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규묘지명(趙仁規墓誌銘)
묘지명은 『평양조씨세보(平壤趙氏世譜)』(1929)에 수록되어 있다. 묘지명은 1308년(충렬왕 34)에 방우선(方于宣)이 작성하였다.
조인규(趙仁規, 1237~1308)의 자는 거진(去塵)이며, 평양군(平壤郡) 사람이다. 아버지는 영(瑩)이며, 어머니 이씨(李氏)는 유분(有芬)의 딸로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숙공(貞肅公)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조인규는 충렬왕·충선왕때의 재상이었다. 몽고어에 능하여 무려 30여 차례나 사신이나 국왕의 수행원으로 원나라에 갔다. 다루가치의 철수 등 주로 고려와 원 사이의 외교현안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조온려(趙溫呂)의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서(瑞), 차남은 연(璉), 3남은 연수(延壽), 4남은 승려 의선(義旋), 5남은 위(瑋)이다. 장녀는 노영수(盧潁秀)에게, 둘째는 원나라 사람 오말(吳抹)에게, 셋째는 백효주(白孝珠)에게, 넷째는 염세충(廉世忠)에게 각각 시집갔다.
선충익대보조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태위 판중서문하사 상장군 평양군(宣忠翊戴輔祚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守太尉 判中書門下事 上將軍 平壤君)이며 추증된 시호 정숙공(貞肅公) 묘지명
대저 신하가 된 사람은 네 가지 몸가짐을 가져야 하나니, 몸단속을 잘하여 엄중하게 바른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하나이고, 일에 임해서는 공(公)을 따르고 사(私)를 가볍게 보는 것이 둘이며, 사신으로 나가게 되면 잘 대처하여 나라의 명예를 높이고 넓히는 것이 셋이며, 조정에서 일하게 되면 행동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넷이다. 신하로서 그 한 가지를 가진 이도 또한 드문데, 하물며 한 몸에 네 가지 몸가짐을 구비한 사람은 대개 천 년에 한 사람뿐일 것이니, 우리 평양군(平壤君)이 바로 그 분이다.
공의 이름은 인규(仁規)이고, 자는 거진(去塵)으로, 평양군(平壤郡) 사람이다. 아버지 영(瑩)은 금오위 별장(金吾衛 別將)이었는데, 공이 높이 되었기 때문에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부상서 상장군(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吏部尙書 上將軍)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내원승(內園丞) 유분(有芬)의 딸인데 여러 차례 봉해져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이 되었다. 어머니가 태양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에 잉태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자 공을 세워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큰 뜻을 세워, 문자(文字)를 가볍게 여겨 그것을 버리고 태자부시위(太子府侍衛)가 되었다. 무오년(고종 45, 1258)에 이르러 장군 인규(仁揆) 휘하의 대정(隊正)이 되었다. 나라에서 무반[山西]의 자제 중에 영리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골라 대조(大朝, 元)의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는데, 공이 이에 참여하여 선발되었다. 계해년(원종 4, 1263)에 교위(校尉)로 승진하고, 기사년(원종 10, 1269)에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세자로서 원의 조정에 들어갈 때에 공이 수행하여 갔는데,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섭산원(攝散員)이 되었다. 임금을 수행한 4년 동안 보좌한 공로가 많았다.
갑술년(원종 15, 1274)에 임금이 원 황실의 딸을 배필로 삼고 돌아와 왕위를 이어 받으니, 그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으로 뛰어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장군 지합문사 겸 어사중승(將軍 知閤門事 兼 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무인년(충렬왕 4, 1278)에 대장군 직문하성(大將軍 直門下省)으로 옮기고, 기묘년(충렬왕 5, 1279)에 우승선(右承宣)에 임명되면서 정의대부 상장군 지병부사 태자우유덕(正議大夫 上將軍 知兵部事 太子右諭德)이 더해졌다가 곧 좌승선 지이부사(左承宣 知吏部事)로 옮겼다. 임오년(충렬왕 8, 1282)에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으로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兵部尙書)로 뛰어 올랐다. 갑신년(충렬왕 10, 1284)에 지원사(知院事)가 더해지고, 병술년(충렬왕 12, 1286)에 어사대부 태자빈객(御史大夫 太子賓客)으로 승진하였다. 정해년(충렬왕 13, 1287)에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로 뛰어 오르고, 이어 문하평장사 태자소사(門下平章事 太子少師)가 더해졌다.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더해지고,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선수 가의대부 왕부단사관(宣授 嘉義大夫 王府斷事官)이 더해지면서 삼주호부(三珠虎符)를 띠었다. 신묘년(충렬왕 17, 1291)에 판병부사(判兵部事)가, 임진년(충렬왕 18, 1292)에 문하시중 판이부사 태자태사(門下侍中 判吏部事 太子太師)가, 정유년(충렬왕 23, 1297)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태위 판중서문하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守太尉 判中書門下事)가 더해졌는데, 나머지는 모두 그전과 같았다.
