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의 품격(2) (이기주著, 황소미디어그룹刊) / 임순형 二講 本立道生(본립도생)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 “당연한 것을 잘 해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습관: 내면의 리듬 산다는 건 반복의 연속이다. 되돌이표처럼 거듭되는 일상을, 그리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일을 부단히 되풀이하면서 우린 세월 속을 헤맨다. 그러고 보니 글쓰기는 인생을 닮았다. 기나긴 반복의 과정을 견딜 때 글과 삶은 깊어지고 단단해지니 말이다. 송나라 문인 구양수는 글 잘 짓는 방법으로 多讀(다독), 多作(다작), 多商量(다상량)을 들었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글쓰기의 기초체력을 기를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다만 이를 두고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잖아. 글쓰기 하수나 실천하는 거 아야?'라며 콧방귀를 뀌면 곤란하다. 下手(하수)는 기본에 해당하는 그 '뻔함'의 가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中手(중수)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고, 上手(상수)는 뻔한 것을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 너머의 세계로 훨훨 날아간 사람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고 당연한 것을 잘 해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어느 분야건 밑바닥을 단단히 다져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나아가 더 넓은 길로 향할 수 있다. 글 쓰기 노하우는 기술보다 습관에 가깝다. 때론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습관이 슬을 쓰는 건지 모른다. 습관이 스스로 미끄러지고 번지면서 내 삶의 여백을 진하게 물들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성: 문장을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 주관은 빛의 굴절과 분산을 일으키는 프리즘처럼 고유한 각도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주체적 견해다. 주관이 스며든 글에는 작가의 개성이 묻어난다. 글쓴이의 독특한 꺾임 혹은 일종의 角(각)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 각이 살아있는 글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글쓰기는 개성이라는 노를 저어 첫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 사이의 바다를 건너가는 일이다. 개성이 부족한 작가는 지면과 화면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개성이라는 그릇에 푹 담갔다가 나온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은 독자의 가슴에서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o 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도와주세요. o 아름다운 날입니다. 하지만 나는 볼 수가 없네요. 같은 뜻이지만 두 문장의 무늬와 온도는 사뭇 다르다. 첫 번째 문장은 객관적인 사실을 글로 옮긴 것으로 직선적이다. 두 번째 문장은 곡선을 닮아 돌려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날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아쉬움과 체념이 녹아 있다. 어쩌면 이 표현이 행인들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 게 아닐까. 문체: 비수를 꺼내야 하나 검을 휘둘러야 하나 비수는 문장으로 치면 단문이다. 단문은 메시지를 명료하고 속도감 있게 드러낼 때 효과적이다. 잘 쓴 단문은 비수처럼 날카롭다. 길이가 긴 장문은 검에 비유할 만하다. 검은 비수에 비해 날을 다양한 각도로 사용한다. 찌르고 베는 것뿐 아니라 뻗어서 끊고 뚫을 수도 있다. 어설픈 검술실력으로는 마음껏 휘두를 수 없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검의 주인이 되려면 그에 걸맞은 내공과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과거 일본에서 검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훈련을 받은 상급 무사와 황실에 속한 자만이 검을 소지할 수 있었다. 검은 신분을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적의 심장에 비수를 꽂듯 단문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작가는 여럿이지만 군계일학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헤밍웨이와 동시대 작가인 월리엄 포크너의 웅장하고 호흡이 긴 글을 즐겨 읽는 지인이 조롱기를 섞어 내기를 걸었다. '혹시 여섯 단어로 소설을 완성할 수 있다면 자네의 필력을 인정하겠네!' 헤밍웨이는 문장을 썼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그는 더 이상 헤밍웨이를 조롱하지 않았다. 여섯 단어에 불과하지만 불필요한 표현을 찾을 수 없고 필요한 표현은 빠진 게 없다. 단문이나 장문이나 복문 중 어느 문체가 좋고 나쁘냐는 가릴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름다운 글은 대개 정확한 글이라는 점이다.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과 감정을 자신만의 문체로 낚아채서 독자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펼쳐냈다면 문장의 호흡과는 무관하게 정확한 글로 간주해야 한다. 제목: 독자가 가장 먼저 읽는 글 이름은 숭고하다. 