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결정되는 초등학교
제42회 정혁진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난 세월이 흘러 돛단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듯 오늘의 나는 그렇게 멀리 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개교 100주년 행사를 빛내기 위해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망설였지만 조그만 기여라도 하는 것이 나의 도리라 생각해서 이제 타임 머쉰을 타고 60년 전 이리국민학교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본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졸업식 날이었다. 우등상 등 여러 상을 타 기쁜 날이었다. 그리고 남아있을 아우들에게 불러 주었던 노래,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떠나갑니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졸업을 하고 나서 모두 흩어졌지만 아닌 게 아니라 냇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 그런 만남이 지금까지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나서도 시시 때때로 나는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 마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감상에 젖는다. 그러면 졸업식장에서 나와 교문 앞에 줄지어 서서 마지막 배웅해주던 은사님들, 그리고 후배들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정말 노래 가사처럼 정들었던 교실, 선생님, 그리고 아우들. 울먹일 것 같은 그런 향수의 파노라마가 치는 것은 웬일일가?
그 후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이처럼 애틋했던 졸업식은 더 이상 없었다.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정서적으로 인간을 키워주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선생님들을 모두 기억한다. 1학년 때의 선생님께서는 내가 잘못하여 뚜껑이 없었던 오물통에 빠졌었는데 나를 풀장에 데리고 가 목욕을 씻겨주고 자식처럼 돌보아 주시던 일이 지금까지도 기억이 남는다. 또, 6학년 때는 중학교 입시 공부를 위해서 저녁 늦게 까지도 공부했는데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는 때라 어둠이 깔리면 촛불을 켜 놓고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재미있었던 것은 매일 시험을 보고, 시험성적 순으로 햇볕이 쪼이는 창가의 1분단부터 석차 순으로 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항상 4분단을 차지하는 부진한 아이들은 꼬리표를 붙여 여학생 반을 돌리는 제도가 있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 동원됐던 수단이지만 지금 그런 발상을 했다가는 큰일 날 일이다. 나의 반 담임은 박광렴 선생님이었다. 국어, 수학, 사회, 역사, 서도, 그림 까지 모든 과목을 혼자서 잘도 가르치셨다. 나에게 입시 공부로 건강이 약해졌다고 비타민을 처방해 주는 등 학생들을 자식처럼 돌보아 주셨던 분이시다. 졸업을 하고 나서 보은을 할 기회를 찾지 못했던 것을 항상 마음에 걸리었다.
또 이 시절을 생각하면 민주주의 교육을 잘 받았던 것 같다. 내가 다닐 때는 전체 학생 수는 3,000명, 그리고 내가 다니던 때는 6학년이 5개 반이었는데 3개 반은 남학생, 나머지는 여학생 반이었다. 각 반에는 어린이 회장이 있었고, 전교 어린이 회장은 여러 후보가 경쟁해서 전교생의 투표로 선출하도록 되어있었다. 6학년에 올라가자 나도 5명의 어린이 회장후보에 끼었다. 사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라 그런데 앞장서 한 것은 아니고 나도 모르게 주변에서 추천을 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후보들은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각자의 정견 발표를 하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단상에 올라가 연설을 하려고 하니까 오금이 저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정견 발표 후 투표일까지 지금의 선거 운동 같은 것도 있었다. 나는 여학생들 만나는 것이 부끄러워 피하고 남에게 부탁하는 것도 전혀 못했지만, 나의 반, 나의 동네 아이들이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떠드는 것을 보고 계면쩍어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것이 내가 인생을 살면서 대중 앞에 나서도 기가 죽지 않고 소신껏 이야기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하튼 1950년대에 내가 다닌 이리국민학교는 민주주의를 어느 선진국 못지않게 가르치고 실습했던 곳이다.
