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효’윤리
정조는『논어』에서 언급되고 있는‘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면서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으니, 윗사람 범하길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지 않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면 도道가 생기니 효성과 우애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라는 논리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우리 선대왕께서는 효제를 근본으로 삼으시고 환과鰥寡를 우선으로 하는 정사를 펴시면서 50여년을 두고 늘 근심 속에서 오직 선대의 뜻과 사업을 계술繼述해 갈 생각을 하셨다.’는 언급에서 이를 확인할수있다.
정조가 이처럼 부자간의 사랑에 대해 관심을 둔 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단순한‘인륜’이 아닌‘천륜’에 근거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는『효경』에서‘부모와 자녀관계의 도道는 천성天性이다.’라고한 것이나,『시경』에이르기를‘큰 덕행이 있으면 사방의 나라들이순종한다.’라고 한 것과 같은 형태의 인식이기도 하다.
또 정조의 시문집『홍재전서』에서‘충이나 효 또는 열행烈行에 한 가지라도 관련이 되면 내가 반드시 높여 장려해서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고 언급한 것이나,‘임금이 백성이 아니면 누구와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그래서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고 거론한 점을 통해서도 효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물론 정조가 이와 같은 논리를 언급한 것은 풍속을 고르게 하고자 한것이 목적이었지만, 여기서 중시할 부분은 군주라고 하더라도 솔선하여‘효孝’를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정치지도자의 행태에 따라 나라의 치란治亂이 결정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실천한 것이다.
정조의‘효’에 대한 논리구조를 보면,‘조상으로부터 내려받아 되돌리는 것을 효孝라 하고, 자손에게 내려주는 것을 자慈라 하며, 동족에게 베푸는 것을 목睦이라 하고, 동족同族에게 베푸는 것을 확장하면 인仁이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효제孝悌가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라는 유가윤리의 이념을 계승하고 구체화 시킨 것이다. 인仁이 곧‘사랑’이라는 점에서 그의 효심은 자연스럽게‘애민정치’, 즉‘노인공경’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정조의 노인공경
정조는 선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비명횡사하고, 세손으로 책봉된 이후에도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여러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속에서도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일을 도모하였다. 왕위에 오른 이후, 선친인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고 능침陵寢을화성 현륭원顯隆園으로 천봉遷奉하는가 하면,『오륜행실도』를 간행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이는『이륜행실도』와『삼강행실도』를 합한 것으로,‘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며, ‘노인을공경’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자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정조가 노인을 공경하는 모습은 화성행궁 봉수당奉壽堂에서 거행된 진찬례進饌禮에서 잘드러난다. 이는 어머니‘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연으로, 이날 행사에 혜경궁의 내·외빈 82명, 영의정 홍낙성(78세), 우의정채제공(76세) 등 15명과 이들의 아들·손자 등 23명, 화성부 노인 최상후(84세) 등 384명이 연회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조는 신민臣民들과 그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 양로연養老宴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효행이 뛰어난 사람들을 표창하는가 하면,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가운데 61세 이상 된 노인들에게는 별도로 비단 1필씩을 하사하고 쌀과 소금, 미역, 간장, 황염건黃染巾, 나무 지팡이 등을 나누어 주기도하였다. 이러한 예는『서경』에 이른바‘백발의 노인에게 물으면 잘못되는 바가 없을 것’이라는 양로의 예를 인식하고 실천한 것이다.
또 왕실의 인척은 물론“신하로서 나이가 70세가 넘고 내외가 해로하는 자가 자그마치 13명이나 된다. 이런 경사스러운 때를 맞아 기축祈祝하는 일로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노인을 공경하는 정사政事는 또한 은혜를 베풀어 봉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연로한 신하들과 그 부인들의 나이를 일일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지사 송제로는 81세이고 정부인 엄씨는 80세이며,전참판 서병덕은 80세이고 정부인 박씨는 74세이며, 전 참판 신응현은 70세이고 정부인 윤씨는 70세이다. 이상 여러 기로耆老들의 집에는 별도로 쌀과 고기를 주고, 안사람들에게는 명주를 주어 오부五部의 낭청으로 하여금 문안하게 하라.”고 해당 기관에 지시하는 한편, 양로연이 끝난 뒤 잔치에 참여한 관료들에게도 품계를 1품씩 올려준 것은 노인 봉양에 대한 그의 남다른 면모를 읽을수있다.
이러한 정조의 노인공경은 자칫 특수한 지역에서의 단발성 행사로 보일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유가의‘효’원리에 부합되게 실행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역대 조상인 종묘宗廟에 나아가 인사를 올리고 종신宗臣을 찾아 인사올린 모습은 그의‘노인공경’이 단순히 자가적인‘효심’이 아닌 사회와 정치·종교·철학적으로 확대되는 ‘효의 확장원리’를 보여준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양반과 상민간의 신분적 갈등을 서얼허통정책庶孼許通政策을 통해 완화시키고, 시장자율화 정책으로 불리는 신해통공정책辛亥通共政策을 통해 국가경제의 기반을 다져나간것도 이와 같은 원리 때문이다.
물론‘노인을 공경’하는 목적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는 대의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정조가 백성을 교화敎化시켜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고자 한 것’은 궁극적으로 물질보다는 정신적 삶을 더욱 더 고양高揚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것도 없다 하겠다.
글. 김해영 (수원시 홍재사상연구회 회장, 철학박사) 사진.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