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빈(呂洞賓)

작성자心印 (심인)|작성시간09.12.25|조회수327 목록 댓글 0

 명사교실에 올려논 經典(경전)속에는 말세에 다가 오는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일러놨습니다. 모든 성현들께서 하늘의 뜻을 문자인 한문에 숨겨

놓으셨기에 어쩔수 없이 올릴수 밖에 없읍니다 한문이 있어 어렵다 생각지 마시고

經(경)속에서 진실로 구하면 지혜에 이르는 문이 열릴것입니다.

 

여동빈(呂洞賓)

 

여동빈의 본명은 경(?)이고, 자(字)는 백옥(伯玉)이며 또 다른 이름은 소선(紹先)이다.

 출가 이후에는 이름을 암(岩)으로 고쳤고, 자는 동빈(洞賓)이다. 그는 당나라 후대,

관서 하중부 낙현사람이다. 현재 지명은 산서성 영락현이며, 그곳에 그가

태어난 것을 기념해서 만수궁(萬壽宮)을 세웠다. 그는 당나라 덕종 정원(貞元)

 12년(797년) 4월 14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그의 모친이 여동빈을 낳을 때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고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덮었으며 한 마리 선학(仙鶴)이

하늘에서 날아 내려와 침상으로 날아들다가 돌연 사라졌다고 한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미래 예견

여동빈은 태어나면서부터 관상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즉 양쪽 눈썹이 길고 비스듬히 구레나룻과 이어졌고, 봉황의 눈매에 광채가 나며,

코는 높고 단정하며 왼쪽 눈썹과 왼쪽 눈 아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이렇게 기이한 조짐을 갖고 태어난 이 아이를 매우 총애하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교롭게도 불교 선종 6조 혜능대사의 손(孫)제자인

마조화상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동빈의 부친은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고 와서

마조대사에게 보이면서 아이의 앞날을 물었다. 마조대사가 동빈의 운명을 점쳐본 후

 “이 아이는 풍모가 맑고 기이하며, 골상 또한 평범하지 않으니, 풍진을 벗어난

뛰어난 인물이다. 아이가 성장한 후 우여즉거(遇廬則居, 여를 만나면 머물고)하고,

우종즉고(遇鍾則叩, 종을 만나면 두드려라)하라면서 이 여덟 자를 평생 꼭 기억하라.”

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마조대사가 예언한 그 여덟 자의 의미처럼

동빈은 과연 여산(廬山)에서 수행하였고, 종리권(鍾籬權)을 만나 도를 배웠다고 한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 : 당나라때 승려로 750년 전후로 활약하였으며 속성은

마(馬)씨, 통칭 마조도일, 사천성 출신으로 19세 때 출가하여 선종 6조 혜능 문하의

 남악 회양(南岳 懷讓)의 법을 이었다. 강서성 홍주를 중심으로 교화하였기 때문에

그 일파를 홍주종(洪州宗)이라고도 한다. 널리 알려진 문하생이 백장, 대매,

남천 등이며 남악의 종풍이 일시에 융성하였으며,

후일 임제종(臨濟宗)으로 발전하였다. 마조 천하라 하여 마조의 선풍이 온 세상을

 덮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선(禪)을

실천하는 새로운 선종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동빈의 젊은 시절, 두 차례 과거시험 낙방

여동빈은 어린 시절에 총명이 남달라 하루에 글자 만 자를 암송하고 말이 입에서

 나오면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성장한 후 신장은 8척 2촌에 목덜미는 기다랗고 이마는

 넓었으며, 봉(황)의 눈과 광채가 나는 눈썹에 행동거지는 당당했다고 한다.

성격은 소박하였으나 말주변이 없었으며, 언사가 능숙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성년이 되어 김씨를 아내로 맞아 자녀 넷을 두었다. 당나라 무종(회창) 연간에

여동빈은 두 차례나 장안에 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 번 다 낙방하였다고 한다.

 

장안 술집에서 선인 종리권을 만남

여동빈이 두 번째로 장안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6세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낙심한 가슴속에 쌓인 울적한 그 심정은 보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오후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 발길이 가는대로 걷다가

 어느 작은 술집에 들어갔다. 자작하면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심정은 마치

 바람 따라 거리를 떠도는 가을 낙엽처럼 의지할 바 없이 쓸쓸하였다.

