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기연, 카오스모스, 흰 그늘
―김지하의 신작시에 대하여
이은봉
김지하는 누구인가. 사상가인가, 시인인가. 그에게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양자택일적 질문이 적당치 않다. 양자택일적 질문이 적당치 않은 것은 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양자택일적으로 선택될 수 있는, 그리하여 단일한 의미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언제나 상호 모순된 복합적 의미로 순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사물과 생명의 존재법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지하는 사상가가 아니면서도 사상가이고,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인이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이러한 대답은 기본적으로 형용모순을 내포한다. 일종의 역설인 셈이다. 김지하가 사상가이면서도 시인이고, 시인이면서도 사상가라는 내포는 다름 아닌 이러한 역설과 함께 한다. 요컨대 그는 一義的 의미만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매우 복합적 존재라는 뜻이다.
어떤 존재에 대한 양자택일적 질문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올바른 대답을 이끌어내기가 불가능하다.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내포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양자택일적 질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자택일적 질문에는 이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강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기 위해 김지하가 그동안 많은 애를 써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물론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이 오늘을 살아가는 참다운 진리와 무관하다는 것은 그만의 주장이 아니다.
생명의 존재법칙과 관련하여 줄곧 그는 '不然其然'의 세계관을 강조해온 바 있다. '不然其然', 즉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렇다'는 라는 세계관은 오늘날에 이르러 좀더 명확하게 진리로서의 함의를 갖는다. 어떠한 사물이나 생명도 이분법적으로, 양자택일적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존재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不然其然'은 水雲의 깨달음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것은 水雲만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는 김지하가 '不然其然'의 내포를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카오스모스의 개념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不然其然'이든 카오스모스이든 이들 개념이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은 본래 종교적 진리의 어법이다. 예수나 석가, 공자 등 종교적 선지자들이 즐겨 애용해온 것이 모순어법, 곧 역설어법이라는 점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般若心經의 언어,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언어는 모순언어, 즉 역설언어의 대표적인 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가 곧바로 '不然其然'이나 카오스모스의 논리와 상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는 흔히 순환론적 세계관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空이 곧 色이고, 色이 곧 空이라는 것은 空에서 色으로, 色에서 空으로 순환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空이 本質이면 色은 現像이거니와, 本質卽現像 現像卽本質의 논리가 태어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는 無卽有 有卽無의 논리와도 곧바로 상응한다. 不然其然이 其然不然이 되고, 카오스모스가 코스모카오스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거니와, 무엇보다 이는 세계에 투사되어 있는 어떠한 사물이나 생명도 一義的인 내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일의적인 내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의 진행에 따른 변화로부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떠한 존재도 영원할 수 없다는 諸行無常의 가치가 설득력을 갖는 것도 실제로는 사물과 생명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형편에서 비롯된다.
모순언어, 즉 역설언어는 종교적 진리의 언어인 동시에 시의 언어이기도 하다. 정지용의 시 [유리창]에서 엿볼 수 있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엿볼 수 있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등의 구절이 기존의 시에 드러나 있는 대표적인 모순언어, 즉 역설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시사에서 모순언어, 즉 역설언어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이 되는 시인은 萬海라고 해야 마땅하다. 萬海의 시집 {님의 침묵}에 실려 있는 모든 시는 공히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집의 시들이 시적 진리보다는 한층 선적 진리를 감응케 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러한 언어용법과 관련이 있다.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실려 있는 시가 禪僧의 깨달음을 노래한 일종의 悟道頌으로 평가되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만해의 시가 보여주는 이러한 언어용법은 기존의 禪詩가 발전시켜온 언어용법, 즉 不立文字의 언어용법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不立文字의 언어용법이 기본적으로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不立文字, 즉 문자로는 (진리를) 세울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역설이거니와, 不立文字가 언제나 不離文字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不立文字에서 不離文字로, 不離文字에서 不立文字로 순환하는 선의 언어관 자체가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禪의 언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순환논리는 不一而不二 不二而不一의 세계관을 곧바로 반영하거니와, 이는 곧 不字를 생략한 一而二 二而一의 순환논리와도 다르지 않다. 김지하가 水雲의 깨달음을 통해 강조해온 不然其然(其然不然)이나 들뢰즈의 깨달음을 통해 강조해온 카오스모스(코스모카오스) 개념도 실제로는 이처럼 不二의 세계관과 맞물려 있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氣卽理 理卽氣의 순환논리와도 별 차이 없이 통한다.