무술년(충렬왕 24, 1298)에 간사한 사람이 말을 꾸며서 망녕되게 고소하니, 공은 이 때문에 원의 조정에 가게 되었다. 원의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힐문하였으나, 대의를 확고하게 지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말이 없었으므로, 중국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칠팔 년 남짓 억류되어 있다가, 황제(成宗)가 한결같은 절개를 가상하게 여겨 대덕(大德) 9년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조칙을 내려 그전과 같은 임무를 맡으면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 해 12월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판중서문하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判中書門下事)에 다시 임명되고 나머지도 전과 같이 되었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에 자의중서문하사(咨議中書門下事)로 승진하고 평양군(平壤君)으로 봉해지자, 비록 집에 있으면서도 무릇 군국(軍國)에 관한 중요한 일은 모두 나아가 결정하게 되었다.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에 부(府)를 설치하고 관원을 두게 하였으며,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을 더하였다. 공은 이에 “평생 동안 사방으로 바쁘게 다니느라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이제는 이미 군(君)으로 봉해지기에 이르고, 나이도 70이 넘었으니, 마땅히 잔치를 베풀면서 즐겁게 지내해야 하겠소” 라고 하고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 은거하며 고결하고 즐겁게 지낸 일을 사모하였다. 또 마음으로는 오로지 부처를 섬겼다. 일찍이 대장경을 펴내려 하여 특히 승려[開士]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그 해 3월에 시작하여 4월 19일에 와서야 일을 다 마쳤다. 그 날 밤에 집안의 어른과 아랫사람 네 명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옷을 갖추어 입고 찾아 와 문을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저승에서 평양군이 불경을 만드는 것을 끝내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맞아 오라고 하기에 왔습니다.” 과연 이튿날이 되자 목 위에 작은 종기가 돋아났다. 용한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하였으나 “질환이 어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도 또한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려 있는 것이니 회피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며 드디어 의약(醫藥)을 물리쳤다. 처음에 공은 꿈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존상(尊像)이 하늘에 닿도록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양과 같은 그림 한 폭을 이루고자 하여 병이 위중한데도 몸소 벽에 의지하여 점을 찍고 곧 화공을 불러 초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비록 병중에 있으면서도 쾌활하고 자재(自在)함이 이와 같았다.
이에 앞서 여러 아들이 모두 왕명을 받아 원에 들어가 있고, 오직 둘째 아들 연(璉)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25일이 되자 뒷일을 부탁하여 말하였다. “오랜 전생부터 인연이 있어 같은 형제로 태어났으니, 집안일로 서로 시기하고 미워해서는 안 된다. 무릇 나라를 잘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집안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맏아들 서(瑞) 등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형은 공손하고 동생은 순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마라.” 말을 마친 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이 되자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향로를 받들며 찬불(讚佛)하고, 옛날의 게(揭)를 외우면서 단정히 앉은 채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이다.
성 안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달려와 우러러 예를 바치면서, “공이 바르고 곧게 공사(公事)를 받든다고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참 본성을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모두 찬탄하면서 울었다. 임금도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장례일을 도와 주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에 개성(開城) 웅곡(熊谷) 북쪽 기슭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정숙공(貞肅公)이라고 추증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풍채가 잘 생기고 말이 적었으며, 단정하고 진실하여 번드레함이 없었다. 비록 무관직에 종사하였으나 사서(四書)와 전기(傳記)에도 자못 관심을 두었고, 또 글씨를 잘 썼다. 평생에 사물을 대하면 관대하고 온화하여 겸손하였으나, 일을 두고서는 꺼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였으므로 사람들 중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하위직에 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정에 출입한 것이 무릇 30여 차례였는데 거동하기만하면 나라를 바르게 하고 구한 성과가 있었다.
지난 을해년(충렬왕 1, 1275)에 중국 조정에서 보낸 두목(頭目) 흑적(黑的)이 우리 나라와 언짢은 감정을 쌓아 왔는데, 우리의 습속을 고치려고 황제에게 가서 상소하자 일이 이미 이루어져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공은 홀로 말을 달려 황제에게 친히 정상을 아뢰어 윤허를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달로화적(達魯花赤)의 종전군(種田軍)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파하여 철수하게 하였으니, 이 일이야말로 만세에 남을 공적이다. 그리고 또 임금(忠烈王)이 여덟 글자의 공신(功臣)이 되게 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에 오르게 한 것, 첨의부(僉議府)가 2품의 아문(衙門)이 된 것, 양대(兩臺, 僉議府와 密直司)의 은인(銀印)을 내려 받게 한 것, 그리고 남쪽의 섬과 북쪽의 변방지대가 우리의 강토로 다시 속하게 한 것 등은 모두 공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전후하여 세운 것을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단지 그 중에서 더욱 두드러진 것만을 든 것이다.
