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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자료

거칠부(居柒夫)

작성자열기|작성시간08.01.02|조회수185 목록 댓글 0
거칠부(居柒夫)
新羅 中興의 礎石
생몰년 미상
新羅 眞興王 때의 宰相
545年 新羅의 歷史書「國史」를 펴냄
551年 高句麗의郡 10個를 뺏고 僧侶 惠亮을 데리고 옴
576年 上大等이 됨
居柒夫는 新羅의 王族으로 태어나 小國의 설움을 떨치고자 발분 努力하는 一生을 보냈다. 같은 時代에 맹장 異斯夫(이사부)가 있어 國防의 대들보가 되고, 居柒夫는「國史를 編纂(편찬)하고 佛敎를 隆盛(융성)하게 하는 文化的 基盤(기반)을 닦았다. -본문에서....
마음을 씻어라
한낮의 산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씩 소소리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은 가볍게 어루만지고, 透明하리만큼 맑은 물이 골짜기를 감싸고돌며 햇살에 물 여울이 은비늘을 반짝거릴 뿐이다. 一瞬間 그 摘要함을 흔드는 畏鍼(외침)이 울려 퍼졌다. 겁그대들은 眞正 俗世를 떠나왔는가!겂 깊은 숲 속의 아담한 절이었다. 建物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마당은 깨 넓었다. 거기에는 百名에 가까운 무리가 앉아 있었다.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젊은 僧侶들이었다. 一喝(일갈)을 토한 이는 맨 앞 너럭바위에 걸터앉은 老僧(노승)이었다.
그의 이름은 惠亮(혜량), 이미 靑年時節부터 道名이 자자하여 수많은 高句麗 젊은이들이 다투어 몰려와 그의 弟子가 되고자 하였다. 그래서 法堂이 좁아 뜰에 나와 가르침은 펴는 중이었다. 주장 자를 쥔 惠亮(혜량)은 맨땅에 무릎을 끓고 앉은 젊은 僧侶들을 둟어지게 노려보았다. 空中에 뜬 매가 먹이를 찾는 듯 매서운 눈빛이었다. 젊은 修者들은 아연 긴장한 表情으로 惠亮의 입을 쳐다보았다. 한同案 꾸짖듯이 노려보던 惠亮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겁머리를 깎고 산 속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깨달음을 얻는 건 아니라.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하니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거늘, 어찌 아직도 속세에 대한 미련이 그대들의 마음에 가득하단 말인가? 모두 개울로 가서 몸을 씻고 또한 마음을 씻도록 하라. 그리하여 來日부터는 虛空처럼 텅 빈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라.겁 惠亮은 주장 자로 땅을 쿵, 치고는 일어나 장삼 자락을 펄럭이며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修者들이 一齊히 일어나서 두 손 모으고 절을 하였다. 그런 다음 숲을 지나 透明한 물이 흐르는 溪谷(계곡)으로 갔다. 겂마음의 때를 씻으라는 말씀인데, 대체 마음이 어디 보여야 씻든지 말든지 할 것 아냐.겁 겂딴生覺을 말라는 말씀이지.겁 “世上에 對한 未練(미련)을 버리라는 말씀이야.겂 僧侶들은 투덜거리며 벌고 벗고 沐浴을 했다.
더러는 물장구를 치고, 더러는 서로 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쳤다. 故鄕에 對한 그리움도, 깨달음에 대한 慾望(욕망)도 잠시 잊은 한가러운 時間이었다. 모두들 몸을 씻거나 물장난에 餘念(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키가 큰 한 젊은이는 沐浴도 하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몸을 씻는데, 자네 혼자 마음을 씻는가?”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키 큰 젊은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다시 누군가가 물을 끼얹자 천천히 눈을 뜨고 먼 남쪽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날 밤이었다. 모두들 깊은 잠에 빠진 시간인데 법당에는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
주지 惠亮(혜량)이 눈을 감은 채 佛經을 외고 있었다. 그 앞에는 키 큰 젊은 승려가 무릎을 끓고 앉아 뭔가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惠亮(혜량)이 염주를 돌리던
손동작을 멈추고 눈을 떴다. 키 큰 젊은이는 입이 마른 지 혀로 입술을 적시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沙彌(사미)여, 이제 그만 그대 갈 곳으로 돌아가거라.”
惠亮이 말에 젊은이가 따져 물었다. 겁저는 한갓진 시골에서 태어나 공부를 하고자 여기로 왔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라 하십니까?”惠亮이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겁내가 비록 늙어 總名이 흐려졌으나 사람을 몰라보지는 않는다. 또한 내가 아니라도 高句麗에는 人才가 많으니라. 어서 바른 대로 대지 못할까?”