김지하가 판소리 등 전통 예술을 평가하는 기준을 발전시켜 자신의 미학으로 삼고 있는 '흰 그늘'의 내포도 결국은 이러한 맥락 위에 선다. '흰 그늘'의 이미지는 그의 주장처럼 '빛나는 그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밝은 그늘', '기쁜 어둠', '환한 우울', '즐거운 슬픔' 등의 뜻과 함께 하는 셈이다.
이 '흰 그늘'의 이미지 역시 본질적으로 모순어법, 즉 역설 어법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러한 점에서 '흰 그늘'의 이미지는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정지용의 "외로운 황홀", 김영랑의 시 "찬란한 슬픔"의 이미지와도 서로 통한다. 이러한 지적은 무엇보다 김지하의 미학이 우리 시와 문화의 유구한 전통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준다.
그렇기는 하지만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은 충분히 그 나름의 독자성을 갖는다. '흰 그늘'의 미학은 김지하의 핵심 사상인 不然其然, 카오스모스, 협종 중심의 律呂 등과 일단 그 내포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不然其然, 카오스모스, 협종 중심의 율려 등은 陰을 중심으로 하되 陽을 받아들이는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흰 그늘'의 내포를 살펴보면 이내 '흰'은 陽의 이미지이고, '그늘'은 陰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흰 그늘'의 이미지 역시 陽을 받아들이는 陰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음을 중심으로 하되 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흰 그늘'의 미학적 내용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이 때의 그늘, 즉 陰은 우리 민족의 전통 예술에서 흔히 얘기해온 한이나 설움, 슬픔, 아픔 등의 의미를 망라한다.
컴컴한 숲 그늘에
흰 자작나무들 빛나는
흰
외줄기
천지(天池) 가는 길
고개 너머 또 고개 너머
하이얀 외길
하이얀 하늘
예순 다섯에 처음으로
이도백하(二道白河)로부터 끝도 없는
천지 가는 길
천지,
쌔하얀 어둠
민족의 성산(聖山)
안개 속을 구불구불
흑풍구 비바람 속을 가로질러
천문봉 오르는 길
아
천지 가는 길
안개 가리어
천지는 없고
검은 어둠 속
시뻘건 불광(佛光) 한 오리여
저만치 검은 바위 위에 타오르는 불
봉우리 끝의
기이한
눈 못 감는
새하얀 한 밤
두려운 바람소리 소리 속에
외로운 변화의 신(神)의 한 외침소리
옛
시베리아 허공중
고절한 율려(律呂)의 소리
'한!'
'처음!'
'새로운 시작!'
반은 잠들고
반을 깨어
밤새워 홀로
이를 악물고 다짐한다
'산 위에 물이 있음이여!'
수운(水雲) 왈
'山上之有水兮!'
아침에도 여전히 천지는 없고
비바람 흑풍구 가득가득 흰 안개 속에서
아아
누굴까
거대한 손이 하나
뚜렷이
뜬다
아아
누굴까
저기 저
천지 대신
바위들 사이로
뜨는
하나의
거대한 거대한 불광의 불
타는 손
타오르는 백두(白頭)의 한
요령소리에
요령소리에
아
지금 여기 이렇게
신내림이여.
―[천지(天池) 가는 길] 전문
이 시는 민족의 성산(聖山)이라고 일컬어지는 백두산 천지를 여행하는 과정에 도달한 일련의 소식들을 담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소박한 기행시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앞에서 줄곧 논의해온 김지하 자신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사상시하고 할 수 있다.