조청대부 사재경(朝請大夫 司宰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조온려(趙溫呂)공의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서(瑞)는 우림(羽林)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보문각대학사 상장군(銀靑光祿大夫 知樞密院事 寶文閣大學士 上將軍)으로 선수 관고려군 정동좌부도원수(宣授 管高麗軍 征東左副都元帥)가 되었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공의 생전에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서급(犀級)에 이르렀다. 차남 연(璉)은 지금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 응양군상장군(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兵部尙書 鷹揚軍上將軍)으로 선수 왕부단사관(宣授 王府斷事官)이다. 셋째 연수(延壽)는 지금 영렬대부 비서감 한림시강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榮列大夫 秘書監 翰林侍講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이고, 선수 관고려군만호(宣授 管高麗軍萬戶)에 제수되었다. 형제 세 명이 일시에 다같이 삼주호부(三珠虎符)를 띠었으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 올 봄에 원수공(元帥公, 瑞)이 중국 조정에 들어가 처음으로 부명(符命)을 받았는데 이에 앞서 시를 지어 부친에게 바쳤다.
한 가문에 세 명씩이나 호부(虎符)를 받으니
천만고(千萬古)에 없는 일입니다.
누구의 음덕 탓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버님은 머리가 하얗게 세셨군요.
마침 공이 별세하여 미쳐 눈으로 보지 못하고 다만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니, 이것이 하나의 한이다. 넷째 의선(義旋)은 천태종(天台宗)에 투신하여 선과(禪科)의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는데 지금 선사(禪師)가 되어 진구사(珍丘寺) 주지로 있다. 다섯째 위(瑋)는 지금 조산대부 신호위보승장군(朝散大夫 神虎衛保勝將軍)이다.
장녀는 영렬대부 추밀원좌부승선 판비서시사 한림시독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榮列大夫 樞密院左副承宣 判秘書寺事 翰林侍讀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인 노영수(盧潁秀)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원(大元)의 영록대부 강절등처 행중서성평장정사(榮祿大夫 江浙等處 行中書省平章政事)인 오말(吳抹)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조의대부 신호위대장군 지각문사(朝議大夫 神虎衛大將軍 知閣門事)인 백효주(白孝珠)에게 시집갔으며, 넷째는 조봉대부 용호군대장군(朝奉大夫 龍虎軍大將軍)인 염세충(廉世忠)에게 시집갔다.
공은 미관으로부터 요직을 두루 거쳐 재상에 오르고, 생전에 군(君)으로 책봉되는 은총[分茅之寵]을 입었으며, 또 훌륭한 자손들이 조정의 대각(臺閣)에 빛나고 있으니, 삼한(三韓) 이래로 공과 같이 시종 영예를 누리게 된 이가 능히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수재거사(睡齋居士) 시중(侍中) 홍규(洪奎)가 시를 지어 곡(哭)하면서 말하기를
세 임금을 섬긴 재상이로다
봉군(封君) 된 이 중에서 공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라고 하였고, 또 계속하여
집안에 가득 찬 아들과 사위들이 이미 재상이 되었으니
현인(賢人)을 이어서 백성을 보전하리라.
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실제의 일을 적은 것이다.
장례 날에 앞서 원수공이 공의 행장을 갖추어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작년에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서 공을 모시고 원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들어갔을 때 나를 직접 돌보아 주었으며, 하물며 여러 아들과 사위가 모두 나의 친구이니 감히 글이 졸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삼가 재배하고 명(銘)을 짓는다.
뿔 달린 짐승 중에서는 기린이고, 날짐승 중에서는 봉(鳳)새이니
구구하게 날거나 달리는 짐승이야 비록 많으나 또한 어찌 하리오.
예전에 공의 어머니가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고 기르니 제비 턱에 무쏘뿔의 정수리 뼈[頂骨]를 가졌도다.
장성하기에 이르러 무반[山西]으로 이름을 올려
수레[軺軒]을 타고 북국으로 가니 들고남이 몇 차례였던가.
세 임금을 언각(鶠閣, 中書省)과 난대(鸞臺, 門下省)에서 두루 보좌하고
나라의 주춧돌이 되어 임금을 도와 선정을 베풀게 하였다.
작위는 5등(五等)보다 높았고 지위는 삼태(三台, 三公)에 달하였으며
주옥(珠玉)을 이어 매단 여러 아들은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찼도다.
그 공명과 덕업(德業)은 예로부터 견줄 이 없었고
단정하게 앉아 돌아가시니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이 혼란하지 않았도다.
명(銘)으로 쓴 글에도 부끄럼이 없고 무덤자리도 매우 아름다운데
돌에 새겨 무덤에 넣으니, 아, 슬프도다.
지대(至大) 원년 무신년(충렬왕 34, 1308) 6월 일 조의대부 판예빈시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朝議大夫 判禮賓寺事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방우선(方于宣)이 쓰다.