惠亮의 號筒(호통)에 짐짓 놀라 머뭇거리던 젊은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겁저는 新羅에서 온 居柒夫라고 합니다.”惠亮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겁너는 지금 비록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있지만, 네 마음 은 전혀 딴 곳에 있다. 그렇지 아니하냐?겂
속내를 환히 들킨 居柒夫는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저는 성이 金氏이며, 新羅17代 임금이신 奈勿王(내물왕)의 5대손 입니다. 우리 新羅는 먼 東南쪽 바닷가의 작은 나라입니다. 저는 新羅를 高句麗, 百濟에 버금가는 나라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百濟와 高句麗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중입니다.
또한 스님처럼 크게 깨우치고 싶은 慾心도 있습니다. 결코 일부러 스님을 속인 건 아니니 용서하십시오.”
惠亮은 居柒夫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두 손을 잡았다. 겁내가 너를 꾸짖는 것은 新羅人이라서가 아니다. 네 몸에 흐르는 기운으로 보나, 생김생김으로 보나 너는 산 속에서 工夫만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서 들러 네 나라로 돌아가라, 정체가 밝혀지면 신라의 諜者(첩자) 몰려 살아 남기 어려울 것이다.”겁慾心(욕심)이 많은 몸이라 무슨 일부터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깨우쳐 주시니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이 길로 제나라로 돌아가 할 일을 찾아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居柒夫는 큰절을 올린 다음 돌아섰다. 惠亮이 문 밖까지 따라나와 말했다. 겁三國의 앞날이 예사롭지 않구나. 지금은 작은 나라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신라가 크게 이러나
高句麗, 百濟와 힘을 다툴 것이다.
너는 상이 매의 눈에 제비 턱이니 훗날 용맹스런 將帥(장수)가 될 것이다. 그때 나를 만나게 되더라도 해를 끼치지 말거라.”惠亮(혜량)은 이미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겁제가 비록 온전히 부처님의 弟子(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스님께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만일 제가 스님의 말씀처럼 將帥된다 해도 스님께는 털끝만큼도 해를 입히지 않겠습니다. 제가 스승님의 말씀과 같이 된다면 그 줄 거움도 같이 누릴 것을 내일 아침
떠오를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합니다.
“고맙구나. 조심하여 가거라.”
혜량이 거칠 부의 어깨를 떠밀었다. 거칠 부는 달빛을 등에 지고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상은 『삼국사기』「열전」과 『해동고승전』을 바탕으로 거칠 부와 혜량의 만남을 다소 각색하여 그려 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거칠 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거칠 부(居柒夫)의 성은 김씨요. 내물왕의 5대손 이다. 조부는 각간잉숙이고 부친은 이찬 물력이다. 거칠 부는 어려서부터 매이지 않고 원대한 뜻이 있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을 유람하다가 고구려를 엿보고자 그 지경에 들어갔다. 이때 법사 혜량이 법당을 열고 경을 강론한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불경 강의를 들었다.
거칠 부의 이름은 또한 황종(荒宗)이라고도 전하는데, ‘거칠 황’자에 ‘마루 종’이다.
마르는 으뜸이란 뜻으로 사대부(士大夫) 귀족을 나타냄이다. 황종 역시 이두 식으로 읽으면 거칠 부라고 신채호는 풀이한 바 있다. 그리고 삼국의 앞날을 예견한 혜량은 이때 이미 거칠 부와 모종의 밀약을 했을 것이라고 『조선상고사』는 주장한다.
때는 5세기 중엽이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한가을 경계로 한반도 중부 지역을 놓고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격동기였다. 그 가운데 신라는 가장 미력하였다. 중국 동해안과 옛 오월(吳越)과 일본에까지 세력권을 확대한 백제나, 만주와 요동 일대를 석권하여 대륙과 쟁패하는 고구려에 비길 바가 못 되었다. 이에 신라의 왕족인 거칠 부는 스스로 중이 되어 각국을 염탐하며 국가의 장래를 융성 시킬 것을 도모했던 것이다.
파약(破約)
거칠 부와 같은 시대에 신라에는 또 한 사람의 인재가 났으니 바로 맹장 이 사부(異斯夫)였다. 그 역시 성은 김씨로 일찍부터 정치에 나서 아슬라주의 군권(軍權)을 맡은 도둑이 되었는데, 우산국(于山國 : 울릉도)을 복속시킬 때의 일화가 매우 흥미롭다.
