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이영규 변호사입니다.
건설·공사 계약을 체결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일정이 미뤄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곤 합니다. 보통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도급인의 잘못이나 책임으로 공사가 중단된다면, 수급인은 지연된 기간만큼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들 당연하게 생각하십니다. 공사계약 일반조건에도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부분이니까요.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의 문제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사가 진행되던 도중이 아니라, 아예 ‘착공 자체’가 도급인의 책임으로 장기간 지연된 경우라면 어떨까요? 착공도 하지 못하고 마냥 대기해야 했던 수급인은 그 지연 기간에 대한 배상금을 도급인에게 청구할 수 있을까요?
최근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대법원 2026. 5. 29. 선고 2026다200798 판결).
⏱️ 사건의 발단 : 장기간 지연된 착공, 그리고 뒤늦은 청구
사실관계를 조금 축약해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피고는 국도 확장 포장 및 지하차도 공사를 발주한 도급인이었고, 원고는 이 공사를 맡은 수급인이었습니다. 두 당사자는 지난 2009년 12월경 도급계약을 체결하고 착공신고까지 마쳤습니다. 하지만 피고 측의 사업부지 확보 절차가 지연되면서 공사는 첫 삽조차 뜨지 못한 채 장기간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6년이 지난 2015년이 되어서야 피고는 원고에게 착공을 요청했고, 원고는 그때서야 공사를 시작해 2021년이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피고는 공사가 끝난 후 원고에게 공사대금 전액을 지급했지요.
사건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수급인인 원고 입장에서 생각하면, 도급인의 잘못으로 인해 착공이 무려 6년이나 지연되면서 감당해야 했던 유무형의 손해가 막심했을 것입니다. 이에 원고는 공사계약 일반조건에 명시된 '도급인의 책임에 의한 공사지연 배상책임'을 근거로, 착공이 지연된 기간에 비례한 지연배상금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 법원의 시선 : 문언의 엄격한 해석과 규정의 체계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공사계약 일반조건에서 말하는 ‘공사지연’이라는 개념 안에 ‘착공 자체가 지연된 경우’까지 포함되는가였습니다.
원심과 대법원은 이 조항이 '착공 후 공사가 정지된 경우'만을 의미할 뿐, '착공 자체가 지연된 경우'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이 이러한 결론을 내린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계약 조건을 이루는 문언의 표현 때문입니다. 공사계약 일반조건을 보면 "피고의 책임 있는 사유로 '공사정지' 기간이 60일을 초과하는 경우, 초과기간에 대하여 '잔여 계약금액'에 일정한 금리를 곱한 금액을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원은 여기서 사용된 '공사정지', '잔여 계약금액'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공사가 착공되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를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예 시작도 안 한 상태에서는 '정지'나 '잔여'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취지입니다.
둘째, 전체적인 규정의 체계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련 조항들에서 말하는 '공사의 일시 정지'나 '현장감독자의 공사 전부·일부 이행 정지' 등은 모두 사실상 착공이 이루어진 이후의 공사 정지 상태를 염두에 두고 규정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셋째, 수급인에게 다른 구제 수단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도급인의 책임으로 착공이 지연되는 경우, 수급인은 이를 이유로 계약기간 연장을 요청하거나 계약금액 조정을 신청할 수 있는 권리가 별도로 있습니다. 따라서 지연배상금 조항에 착공지연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수급인에게 일방적으로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 변호사의 시선 : 계약서 문언 해석의 무서움, 그리고 대책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계약 해석의 대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계약 당사자가 서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면, 명확한 문언의 객관적 의미를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문언의 의미가 불분명하다면 계약의 동기, 경위, 목적, 거래 관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지만, 특히 당사자 일방에게 중대한 책임을 부과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문언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확고히 원칙을 세웠습니다.
계약당사자 사이에 어떠한 계약 내용을 처분문서인 서면으로 작성한 경우에 문언의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다면, 특 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문언대로 의사표시의 존재와 내용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문언의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 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는 문언의 내용, 계약이 이루어지게 된 동기와 경위, 당사자가 계약으로 달성하려고 하는 목 적과 진정한 의사, 거래의 관행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 그리고 사회 일반의 상식과 거래의 통념에 따라 계약 내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특히 당사자 일방이 주장하는 계약의 내용이 상대방에게 중 대한 책임을 부과하게 되는 경우에는 문언의 내용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한다
대법원 2016. 12. 15. 선고 2016다238540 판결, 대법원 2023. 12. 21. 선고 2023다228152 판결 등 참조
이 판결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매우 무겁습니다. 아무리 내 입장에서 억울하고 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계약서에 적힌 '글자 한 단어', '문구 하나'의 법적 해석에 따라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이 오가는 판결의 희비가 완전히 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설·공사 분쟁은 이처럼 처분문서인 계약서의 해석을 두고 아주 미시적이면서도 치열한 법리 싸움이 벌어지는 영역입니다. 계약 체결 단계에서부터 독소조항이나 공백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야 마땅하며, 이미 분쟁이 발생했다면 아전인수격 해석에 그칠 것이 아니라 대법원의 엄격한 해석 기준에 맞추어 논리를 개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