宣忠翊戴輔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守太尉判中書門下事上將軍平壤君贈諡貞肅公墓誌銘」
夫爲臣之體有四焉飾躬而嚴重持正者一也臨事而循公蔑私者二也奉使而專對延譽者三也立朝而進止詳華者四也人臣有一體者亦鮮矣况一身而備四體者蓋千載一人而已惟吾平壤君其人也公諱仁規字去塵平壤郡人也考諱瑩皇金吾衛別將以公故贈金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吏部尙書上將軍母李氏皇內園丞有芬之女也累封至土山郡夫人母夢日輪入懷因娠而生焉自小穎異不好遊戱年至志學有立功匡國之大志以文字爲浮薄乃捨之充太子府侍衛至戊午歲得補將軍仁揆下隊正國家選山西子弟有通敏才者令習大朝言語公與是選癸亥加校尉己巳今上以世子入朝公在從行之數加攝散員扈從四年間多有補導之力甲戌主上配皇支來襲正位以勞舊超受中郎將尋拜將軍知閤門事兼御史中丞戊寅遷大將軍直門下省己卯拜右承宣加正議大夫上將軍知兵部事太子右諭德尋遷左承宣知吏部事壬午以神虎衛上將軍超拜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兵部尙書甲申加知院事丙戌加御史大夫太子賓客丁亥躐加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尋加門下平章事太子小師戊子加太子太保庚寅加門下侍郞平章事宣授嘉議大夫王府斷事官就帶三珠虎符辛卯加判兵部事壬辰加門下侍中判吏部事太子太師丁酉加壁上三韓三重大匡守太尉判中書門下事餘幷如故戊戌有奸人飾辭妄訴公以此赴朝廷朝廷以多般詰問確持大義終始無異言中朝士大夫皆賢之勒留七八年帝嘉其一節於大德九年乙巳詔許依舊勾當回還本國是年十二月復授壁上三韓三重大匡判中書門下事如故丁未加咨議中書門下事封平壤君雖在家凡軍國要務皆就決焉戊申立府置員僚加宣忠翊戴輔祚功臣公乃曰平生鞅掌四方畧無暖席今己至封侯年邁七旬宜以讌娛怡神慕謝傅東山之樂又心專佛事嘗印出大藏經特於居第招集開士粧成卷帙自是年三月始手至四月十九日斷手是日家內上下數四人同夢夢有神人盛服扣門曰冥士聞平壤君粧了虯藏遺使迎致故來耳果至翌日頸上有微瘇使良醫視之曰疾不可爲也公亦曰死生有命不可廻避遂屛醫藥初公夢見觀音尊像竟天而立今欲畵成等身一幀當病劇之時擧身傍壁標點之卽命工手摹出草圖雖在病中其快活自在如此先是諸子皆乘馹
入朝唯二子璉侍側至二十五日囑之曰宿劫有緣生爲同腹不可以家事互相猜忌凡欲利國必先正其家待長子瑞等回來兄恭弟順無被人欺言訖洗浴更衣至昏時向西胡跪奉香爐念讚佛古偈端坐而逝享年七十二城中士庶奔走瞻禮曰聞公正直奉公者久矣乃今知其實本性也皆讚歎泣下上聞訃震悼命有司襄事以六月二十八日葬于開城熊谷之北麓贈諡曰貞肅公公之爲人美風儀寡言語端實無華雖從虎職其於四書傳記稍有留意又善於筆法平生接物寬和若謙謙然當事則謇謇然人無敢犯者自微官至今出入中朝凡三十餘度動有匡救之効越乙亥年中朝所遣頭目黑的與我國蓄憾欲改國俗往訴于天陛業已成矣無如之何公單騎朝天親奏情狀無不允兪乃至達魯花赤種田軍一皆罷還此則萬世之功也抑又主上爲八字功臣陞加行省丞相僉議府爲二品衙門領降兩臺銀印與夫南洲北鄙之還屬我彊等事皆公之力也前後樹立不可盡記但擧其尤者耳娶朝請大夫司宰卿致仕趙公溫呂之女生五男四女男一曰瑞以羽林登第今爲銀靑光祿大夫知樞密院事寶文閣大學士上將軍宣授管高麗軍征東左副都元帥生二子及公眼前開收科官至犀級二曰璉今爲金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兵部尙書鷹揚軍上將軍宣授王府斷事官三曰延壽今爲榮列大夫秘書監翰林侍讀學士充史舘修撰官知製誥宣授官高麗軍萬戶兄弟三人一時俱帶三珠虎符眞稀有事也今春元帥公入中朝初受符命先作詩寄呈高堂云一門三虎符千萬古應無未識誰陰德高堂有白鬚適公卒未及眼見但膾炙於人口是一恨耳四曰義旋投天台中禪選上上科今爲禪師住珍丘寺五曰瑋今爲朝散大夫神虎衛保勝將軍女一適榮列大夫樞密院左副承宣判秘書寺事翰林侍讀學士充史舘修撰官知製誥盧潁秀二適大元榮祿大夫江浙等處行中書省平章政事吳抹三適朝議大夫神虎衛大將軍知閣門事白孝珠四適朝奉大夫龍虎軍大將軍廉世忠公自褊裨歷揚要秩至登冢宰現受分茅之寵而又蘭蓀繁衍輝映臺閣自有三韓已來得如公之哀榮終始者能有幾人睡齋居士侍中洪公奎作詩哭之曰歷事三朝冢宰臣分茅居右更誰人又繼之曰滿堂子壻已爲相繼踵賢雜可保民蓋實錄也先葬日元帥公具公行狀囑余爲銘予
於昨年以直翰林陪公入賀聖節親承顧睞况諸子壻皆子親舊敢以必拙爲辭謹再拜而銘之曰
角者麟也翼者鳳兮區區飛走雖多亦奚昔公之母夢日入懷載生載育頷燕顱犀比至長成策名山西乘軺拱北出入幾回三朝歷補鶠閣鸞臺爲邦柱石爲鼎塩梅封高五等位極三台聯珠數子虎頭金牌功名德業高無幷齊儼然坐逝終始不迷銘詞無愧宅兆孔佳刻石納竁嗚呼哀哉至大元年戊申六月 日 朝議大夫判禮賓寺事充史舘修撰官知製誥方于宣述
〔출전 : 『平壤趙氏世譜』(1929)〕
조인규사당기(趙仁規祠堂記)
조인규 사당기(祠堂記)는 글의 내용은 묘지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신도비(神道碑)에 가깝다. 사당기에 따르면 조인규가 당(堂)을 짓고 평소 거처한 곳인 ‘지원(祗園)’에 그의 화상(畵像)을 걸고 제사를 지내고, 네모난 돌을 뜰 가운데에 세워 선군의 뜻과 가르침을 자손들에게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사당기를 작성한다고 하였다. 사당기는 1341년 이후(구체적인 년도 미상)에 이곡(李穀)이 작성했으며, 그의 문집 『가정집(稼亭集)』 권3에 실려 있다.