지증왕 13년, 작은 섬나라인 우산국이 신라의 명을 따르지 않는 일이 점차 늘어나자 조정에서는 우산국을 복속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동해 한가운데 고립된 섬인데다 지형도 험악한 고지에 성을 쌓고 웅거하는 우상 국을 점령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들은 해전에 능하고 또한 높은 산성에 위치한 터라 육군이 주력인 신라로서는 만만치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이에 이 사부는 한 가지 묘책을 냈는데, 고도(孤島)에 고립되어 식견이 좁은 우산국 사람들이 허점을 찌른 것이었다.
이 사부는 나무로 커다란 사자를 만들어 색을 입혔다, 그리고 그것을 선단 머리에 싣고는 우산국으로 가서 북소리, 나팔 소리도 요란하게 위세를 떨쳤다.
“너희들이 속히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섬에 풀어놓아 모두 짓밟고 물어 죽이게 할 것이다.!”
화산섬인 울릉도에는 지금도 별다른 맹수가 없다. 그런 터에 우람찬 사자 형상을 대하니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게다가 흔들리는 배에 실린 그것은 넘실넘실 살아 움직이는 듯했을 테니 금세 낭패감에 휩싸여 항복하고 만 것이다.
이처럼 기지와 용맹을 두루 갖춘 이사부가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군 권을 장학하니 신라는 대국으로 융성할 대들보를 얻은 셈이었다. 젊어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지증왕, 이때 신라는 백제와 화친을 맺고 공동으로 고구려와 대항하는 등 소국에서 벗어나 면모를 일신하였다. 하지만 강국이란 군사력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임을 이 사부는 깨달았다. 문화적 능력이 미약하다면 그것은 큰 대들보를 이용해 웅장한 집을 지어도 초석이 약하면 모래성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이 사부는 깨달았다. 문화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라의 정통성을 세워야 했고, 그러자면 왕조 사를 서슬 하는 것이 급선무다. 진흥왕 6년 가울 7월, 이찬 이사부가 어전에서 아뢰었다. “이제 우리 신라는 백제와 화친을 맺을 만큼 힘을 길렀습니다, 안으로 법이 세워지고 밖으로는 영토가 넓어져 아무도 우리를 계림이나 금성이라고 얕보지 않습니다. 시조 혁거세 거서간께서 나라를 세우신 지도 이언 600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마땅히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여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이 옳은 줄 아룁니다. 국사(國史)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만대에 보여 주는 것인데, 이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서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경의 말씀이 장히 옳소, 이웃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사직의 기록을 펴낸 지 몇 세대가 지났는데, 만시지탄은 있지만 서두러 주시오, 하지만 이 막 중한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단 말이오?”황태후가 말했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갓 13세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황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부의 말이 이어졌다. “대아찬 거칠 부는 어려서부터 많은 지역을 유람하여 견문과 학식을 따를 자가 없으니 그가 반듯이 해낼 줄로 압니다.”
이사부가 거칠 부를 천거하자 그대로 재가가 났다. 혜량에게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거칠 부는 당시 17관등 가운데 제5위인 대아찬에 올라 있었다. 명에 따라 그는 널리 문사(文士)를 모집하고 각지의 자료를 모아 국사 편찬에 매진하였다. 이로써 서라벌의 부족 국가로 출발한 신라는 거의 600여년 만인 서기 545년에야 처음 역사를 찬술하게 되었으니, 이는 율령의 반포와 더불어 고구려보다는 200년 이상, 백제보다는 100년 이상 늦은 셈이다. 이윽고 신라의 역사를 편찬한 거칠 부는 이름하여 『國史』라 하였고, 이 공로로 파진 찬의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국사』역시 고구려의 『유기』백제의 『서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전해지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시나브로 한반도는 점점 더 큰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대항하면서도 꾸준히 백제를 견제하며 세력을 키웠다. 북방의 간 성인 고구려에 일대 위기가 찾아왔다. 서기551년 돌궐 족이 동침(東侵)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에서 크게 싸움을 벌였다. 고구려의 양원 왕은 장군 고홀을 보내 대적하였는데, 쉽게 판가름이 나지 않고 일대 접전이 이어 졌다. 돌궐의 침입은 백제에게는 절호의 기희였다. 백제는 장군 달기(達己)로 하여금 정병 一萬의 별동대를 거느리게 하여 양원 왕마저 戰場으로 사이, 空城이 된 고구려의 도읍 평양을 급습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주력 군이 빠져나간 도성은 맹장 달기가 이끄는 별동대에게 무너져, 양원 왕은 평양 성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도피하였다. 이때 신라의 진흥왕은 이 사부와 거칠 부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게 하였다.