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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경

[비경지을 찿아]중국원림

작성자時雨|작성시간20.10.05|조회수62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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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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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원림

인간선경

원림은 중국인들의 화원으로 역사와 전설의 귀토로 중국인들의 몽상의 대상인데 최근에 벨기에에는 중국원림공원이 세워졌다

한무제의 꿈이라 명명하고 고사로 정원을 꾸미고 곤륜 봉래의 신선화원을 추구하여 선경과 고뇌의 해탈을 이루고저 하였다

한무제는 진시황을 초월하고자 하여 구선과 태액지와 상림원을 세우고 신선과 구통하는 누각을 세운다

그러나 신선은 인간화원에 오지않고 제왕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고 죽게된다

이제 원림의 산봉루각에 깃들어 봉래삼산은 중국 황가원림의 표지로 선경화원이 된다

한무제의 꿈은 원림에 영생하여 현실과 인간의 여정을 재현하고 현실과 상상의 조원지려가 진행중이다

서방인들은 원림으로 동방을 상상하고 중국인들은 원림에서 역사를 찾는다

개봉의 송휘종이 만든 화석강원림인 간악은 화강암 공원으로 백성들의 조운선을 사용하여 원성을 자아낸 곳이다

화석강사건에서부터 북송시대 수호전의 비참한 백성들의 고통이 시작되고 국가는 광풍에 휩싸인다

북송시기 문인들의 산수화가 발달하여 휘종은 산수화를 현실로 바꾸기로 하여 기봉이석을 내심의 봉래로 간악을 만든다

간악이 완공된 5년후 금병의 남하로 북송은 멸망하고 간악은 파괴되어 유석만 운하연변에 남는다

고시에는 중원의 수많은 고국이 망하는데 송은 돌로인해 망했다고 직격탄을 날린 우국지사도 있다

중국인들의 마음에는 봉래와 도화원이 늘 존재하는데 신선의 경지로 간악은 인공적으로 천지관 도법자연의 체현의미이다

천지건곤중 사람의 위치를 늘 찾는데 일지삼산의 봉래경이 최고로 산수 돌 식물과 건축이 인간낙원의 기본적 격국이다

원림에서 인간선경을 찾고 자연과 친근한 회귀산수의 즐거움을 찾고자 하고 봄의 난초에서 경염을 찾는데 월절서에는 춘추시대 월왕 구천은 온산에 난초를 식재했다 한다

2500년간 난초는 산야에서 궁전으로 사대부의 정원의 필수적인 화초였다

꽃은 만물의 생장중 시절교체의 소식으로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의 상징으로 인간의 자연애호와 모방자연의 색채 성음 기식의 기본이다

장자에는 장자와 혜시가 냇가에서 산보하는데 물고기들이 자재하는데 진정으로 쾌락인지 논하는데 장자는 인간의 속박을 한탄한다

동진 영화 9년 모춘에 월왕 구천이 난을 심던 장소에서 우군장군 왕희지는 문인들과 취회하고 우주에 비해 인생은 너무나 짧아 비통해 한다

원림은 인공의 자연공간으로 인간의 내심모순의 산물로 산수중 자아의 회복을 갈망하여 내심의 안둔을 추구한 것이다

중국인의 생명관은 두종류로 하나는 鐘鼎이고 나머지는 산림인데,유가는 종정지로이고 권력과 윤리인데 세사중간에 불가측의 좌절과 고난이 기다린다

인간도 결국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귀환을 바라고 안둔을 추구하여 산수간의 정신가원을 바란다

자연회귀의 추구는 강렬하여 현실중의 도화원을 바라는데 동진시 사람들은 동란을 피하여 현실을 도피하고 퇴로가 없어 산림에 은거한다

怡然自樂이 도화원의 최초 형상으로 봉래이후의 원림주제로 피세의 산림을 찾아 이상의 현실화원이다

명헌은 명대의 원림으로 소주의 원림을 말하고 공간의 조형으로 화원은 성시문명과 사회의연결점으로 대자연과 배합한 것이다

원림은 인간이 우주의 한점으로 상징되어 宇는 일체의 공간을 말하는데 원림을 주전자속의 천지로 무변무제 宙는 일체의 시간으로 원림의 사계로 무시무종을 말한다