조인규(趙仁奎 : 1237~1308)의 자는 거진(去塵)이며, 평양군 사람이다. 아버지는 형(瑩)이다. 어머니 이씨는 문간(文幹)의 딸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사당기에 따르면 조인규는 몽고어에 능통하여 고려와 원 사이의 주요한 외교 현안을 처리하여 고려의 사직을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원나라 사신 흑적(黑的)의 고려에 대해 황제에게 잘못 보고한 것, 탐라와 평양 사람을 원나라에 직속시켜 그 주인을 배반한 것과 고려 주둔 원나라 군사 가운데 해를 끼친 자들을 파면해서 돌아가게 한 것, 유리하는 백성과 노략질을 당하여 요동과 심양에 붙들려 있던 자를 모두 제 나라로 돌아오게 한 것, 두 번째 일본 정벌 군대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롭게 한 일을 중지시킨 일 등이 공이 황제에게 힘써 잘 대답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부인은 조온려(趙溫呂)의 딸로,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서(瑞), 둘째 연(璉), 셋째 연수(延壽), 넷째 의선(義旋), 다섯째 위(瑋)이다. 큰 딸은 노영수(盧穎秀)에게, 둘째는 오마아(烏馬兒)에게, 셋째는 백승주(白承珠)에게, 그 다음은 염세충(廉世忠)에게 각각 시집갔다.
조정숙공 사당기(趙貞肅公 祠堂記)
지정(至正) 원년(충혜왕 복위2, 1341) 봄 내가(묘지명 찬자인 李穀) 정동막(征東幕)에 있을 때 찬성사(贊成事) 조공(趙公)이 조카 평원군(平原君)과 함께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청하면서, “선군(先君) 정숙공(貞肅公)은 조정에 공로가 있고 덕을 후세에 끼쳤는데, 비록 무덤에 묘지명이 있으나 신도(神道)에 비가 없습니다. 집안의 역사나 나라의 역사는 사람들이 찾아보기가 어려워, 오래 되어 인멸되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또 선군은 일찍이 집 뒤에 당(堂)을 짓고 평소 거처하는 처소로 삼고 지원(祗園)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그 가운데에 선군의 화상을 걸고 때에 맞춰 제사를 지내고, 네모난 돌을 뜰 가운데에 세워 그 공덕을 새겨 자손들이 익혀 듣고 새겨서 선군의 뜻과 가르침을 잊지 않게 하려 합니다. 그대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임기가 차서 원나라 수도로 돌아가게 되어,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지금 정숙공의 아들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연산(燕山)에 머무를 때 매번 나를 볼 때 말이 그 일에 미치게 되면, 또 말하기를, “비록 불법(佛法)을 배우지만 끝이 없이 지극한 아버님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말이 더욱 간절하고 청하는 것이 더욱 근실했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그 대강을 서술하고자 한다.
천하가 생긴지 오래되어, 한 번 잘 다스려 지면 한 번은 어지러웠다. 가까이 당나라가 쇠약하자 오계(五季)가 크게 혼란하였다. 요(遼)나라와 금(金)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남북으로 분열되고 전쟁이 그치지 않아,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하늘이 경사스런 운수를 열어 주어 성인이 계속해서 나고 이름난 신하가 많이 나와서 육합(六合 : 상·하와 사방)을 하나로 통일하고 여러 사람의 뜻을 정하였다. 문궤(文軌)를 같이 하고 풍속을 변화시켰다. 주역에 이르기를, “크도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의지하여 시작해 나온다.” 하였으니, 그것은 오직 원나라뿐이다.