김지하의 사상 일반을 대표하는 언어적 상징은 주지하다시피 不然其然 혹은 카오스모스이다. 不然其然 혹은 카오스모스는 모순어법, 역설어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거니와, 이 시 또한 그러한 점에서 상호 모순되는 내용이 병치되고 있다. 冒頭의 구절 "컴컴한 숲 그늘에/흰 자작나무들 빛나는/흰/외줄기/천지(天池) 가는 길"에서 '컴컴한 숲 그늘과 흰 자작나무들 빛나는 외줄기 흰 길'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의 상호 충돌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이다.
특히 "컴컴한 숲 그늘 속의 흰 자작나무들 빛나는 외줄기 흰 길"의 이미지는 김지하의 미학을 대표하는 '흰 그늘'의 이미지와 곧바로 통한다. 그로서는 '흰 그늘'의 아름다움을 "예순 다섯에 처음으로/이도백하(二道白河)로부터 끝도 없는/천지 가는 길"의 풍경들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경험하는 "민족의 성산(聖山)" "천지 가는 길"의 이미지 역시 '쌔하얀 어둠', 즉 '흰 그늘'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흰 그늘'의 이미지, 즉 '환한 어둠'의 이미지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안개 속을 구불구불/흑풍구 비바람 속을 가로질러/천문봉 오르는 길"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검은 어둠 속/시뻘건 불광(佛光) 한 오리", 즉 "저만치 검은 바위 위에 타오르는 불"이기 때문이다. '검은 어둠 속의 불광(佛光)'과 '검은 바위 위의 불'의 이미지가 '흰 그늘'의 이미지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형용모순의 이미지, 즉 "새하얀 한 밤"의 풍경 속에서 김지하는 급기야 일련의 소식을 만나게 된다. "두려운 바람소리 소리 속에"서 듣게 되는 "외로운 변화의 신(神)의 한 외침소리"가 다름 아닌 그것이다. 이 때의 신의 외침소리는 不然其然의 내포를 구체화하고 있는 '흰 그늘'의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가 닿는 세계이다. 그런데 '흰 그늘'의 이미지가 탄생시키는 "외로운 변화의 신(神)의 한 외침소리"는 "고절한 율려(律呂)의 소리와 병치되면서 이내 의미의 전이를 낳는다. 물론 '율려 소리'로 의미를 전이시키고 있는 '신의 외침 소리'는 각기 분리되어 있는 양자 택일의 존재가 아니다. '율려 소리'가 곧 '신의 외침 소리'이고 '신의 외침 소리'가 곧 '율려 소리'라는 것인데, 이러한 양가적 내포는 그가 검은 "바위들 사이로/뜨는" 아침 태양을 "거대한 불광의 불"로, "타는 손"으로 "신내림"으로 깨닫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언뜻 허술한 형식의 기행시로도 파악되는 김지하의 최근 시들은 이처럼 그 나름의 깊은 철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들 철학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알고 즐기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점은 기본적으로 최근의 그의 시가 사상을 전경화하는 가운데 예술을 후경화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물론 이러한 형식의 시쓰기에도 김지하 나름의 미학적 방책이 깊이 함유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의 시에 따르면 그것은 "쉽고 허름한 형식에/서늘하고 신령한 내용"으로 요약된다.
스무살
내 대학 때
민중민족문학의 사형(師兄)
조동일 교수를
시와시학사 편집실에서
십여 년 만에 만났더니
대뜸
왈,
'어수룩한 시 많이 쓰고
허름한 시 가리지 말고 발표해!'
그래
어김없이
꼭 그랬더니만
평론가란 이들이 모두 다
차마 엉터리란 소린 못하고
죄 입다물어버렸다
백두산 천문봉에 올랐을 때다
안개에 가려 천지는 없고
바위 위에 시뻘건 불광(佛光)만이 타오르는데
가슴 속에서 한 마디가
똑 불광처럼 떠오르는데
'쉽고 허름한 형식에
서늘하고 신령한 내용!'