바로 이때 술집으로 긴 수염에 빼어난 눈썹, 안색이 붉으레하게 빛나는 도사복장을 한

노인이 걸어 들어와 여동빈의 맞은 편 빈자리에 앉았다. 세간의 다툼이 없는 듯

 사리사욕이 없고, 온화함이 넘치는 듯한 그 노인의 풍모는 여동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두 사람은 마주하여 술잔을 권하면서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스승을 만나다

선인 종리권 즉석에서 시를 짓다

술잔을 돌리면서 서로의 심사를 한마디씩 토로한 후, 풍채 좋은 노인은 돌연

 시심이 크게 일어난 듯 술집 종업원을 불러 붓과 먹을 가져오게 하였다. 노인은

즉석에서 시를 읊으면서 붓을 들어 술집 벽 위에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坐臥常携酒一壺 不敎雙眼識皇都

좌와상휴주일호 불교쌍안식황도

乾坤許大無名姓 疏散人間一丈夫

건곤허대무명성 소산인간일장부

 

앉으나 누우나 언제나 한 호로의 술을 가지고 다녔고

두 눈으로는 황도(세상일)의 일을 모르도록 했다네

하늘과 땅은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이

한낱 인간세상을 떠도는 한 사내일 뿐일세.

 

여동빈은 시를 음미해 보고는 노인의 시풍이 표일하고 호방함을 깊이 찬탄하였다.

 여동빈은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절을 하고난 후 노인에게 물었다.

“비록 하늘과 땅이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다고 하였지만, 후배인 저로서는

도장께서도 칭호가 있을 것 같아 묻자옵니다. 도장의 성명 삼자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노인은 두 눈에 미소를 띠면서 “나의 성은 종리(鍾離)이고

이름은 권(權)이요.”라고 하였다. 여동빈은 ‘종리(鍾離)’ 두 글자를 듣자,

마음속에 마치 종이 울리듯

 옛날 부모님이 늘 말씀하셨던 ‘마조(馬祖)선사의 예언’이 떠올랐다. 즉

“우여즉거(遇廬則居)하고 우종즉고(遇鍾則叩)하라”

(廬를 만나면 머물고, 鍾을 만나면두드려라) 문 앞에 앉은 이 기이한 노인이 내가

마땅히 두드려야 하는 종(鍾)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여동빈, 선인 종리권에게 詩로 화답하다

여동빈은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예언이 적중하는 상황을 만나자 순간 멍하였다.

 이때 종리 노인이 술잔을 들며 “자, 우리 술 한 잔 합시다.”하면서 술을 권한다.

 술을 마신 후 종리 노인은 “자네도 시 한수 짓는 게 어떠한가?”하였다.

여동빈도 술 한 잔을 마시자 시심이 샘솟듯 올라와 붓을 들고

술집 벽 위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生在儒家遇太平 懸纓垂帶布衣輕

생재유가우태평 현영수대포의경

誰能世上爭名利 欲侍玉皇歸上淸

수능세상쟁명리 욕시옥황귀상청

 

유가 집안에 태어나 태평시대를 만났건만

갓 끈을 걸어두고 허리띠를 벗어 놓았으니

삼베옷이 가볍다(벼슬하지 않은 포의를 비유)

누가 세상과 더불어 명예와 이익을 다투겠는가?

옥황상제를 모시러 상청경으로 되돌아갈까 한다.

 

종리권은 여동빈의 시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본 후 크게 기뻐하면서 “공자는 이미 도를

향하는 마음이 있는데, 나를 따라 세상을 버리고 입산하지 않겠소?”하였다. 여동빈은

 머리를 흔들며 다만 집안에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고는 아무래도 속세를 떠나기가

 어려운 듯이 말하였다. 그 도사는 푸른 도건에 흰옷을 입고 허리에 큰 표주박을 차고

있었다. 이윽고 벽에 시 한 수를 썼는데 그 시정이 표연히 세속을 떠나 있었다.

여동빈은 깜짝 놀라 절을 올리고 성씨를 물었다. 도사가 말하길

 “내 성은 종리(鐘離)요 이름은 권(權), 자는 운방(雲房)이네.” 하였다.

그가 바로 당팔선 중의 한 사람으로 훗날 여동빈의 스승이 되는 종리권인데,

이것이 여동빈과 종리권의 첫만남이었다. 종리권은 한나라 때 사람이므로

 이미 500세도 더 된 신선이었다. 여동빈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선도 배우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종리권은 여동빈의 속세의 인연이 아직 남아 있다면서

 뒷날을 기약하고 나는 듯 가버렸다.

이후 종리권은 여동빈이 도를 받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를 보기 위해 10가지 관문의

 혹독한 시험을 치르게 한다. 이것이 ‘운방십시동빈(雲房十試洞賓)’의 일화인데,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 번째는 여동빈이 하루는 밖에서 돌아오니 집사람들이 모두 죽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슬퍼함 없이 다만 후하게 갖추어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또 하나는, 정월 초하루에 거지가 문에 기대어 구걸하기에 돈을 주었다.

그런데 돈이 적다고 짜증을 내기에 여동빈이 더 주었는데도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으며 함부로 꾸짖었다. 그럼에도 여동빈이 예의를 갖추어 사의를 표하자

거지가 웃으며 가버렸다.

