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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래, 밝고 맑게 살자 / 박래여

작성자김영중|작성시간26.06.10|조회수20 목록 댓글 0
그래, 밝고 맑게 살자
    박래여


 명상센터에서 돌아온 농부는 밀린 일을 처리하기 바쁘다. 여름에 30일 코스를 다녀와도 되느냐고 내 의견을 묻는다. ‘당신 마음이지요. 가고 싶으면 가야지요.’ 내 대답에 미소를 짓는다.


 문제는 한 달 간의 농부의 부재에 걱정되는 것은 골짜기 물과 단감과수원 방제다. 유기농을 해도 친환경 방제는 꾸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딸 혼자 할 수 있을까. 단감과수원보다 시급한 것은 식수다. 폭우라도 쏟아져 벌물이 골짜기를 침식하면 식수 호스가 떠내려갈 공산이 크다. 농부가 있을 때는 물이 빠지면 다시 연결할 수 있지만 딸의 힘으로 가능키나 할까. 내 부실한 다리로 돌비알 골짜기를 오르내릴 수도 없고. 지하수가 있지만 수중 모터가 고장 났단다. ‘나는 죽을 수도 없겠네.’ 농부의 한 마디가 가슴을 묵직하게 한다.


 농부가 집을 비우면 꼭 일이 터진다. 이번에도 식수로 사용하는 물이 떨어졌었다. 딸도 농부도 없었다. 손재주 좋은 농부 덕에 편하게 살아온 것이 미안하고 고마웠지만 당장 식수 걱정을 해야 할 판이라 기를 쓰고 골짜기에 올라갔었다. 솔직히 젖 먹던 힘까지 짜냈지 싶다.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으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을 텐데. 노인이 되면 산골짜기 오르내리기도 힘에 부친다. 농부가 상수도를 넣고 싶어 하는 이유다. 우리 동네까지 들어온 상수도를 왜 우리 집에는 안 넣어주나. 화가 나려고 한다.


 아무튼 농부가 오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
 농협 육묘 장에 가서 고추와 오이, 가지, 방울토마토 등, 모종을 사왔다. 날씨가 변죽이라 이른 감은 있다. 동네의 논밭에도 고추 심은 곳이 안 보인다. 노지 옥수수가 파릇파릇하다. 동네 할머니가 마늘밭에서 마늘종을 뽑고 있다. 마늘종이 빨리 올라온단다. 고추는 날씨가 변죽이라 4월 20일 넘어서 심어야 안전할 것 같단다. ‘우리도 며칠 더 있다가 심을까? 우박이라도 쏟아지면 고추농사 망치잖아.’ 내 말에 농부는 ‘하루 이틀 상간이다. 얼지만 않으면 된다.’ 망설이지 않는다. 고추와 여러 가지 모종을 심었다. 물도 줬다.


 딸은 여름 상추와 쑥갓 등, 씨앗도 뿌리잖다. 지난해 뿌리고 남은 씨앗바구니를 열었다. 자잘한 씨앗들이 땅 냄새를 맡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다. 나는 먹는 것보다 씨앗을 심어놓고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 씨앗 한 주먹 뿌리면 여름 내내 시장 갈 일도 없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지만 모종을 심든, 씨앗을 뿌리든, 자급자족하고도 남아 여기저기 퍼 나르는 즐거움도 준다.


 씨를 배게 뿌려라. 그래야 잘 올라온다.
 배게 뿌린다는 게 뭐야?
 쏘물게 뿌리라는 말이다.
 아하, 쏘물게? 쏘물게가 사투린 줄 몰랐네.


 경상도 딸은 표준어보다 쓰임말인 사투리에 더 익숙하다. 일제 강점기, 이십 대, 고루 이극로 선생이 간도에 갔을 때다. 음식점에서 고추장을 달라고 했지만 주인이 알아듣지를 못했다. 손짓발짓해서 설명을 했더니 ‘아하, 댕가지장?’하더란다. 이극로 선생은 그때 한국인인데 지역에 따라 쓰임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조선어 표준어 사전 편찬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글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투리 쓰임말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풀이 천지삐까리다. 풀 좀 매라. 호메이랑 삽도 가지고 온나. 니 천지삐까리는 아나?
 농부가 말한다. 딸은 천지삐까리는 많다는 뜻이 아니냐며 웃는다. 씨앗을 뿌려놓고 부녀는 감산으로 향한다. 골짜기 물 호스 점검은 오후에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더니 햇살 날 조짐을 보인다. 선선한 바람이 분다. 나는 흐린 날보다 맑은 날이 좋다. 사람들 대부분이 맑은 날을 좋아하지 않을까. 모두 밝고 맑게 살고 싶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 밝고 맑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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