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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남북 분단의 비극 속에 묻혀 간 천재 과학자 경원하 박사

작성자경동현|작성시간11.03.14|조회수211 목록 댓글 1

필자가 경원하 박사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때다.

아마 강원일보(?)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발행한 신문으로 기억되는 데 기사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필자의 이름이 경원하였다.

50년도 훨씬 넘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경원하 박사가 우리의 종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후 대학에 들어와서('69학번) 교양수학을 배웠는 데 저자 들 중 한명이 경원하였다.

어른들께 여쭈어 보았더니 춘천 농대에서 근무를 하다가 브라질로 이민을 간 분이라고 했다.

경원하 박사(후일에 박사가 됨)는 '60년대 중반에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고 했다.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평양출신이고 6.25때 월남했는 데 청주 경씨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항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고 했다.

아마 윗대에서 교류가 끊어져서 족보를 찾을 수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필자가 '70넌대 중반 교직에 나간 후 선배들에게 경원하 박사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더니 그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북한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는 데 잘못 말하면 큰일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경원하 박사는 대단한 천재라고 하였다.

현대 수학과 물리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현대 과학의 동향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등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했다.

 

필자가 경원하 박사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뒤 10년이 훨씬 더 지난 후였다.

사촌형님께서 월간 중앙인가 하는 잡지에 경원하 박사가 북한에서 핵개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기사가 났다고 하셨다.

그후에 다른 기사를 보니 이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경원하 박사의 전공이 기폭장치(폭발)에 관한 것이고 핵물리학은 아니기 때문에 핵개발을 주도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다만 폭발에 대한 연구로 일부 기여는 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90년대 초 북한의 유학생들의 망명 사건이 일어날 때 탈북한 북한 출신 두 학생이 춘천을 방문하였는 데 신문사에 근무하는

중학교 동기생이 북한 출신 유학생을 접대했는 데 그들이 춘천농대에서 재직했던 경원하 박사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이 증언을 보면 경원하 박사가 북한 과학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진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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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시대에 '경대승'장군이 주인공으로 나오던 2005년 무렵 9시 뉴스가 첫머리에 경원하 박사 망명설이 보도되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경원하 박사에 대한 많은 보도가 있었다.

필자는 전부터 관심이 있어 많은 자료를 조사하여 보았다. 이에 대한 내용을 오손도손 이야기 방에 올린 적이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경원하 박사는 평양의 명문이었던 평양고보(평양 제2중?)를 졸업하고 김일성대학교를 다녔다고

(졸업) 한다.

6.25때 월남하여 해병대 장교로 근무하고 춘천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사촌형님의 말씀에 의하면 옮긴 본적을 필자의 본적지 주소(큰댁과 우리집)에 두었다고 한다.

아마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같은 종친의 주소지로 본적을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춘천에 정착한 경박사는 춘천농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성수학원에서 수학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북한의 학력이라 인정을 받지 못해 시간강사로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 당시 춘천농대 학장이던 함인섭 박사의 강력한 추천으로 전임강사가 되었다고 한다.

경원하 박사는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학위를 받고 캐나다에서 일했다고 한다.

캐나다 맥길대학교 교수 후보에 올랐으나 북한에 가서 어머니와 형을 만난 일이 미국 CIA에 감지되어 감시를 받게 되고 이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경원하 박사가 사상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 주변 인물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다.

경원하 박사는 북한에서 어머니와 형을 만나고 온 일 때문에 CIA의 감시를 받게 되고 맥길대학교 교수직도 불투명하게 되자

한인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고종옥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 데 고신부님의 힘으로도 어떻게 수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경박사를 도우려 동분서주하는 고신부까지 신상에 피해를 입을 정도까지 되었다고 한다.

경원하 박사가 북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CIA의 감시와 이로 인한 교수 취업의 좌절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경원하 박사의 망명 사건은 오보로 밝혀지고 하나의 해프님으로 끝나고 경박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경원하 박사  망명 오보사건이 있은 후 3년인가 지난 후 대학 과동문회에서 맥길대학에 재직하다가 서울대 교환교수로 왔다가

동문회에 참석한 선배를 만나 경원하 박사애 대하여 물어 보았다.

