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桑村金子粹의生涯
라는 詩를 지었다. 그는 前項의 詩에서 보는 바와 같이‘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라고 하여 高麗가 亡하자 새로운 사람들이 지조 없이 날뛰고 있음을 개탄하고는‘忠臣列事는 모두 다투어 회포를 옲는다’라고 하면서 高麗에 대한 忠節을 다짐하고 있다.
또 그는 不朝峴에 올라서
忠臣烈士今安在(충신열사금안재) 충신과 열사들 지금은 어디있는가
飛去山禽語古春(비거산금어고춘) 날아가는 산새들도 옛 봄을 노래하네
玉階花心風後老(옥계화심풍후노) 玉階의 꽃술들은 바람 뒤에 시들었고
金陵樹色雨中貧(금능수색우중빈) 金陵의 나무 빛깔은 빗속에 파리하네
應知日短淸香閣(응지일단청향각) 알괴라 淸香閣에는 해가 짧아졌을 것이고
相必天寒觀德人(상필천한관덕인) 필시 觀德人에게도 날씨는 차가울 것이라
感淚振衣臺上客(감루진의대상객) 臺(대)위에선 이 길손은 강개한 마음에
옷을 떨치는 도다
此時幾泣我王身(차시기읍아왕신)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
각하고 울었던가 라는 시를지었다.
그는 위의 시에서‘충신 열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라고 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토로하고 있다. 또 태조 왕건의 능을 참배하고
修德就閒後(수덕취한후) 德을 닦느라 벼슬길 떠난 뒷일망정
臣維安獨歸(신유안독귀) 臣만이 어찌 혼자 돌아가겠소이까
榛笭爲誰詠(진령위수영) 榛笭(진령)25)은 누구를 위하여 읊겠는가
葵藿自春開(규곽자춘개) 葵藿(규곽)26)은 봄부터 피어있구려
泣下風雲淚(읍하풍운누) 風雲(풍운)의 눈물 수 없이 흘리면서
踏來녹劫灰(답래녹겁회) 녹世(녹세)의 劫灰(겁회)27)를 밟아왔다오
侍陵將뇌주) 陵寢(능침)을 모시고 술잔을 올리니
北斗影徘徊(북두영배회) 北斗(북두)의 그리림자 배회하네28)
라는시를 지어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그에게 대사헌의 직을 내려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은 평소부터 그의 덕망을 존경하고 있어 형조판서의 직을 내려 부임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그는
“나라가 망하니 충의도 더불어 망하는 구나. 내가 평생에 충효를 기약하면서 살아 왔는데 이제 만약에 몸을 굽힌다면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님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고 탄식하고는 서울로 향하였다. 광주의 秋嶺(추령)에 이르자 자손들에게 “나는 이제 죽어서 오직 신하된 절개를 다할 뿐이니, 내가 여기서 죽거든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은 세우리 말라”고 유명하였다.
이어
平生忠孝意(평생충효의) 평생토록 지킨 忠孝 = 내평생의 충효의 뜻을
今日有誰知(금일유수지)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 오늘날에 누가
알아 주리오.
一死吾休恨(일사오휴한) 한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마는= 나 한번 죽어
원한의 눈감으면
九原應有知(구원응유화) 저승길 구원에서 알아 줄 이 있으리.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29)
라는 節命詞(절명사)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는 태종13년(1413)11월 14일이었다. 향년 6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