또 한 가지 좋은 추억은 자연 과 인간의 만남이었다. 매년 가을이면 교정에 있던 수영장 주변에 형형색색의 국화꽃 화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곤 했다. 이것은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만든 국화꽃들이었다. 또 운동장 건너편에는 배추, 무 등을 심을 수 있는 학교 실습지가 있었다. 학교는 키 큰 나무들로 에워싸여 있었고, 운동장 왼편으로 바로 가까이에 큰 저수지가 있었다. 우리들 눈에는 큰 호수처럼 비쳤다. 저학년 때는 선생님께서 호숫가 언덕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 놀이도 가르치고 자연과 함께 하는 그런 배움이 있었다. 운동장 오른쪽으로는 수목원 같은 것이 있었다. 전북농대 캠퍼스가 학교와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이 더욱 숲으로 뒤덮여 있어서 요즘 말로 녹색 마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로 2008년 모교를 찾아 갔을 때는 크게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수는 사라지고 없었고 옛 날의 자연 속 분위기는 많이 손상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러나 내가 공부했던 교실을 돌아보니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교실이지만 우리가 공부할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옛날을 되새길 수 있었다. 당시 안춘근 교감선생님이 나하고 동기였고, 그래서 그로부터 자세한 변화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초등학교 시절 과 나의 지나 온 삶을 한 번 뒤돌아본다. 나의 삶에서 항상 그리움과 추억으로 남아 있는 초등학교 시절. 한국동란이 끝나기 직전에 입학했기 때문에 한국의 일인당 국민 소득이 아프리카 가나보다도 적었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4년 전 내가 가나 환경성 정책 자문관으로 나가 있었을 때 만났던 가나 정부 관리가 그 때는 자기네가 더 잘 살았다고 자랑했다. 그래도 나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90%의 학생이 가난했기 때문에 한 번도 가난을 고통스럽게 생각해 본 일도 없고 가난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도 물론 가난한 축에 끼어, 수업료를 못 내서 집으로 쫓겨 가기도 했지만 그걸 그렇게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았으니 말이다. 자연 환경은 오염되지 않았고, 논, 들판과 강가에 가면 자연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얻을 수 있었다. 자연이 주는 평화와 생기, 그리고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익산이라는 조그만 도시, 그리고 자연과 가까이 있었던 우리 모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이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두 번째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꿈을 심어주고 용기를 불어 넣은 선생님들의 한마디는 장구한 세월이 지나도 항상 기억 속에 살아 있다. 5학년 때인가 웅변대회가 있어 원고를 써낸 때가 있었는데 당시 담임 김중배 선생님께서 나를 불러 칭찬을 해주셨다. 어린이로서는 격조 높은 문장을 썼다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 것은 나의 부친이 시골 정치인이어서 신문을 몇 개씩 구독하고 있었는데, 나도 무엇인지 읽어 보아야겠다는 호기심에서 한자로 가득 찬 신문을 어려서부터 조금씩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교에 가서부터는 외국어 공부에 항상 호기심을 갖게 되어, 영어에 재미를 느끼고,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는 일본어, 베트남어 등 나이를 먹어가도 항상 외국어와 함께 살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을 뒤돌아보면 언제나 아늑한 행복감을 느낀다. 호기심, 그리고 낭만 과 꿈만 있고, 근심이나 걱정은 없었던 것 같다. 근심이나 걱정은 모두 부모님 몫이었으니까…… 초등학교 때의 이런 꿈들이 결국은 내 인생의 행로를 결정지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항상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무엇이든 손을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시련과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였고 이를 기회로 받아들였다. 대학을 갈 수 있는 집안 형편이 못되었지만 일단 도전하고 보았다. 역설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일류대학을 목표로 했다. 목표했던 대학에 합격하자 집에서 입학금과 한 학기 등록금만 받아가지고 상경했다. 세상은 도전하면 열리는 법이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졸업을 했지만 항상 즐겁게 보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엔지니어로서, 그리고 행정가로서, 그리고 정책 전문가로서 다양한 변화를 거친다. 그리고 행동 분야도 반경도 계속 넓어지고 확대되었다.. 초등학교 때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공대를 나와 생산 공장의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꿈은 그 것 보다는 더 컸다. 이 때 가 1970년 대였다. 한국이 하루아침에 후진 농업국가에서 선진 산업 국가로 변화하기 위해서 요동을 치고 있었고, 당시 그 선도적 역할을 했던 것은 중앙 행정을 맡고 있는 엘리트 공무원들이었다. 나는 공무원이 되기로 작정을 했다. 공학도가 행정 고시에 도전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꿈을 이루었다. 공무원이 된 후 경제기획원에서 일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등 원했던 일을 할 수 있었다. 10여년 후 경제 개발의 후유증으로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자 나는 다시 환경부로 부처를 옮겼다. 환경 문제가 국내 문제에서 국제 문제로, 그리고 지구적 문제로 발전하면서 나는 활동 무대를 확대해 나갔다. 1989년에 한국 최초로 케냐 나이로비에 소재한 유엔환경기구(UNEP)본부의 P-4 간부 직원으로 2년간 파견되었다. 1996년에는 미국 환경청에 파견되어 미국 환경부 직원들과 1년간 함께 일을 했다. 1989년에는 아셈(ASEM) 산하의 아시아-유럽 환경기술 센터의 부소장으로 선임되어 태국 방콕에서 3년 6개월 동안 아시아 와 유럽의 환경 기술 교류 및 협력활동을 촉진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2003년 환경부를 퇴직하고 나서는 국립공원관리공단 부이사장으로 그리고 충주 대학의 초빙 교수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 하면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였다. 2010년에는 아프리카 가나 환경성 자문관으로 가서 1년 동안 폐기물 관리 정책 개발을 도와주었고, 2011년 부 터는 베트남 자원환경부 자문관으로 와서 이 나라의 환경 보호 전략 개발, 녹색 성장 전략 개발 등을 지원해 주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은 긴 인생행로를 결정해 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마음껏 꿈을 키우고, 자연과 친해지고, 항상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 감을 가져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혼자서 해결하는 능력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른이 되면 그 때 가졌던 꿈과 생각들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성공은 소위 세상이 말하는 출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꿈과 목표를 얼마나 실현했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원했던 것을 성취한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인생에서 성공한 것이고 가장 소중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