―[내 시의 스승은 조형 다음에 또 이형] 부분
이 시에 따르면 김지하 나름의 예의 미학적 방책은 "'어수룩한 시 많이 쓰고/허름한 시 가리지 말고 발표해!'"라는 조동일의 권유에 비롯된다. 조동일의 이러한 권유는 좀더 완벽한 작품을 쓰기 위해 붓방아를 찧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적 현존을 채찍질하는데 정작의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시가 찾아오기를 기다려온 김지하에게 조동일의 이러한 권유는 자못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조동일의 권유에서 비롯된 "쉽고 허름한 형식에/서늘하고 신령한 내용"이라는 김지하의 미학적 방책이 다소 소극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붓방아를 찧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러한 미학적 방책으로부터 시인으로서의 프로정신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이러한 미학적 방책이 긍정적으로만 이해되지 않는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예의 미학적 방책과 관련하여 또 하나 불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최근의 그의 시가 지나칠 정도로 예술적 성취보다는 사상적 성취를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과 사상 역시 不然其然의 관계로 존재해야 마땅하리라는 것이 평소의 내 생각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상으로서의 언술방식이 아니라 예술로서의 언술방식을 취하는 것이 시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술을 陰中心으로 하되 사상을 陽中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시의 음개벽의 바람직한 방향이 된다. 시에서는 예술이 前景이고 陰이라면, 사상이 後景이고 陽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의 구현이야말로 不然其然(其然不然)의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김지하가 강조해온 不然其然(其然不然)이나 카오스모스(코스모카오스)의 논리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삶의 진리 일반을 포괄한다. 무엇보다 이는 이분법에 기초한 양자택일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있어 새로운 세기와 함께 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지닌다. 陰을 중심으로 하되 陽을 받아들이는 삶, 동시에 이 때의 陰과 陽이 상호 순환하는 삶으로 보편화된다면 그것 자체로 이미 陰開闢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空卽是色 色卽是空, 不一而不二 不二而不一, 不然其然 其然不然 등의 용어들은 이상에서 줄곧 논의해온 것처럼 그 의미가 상호 호혜적으로 뒤얽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하가 수운의 용어인 不然其然(其然不然)을 고집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이는 동아시아 내부에 중심을 세우기 위한 그의 지난한 노력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를 陰中心으로 하되 일본과 중국을 陽中心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不然其然(其然不然)의 가치를 실천해 나가려는 그의 오랜 理想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중심을 세운다는 것은 당연히 질서를 세운다는 것이 된다. 질서는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양자택일적으로 선택될 수는 없지만 세상의 중심과 관련된 층위조차 없지는 않기 마련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의 상호 분리가 가능치 않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카오스모스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들 사이에 중심을 세울 수밖에 없다면 그것의 층위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김지하의 입장에 따르면 不然其然(其然不然)과 카오스모스(코스모카오스)에서 상대적으로 저층을 형성하는 것은 不然과 카오스이다. 不然과 카오스는 陰이다. 물론 이는 其然과 코스모스가 陽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陽보다는 陰이 저층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이 때의 음이 중심이 되어 순환하는 세계가 후천개벽의 실질적인 내포라는 것이다. 이는 6의 律과 6의 呂로 이루어지는 12율려에서 남성 音인 황종(陽音)보다는 여성 音인 협종(陰音)이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각에 의해 陰인 우리나라가 중심이 되어 陽인 일본과 중국이 상호 호혜적으로 연대하는 동아시아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 김지하이다. 이러한 구상은 그의 시 [ANA]에 드러나 있는 "'아시아 민중호혜 관계망' 구상을/발표하기로 돼 있어", "공동체와 집합 대신/호혜(互惠)를 발언해야 하는/한민족의 소명" 등의 구절에 의해서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만들기라고 할 수 있는 김지하의 이러한 구상은 결코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들어 언론에 의해 더욱 불거지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특히 이를 잘 증명해준다. 강제로 고구려의 역사와 유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경우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 전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패권주의의 하나일 뿐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김지하에 의해 구상되고 있는 동아시아 민중연대 역시 이처럼 不然其然(其然不然), 카오스모스(코스모카오스)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동아시아 민중연대를 뒷받침하고 있는 김지하의 이러한 논리가 그 특유의 미학인 '흰 그늘'의 이미지와 그대로 통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다음의 시에 의해서도 그것은 곧바로 증명이 된다.