산석화목 정대루각은 인간의 심경으로 우주의 화해를 말하고 인공의 최고경지로 본다

소주의 예포는 고대 장물지라는 사대부생활의 백과전서에 나오는 장소로 명대의 소원림으로 명성이 높은데 2대원주 문진맹 형제는 당년의 시정이 남아 마음이 머무는 곳이라 한다

건륭시 소주현존의 최고로의 원림인 창랑정부근으로 서생 심복이 처자 예랑이 살던곳으로 창랑정을 관상하던 소원림이다

향운우절이라는 연화를 감상하고 원림의 형식보다 운아를 즐기며 사는데 처자 예랑이 세상을 떠나고 매화를 바라보며 살았다 한다

원림은 제왕의 궁전이 아닌 문인의 정원으로 봉래의 삼선산을 기대하고 유일한적을 추구한다

 

 

 

상림원

2천년전 한무제 류철의 수렵장인 섬서 관중의 상림원은 중국역사상 최대의 황가원림으로 역사의 풍진속에 사라졌다

섬서성 합양현 영천촌에는 당시의 풍모가 남아 농악극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당년은 휘황은 없지만 편단은 남아있다

36좌의 원중원으로 12궁전구의 모든 공능을 갖추고 호화로운 원림으로 원유의 백수들이 수렵의 대상이 되고 3천종의 진기화목를 심어 대추 포도 빈랑등 각종과일나무가 심어진다

제국의 총물력이 상림원에 집중되고 원중의 청수 완약한 남국풍정 호방한 북방풍정이 혼합되는데 상림부에는 풍경이 자세히 그려진다

그러나 성장과 성문은 한무제가 흉노를 막기위한 설비로 변경의 수비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파란동탕의 지점이던 이곳은 원고의 성음으로 조광호방한 주민들이 남았는데 격렬한 춤이 곁들인 상라고는 진한교체시기에 기원하는 나희로 강렬한 군사색채로 남아 나희면구는 적을 두렵게 한다

광풍의 동작과 조광의 운미는 변하지 않고 계승되는데 매년 봄이면 광환절이 열리고 고취 가무 잡기 설창으로 백희를 표현한다

한제국의 종용 개방적 태도는 박물관의 한 대도용의 백희표현과 유사한데 한용과 진용은 큰 차이가 난다

한용은 사의적이고 선조도 호선형으로 진용의 직선적 선조와는 다른데 진용은 엄숙하고 한용은 다소 낭만적이고 서민적이다

한용은 상상력을 자아내는데 당대의 정신풍모를 말해주고 한 대의 병마용은 진대의 병마용과 달라 전쟁은 정복으로 출정의 모습이 가벼운데 강력한 국력으로 인한 자신감이다

키가 큰 관중인의 모습인데 토지의 고난변천을 기록한 얼굴로 화음시 쌍천촌은 서한양창의 구지로 수많은 와편이 널려 진한시기의 유물로 장식전인데 부려당황의 호화로운 진전한와를 상징한다

함곡관이동의 양식창고로 가공후 수조를 통해 장안성으로 운송하여 150공리의 수로가 연결된다

노강은 폐부지음으로 웅혼한 토지를 닮아 줄곧 전해오고 역사심처에서 오는 영혼의 납함으로 상림원 확건시 전국에서 조병하고 양식을 날라오는데 선공들의 고함소리가 지금도 남아 조광한 고함은 노강창으로 남는다

관중의 향촌에는 원고지성이 남아 구슬픈데 금동선인이 완공되는데 상림원의 최대건축이다

신명대는 67미터로 현대의 27층건물의 높이로 한제국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그의 야심은 상림원에서 더욱 먼곳으로 향하는데 동으로 조선북부를 병합하고 남주백월 서유총령 한제국은 최대의 판도를 형성한다

유철은 비단길을 개통하고 구아대륙을 서로 연결하고 7천공리의 장로를 통해 비단과 도자기가 전해진다

한무제의 눈에는 천하가 단지 수렵장의 확장으로 백로가 서리가 되고 위자부는 공주부의 가희로 회궁시 그녀를 발견하고 일년후 무제의 총애를 받아 상림원에 거주하고 몇 년후 태자를 낳아 백성들은 코로 나팔을 분다

한 대에 남겨진 화상석은 2천년전의 기록을 남기어 지금의 생활과 유사한데 주거 음식도 유사하다

술을 마시면서 가위 바위 보를 하고 과거의 습속을 간직하는데 열정 낙관적 관중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한무제시 외국사절들은 궁정에서 호화연석을 열어 제국의 부를 보여주는데 대형 철제술통에 가득찬 술로 접대한다

