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베수비오 화산을 배경으로 한 모래 해안의 나폴리 시가지는 동쪽으로 차차 높아지는 경사지에 자리하고, 토양은 비옥한 화산재로 구성되어 오렌지와 올리브 같은 지중해성 농작물들이 풍요롭게 자라며, 기후 또한 연중 내내 온난하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속담이 생긴 세계적인 관광도시다.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밀라노 다음으로 큰 도시로, 인구는 약 98만 명이며 면적은 117㎢로 지중해에 닿아 있는 항구도시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인들이 쿰마인들이 원주민이었던 여기에 ‘새로운 도시’라는 식민도시를 세우고 네아 폴리스(Nea Polis)라 부른 것이 나폴리의 기원이다.
기원 전 326년에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으나, 훈족과 게르만 족의 발흥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 후부터 둥지를 튼 동고트 왕국(493~540)이 동로마에 멸망당하고, 나폴리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된다. 이후 나폴리는 1300여 년간 이탈리아 북, 중부를 지배한 롬바르디아 왕국과 교황령과 다른 역사를 갖게 되지만, 지중해를 건너온 외국의 군대가 로마로 진격하는 전초지라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이 도시를 차지하기 위한 이민족들의 다툼이 끊이지 않아,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의 지배를 받았다.
11세기 중반, 노르망디의 기사 루제로 1세가 동로마령이었던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했고, 11세기 후반에는 사라센 제국이 지배하던 시칠리아 섬까지 점령하여 2대 째인 루제로 2세는 교황 아나크레투스 2세로부터 왕위를 추인 받아 시칠리아 왕국으로 성립한다. 노르망디는 바이킹이 점령하여 자리 잡은 곳이었으니, 이 왕국은 결국 바이킹이 지중해까지 진출해 세운 왕국이었다.
시칠리아의 왕권이 혼인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에게로 넘어가자, 신성로마제국과 앙숙이었던 교황의 꼬드김을 받은 프랑스왕의 아우인 앙주 영주인 샤를(카를로 1세)은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칠리아에 앙주 왕조를 세웠으나, 비잔티움 제국 정복을 위한 중과세로 부과하여 민심을 잃었다. 1282년 3월에 샤를 왕과 교황에게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프랑스계 주민 4,000여명을 학살하고 혁명을 일으켰다. ‘시칠리아의 만종’이라 불리는 학살사건이 그것이다.
이로써 샤를 왕은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잃었고, 바르셀로나 가문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가 왕위에 등극하여 남이탈리아만 앙주 왕조의 통치 하에 놓이자, 서로가 시칠리아 왕국이라고 주장했지만, 수도가 나폴리인 반도측이 ‘나폴리 왕국’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앙주 왕가의 적통이 끊기자, 모계(母系)의 발루아-앙주 가문의 르네(레나토) 1세가 나폴리 왕위를 획득했으나, 1504년 아라곤왕 페르난도 2세에 의해 앙주 왕가의 권리는 소멸되었고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의 속지가 되어 이후 2세기 동안 왕국의 지위를 잃고 나폴리 총독 관할지역이 되었다.
그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 잠시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파르테노피아 공화국(1799~1806)이 세워졌다. 1806년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이 왕국은 1860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가리발디에 의해 점령되어 1300년 만에 북이탈리아에 예속된 나폴리는 세계적인 관광도시에 발달해왔지만, 남부 각지의 빈민들이 몰려들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마피아 세력의 중심지로 전락했다.
팔라쪼 레알레 왕궁과 플레비시토 광장
팔라쪼 레알레 왕궁은 나폴리에서 가장 큰 광장인 플레비스키토 광장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으며, 19세기 초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도 1세가 건설한 플레비시토 광장은 왕궁과 1737년에 완공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오페라 극장인 산 카를로 극장과 반원형 파사드의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의 열주로 둘러싸여 있다. 왕궁은 부르봉왕조의 카를로 3세가 로마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주문하여 17세기에 건립되어 18세기 이후부터 나폴리 왕들의 거주지였지만 지금은 국립 도서관으로 사용 중인, 단순하고 수수한 3층 건물이다.
