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 / 정상규
돌과 돌의 틈새를 이용하며 만든 절이 있다. 돌구멍 절이라고 불리어 지다가 요즘 중암암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팔공산 자락에 바윗돌이 어우러진, 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를 잡아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심을 가지지 않고는 부처에게 다가서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절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큰 돌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틈새를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길을 막는다. 왜소한 사람도 가재처럼 옆으로 걸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돌구멍 절 근처에 상상하기 힘든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어린 소나무를 만났다. 바위 위에 서 있는 소나무다. 그가 하필이면 돌 위에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는지 모르겠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방망이로 밀어 놓은 듯한 둥글 넓적한 바윗돌의 정수리에 꽂혀 있는 나무가 신기롭다. 물이 없는 곳에 나무가 산다는 것은 흡사 공기가 없는 곳에 사람이 사는 것과 같다. 한 줌도 되지 않는 흙을 부둥켜안고 뿌리를 돌 속으로 깊게 박고 있다. 물을 찾기 위해 연약한 뿌리가 단단한 돌 속을 파고들어 땀과 피를 흘리는가 보다.
처절한 생존경쟁이다.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애련한 감정이 들어 그를 어루만진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그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은 양의 솔잎을 남기고 잎들을 죄다 떨어뜨리고 낮은 키를 유지한 채 전쟁터에 나가는 작은 병사같이 늠름하게 내 앞에 서 있다.
씨 뿌리는 사람에 비유한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신은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어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기름진 땅과 돌밭, 가시덤불을 택할 수 있도록 했다. 행복에 대한 자유를 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돌 위에 삶의 둥지를 틀고 있는 저 소나무는 신의 배려가 아예 없었는가 보다. 태어난 곳이 곧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최선의 방법으로 살려고 몸부림친다.
개나리와 진달래꽃이 예쁜 옷을 입고 봄날의 향연을 벌려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는 표정이 무감각하다. 더위와 추위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른 나무들같이 기품을 지닐 생각을 할 수 없는 그는 오직 살겠다는 의지만은 강한 듯 물기를 찾아 손을 뻗친다.
직물공장 사장의 아들인 친구 K의 모습이 떠오른다. 소위 좋은 터를 잡고 태어난 셈이다. 고무신을 아끼기 위해 어머니께서 실로 꿰매어 주시던 시절, 그는 발목까지 올라가는 붉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황토 길이 뽀얀 먼지를 몰고 다니는 신작로는 요즘처럼 장마철이 찾아오면 질퍽한 흙탕으로 변한다. 고무신을 신고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없었다. 흙이 찰떡처럼 변하여 고무신에 척척 달라붙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신이라도 벗겨지는 날이면 발과 양말은 진흙 범벅으로 변한다. 운이 좋은 날이라도 집에 돌아오면 신발 밑바닥을 짚이나 막대기 등을 가지고 진흙을 파내곤 했다. 심지어 물이 고인 곳은 지나갈 엄두를 못 낸다. 장화를 신을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흙탕물을 퉁기며 자유롭게 걸어가고 싶은 마음에 장화를 신고 온 동네를 돌아다닌 꿈을 꾸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고등학교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어머니께서 속을 태울 때 친구 K는 오토바이 경주를 참여한 것을 보면 나무가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듯이 사회에 탄탄한 기반을 잡고 뿌리를 내렸음에 틀림없었다.
어린 시절의 일들이 낡은 흑백사진같이 희미하게 빛바래져 잊히고 있는 어느 날, 우연히 그를 만났다. 나이 보담 십 년이나 더 들어 보이는 얼굴이다. 그가 신은 신발에 눈이 간다. 강물처럼 흘러가버린 세월이지만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 그가 신은 장화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신은 구두는 물에 젖은 것을 그대로 신은 것처럼 보이는 광기 없이 구겨진 구두였다.
그 순간 찬란하게 빛을 내면서 가꾸어 온 내 꿈이 산산 조각이 되어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장화가 아닌 소중한 보물을 날려 보낸 듯하다. 아쉬움이다. 전류처럼 퍼져 나간 허무감은 어쩌면 마음 한가운데 원하던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허허로움 같은 것이다.
선술집에 들렸다. 화재로 직물공장을 모두 태우고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주식투자로 전 재산뿐만 아니라 친척 집까지 손실을 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마 같은 삶을 산 그의 얼굴에 패기 있던 옛 모습은 어느 구석에도 찾을 수 없었다. 좋은 환경에 자라난 사람도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언제나 훌륭한 터를 잡고 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현실과 다른 환경을 탓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작은 시련이 찾아오면 사회를 탓하며 조상까지 들먹거린다. 그도 모자라면 세상이 자기를 외면한다고 느껴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자해를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 시간에도 방황하는 노숙자나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살아가는 나무를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의 삶도 그를 닮고 싶다.
어린 소나무를 보고 배운다. 시련을 이기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가장 좋은 터가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뿌리는 하늘을 향해 바위틈에 붙어 있고 가지는 땅을 향해 자라서 수평으로 길게 굽어져 있는 만년송이 될 그를 기대한다.
좋은 터는 주어진 것이 아니고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