무제는 득의양양하여 신하로서 사절을 대하는데 관중인들의 자신 호방 웅심발발의 태도도 현실과 역사가 교집한다

한 대의 화상석은 가벼운 선조로 풍부복잡한 도안을 각석하였는데 2천년전의 생활을 표현하여 당시의 생활을 추측할수 있다

화상석을 통해 한적 질박한 생활이 체현되는데 과거와 현재가 일맥상통하는데 피영희의 고강창량한 성음으로 이어진다

생사박살의 역사극정으로 관중평원의 부단한 상연으로 생명의 연소기 사라지는데 곽거병은 류철과 낭중령 이감이 상림원에서 수렵을 하는데 살기등등하였는데 2천년후에도 사냥개들의 수렵은 살기가 번득인다

결국 이감은 살해되는데 2년전 위청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힌 이감에 대한 보복으로 곽거병은 친족의 복수를 한다

곽거병은 류철에 대한 참월로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침통해하고 수개월후 24세의 곽거병은 폭사한다

이에 위자부와 곽거병은 견련되어 위씨가족은 급전직하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곽거병사건은 한무제에게 큰 타격을 주는데 만년의 류철은 자신감을 잃는데 의심과 추측이 심해진다

류철의 만년에 상림원은 대규모의 시공으로 400리의 성장을 건립하고 12개의 고대한 대문을 수축한다

상림원에 몰래 진입하면 엄벌에 처하는 규정을 반포하여 우림군이 성을 지키고 곤명지에서는 수군을 훈련하여 개방은 봉폐로 변하여 관중의 향촌은 성장안에 갖힌다

이는 류철의 미묘한 심리변화로 지금의 낙인으로 남는데 이후 한제국의 영광은 점차 쇠락하여 국고는 비고 상림원의 유지조차 어려워지는데 이에 쫒겨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여 경종 방목을 허락한다

상림원에 다시 촌장이 돌아오고 황가원림은 거대한 촌장으로 변하고 물레방아는 돌아간다

삼엄한 격국이 재력이 회복되는데 상림원의 쇠락을 막을수는 없었고 류철의 만년에 또한번의 궁정투쟁이 일어나는데 위자부와 태자는 자살을 한다

기원전 87년 류철은 사망하는데 상림원은 서한말의 전화로 폐허가 되어 237년 위명제는 상림원의 금동선인을 가져가며 참연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쇠퇴는 번영의 다른 일면으로 쇠퇴는 또다른 번영의 축적인데 쇠퇴와 번영은 완정된 사회를 만든다

2500공리의 황토고원의 관중인들은 흉노를 박살하고 착근하여 중국역사상 최대의 황가원림을 세우고 지금까지 생존을 이어오는데 순박한 풍정과 풍속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다

석양에 돌아오는 자녀들의 긴그림자는 온난한 심리의 상징인데 그림자와 선의 지속에 미련을 둔다

 

 

 

 

도화원은 어디에

절강 리저진 란저산방의 회몽지간에 도연명은 황제가 방림원을 세웠다 하는데 선경 도화원이 금곡원에 있다고 하였다

습유기에는 진시황이 상림원을 세우려 산서 운강의 대나무를 함양으로 옮겨심었다는데 대나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죽은 공심 유절 인 불절로 중국의 원림은 대나무가 필수적인 화목으로 왕유의 시 죽리관에는 독좌유황리 탄금북장소 심림인부지 명월래상조라 하는데 유황은 죽림을 말하고 탄금은 혜강 앙천장소는 완적을 말한다

혜강은 263년 낙양의 동시에서 3천명의 태학생이 엎드린 가운데 사면을 호소하는데 여름새가 되어 사라진다

조조의 손녀 장평공주의 사위로 소나무의 풍모를 가졌다 하는데 사마염의 즉위후 살기는 조조의 가족으로 향하여 죽게된다

낙양에서 200길에 있는 천문산은 혜강의 낙원으로 철포를 열고 쇠를 달구는데 담없는 혜강의 원림이었다

그는 형장에서 광릉산을 연주하고 떠나는데 40세로 완적의 53세보다 애석한 나이로 곡 읍 망 애 사를 고루 남기고 떠난다

친구 산도를 살리려고 절교서를 보내기도 하는 철저함을 보이고 죽림칠현의 대표자이다

이후 죽림은 격외의 유정한 상징으로 불교의 죽림정사로 발전하고 405년 가을 41세의 도연명은 팽택현령이 되는데 85일후 사관하고 전원으로 돌아간다 