어둠 속에서 희게 불타는
자작나무 검은 숲에서 숲으로
문득
사슴 한 마리
길 가로지른다
윤동주의 명동학교도
항일유격근거지의 숨은 땅
생태공동체 호혜망의
두레마을도
아아
연길에서 인천까지
기인 긴 서해바다 위
허공에서도
사슴은
끊임없이
길 가로지르고
잠 못 드는
내 마음 속
그 돌아온 밤을
끊임없이 환영인 듯 가로지르고
백두에서 돌아와
한 밤이 가고 한 낮이 또 지나간 지금
지금까지도
―[백두(白頭)에서 돌아와] 부분
이 시에 따르면 동아시아 민중연대의 陰中心인 우리나라는 사슴의 이미지를 갖는다. 백두산 천지에서 김지하는 陰中心인 우리나라, 곧 한민족의 이미지로 사슴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고전에서 사슴은 순결하고 순수한 理想을 상징한다. 일종의 靈物로 받아들여져 온 사슴의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이처럼 미래 세계에 대한 神性스러우면서도 긍정적인 비전을 지닌다.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사슴은 김지하 특유의 미학인 '흰 그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끈다. "어둠 속에서 희게 불타는/자작나무 검은 숲"으로 구체화되어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흰 그늘'이라는 점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사슴 한 마리"가 다름 아닌 "희게 불타는/자작나무 검은 숲에서 숲으로", 곧 '흰 그늘'로 "길 가로지른다"는 점이다. 결국 이들 구절이 내포하는 것은 神性스러우면서도 긍정적인 비전을 담고 있는 '사슴'이라는 영물이 '흰 그늘', 곧 不然其然의 산물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해 앞의 시 [천지(天池) 가는 길]을 되돌아보면 이 시에서 '사슴'은 "신(神)의 한 외침소리", "고절한 율려(律呂)의 소리", "거대한 손", "신내림" 등의 이미지와도 쉽게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 이미지는 靈性을 기초로 하고 있거니와, 다름 아닌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이 시에서의 '사슴'의 내포는 분명해진다. 백두산 천지로 대표되는 한민족의 이미지를 영적 존재인 '사슴'으로 인식하는 데는 무엇보다 우리나라를 陰中心으로 하되 중국과 일본을 陽中心으로 받아들이려는 기획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시에서 "중국은 이제 바람이요/일본이 도리어 우레인가"([교오또 2])라고 되묻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러한 논의와 맥을 함께 한다.
옛 바람(巽)은 이제 와 중국이요
옛 우레(震)가 오히려
지금은
일본
우레 바람이 함께
우리를,
우리의 창조의 새 길을
보필한다는 새로운 운수이고 보니
―[우레 앞에서] 부분
이 시는 김지하가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쓴 작품이다. 우리나라를 陰中心으로 하되 중국과 일본을 陽中心으로 받아들이는 동아시아 민중연대에 대한 전망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그이다.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김지하의 그러한 전망은 이 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레 바람이 함께/우리를,/우리의 창조의 새 길을/보필한다는 새로운 운수"를 토대로 한다. 우레는 일본을, 바람은 중국을 상징하거니와, 이러한 상징은 그의 시의 "동남방이 우레요/서북방이 바람이라/우레와 바람이 돕는다 하니"([회음(會陰)에 별 뜨듯]) 등의 구절에 의해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陰中心인 우리나라와 관련하여 陽中心인 중국과 일본에 대한 김지하의 이런저런 소회를 담고 작품은 그밖에도 [평등원(平等院)에서] [교오또·1] [사카이에서] [가며 오며] 등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일본 여행은 중국 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명과 평화를,/동아시아에 창조될 새로운 문명의 이름,/생명과 평화의 길을"([사카이에서]) 탐색하는 데 놓여져 있다.