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은 터라 백제는 고구려에 합공을 할 수 있게 되어 좋아라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거칠 부와 이 사부는 일단 백제군과 연합하여 죽령 이북에 자리 산 고구려의 도살성(지금의 진천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 지역은 백제의 옛 영토이므로 신라는 마땅히 도살 성을 백제에게 양도하고 고구려의 본토를 향해 진군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런데 신라는 도살 성을 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사부는 거기서 서 진하여 백제의 옛 성 10여 개를 신라의 영토로 만들어 버렸다. 신라는 역시 백제의 숙적이었다. 동맹을 맺었다하여 믿었던 것이 백제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된 셈이었다. 동맹군에게 일격을 당한 백제는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격이었다. 평양을 점령했던 달기의 반격을 받아 전멸되다시피 하였으니 숙적 고구려의 반격을 받아 전멸되다시피 하였으니, 숙적고구려의 도성을 점령한 초유의 개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때 신라가 백제와 동맹군의 의리를 지켜 함께 북진했더라면 고구려를 패망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으니, 당시 진흥왕의 결단은 삼국의 판도가 걸린 중대사였다. 일견 광대한 영토를 가진 백제에게 충청도 동북쪽 정도는 미미한 영역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라에게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결단이었으므로 진흥왕은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일 고구려나 백제가 어느 한 나라로 병합된다면 소국 신라는 그 회오리에 휩싸여 덤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에 영토 확장을 부심 하던 진흥왕으로서는 실리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이로써 나제동맹은 결렬되고. 이 사건은 신라를 강성하게 만든 분수령이 되었다. 경상도 동부 지역을 기반으로 웅거하던 신라가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고, 비로소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결정권을 쥘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단과 결행에는 이 사부와 거칠 부의 의중과 활약이 절대적이었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이 부끄러운 배신을 감추기 위해 신라는 역사에서 소상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신채호는 말한다, 그러나 거칠 부의 열전에 백제가 먼저 평양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거칠 부가 죽령을 넘어서 10개성을 장학했다는 기록은 미처 지우지 못해 오늘날 근거가 남은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거칠 부는 전편과 이어지는 일화를 남겼다. 거칠 부가 죽령을 넘어 충청도 북쪽 지역을 차례차례 점령해 나갈 때였다. 한 시골을 지나는데 먹빛 옷을 입은 승려들이 도열하여 신라군을 영접하는 것이었다. 적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서 오시오, 장군.”도열한 무리 가운데 수장인 듯한 노승이 나와 거칠 부를 맞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거칠 부는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예를 갖추었다. “스승님!”
노승은 거칠 부의 앞날을 예견했던 혜랑이었다.
“옛날 떠돌며 배우던 때에 크게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 뵈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거칠 부가 옛일을 잊지 않고 되살리니 혜. 량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지금 고구려는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원컨대 장군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거칠 부는 기꺼이 혜량을 수례에 함께 태워 그 무리와 더불어 서라벌로 돌아왔다. 혜량으로서는 기울어 가는 고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른 것이었다
진흥왕 역시 혜량을 환대하여 僧統으로 삼았다. 신라는 법흥왕 치세에 이차 돈의 순교로 인해 불교가 퍼지기 시작했으나, 아직 체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혜량이 승통(僧統)이 되고부터 비로소 팔관회와 백좌강회를 베푸는 등 체계적인 불법 포교에 나섰다.
하지만 혜량이 과연 순수한 불교도였는지는 의문이다. 팔관회는 고구려 제천 의식의 일종으로 을파소가 부흥시킨 고유의 도법 수련과 연관성이 깊기 때문이다, 신라의 화랑 제도를 구체화한 이도 역시 진흥왕이었으니, 혜량의 망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그는 현묘지도와 불교를 융합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 후 신라는 가야를 병합하고 창성 일로에 들어섰는데, 그 선봉은 바로 화랑들이었다. 이렇게 하여 소국 신라가 문화적 기반을 갖추고 세력을 떨쳐 명실 공이 대국으로서 면모를 일신하게 되니, 이 사부와 거칠 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칠 부는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소국의 설움으로 떨치고자 발분 노력하는 일생을 보냈다.
같은 시대에 맹장 이사부가 있어 국방의 대들보가 되고, 거칠 부는 『국사』를 편찬하고 불교를 융성하게 하는 문화적 기반을 닦았으니, 신라의 강성이 이때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거칠 부는 진지왕 원년에 재상인 상대 등이 되어 내외 정을 총괄하였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그는 78세에 숙환으로 숨졌다고 하는데, 태어난 연도를 모르므로 돌아간 때도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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