정숙공은 태종(太宗) 9년 정유년(고종 24, 1237)에 태어났다. 그 때 겨우 변채(汴蔡)의 땅을 거두어 들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었으나 남쪽으로 정벌하고 북쪽으로 토벌하는 것이 끝나지 않았다. 고려는 비록 이미 귀부했으나 권신(權臣)의 통제를 받아 강화에 있으면서 술직(述職)하는 것을 제때 하지 않아 원나라 군사가 국경을 압박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안위에 처했고. 인심이 순응하거나 배반하려는 무렵이었다. 풍속과 습관이 변하기 시작하여 삼한이 다시 처음과 같이 건설되는 때였다.
당시 이(夷)와 하(夏)가 처음으로 통하여, 위로 덕을 선포하고 아래로 정을 통하는데 통역하는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공은 화어(華語)를 잘하고 언변에 능숙하여, 발탁되어 높이 날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허리띠를 졸라 매고 조정에서 빈객들과 말을 통하였고, 끝에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여 사직의 신하가 되었으니, 공의 일생을 보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지원(至元) 기사년(원종 10, 1269) 공은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갈 때 함께 갔다. 갑술년(충렬왕 즉위, 1374) 황제의 딸을 맞이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임금을 대하면 이해(利害)를 아뢰고 죄를 질 각오로 어렵고 험한 일을 겪으면서 권세있는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도읍을 회복하여 나라를 바르게 하였다. 우리 백성들이 희희낙락하게 베개를 편히 베고 지금까지 온 것은 공의 공로가 많았다. 처음 원나라에서 보낸 사신 흑적(黑的)이 감정을 품고 말을 만들어 분란을 일으켜 황제에게 잘못 보고한 것, 탐라와 평양 사람을 원나라에 직속시켜 그 주인을 배반하게 한 것과 고려에 주둔한 원나라 군사 가운데 해를 끼친 자들을 모두 파면해서 돌아가게 하였다. 그 뒤 유리하는 백성과 노략질을 당하여 요동과 심양에 붙들려 있던 자를 모두 제 나라로 돌아오게 한 것이라든가, 간사한 신하들이 의논을 발의하여 두 번째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군대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롭게 한 일을 중지시킨 것도 모두 공이 황제에게 힘써 잘 대답한 때문이다. 무릇 왕이 공을 보내 황제에게 아뢰게 하면, 황제는 곧 공을 불러 들여 위로하고 공이 아뢴 것을 일찍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한번은 “너는 원나라 사람이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고, 말과 행동이 조금도 동쪽나라 사람 같지 않구나.” 라고 하였다. 아 나라를 중흥시킨 공은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구나.
공의 이름은 인규(仁規), 자는 거진(去塵)이다. 평양군 사람이다. 아버지 형(瑩)은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는 내원승(內園丞) 문간(文幹)의 딸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에 봉해졌다. 부인의 꿈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얼마 있다가 태기가 있어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달리 뛰어났고, 장난하고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좀 자라 글을 읽을 수 있고 대강 뜻을 통하자, 곧 그만두고 무반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하급 간부로 시작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이 되고, 지합문사(知閤門事), 어사중승(御史中丞), 좌승선(左丞宣)이 되었다 네 번 승진하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가 되고 또 승진하여 어사대부 태자빈객(御史大夫 太子賓客)이 되었다. 빈객에서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가 되었다가 곧 평장시랑(平章侍郞)으로 승진되었다. 경인년(충렬왕 16, 1290) 특별히 가의대부 고려왕부단사관(嘉議大夫 高麗王府斷事官)에 임명되고, 이어 금으로 된 호부(虎符)를 받아 공의 능력을 드러내었다. 임진년(충렬왕 18, 1292) 시중(侍中)이 더해졌다. 대덕(大德) 을사년(충렬왕 31, 1305) 다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승진되었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나이가 많아 사직할 것을 청하자 공신 칭호를 하사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고 부를 설치하여 관원을 두게 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공의 집에 가서 물어서 결정하게 하였다. 이듬해 병이 나자 아들들이 훌륭한 의원을 청하여 보게 하였다. 공은 “내가 머리 올려 상투를 짜면서부터 나라 일에 봉사하여 나이 이제 70이 넘었고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또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의원이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라고 하였다. 그 때에 여러 아들들이 모두 원나라 서울에 있고, 오직 충숙공 만이 옆에 모시고 있었다. 공이 부탁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집을 다스려야 한다. 시경에 ‘형과 아우가 있으면 실로 서로 좋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네 집에는 동기(同氣)가 많이 있으니 부디 화내고 다투지 말라. 남의 웃음거리가 되리라. 너의 형제가 다 오거든 갖추어 기록하였다가 훈계하고 그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4월 25일에 병이 위독하므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서 운명했다. 나라의 여러 선비와 서민들이 쫓아가서 곡하면서 말하기를, “공이 평생에 정직하다고 들었더니, 이제 그대의 죽는 것을 보니 바로 살아있을 때를 알 수 있겠다.” 하였다. 부고가 왕에게 올라가자, 왕은 “하늘도 무심하여 원로를 남겨주지 아니하였다.”고 탄식하며, 부의하고 장사지내는데 예절을 다하게 하고 시호를 정숙공(貞肅公)이라 내려 주었다.