김지하가 자신의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기획이 깨어 있는 동아시아 삼국의 민중연대를 바탕으로 하여 비국가적으로 실천되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의 꿈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새롭게 엮어내려는, 곧 새로운 미래 세계를 열려는 거대한 理想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물론 김지하의 이러한 理想이 동아시아라고 하는 일정한 지역에 갇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전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 그의 이상이거니와, 그것은 [가며 오며] 등의 시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가 "이 땅의 뇌수를 바꾸어/이 땅의 저 큰 힘으로 세계를/후천개벽해야 하리라고/태평양 상공에"서 크게 다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는 세계를 향한 그의 상상력이 얼마나 크고 원대한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질서, 나아가 우주의 질서까지 새롭게 엮어 내려는 김지하의 이러한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강증산의 한 판 굿인 천지공사의 실질적인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1980년대 이후의 그의 사상이 {大巡典經}의 실질적인 저자이며 {종교학 개론} {증산사상의 이해} {민족적 종교운동} {금산다화} 등의 저서를 남긴 이정립의 사상을 발판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김지하의 철학은 김일부와 최수운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강증산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명확하다. 결국 오늘의 김지하는 동학 일반을 새롭게 변주하여 이른바 東道東器(同道同器)로 상징되는 새로운 비전을 세계사에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김지하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있는 이러한 기획이 단지 허황한 몽상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말 그대로의 개벽, 즉 일시에 세계가 달라지는 혁명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강조해온 陰中心, 女性中心, 그늘 중심으로 세계가 이동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중심이동의 실질적인 내용을 가리켜 율려운동이라고 하거니와, 그가 율려운동의 주체로 삼고 있는 神人間의 개념도 이제는 두루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이 서로 통합되어 있는 존재가 神人間이다. 따라서 神人間은 현재의 인간이 아니라 원시시대 혹은 신화시대의 인간이거나 미래의 인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그로서는 새 시대의 인간형을 오늘의 인간형이 아니라 고대의 인간형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재가 항상 과거나 미래를 수렴시키고 귀결시키는 가운데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에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카이 생협에서
생명과 평화의 길 강연을 했다
뒷풀이에서
모두들 강연이 어렵다고 말한다
한 사람
서른 네 살의 유기농하는 농부 기꾸지
기꾸지가 일어나
자기는 다 알아들었다고 말해버린다
그런데 바로 그가
저녁 식사 때
자기에게서 수년간 쌀을 받아 유통시키는
오찌이라는 젊은이에게
정색을 하고
'당신 뭐하는 사람이지?' 라고
심각하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선
꿀먹은 벙어리 얼굴이었다
우스워 모두들 우스워
밤새 웃었다
아마도 생명의 농업이란
익살의 경작인가
남을 웃게 하는
기이한 능력인가
헤어질 때 기꾸지 왈
'강연을 한 마디도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손을 굳게 잡으며
'농사지으면서 늘 철학을 하세요.'
그리고 붙여 또 한마디,
'아마도 그러면 평생토록 남에게
웃음을 주게 될 것 같구려.'
기꾸지 얼굴이 순간
교오또의 저 미소짓는 보물
미륵반가사유상이 되었다.
―[기꾸지] 전문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인 '기꾸지'는 익살로 가득 차 있는 긍정적인 인물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不然其然보다는 其然不然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不然의 부정보다는 其然의 긍정을 앞세우는 것이 기본적인 그의 생활태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꾸지의 생활태도로부터 神人間의 구체적인 형상을 유추할 수 있다면 神人間 또한 "미소짓는 보물/미륵반가사유상"의 표정을 지니고 있으리라고 보인다. "자기에게서 수년간 쌀을 받아 유통시키는/오찌이라는 젊은이에게//정색을 하고/'당신 뭐하는 사람이지?' 라고/심각하게" 묻는 것으로 주위 사람들을 "밤새 웃"게 만든 "익살의 경작"자가 다름 아닌 기꾸지이기 때문이다. "남을 웃게 하는/기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기꾸지이거니와, 그의 이러한 능력이 저급한 개그맨이나 코미디언의 자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김지하의 이러한 발상에 따르면 신인간 또한 陰을 중심으로 하되 陽을 받아들이는 '흰 그늘'의 존재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렇게 기준을 삼고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신인간의 범주에 들 가능성이 훨씬 크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강증산이 강조한 바 陰開闢의 세계 또한 여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거니와, 김지하의 페미니즘은 다름 아닌 이러한 점에서 서구의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변별된다.