숭고하지 않은 이름은 없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르는 일만큼이나 이름을 짓는 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어쩌면 사람 이름뿐 아니라 글의 이름인 제목을 구상할 때도 정성을 쏟아야 하는지 모른다. 한 자 한자 진심과 눈물을 잉크 삼아 써 내려간 글이 독자의 마음에 가닿길 바란다면 말이다. 제목 하면 나는 출입문의 손잡이를 떠올리곤 한다. 건물에 들어가려면 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기거나 돌려서 출입문을 열어젖혀야 한다. 건물과 사람 간에 이뤄지는 최초의 물리적 접촉은 손잡이에서 일어난다. 제목의 역할도 비슷하다 독자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목과 마주한다. 표지에 박혀 있는 제목을 곱씹으면서 전반적인 내용을 유추하고 주제와 흐름을 짐작한다. 어떤 독자는 제목만 보고 페이지를 넘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제목은 독자가 가장 먼저 읽는 글이다. 제목 정하는 일이야말로 글쓰기의 화룡점정이며 책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소 중의 하나다. 당연히 출판사에서는 책의 가치를 높일 제목을 찾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光而不燿(광이불요)'라 했다.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제목은 너무 번쩍거릴 정도로 빛을 뿜지 않되, 적당한 빛으로 독자가 책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제: 때론 글을 떠받치는 기둥이 필요하다 화살은 곧게 비행하지 않고 좌우로 흔들리며 날아간다. 시위를 놓는 순간 화살 뒤쪽에 강한 힘이 실리는데, 이때 무게 중심이 있는 앞부분을 가벼운 뒷부분이 앞서 나가려고 해서 힘의 충돌이 일어나는 탓이다. 이를 '궁사의 패러독스'라고 한다. 전통 활의 경우 휘청거림을 줄이기 위해 맹금류 깃털로 만든 '깃'을 화살 뒤에 꽂는다. 한 편의 글과 이를 지탱하는 주제는 화살의 깃과 관계와 비슷하다. 주제는 글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결말: 매듭을 지어 마무리하다 '마지막'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굳이 소리 내 발음하지 않아도 괜히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단어다. 인생은 유한하고 모든 일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이를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삶의 끄트머리에 걸터앉는 순간 '이제 끝이구나'하는 씁쓸한 체념과 함께 찡한 그리움이 밀려오고 그리움은 서서히 기억으로 옮아가기 시작한다. 삶에 끝이 있듯 글에는 결말이 있다. 잘 매듭지은 결말은 그 문장만의 향기, 곧 문향을 남긴다. 문향은 쉽게 부스러져 흩날리지 않는다. 독자의 마음속으로 고스란히 배어든다. 그곳에서 지지 않는 꽃이 된다. 여백: 가장 본질적인 재료 '동양화의 이단아'로 불리는 김호득 수묵화가는 인터뷰에서 연륜이 쌓일수록 여백을 그리는 데 힘을 쏟게 된다고 말했다. '난 공기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복잡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지만, 이제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단순하게 표현합니다. 고수의 동작은 단순해야 해요. 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입니다.' 글도 그림도 힘을 빼고 여백을 만들어야 지면과 화폭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밖으로 밀어내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의 가장 본질적인 재료는 문장이 아니라 여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장을 다 채우기보다 적절히 비워내고 그 비움의 파편들은 모아서 크기와 높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공간을 지을 때, 문장과 문장사이로 햇빛과 바람을 불러들일 수 있고 글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우린 펜이 아니라 여백을 쥐고 글을 쓰는지 모른다. 빽빽한 활자 사이사이에 삶의 희로애락이 깃든 갖자의 공간을 새겨 넣기 위하여... 三講 杜門静守(두문정수) 밖으로 쏠리지 않고 나를 지킨다. “스스로 일으킨 물결에 올라타야 삶의 해답에 다가갈 수 있다.” 능동: 스스로 문장의 물결을 일으키다 생각이 행동을 끌고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생각의 상당수는 행동 뒤에 몸을 숨긴 채 꿈쩍도 하지 않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손자병법에 '拙速(졸속)이 遲緩(지완)을 이긴다'는 문장이 나온다.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도 머뭇거리기보다 일을 저지르는 편이 낫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글쓰기야 말로 몸과 마음을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행위다. 글의 재료는 다분히 정신적이나 글을 짓는 절차만큼은 육체적이다. 펜을 잡고 종이에 글자를 새기든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든 능동적인 육체의 움직임을 통해서만 우린 글을 쓸 수 있다. 능동은 글쓰기뿐 아니라 모든 장르의 예술에서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능동성의 중요성은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인 문학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오래전 일본의 어느 소설가는 'I love you'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로 번역하지 않고 '오늘 달이 참 밝네요'라고 썼고, 어떤 작가는 '당장 죽어도 좋아'라는 문장으로 옮겼다고 한다. 두 작가 모두 원문에 서로 다른 관점을 부여함으로써 문장을 능동적으로 재해석한 셈이다. 