부인은 사재경(司宰卿) 조온려(趙溫呂)의 딸로,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서(瑞)는 과거에 급제하여 특별히 회원대장군 고려부도원수 삼사사(懷遠大將軍 高麗副都元帥 三司使)로 임명되었고 시호는 장민공(壯敏公)이다. 둘째 연(璉)은 중의대부 왕부단사관 첨의찬성사(中議大夫 王府斷事官 僉議贊成事)이며,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셋째 연수(延壽)는 춘관(春官)에 급제하여 특별히 소용대장군 관군만호 삼사사(昭勇大將軍 管軍萬戶 三司使)에 임명되었다. 넷째 의선(義旋)은 정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 知見無礙 三藏法師)로서 천원 연성사주지 겸 본국영원사주지 본국우세 정명보조 현오대선사 삼중대광 자은군(天源 延聖寺住持 兼 本國瑩原寺住持 本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 三重大匡 慈恩君)이다. 다섯째 위(瑋)는 중대광 첨의찬성사(重大匡 僉議贊成事)이다. 큰 딸은 좌승선(左丞宣) 노영수(盧穎秀)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강절평장(江浙平章) 오마아(烏馬兒)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대호군(大護軍) 백승주(白承珠)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호부시랑(戶部侍郞) 염세충(廉世忠)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몇 명이 있다. 원수(元帥 : 서)의 장남 굉(宏)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교부령(典校副令)이다. 다음 천이(千䙫)는 진사에 급제하여 지금 밀직부사(密直副使)이며, 다음 천유(千裕)는 원윤(元尹)이다. 딸은 안길왕(安吉王) 야아길니(也兒吉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판서(判書) 김경직(金敬直)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연덕대군(延德大君) 진(瑱)에게 시집갔다.
단사관(斷事官 : 연)의 장남 사민(斯民)은 지금 낭장(郎將)이다. 다음 덕유(德裕)는 지금 봉의대부 왕부단사관 판전의시사(奉議大夫 王府斷事官 判典儀寺事)이다. 그 다음이 윤선(允瑄)이고, 그 다음은 보해(普解)이며 머리를 깎고 중천태교선(中天台敎選)이다. 큰딸은 만호(萬戶) 권형(權衡)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우상시(右常侍) 김상린(金上璘)에게 시집갔다.
만호(萬戶 : 연수)의 장남 충신(忠臣)은 지금 선무장군 관군만호 삼사좌윤(宣武將軍 管軍萬戶 三司左尹)이며, 다음은 신(信)이다. 딸은 낭장(郎將) 김휘산(金暉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상호군(上護軍) 윤지표(尹之彪)에게 시집갔다.
찬성사(贊成事 : 위)의 아들 흥문(興門)은 지금 소부윤(少府尹)이다.
외손도 몇 명있다. 장녀의 아들 탈(頉)은 지금 경양군(慶陽君)에 봉해 있다. 딸은 판서 허부(許富)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삼사사(三司使) 김상기(金上琦)에게 시집갔다. 셋째 딸의 아들 충윤(忠胤)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다. 딸은 상호군 이권(李權)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별장(別將) 김오만(金五萬)에게 시집갔다. 넷째 딸의 큰 아들 효신(孝臣)은 지금 삼사좌윤이며, 다음 불노(佛奴)는 지금 익정시승(翊正寺丞)이고, 딸은 호군 민현(閔玹)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매우 많으므로 다 기록하지는 않는다.
공은 성질이 명랑하고 민첩하며 외양이 웅장하고 크며 말이 적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물건에 접촉할 때 관대하고 화평하며 일을 대하면 강직하고 정대하여 4대의 임금을 도와서 장하게도 원로가 되었다. 성품이 또 착한 것을 좋아하여 남에게 물건을 주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더욱 불교에 독실하여 청계불사(淸溪佛寺)를 창건하고 임금을 위하여 복을 축원할 때, 묘전(妙典)을 금으로 쓰고 해장(海藏)을 먹으로 판박이고 불상(梵像)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모두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이다.
집을 다스리는 데 엄격하고, 아들 가르치기를 옳은 것으로 하여 공이 늙기 전에도 많은 자손들이 달관명사(達官名士)가 되어서 중외(中外)에 널리 있었고, 죽은 뒤에도 모두 가훈을 따라서 효도하고 우애하기를 화락하게 하여 사람이 딴 말을 하지 못하였다. 시구(尸鳩)의 평균함과 척령(脊令)의 어려움을 급히 여기는 것에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보통 사람의 정은 오래 되면 날로 잊는 것인데, 공은 죽은 지 36년이 넘었지만 그런데도 또 인멸되지 아니할 것을 생각하여, 죽은 이 섬기는 것을 산 사람처럼 하는 것이 이 같으므로 이것을 기록하노라.