 

 

 

 

 

 

 

 

 

 

 

 

 

 

대지에 시를 쓰다

당대는 멀리가지 않아도 박물관에서 당대의 문물을 통해 당시의 생활을 알 수 있다

섬서성 중보촌에서 출토된 당삼채원락의 모형은 전원과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시에 출토된 섬서문물박물관의 당삼채가산모형은 당대의 원림이다

이것은 최초의 원림모형으로 전택후원인데 토산이 아닌 첨삼각형의 석산인데 산아래 연못이 있는데 당대의 원림에 대한 문헌은 없지만 당시에 많은 내용이 있다

고도 서안의 고가에는 흔적이 남아 전당시에는 500여수의 싯구가 있어 동일지역을 묘사한다

당현종시기의 곡강 부용지는 곡강지라 하는데 서안의 핵심지구가 되었는데 당대 장안은 목단지성으로 왕유는 위대한 시인중 한사람인데 곡강지가 생긴 시기는 20세로 진사로 소년득지하는데 안사지란으로 폄관되는데 좌절하여 755년 장안이 공함된다

매년 5월 15일은 희상공의 제사일로 전민남지구의 리원항업들은 융중한 제사를 지낸다

희상공은 안록산에 반대하여 죽은 당대의 악공 뢰해청으로 개원사는 천주의 가장 오래된 사찰의 하나인데 당추공 2년에 세워지는데 대전의 두공에 24존의 묘음조비천조상이 있어 그들이 들고있는 악기는 천주의 남음에서 사용하는 악기와 극히 비슷한데 남음은 남관이라 하여 동남연해에 보존된 현재음악중 당악에 가장 가깝다

의경은 심경인데 시경이기도 하고 명월은 소나무사이에 비추고 푸른우물은 돌위를 흐른다고 한다

천주거리를 거닐면 많은 가정의 편액중 開閩傳芳이란 4자인데 주인은 어김없이 성이 왕씨인데 당대의 연원으로 그들의 조상은 당말오대의 복건개발의 시조 개민삼왕인데 이들은 태원에서 산동 낭야로 다시 하남고시로 다시 복건으로 이주하여 왕심지 삼형제가 64개의 성씨를 데리고 복건으로 온다

천주사람들은 대부분이 하남의 이민으로 천주방언은 하락지구의 말로서 황하와 락수사이인데 하락방언 문화라 한다

진인들이 천주에 이거하여 이곳의 강도 진강이라 하고 진강은 고천주의 소재지로 당대 정식으로 천주라고 하였다

지하에는 서안을 보고 지상에서는 천주를 본다고 하는 격언이 있는데 남천의 족군들은 생활을 지켜오고 있다

천년전의 대당여운을 느끼는데 많은사람들이 고로의 민남방언으로 당시를 음송하는데 현재의 한국의 한자음과 거의 유사하다

왕유는 폄관으로 수치와 자책으로 교직되어 속박의 시인이 되어 고뇌한다

망천석각중 망천집 20집은 왕유의 산수시의 집대성으로 망천 20경을 기재하여 산수시를 유행시킨다

왕유는 당시 원림의 선지를 장안 50공리의 종남산에서 다시 60공리의 산중에 산수지락으로 불교에 묻혀산다

위진 은일풍도로 부득이한 선택인데 이후 의경으로 추앙되어 왕유의 은일과 원림사상의 영향을 받고 망천화권은 명대화가 구영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왕유는 다시 관직에 나가 상서우승에 이르고 욕화중생하고 세속적 추구를 놓고 산고추명의 생활을 한다

시를 통해 시공 시각 청각 감수의 4단계로 시인의 의경을 보여주고 원림은 시인의 의경의 의탁으로 借景喩心 차경유인으로 화의의 모사를 한다

그는 고도한 시감으로 有聲詩畵의 시서화락의 창작방법을 처음으로 만들고 원림창조에 응용한다

원림은 예술경계의 고도로 문인의 의경지미를 중국고전의 원림중 실현하여 몽상중의 망천의 원림을 창조한다

이에 후세문인들의 원림의 전범으로 중국원림의 풍격형태를 바꾸어 시정화의로 무수한 문인들이 천남북해에서 망천에 온다

이들은 왕유의 족적을 찾아 발산섭수하여 1960년대 망천에는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고 자연이 훼손되어 왕유의 묘는 공장아래에 밀려난다