절문: 간절히 질문을 던지다 논어 '子張(자장)'편에 '切問近思(절문근사)'라는 구절이 나온다. '절실하게 묻고 현실을 직시한다' 또는 '깨닫지 못한 것을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문제부터 생각한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원래 그런 거지'라는 말로 호기심을 억누르지 않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과 현상 앞에서 간절히 질문을 던지다 보면, 정제된 것 같던 인생이 다시 굴러가기도 하고 좀처럼 풀리지 않던 삶의 매듭이 단번에 풀리기도 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질문은 글쓰기의 훌륭한 연료가 아닌가 싶다. 글을 쓰는 일은 질문을 연료로 해서 작가의 물음표라는 시발역을 출발해 독자라는 종착역에 도착하는 열차인지 모른다. 오문: 세상의 더러움에 오염된 문장 김찬호 사회학자의 '모멸감'이라는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선플보다 악플이 네 배가량 달리는 반면 일본은 선플이 네 배이며, 네덜란드는 선플이 악플의 아홉 배나 많다. 이런 현상을 압축성장의 후유증이란 진단한 사회학자가 있는가 하면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이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열패감이 인터넷 공간에서 표출된 것으로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타인은 원뿔을 닮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이를 무시한 채 한쪽에서 삼각형이라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선 원이라고 우기면 둘의 의견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 평행선처럼 교점을 찾지 못한다. 서로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향해 폭언과 욕설을 내던지면 일시적으로 분노를 배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문장을 쏟아낸 마음의 언저리는 곪을 수밖에 없다. 오염처리 없이 폐수를 방류하는 공장 주변의 땅이 시커멓게 썩어버리듯이 말이다. 슬픈 일이다. 성찰: 내면을 들여다보고 지키는 일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성찰이다. 스스로를 헤아려본다는 점에서 성찰은 坐定(좌정)의 성격을 띤다. 坐는 평평한 땅土 위에 사람人과 사람人이 마주한 모습을 나타낸 한자다. 定은 '정하다', '바로잡다' 등의 뜻을 지닌다. 자신을 철저히 대상화하여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잘 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치는 것이 좌정이자 성찰이다. 조선 중기 문신 이수광은 '杜門静守(두문정수)'라는 글귀를 남긴 바 있다. '문을 닫아걸고 고요하게 지킨다'는 표면적인 뜻 외에, '밖으로 쏠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내면을 다듬는다'는 의미도 된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성찰을 통해 내면을 살펴가며 스스로 마음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다. 퇴고: 삶과 글이 그리는 궤적은 곡선이다 흔히 인생을 苦海(고해)라고 한다. 삶의 바다 곳곳에 무수한 고통이 암초처럼 놓여 있는 탓이다. 좌초되지 않기 위해 우린 수시로 항로를 변경한다. 애초 정해진 길은 없다. 그저 끊임없이 길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한 편의 글을 써나가는 일도 문장을 고치는 행위의 연속이다. 동화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는 '위대한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위대한 고쳐쓰기만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일수록 문장을 수정하는 데 공을 들인다. 단언컨대, 글을 잘 쓰는 사람 중 대다수는 대개 글을 잘 고치는 사람이다. 어쩌면 퇴고는 글쓰기의 마무리과정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글을 마주하는 단계인지도 모른다. 오탈자나 띄어쓰기 오류를 잡아내는 일이 아니라 초고의 들판을 헤집고 다니면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활자의 풍경을 바라보며 글의 주체와 흐름 등을 살피는 일이다. 한마디로 퇴고는 나무를 관찰하는 동시에 숲을 조망하는 행위다. 지향: 마음이 향하는 방향 어느 왕국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내들이 줄을 섰고 노모와 함께 사는 푸줏간집 총각도 그중 하나였다. 우연히 마주친 그 여인에게 고백했다. '내 마음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진귀한 것들을 가져왔지만 내 마음은 요동하지 않았어요. 혹시 당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의 심장을 가져올 수 있다면 당신의 청혼을 수락할게요.' 사랑에 눈이 먼 사내는 짐승으로 돌변해 어머니의 심장을 파냈다. 동이 트자마자 여인을 만나러 뛰어가던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심장에서 울음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아 어디 다쳤느냐? 천천히 가거라, 천천히...' 어머니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자신의 삶이 깨어져도 매번 자식을 보듬는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고 억장이 무너지더라도 어머니는 끝내 자식을 용서한다. 제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은 어둠을 찢고 빛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어머니의 사랑과 닮았으면 좋겠다. 내 손끝에서 돋아나는 문장이 어둠을 가로질러 빛을 향해 날아가는 새가 되었으면 한다. 그 새들이 누군가의 삶을 밝은 쪽으로 안내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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