趙貞肅公祠堂記」
省事王守誠篆額」
至正改元春穀在征東幕贊成事趙公與其姪平原君持家傳來徵予文曰先君貞肅公功在社稷德垂後世雖銘諸幽堂而神道未有碑家乘國史人鮮得窺恐久湮沒無聞且先君甞於舍後作堂爲燕居之所因稱祇園今欲於其中垂先君像以時致祠立圭石庭中具刻功德俾子若孫習聞偑服無墜先志無忘先訓子其母辭予時方任滿還都未有以應之也今貞肅公之子三藏法師旋公住錫燕山每見予語及其事且言雖學浮屠法昊天罔極恩何敢忘其言益切而其請益勤穀迺叙其大槪曰天下之生久矣一理一亂近自唐家旣衰五季大亂遼金與宋南北分裂戰爭不息生民之塗炭極矣天開景運聖人繼作名臣輩出一六合定群志同文軌變風俗易曰大哉乾元萬物資始其惟皇元乎貞肅公生於太宗九年丁酉歲時甫收汴蔡天下幾定而南征西伐尙猶未已本國雖已歸附而制於權臣寓都江華述職不時以致天兵壓境此亦國步安危之機人以向背之際俗習遷變之始而三韓之再初也當是之時夷夏始通宣上德達下情動資舌人而公以能華言善辭令拔擢飛騰始則束帶立朝與賓客言終則尊王庇民爲社稷臣觀公之生豈偶然哉至元己巳忠烈王以世子入覲公實從之甲戌釐降帝女令襲王位其入對冕旒歷陳利害出負羈絏備甞艱險誅權姦以正名復都邑以定國使海隈蒼生熙熙奠枕迄至于今繄公之功居多焉初朝廷所遣黑的畜感飾詞欲事紛更已誤天聽耽羅平壤之人直隷內郡反吠其主與夫留屯將率之耗害者尋皆罷去其後流民及被掠爲遼瀋所蔽者悉使歸國槪侫臣倡議再征日本欲因軍興蟊賊我邦事得中止皆由公汗馬專對之力也凡王之遣公奏請也趣召入見慰撫良渥所言未甞不允世祖甞謂曰汝非國人也何其敷對詳明辭色擧止絶不類東人也於戱第其中興之功無出公之右者矣公諱仁規字去塵平壤郡人考諱瑩贈金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妣李氏內園丞文幹之女封土山郡夫人夫人夢日入懷己而有身遂生公生而頴異不好嬉戲稍長知讀書略通大意卽去從虎職始由諸校累遷將軍知閤門事御史中丞左承宣四轉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再遷御史大夫太子賓客由賓客陞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就陞平章侍郎庚寅特授嘉議大夫高麗王府斷事官仍降金虎符以旌其能壬辰加侍中大德乙巳再進判都僉議司事丁未引年乞退錫功臣號封平壤君開府置官僚國有大事卽其家咨决焉明年遘疾于第迎良醫入公曰吾結髪徇國年踰七旬官至一品且死生有命醫何能爲時諸子赴都唯忠肅侍側囑之曰欲理其國先齊其家詩不云乎兄及弟矣式相好矣無相猶矣汝家夥同氣愼母忿爭爲人所笑待汝兄弟來其具訓之以爲家法四月二十五日疾革沐浴更衣端坐而逝國中士庶奔走哭泣曰聞公平生正直見其死即知其生矣訃聞王發天不愸遺之嘆賻葬以禮諡曰貞肅媲夫人司宰卿趙公溫呂之女生五男四女長男瑞登科第特授懷遠大將軍高麗副都元帥三司使諡莊敏次璉官至中議大夫王府斷事官僉議贊成事諡忠肅次延壽擢第春官特授昭勇大將軍管軍萬戶三司使次義旋特賜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住天源延聖寺兼住本國瑩原寺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三重大匡慈恩君次瑋今爲重大匡僉議贊成事長女適左承宣盧頴秀次適江浙平章鳥馬兒次適大護軍白孝珠次適戶部侍郞廉世忠孫若干元帥長男宏及第官至典校副令次千禩第進士今爲密直副使次千裕今爲元尹女適安吉王也兒吉尼次適判書金敬直次適延德大君瑱斷事官長男斯民今爲郞將次德裕今爲奉訓大夫王府斷事官判典儀寺事次允瑄次普解祝髪中天台敎選女適萬戶權衡次適右常侍金上璘萬戶長男忠臣今爲宣武將軍管軍萬戶三司左尹次信女適郞將金暉山次適上護軍尹之彪贊成事男興門今爲少府尹外孫若干人長女男煩今封慶陽君女適判書許富次適三司使金上琦三女男忠胤今爲典理佐郞女適上護軍李權次適別將金五禺四女長男孝臣今爲三司左尹次佛奴今爲翊正司丞女適護軍閔玹曾孫以下甚衆皆不載公資明敏器雄偉寡言語美風儀接物寬和執事剛方弼亮四世蔚爲元臣性又好善喜施尤篤於釋敎剏淸溪佛寺爲上祝釐金書妙典墨印海藏繪塐梵像不可勝紀至於持家嚴敎子以義逮公未老子孫多爲達官名士布列中外旣沒之後咸遵家訓孝友怡怡人不間言戶鳩平均脊令急難其不愧矣凡人之情日遠日忘公沒殆餘三紀而又圖所以不朽而事亾如存者如此是爲記」
〔출전:『稼亭集』권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