왕유가 심었다는 26미터높이의 은행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역사의 변천을 보여주는데 당시 장안과 종남산사이에는 문인은거의 원림대가 형성되고 유행한다

중만당시기에 이르러 원림은 신속히 발전하여 송대시인 이청조의 부친 이격비는 낙양명원기에서 송초 낙양일대의 천여 사인원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대자사원을 언급하여 리도방택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원림중 당대시인 백거이의 택원으로 향산거사라 하여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백거이는 강주사마시 비파곡을 써서 피세의 희망을 나타내는데 왕유를 본받아 귀숙을 추구하는데 낙양의 전씨원림을 구하여 은거하는데 리도방택원이라 한다

백거이는 철저히 심산으로 은거하여 안일을 바라는데 춘추전국이후 중국문인들이 해결하지 못한 仕와 隱의 모순을 완미하게 해결한다

그로인해 원림은 실용의 속성을 갖게되어 성시중의 자연을 구현하고 나무에 비유한 시정으로 근정 묘언 화성 實義의 관점으로 식물의 형태로 의경을 표출한다

觸類芳通은 당인들의 생활의 사유방식으로 또다른 예술의 발전을 가져오는데 원림은 자연의 축영으로 되는데 1971년 섬서의 건릉에서 장회태자묘가 발굴되는데 묘내의 용도동벽에서 손에 분재를 든 형상의 시녀상의 벽화가 발견되어 원림의 축소화판이다

청대문학가 장조는 성시에 거주하며 그림으로 산수를 감상하는데 분경으로 원유를 본다고 하였다

원림은 분재의 확대로 당대의 시구에는 원림의 의경이 나오고 심미관이 형성된다

불가에서는 대소의 관념은 외부에 있지않고 내심에 있는 것으로 芥納須彌라 한다

현존하는 당시 5만수중 백거이의 시는 4천수로 원림은거의 결과로 후인들은 그를 시마라고 한다

왕유는 시불이라 하여 상응상성하는데 백씨문집은 백거이의 나이 67세에 일본에 전하고 원림의 사상이 전해진다

백거이는 70세에 이르러 모든 가기와 식솔들을 보내고 홀로 죽음을 맞는데 가을나비와 더불어 세상을 떠난다

 

 

 

 

변량의 간악몽

담화일현 비홍답설 시간은 운하를 따라오는데 천년전 변량은 세계제일의 국제도시로 공전절후의 초급원림이 있었다

이도시는 이제 10미터아래 묻혀 인간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황포강의 안개는 조장한 분위기로 송대에는 상상중의 천지인 산수화로 대표되는 예술이 발달한다

동경몽화록이 매일 연출되는 송대변량인 개봉은 1300회를 초과하고 고대중국 예술의 완미한 평형인 범천사의 경당은 1050년간 의구한데 관중의 열정은 여전하여 남당 이욱황제의 우미인이 대표곡으로 연주된다

어느봄날 19세의 청년황제 조길은 예술가기질로 형인 철종의 병사로 갑자기 등극한다

그는 의외로 황제가 되어 역사의 무대에 오르는데 새로운 희망이 되는데 선덕루에서 변경의 신민들의 환호속에 등극한다

경제적 번영으로 송인들은 세외도원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청금도는 휘종의 친필로 재상 채경과 거문고를 타는데 두사람의 예술가로 채경은 25년간의 재상직을 유지한다

모든자금을 간악의 건립에 투여하여 송대황제들의 소박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료의 사신이 와서 술잔의 검박함을 보고 멸시하여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한다

채경은 역경을 인용하여 豊亨豫大의 설법으로 간악은 전후후무의 몽상으로 매진을 촉구한다

간악은 27개의 건축과 250여경점을 세우고 송대의 산수화권을 인조하여 상상중의 선경을 실현한다

송대에는 종합성 성시화기능이 이루어지는데 대도시로 조운의 번영과 경제각부문이 발전하는데 청명상하도에 기록되는데 황하의 범람으로 동경 변량은 지하로 묻힌다

청명상하도는 10년만에 그려진 명화로 송휘종이 직접 청명상하도라고 명명하고 황궁에 소장한다

간악은 황성동북 저와지의 고산이란 의미로 풍수조절이란 명분으로 건립되는데 황권의 영고를 위하여 부득이 조성을 건의한다

1117년 겨울 간악의 개공으로 강남의 무수한 태호석이 운하를 통해 북상하는데 박대정신의 송대 한문화는 극치에 이르는데 수묵산수화의 집대성이 이루어진다