선배는 경박사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전화 통화는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경원하 박사가 캐나다를 떠난 이유는 위의 내용과 같았다.

선배의 이야기는 경원하 박사가 무슨 사상적 이유에서가 아니고 단순히 핏줄을 만난 것인데 이것이 의심을 받아 감시를 받게 되고

사회적 활동이 어렵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북한으로 간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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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필자가 졸업한 대학의 과모임에 갔다가 경원하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필자의 은사님과 선배들 중에는 경원하 박사의 제자들이 있었다.

경원하 박사에 대한 평가는 그분이 천재였다는 것과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는 내용이다.

필자의 선배 한분은 대학교 1,2학년때 경원하 박사에게서 물리학과 통계학을 배웠는 데 이에 대한 상세한 기억을 하고 있었다.

물리학의 요점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을 하였고 특히 현대 물리학에 대해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브라질로 가기 전 마지막 수업 시간에 평소에 말하지 않던 자신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일제말과 해방후에 영어를 거의 배우지를 않아(해방후 북한에서는 러시아어를 배웠음) 영어를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1.4후퇴로 월남하기 전에는 북한에서 박격포를 설계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경원하 박사가 기폭장치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과 통하며 핵물리학보다는 폭발에 대한 것이 전공이라는 증언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또, 브라질로 이민을 가려고 포르투갈어를 공부했는 데 브라질에서 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생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이 부분 이민을 떠났다는 말과 상충됨. 망명 오보사건 당시 신문 보도 자료에는 브라질에서 공부했으나 수준이 낮아 미국으로 옮겨 갔다고 함)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가 자신이 외국에 나가면 남한이나 북한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를 생각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필자의 은사님은 경원하 박사가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은 후 출국했기 때문에 TO를 그대로 차지하고 있어

자신이 조교 생활을 여러 해 했어도 TO가 나지를 않아 전임 발령을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누가 경원하 박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보라고 해서 경원하 박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귀국을 하신다면 몰라도 귀국을 하실 의사가 없다면 사표를 제출해 달라고 정중하게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경원하 박사가 사표를 제출했고, 그래서 자신이 전임강사 발령을 받을 수가 있었다고 하셨다.

은사님의 말씀을 보면 경원하 박사가 출국하여 브라질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캐나다에 옮겨 갈 때까지 귀국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경원하 박사가 북한으로 가자 함인섭 춘천농대 학장님은 중앙정보부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느라 고초를 많이 겪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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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통해 들은 경원하 박사는 물리와 수학에 조예가 깊은 뛰어난 천재였다.

6.25때 남하할 때가 20대 초반이었다고 하면 과학자가 되기 위해 가장 열심히 공부하여야 할 시기에 전쟁으로 인한 피난과

군생활을 해야 했다.

또, 20대 후반과 30대 초중반을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뛰어야 했다.

과학자로 성장하기 위한 황금기를 실험 기구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하고, 연구실에서 연구다운 연구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독학으로 외국서적을 섭렵하여 현대 물리학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자로서 황금기를 지난 40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연구를 할 수 있었는 데 이또한 이데오르기의 장벽 때문에

북한으로 돌아가는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에 북한으로 가서 그때부터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겠지만 이미 과학자로서 황금시대는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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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겠지만

경원하 박사가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비껴난 시기에 다른 과학자들처럼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삶을 살았다면

상당한 과학적 업적을 남겼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80%가 노벨상을 수상한 아이디어를 20대때 착상했다고 한다.

경원하 박사는 남들이 인정하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민족분단과 동족상쟁이라는 불행한 시기가 과학자로서 역량을 길러야 할

시기와 겹쳐서 결국 자신이 타고 난 역량을 기르고 꽃피우지 못한 불우한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문중의 명예를 빛낼 수 있었던 종친 중 한분이 분단의 비극 때문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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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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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雲影(禹顯) | 작성시간 11.03.15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쓸데없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천재를 포용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나라의 큰 손실일 겁니다. 좋은 자료 올려주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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