정면의 나폴리 역대 왕들의 석상은 19세기에 추가된 것이며, 왕궁 내부에는 18~19세기의 가구나 도자기, 미술품, 태피스트리 등이 소장되어 있는 왕궁 가구 및 예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헬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파피루스 두루마기와 5세기의 성경을 비롯한 중세의 고서가 소장된 도서관과 왕궁예배당의 거대한 18세기 그리스도 탄생화도 볼거리다.
플레비쉬토 광장은 나폴리의 중심 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성벽이 있던 것에 세워졌다. 후에 주변으로 성당과 수도원들이 들어서게 되는 데, 오늘날에는 웅장한 팔라쪼 레 알레 왕궁과 가로 경계를 이루며, 맞은편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과도 경계를 이룬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은 페르디난도 1세의 지시로 피에트로 비앙키가 1836년에 세운 것이다. 광장 맞은편의 살레르노 궁은 1775년에 건축되었으나, 1825년까지 여러 번 개축되었다.
광장의 측면에는 카를로 3세와 페르디난도 1세의 기마상이 있다. 한때는 마상시합도 벌어졌던 이 광장에서 결혼식과 축제도 열렸다.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여행 중 휴식을 취하기 매우 좋은 장소이다. 특히 광장 문화를 즐기는 나폴리안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부이자 충분한 관광이 된다. 광장과 움베르토 1세 갤러리 사이의 도로는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레스토랑들과 곡선미가 넘치는 도로가 있어 야경이 멋있다.
카세르타 왕궁
1752년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스3세는 바다와 맞붙어 외적의 침입이 용이한 팔라쪼 레알레 왕궁보다 적의 접근이 어려운 새로운 궁을 건립하려고 로마의 유명한 건축가였던 루이지 반비텔리를 불렀다. 나폴리에서 북동쪽 22마일에 숨어있는 카세르타에 방이 700개인 베르사이유 왕궁보다 더 웅장한 왕궁과 공원의 복합 단지 건설을 지시했지만. 그는 스페인 왕가 계승을 위해 1759년 바르셀로나로 떠났고, 그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4세가 1200개의 방, 1790개의 창문, 120 에이커의 넓은 정원이 있는 궁을 완공하고 내륙의 이 성으로 옮겨 왔다.
카세테라 왕궁은 반비텔리 수도교와 함께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카세르타 왕궁은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건축물이다.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파르네세 헤라클레스의 모각품이다. 진품은 로마 카라칼라 욕장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현재는 나폴리 국립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계단, 벽, 천장이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왕궁의 중앙 계단을 통해 양쪽에 세워져 있는 큰 사자상을 지나면 로마 카라칼라 욕장에서 가져온 파르네세 헤라클레스의 복제품을 만난다.
진품은 현재 나폴리 국립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헬라클래스 상 진품이 발견된 것은 1546년. 폐허로 방치되었던 로마의 카라칼라 대욕장에서 재활용할 건축자재를 뒤지다가, 벽돌 더미에서 팔다리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얼굴과 몸체가 멀쩡한, 근육질의 파로스 대리석으로 빚은 헤라클레스 입상(높이 3m)이 발견되자, 교황 파울루스3세는 같은 가문 출신이 건축하는 파르네세의 궁전을 짓는 데 사용하는 것을 수락해 나폴리로 실려 온 것이다.
팔라틴 예배당은 제2차 대전시 연합국의 폭격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해, 8개의 성모마리아 의 일생을 그린 성화 중 7개가 불에 탔고 예배당도 대부분 파 괴되었지만, 전쟁 후 천장과 벽 은 복원하였지만 기둥은 파괴의 흔적이 보인다. 팔라틴 예배당 에서 꽤 떨어져있는 이탈리아 정원으로 가는 숲 사이의 길에 는 12개의 연못이 길게 도열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물 고기와 천사 등 다양한 조각들 이 세워져 있다. 이탈리아 가든 외에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영국 가든에서 가볼만한 곳은 비너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있는 ‘비너스의 목욕 연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