휘종은 그의 산수화에 예술정수의 감오에 이르고 도화를 그리는데 서학도는 휘종의 전세작품으로 화조화의 선하를 연다

1112년 정월 선학이 동경에 날아와 휘종의 붓으로그려지는데 1107-1109년 사이에 황하는 3년간 물이 맑아지는데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출현한다고 기대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길조로 휘종의 성망은 절정에 오르는데 태평성세의 분위기가 충만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서로움이 천기반상의 표현으로 중국역사는 늘 400-800년만에 기후가 냉완을 교차하는 현상으로 역사상 3기의 한랭기가 다가온다

기후의 변화반상은 동지에서 더욱추운 한랭기가 다가오는데 여진의 기병이 백산흑수에서 달려오고 해동청을 어깨에 데리고 남하한다

1115년 금이 건국되고 료를 침식하여 송의 준비가 전혀없던 적이 나타나 당황한다

송인들은 허무표묘의 진경산수를 희구하는데 간악을 수건한 다음해 가무승평하고 의구한데 아골타는 송과 연합을 바라고 료와 공동대결을 바란다

휘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의를 받아들이고 구토회복으로 위엄을 높이고 싶어하는데 1120년 송과 여진은 해상의 맹약을 맺어 공동대처하는데 료는 순망치한의 원리를 강조하여 여진을 경계하길 바란다

송과 여진의 결맹은 쌍방이 소득을 얻는데 금의 수확이 거대한데 여진은 송의 약체임에 너무나 놀라고 맹약은 깨진다

간악이 수건된 4년후 송은 사처에 위기가 오고 160년의 왕조는 쇠퇴를 향해 가고 역사규율의 절점에 도달한다

간악은 송왕조 멸망의 도화선이 되고 동남의 재난이 엄중하여 1112년 휘종은 간악을 지상의 천당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다음해 여진은 송을 멸하기로 하고 송과 전쟁을 시작하고 철기는 동경성아래에 이르고 휘종부자는 대신 궁녀들 보물을 실은 마차와 망망한 북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훗날의 원림은 간악의 그림자를 남기고 역사는 남송이 계승하여 이어간다

 

 

 

 

불후의 임천

1621년 명천계원년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데 사회는 동탕으로 원림생활은 계속되고 국가와 원림은 평형을 이룬다

문징명의 증손 문진형은 강남의 재자로 서향문제의 향초차로 유명한데 문씨가족원림의 일부로 심춘택은 장물지에서 강남문인들의 생활을 기록한다

소주의 금문에 있는 예포라는 원림은 명대의 풍격에 가장 근접한데 문가가 1620년 약포를 구매하여 원림으로 조성한다

가장 특색있는 것이 위장으로 소산석을 담장에 상감하여 하안으로 향하는데 녹수가 담장에 늘어져 비온후 농담한 여운을 남긴다

혼연천성의 입체산수화로 그림처럼 풍아하여 담장에 역사를 그려 시야뿐만 아니라 내심의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장물지는 380년후 소주원림의 모습을 후세에 남기는데 원림의 백과전서로 역할을 하게한다

이미 다국어로 세계에 번역되어 명저로 인정받는데 그의 친구가 園冶라는 저서를 남기는데 원림조성의 참고서로 양생과 거주라는 명대사림생활의 眞面目을 보여준다

은거의 최고 지침서로 유연자득의 생활을 보여주는데 사도의 좌절을 원림에서 극복한다

극치의 雅俗간의 배회로 진퇴의 철학이 보이는데 문징명의 생활이 전범으로 문징명은 10여차의 낙방으로 54세에 진사가 되는데 관장의 흥쇠를 거듭하여 인내를 보여주고 낙향후 겨우 안정을 찾는다

