳥獸散者。無不張膽而出。願從公討賊。衆幾數千。與同時應募者金虎合覆彥陽境。橫擊賊破之。又戰于鷄淵。虎中丸死。公益治兵自如。繞出賊後又破之。當是時。公扼彥陽之吭以遏賊。賊縮不敢恣。慶之四封妥帖者。公之力也。至於獻級。公必讓戰死者若卒伍。人益以此多公。甲午。登虎榜。授部將辭。丁酉。賊將淸正等壘于蔚之西生浦。放兵四劫。旁十餘郡咸被其毒。握兵之將。莫敢窺其左足。尹檄公斫西生浦。公進萆山而藏甲窟中。自出誘賊。賊近窟。滿繁弱射之。無不應弦而倒。公亦丸中臍下。氣揚揚如平昔。冬。中朝經略楊鎬與我元帥權慄進大兵擊島倭。慶尹朴毅長亦從。公屬焉。惡公異於己。誣以過犯將斬。經略素聞公名。救之免。公憤曰。我以無罪而死於忌帥之手。與其死於敵也。馳入賊陣。丸洞右頰入左。刮骨出丸。戊戌。朝廷榮宣武功。錄公原從。爵訓鍊正。君子以爲有大樹風。李相德馨體察兩南。承命大賚力戰壯士。擇一怒馬及公。辭曰。是賊入而屬官者。義不敢受。李相深加歎賞。庚子。宣廟又遣御史。犒奬慶,蔚之戰士。諸將士相率而詣闕下。疏言公倡義討賊狀。上持召公入。問當時事。公逡巡退讓。仍劈畫今日要務。上嘉之。賜酒又賜弓矢。又命授官。由是拜兼宣傳官。不就。又拜都摠都事。戊申。拜馬梁僉使。辛亥。拜慶尙左虞候。所至必以膏萎沃渴爲先。城池器械井井如也。布政閫帥皆交狀褒焉。壬子。天朝指揮使黃應睗來詗倭奴過釜山。時公以虞候。兼行釜之別將事。稔聞公氷檗聲。且見勸農講武峙糧敿戈與他鎭異。及到漢京。嘖嘖稱說不已。俄而備局逬公不次。甲寅。除慶源府使。陞通政。慶塞徼也。其民羯羠不均。然亦服公礪操。馴而安之。秩滿歸也。歷鏡城。判官李潤雨。文士也。與公素相善。故欲試公。飾名妓侍公酒所數日。公終不回眄。李公歎曰。今日始見剛腸男子。岳武穆何以加。北兵使金景瑞見公復陶敝。製以新貂爲贐。公不受。庚申。李贊畫時發鎭平壤。引公爲別將。上下軍務。明年。高沙里僉使之命下。李公曰。僉使人可爲。此時別將。非公莫可。啓留之。仍令公將武士二百屯良榮。時漢將毛文龍困於金人。散卒多投我者。一日。金兵尾漢人猝至良策。公與褊裨誓曰。彼如有轢蹙我。我當死。金人唯馘漢人而去。毛將接伴使李馨遠聞于朝。於是公置對。對以實。命減律配蔚山。初。贊畫公聞公被拿。謂人曰。崔某橐如洗。餓死獄中必矣。割營儲布遺之。公辭曰。我罪重。安敢辱公儲。癸亥反正。乃放還。拜加德僉使。李相敬輿爲御史。極褒公淸勤。上特賜內廏馬。明年。遷慶興府使。巡邊使禹致績,巡察使李溟後先奏最。李相行遠爲御史。則首啓公持廉卓異。及入奏。尤高贊不啻口。遂命加資。其后上御經筵。大臣皆在。上從容曰。北邊遐遠。民不沾化。字牧宜用簡廉吏。左右相交口對曰。慶興府使崔震立年幾八十。洗手居職。未嘗變節。上曰。震立之爲邊將時事。吾亦聞之爾。庚午。拜全羅水使。秋。擢拜工曹參判。公陳情上章固讓。上批逾嘉逾勉。公故循墻甚力。上知不能奪。乃許。未幾。特拜京畿水使。上引見諭之曰。圻閫得卿。吾無憂矣。及瓜。喬桐掃境內走京師願借。上仍命兼三道統禦使。公又上章辭。上又敎曰。予不肩好貨。唯廉謹敍欽。夏遷副摠管。旋除德源府使不赴。甲戌。拜金羅水使。上又引見。加慰遣焉。金相瑬方帶體察使。箚留爲別將。俄移公州營將。於是金人眈眈有虎狼心。故處公要害地備不虞也。果然居數月。西事急。大駕避乏廣之南漢。危與奉天等。四方勤王師有頓而不進者。有半途爲敵所擠者。獨忠淸監司鄭世䂓提褊師單進。公卽慷慨前行。行至龍仁險川。距南漢未一舍。分爲左右軍。公在前。監司在後以待敵。敵夜引其兵之殿者合以攻我。我先軍先潰。鐵騎勢如風雨。軍中無人色。公植立不動。射必殪賊。矢盡。顧謂從者曰。爾等不必從我死。我則不離此一寸而死。爾其識。及賊退。諸孤與從公吏果得公屍於其處。身被數十創。矢集如蝟。面如生。事聞。上爲之咤惜者良久。命有司致。贈兵曹判書。又命慶尙監司官庀葬事。以其年十二月。葬于彥陽縣烏池淵卯向之山。后十五年庚寅。當今上初載。公之舊日褊裨金禹績等上疏。以爲死節之臣。淸白之吏。在先朝例有賜諡追錄之事。臣之故將崔震立亦足爲比。上下其議。皆曰是。太常議諡曰貞武。該部又錄淸白。惟我東漸列聖三綱之敎。大夫士遇變故。則以身易節者相銜。亡論往古。丁卯之亂。南以興,金浚死於安州。戊午之役。金應河死於深河。丙子年。金尙容,沈睍,李時稷之死。可謂彰明較著。而論者獨以崔公爲翹楚。何哉。拜大將當一面者。不死於敵死於法。安得不死。況輔翼受命之臣哉。惟金應河以一褊裨。立名異域。比公幾矣。顧應河方壯。公旣愆。應河束於令。公斥於帥。進與不進在吾闊狹。而自不勝報主心。從容立陣前辦一死。此非心安乎義七十年如一日者。不能也。其所蹈烈。可謂卓乎千古者矣。迹公平生。建牙分符。雄州巨藩。是臨是尸。非一二止。視千金如涕唾。人孰不以爲得於性者然。然公之得於性者在忠烈。潔廉特餘事耳。公娶瑞山柳氏。生五男一女。東尹。承仕郞。先公歿。東說。通德郞。東亮。縣監。東吉。承仕郞。后公兄震興。東璟承議郞。女尹宗享。士人。國哲,國衡,國範。東尹出。女權大賢,鄭希賢,徐裕後。國楨,國桓。東說出。女全爾璞,金建準。國璿,國琛,國瑗,國珣。東亮出。女幼。國鎭,國銓,國鉉。東吉出。女金宇振。國英。東璟出。女幼。曾孫男女若干人。銘曰。
疇玉雪而操。脂膏辟景。疇鐵石而腸。三粲莫逞。疇起而屹屹。長京是牿。疇送而皤皤。拐子與角。始也吾志。終也吾羲。惟志惟義。以歸視死。何所無死。而節卓冠。凜凜精魄。彥陽之土。埋不得兮夜夜長虹兮牛斗之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