 

그리고 하루는 교외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에 있는 물건들을 도적들이 싹

 쓸어가 버리고 없었다. 하지만 동빈은 성내지 않았다. 이후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이 없어 밭을 갈아 자급하는데 홀연 호미 밑에서 금 수십 덩이가 나왔다.

그러나 그는 급히 덮어버리고 이를 취하지 않았다.

 

마지막 관문으로, 밤에 야차(夜叉) 수십이 나타나서 사형수를 쥐어틀어 피와 살이

 엉기었다. 그러자 사형수가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전세에 나를 죽였으니 급히

내 목숨을 살려내라.”고 했다. 이에 동빈이 “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보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며 칼로 자결하려 하자 홀연 공중에서 꾸짖는

소리가 나더니 귀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종리권이 나타나 여동빈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속세의 마음은 없어지기 어렵고, 선인의 재주는 만나기가 어렵다.

내가 사람을 구하는 것은 남이 나를 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네.” 하였다.

 

스승이 제자를 찾는 것은 오히려 제자가 스승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니

도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가를 느끼게 해주는 말이다.

 

종리권이 계속해서 이르기를 “내가 열 번을 시험했으나 모두 꺾이지 않으니 그대는

반드시 득도할 것이네. 세상을 구제하고 남을 이롭게 하여 3,000의 공(功)을

꽉 채워 800행(行)을 원만히 하면 바야흐로 신선이 될 것이네.” 하였다.

여동빈의 스승은 신선의 길을 감에 있어 모든 고난과 고통을 뛰어넘어 자신의

생명을 완성시키는 것[行]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함께 사는 세상사람을 구제하는

것[功]이 몇 배나 소중한 과정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리고 “세간에 살며 공행을 닦은 후에 나와 같이 살도록 하게.” 했다. 그러자

여동빈이 말하기를 “저의 뜻은 선생님과 다릅니다. 반드시 중생을 모두 구제하고

 떳떳이 상계에 오를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종리권은 여동빈이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도를 깨닫는 신선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여동빈이 원하던 바는 단순히 득도하여 자신만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을 등지지 않은 도세(度世)의 삶

대개 사람이 득도를 하면 답답한 몸을 벗고 천상으로 오르고자 한다. 하지만

세속의 오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중생을 구하는 큰 보살과 같은 삶을 산

신선들도 많이 있었다. 도교에서는 속세를 초탈하여 신선의 경지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을 ‘도세(度世)’한다고 한다.

 

여동빈은 종리권이 떠난 후 73세에 대도를 원만히 이루고 도세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여동빈은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신선의 재목을 고르라는 선선사(選仙史)의

 관직을 받고, 인간 세상에서 오래도록 활동을 하게 되었다. 훗날 여동빈은 인연있는

 사람을 찾아 금단(金丹)의 도로써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선맥을 전한다.

지금껏 신선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은 한사람이라도 더 인간을

 세속에서 건져내어 선맥을 전수하려는 그의 애틋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상에 수시로 모습을 나타내어서 때로는 걸식하는 사람으로, 때로는 늙고

쇠잔한 영감으로, 때로는 누추한 중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가름질하고 그의

공덕을 헤아린 후에 도를 전하였다

 

五代論  (草堂自記) 여동빈조사

海山奇遇  江上弟子 火西月述


唐自中和以後四海分崩群雄竊據史家以五代編之不如後唐南唐序之哀帝二年朱全忠弑君

自立直亂臣耳幸而河東鳳翔淮南西川猶奉唐之正朔盡梁三世而只稱天祐年號者河東鳳翔也

李克用本唐賜姓舍朱耶而歸華夏勤勞況瘁以平黃巢功封晉王誓於一生靡敢失節何其忠也

存最乃晉王主器恪守父爵且性孝惜其滅梁之後未求唐宗室而立之耳

然其得國寶稱後唐編爲正統良不誣也

石敬塘遷都帝汴特割據之雄耳何足爲正徐知誥建國金陵復還李姓

楊寬奉國稱(帝於)吳後唐以丙申終南唐以丁酉起則正統卽在此也

劉知遠稱孤晉陽入洛守汴勢亦同乎割據郭威起而劉斌亡又一弑君之朱溫也

柴榮繼立異姓相傳雖號爲周實非眞主吾作敲爻歌起句不曰漢末周朝而曰漢終

唐國者誠以割據之輩終而南唐尙在也

上下九十餘年無人混一疆宇而唐以一線相承反以梁晉漢周攢爲五代此吾所不解也

宋太祖奉天承運掃蕩群奸而南唐最後終

宋繼南唐之統可了然也

請以寄之讀史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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