13년전 그는 입신양명하여 소주 최대의 사가원림인 졸정원을 설계하여 뉴욕박물관의 졸정원 31경도는 모화인데 문징명의 작품이다

관장을 떠날 결심을 하였으나 귀향후 시화중의 원림에 투신하나 생명 정치 예술과 생활의 번뇌로 고민한다

당백호의 당인원은 기타원림과는 다른 묘지인데 그는 당년 과거시험문제를 추측하여 물의를 일으킬 정도의 천재로 해원의 신분으로 진사를 포기하고 만다

문징명은 영준유아한 기질이라면 당백호는 방탕한 광적인 자만감으로 가난으로 폭망한다

400년후 당인원에는 당시의 강남 제일 재자의 묘가 들어서 무수한 내방객이 그를 추모한다

1626년 초 번영안일의 소주성은 불안에 드는데 홍색복장의 금의위가 시정에 들어오는데 동림당인 주순창을 잡으러 온다

역사상 저명한 환관과 동림당인들의 충돌로 정치투쟁이 공개화되어 소주인들은 주순창을 용대하고 수만의 백성들이 거리로 나온다

그수령은 문진형으로 문아유약한 그가 가장 견강한 모습으로 호연정기를 보여준다

성세호대한 시민운동으로 사악한 집정자의 분노를 일으켜 철기가 달려오고 5명의 의사가 탄생하고 원림밖의 동탕을 기념하는 5인지사의 묘지가 생긴다

남방에서는 곡우시절에 신차를 음미하고 모란을 관상하는데 창포의 종자를 뿌린다

추분이 가까워지면 서화의 표구에 가장 적합한데 1635년 시민운동이 9년간 계속되는데 9년후 명나라는 사라진다

농민기의군이 점차 북경에 접근하는데 강남의 원림에는 희곡의 치미로 가반들은 매일 공연하고 춘등미를 감상한다

문진형은 백발의 노인으로 1637년 재차 출사하는데 인생의 득실을 건 도박을 거는데 소한에 출발하고 기대와 불안으로 떠나는데 3년후 피폐한 모습으로 귀향한다

이후 문가는 사관의 길은 끝나는데 원림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고 안위를 얻는다

관장과 원림은 치상과 치료의 기능으로 상호보완하는데 졸정원은 왕씨 서씨로 이후에도 수차례 주인이 바뀐다

1645년 문진형은 귀향 수년후 원림밖은 이미 청군이 강남을 점령하여 체발령으로 극도의 저항이 일어난다

유연한 생활에 도취한 문진형은 꿈에서 깨어나 장물지를 버리고 자살을 기도하는데 6일후 단식후 사망한다

무석의 寄暢園은 鳳谷行窩로 송대시인 진관의 후인들의 원림으로 명대만력시에서 1950년대초까지의 주인으로 이어진다

500년간 진씨가족들의 청명절 취회장소로 2013년 청명에도 불변의 전승으로 인화된 자연인 원림은 물화된 심성으로 변한다

원림은 고화된 역사이자 고금의 거울로 역대문인들의 내심을 반사하는 창이라 한다

또한 부동시대의 문화자각으로 경력과 과거를 후인들은 상상과 독해의 통로로 여겨진다

 

 

 

요원한 귀휴

소주와 항주의 원림이 가장 많은데 시간은 성시를 정지시키지 못하는데 태호석은 이도시의 대표적 돌로 이제 진귀한데 천년전 이돌은 고갈되었는데 절강 호주시 백현향에서 유사한 돌이 나온다

이제 중국의 부자들은 원림과 별장건축붐으로 태호석은 이제 앙귀하여 구하기 힘들다

그들의 조상과 다름없이 원림을 희구하는데 태호석은 필수적으로 대산대호를 재생시킨다

고대 태호석은 잠수하여 구하던 것으로 당시 백성의 고충을 알수 있는데 송대부터 태호석의 광풍이 일어난다

서산의 단석봉의 태호석은 채취의 대상으로 운하를 통해 변량으로 화석강이란 이름으로 실려가 간악에 장착된다

10척의 배에 일강을 실어 보내 화석강이란 기석으로 변량에 도착하고 송멸이후 강남일대에 굴러다니게 된다

사자림이란 가산은 중국의 원림중 유일하게 남은 북송 화석강의 유물로 어린이들의 오락장이 되었다

이사자산은 중국의 건축대사인 패율림의 집으로 석재건축의 대가로 어린시절의 유력이 그를 대가로 만든다

그의 숙부 패진미는 폐허가 된 사자림을 9년간 수복시켜 지금의 모양으로 만들어 복원한다

돌은 자연의 정화로 사람은 과객일뿐으로 남는 것은 풍경으로 사람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원림은 고대와 현대의 결합으로 자연은 인류에게 최고의 산물인 공기로 물인 것이다

물은 생활의 일부로 사람들은 물을 찬미하는데 물의 사용과 치리는 가장 무거운 과제로 상고신화중 인류의 치수지도는 자신의 이해로 대우치수는 대자연의 은사와 징벌을 알게 되는데 대자연 통제의 능력을 보여준다

원림은 고사외의 기적으로 성공적인수는 원림의 핵심으로 유동하는 폭포등 인수 절수가 중요하다

가산은 가능하나 가수는 불가능하여 고인들은 물이 없는 곳에는 원림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하여 원림의 물은 자연의 선물로 지혜와 근로가 필요하다

사자림의 물은 암도와 하천과 연결된 봉극을 이용하여 수압을 이용하고 낙차를 이용한다

藕園의 물은 하면과 수평으로 하여 사계절 물을 원림과 통하게 하여 순환시킨다

사자림도 마찬가지로 낙차를 이용하여 치환하는데 축수도 가능한데 지상의 수원을 위한 설비는 없어 고인들의 지혜의 상징이다

怡園은 수십미터의 지하수가 통과하도록 설계되어 외면의 수계와 서로 통하게 한다

이제 오염으로 사용이 어려워지고 수질처리가 필요하여 어려움에 봉착하여 새로운 물을 순환시킨다

연꽃은 중국에서 3천년이상의 종식사로 과학적으로 연잎은 강온작용을 하는데 지당생물로 인한 오염을 막아준다고 한다

연꽃은 많을수록 좋아 농경시대의 지혜로 지금도 유효한데 절강 온주 영가현의 촌장에는 모든 물을 샘을 통해 조달하는데 아란석등 산석으로 모든 가항을 깔고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동에서 서로 물이 흐르도록 설계하였다

2미터 넓이의 냇물이 전마을을 흐르도록하여 인수구를 만들어 생활수를 방대하게 공급하여 자연구통의 방식으로 각가정의 입구에서 취수가 가능하다

홍수시에는 냇물바닥의 기와편이 물의 흐름의 완급을 조절해주는데 물의 넘침도 방지한다

모든가옥의 문은 냇가로 나있어 청산전야를 볼수 있도록하여 도화원을 방불하게 한다

사람과 원림의 관계는 사람과 산수의 관계로 산수의 영향을 받도록하여 수천년의 생활전통과 경험의 축적으로 사상문화를 키워왔다

필원은 일무정도의 원림인데 건륭시 장원이자 사학자 문인인 필원이 세운 것으로 청명상하도를 소장자로 후손인 필이책은 절강지부로 귀향후 확건하여 세운곳이다

 

 

 

창밖의 화원

중국에는 산해경과 도덕경의 양부는 물과 심을 대표하는데,문명의 진정은 물과 심을 통한 과정으로 사람과 자연의 연변이다

창신과 전통은 모순이 없어야 하는데 영남원림의 전통은 명청시기 서방문화의 영향을 받는데 청휘원,여음산방,양원은 영남원림의 대표로 명청시기 건조한다

유리창은 영남원림의 표지로 동서방의 풍격이 혼합되어 중국의 의경을 주제로 한 그림이 필수적으로 걸리는데 서방 혹은 홍콩에서 고향에 귀근하여 조상들의 유지를 이어가는 영남인들은 仁을 중시한다

인덕 인후 인애가 견실한 교량이 되어 양루의 정신은 중국적인데 피안의 정신이다

탕현조는 모란정환혼기에서 정은 어떻게 생기는지 모르나 한번가면 깊어진다고 하였다

사람은 늙어지면 고집이 강해지는데 소주사람들은 여행을 즐겨하지 않는데 원림에 산수를 농축하여 필요성이 없다한다

중국인들은 상수화를 통해 원근경의 산수를 즐기는 전통을 이어온다

원림의 새는 자연을 보호해주는데 사람과 새는 같아 귀숙을 원하는데 성시와 시간은 부단히 경신한다

양주는 날로 번성하는데 화초를 가꾸는 것은 양주사람들의 낙으로 양주의 목향향은 고건축의 박물관으로 원림구이다

현대화로 점차 개발의 증가로 구원림구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자연은 점차 파괴되고 새와 꽃도 사라지고 있다

 

 

 

 

 

 

 

 

 

 

 

 

 

 

 

 

 

 

 

 

 

 

 

 

 

 

 

 

 

 

 

 

 

 

 

 

 

 

 

 

[출처] 중국원림|작성자 박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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