뭔가를 꼬옥
맹세해야만 하겠기에
맹세하였다
맹세,
'아내에게
충실하리라!'
'기껏 마누라냐?'
'그렇지 않다'
아내는 민족,
아내는 마고(麻姑),
아내는 지구,
아내는 그 옛날의
삼신천문(三神天文),
지구 중력권의
직녀성(織女星)과
태양계의
남두육성(南斗六星)과
은하계의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직렬(直列)했던 만 사천년 전
지구와 우주만물의 근원적인 평화에로
돌아가는 다물(多勿)
율려(律呂)자리의
옛, 옛, 옛
새로운 여율(呂律)에
충실하리라,
아내에게
―[윤동주 앞에서] 부분
이 시는 "용정의 명동학교자리/전시장 맨 끝 사진 속의/윤동주 앞에서" "아내에게/충실하리라!"는 김지하의 맹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맹세는 단지 그가 그동안 자신의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의 태도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의 생략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아내는 다가오는 날들의/이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陰開闢을 세계 전환의 발판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에게 "아내는 민족,/아내는 마고(麻姑),/아내는 지구,/아내는 그 옛날의/삼신천문(三神天文)"인 것이 당연하다. 그에게 아내는 이제 "지구와 우주만물의 근원적인 평화에로/돌아가는 다물(多勿)"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율려(律呂)자리의/옛, 옛, 옛/새로운 여율(呂律)"인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면 그 자체로 일종의 난센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김지하의 시에 나타나 있는 페미니즘은 陰을 중심으로 하되 陽을 받아들이는 陰開闢의 세계사적 대전환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서구에서 수입된 그동안의 페미니즘과 김지하의 페미니즘이 변별되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기인한다. 이 또한 不然其然 혹은 카오스모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니와, 다름 아닌 이러한 점에서도 그의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의 논리는 보편성을 갖는다.
김지하의 이러한 사상이 앞으로는 좀더 생생한 시적 성취와 함께 하길 빌며 여기서 글을 맺는다.({시와사람 2004년 가을호})
―김지하의 신작시에 대하여
이은봉
김지하는 누구인가. 사상가인가, 시인인가. 그에게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양자택일적 질문이 적당치 않다. 양자택일적 질문이 적당치 않은 것은 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양자택일적으로 선택될 수 있는, 그리하여 단일한 의미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언제나 상호 모순된 복합적 의미로 순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사물과 생명의 존재법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지하는 사상가가 아니면서도 사상가이고,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인이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이러한 대답은 기본적으로 형용모순을 내포한다. 일종의 역설인 셈이다. 김지하가 사상가이면서도 시인이고, 시인이면서도 사상가라는 내포는 다름 아닌 이러한 역설과 함께 한다. 요컨대 그는 一義的 의미만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매우 복합적 존재라는 뜻이다.
어떤 존재에 대한 양자택일적 질문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올바른 대답을 이끌어내기가 불가능하다.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내포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양자택일적 질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자택일적 질문에는 이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강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기 위해 김지하가 그동안 많은 애를 써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물론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이 오늘을 살아가는 참다운 진리와 무관하다는 것은 그만의 주장이 아니다.
생명의 존재법칙과 관련하여 줄곧 그는 '不然其然'의 세계관을 강조해온 바 있다. '不然其然', 즉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렇다'는 라는 세계관은 오늘날에 이르러 좀더 명확하게 진리로서의 함의를 갖는다. 어떠한 사물이나 생명도 이분법적으로, 양자택일적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존재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不然其然'은 水雲의 깨달음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것은 水雲만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는 김지하가 '不然其然'의 내포를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카오스모스의 개념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不然其然'이든 카오스모스이든 이들 개념이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은 본래 종교적 진리의 어법이다. 예수나 석가, 공자 등 종교적 선지자들이 즐겨 애용해온 것이 모순어법, 곧 역설어법이라는 점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般若心經의 언어,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언어는 모순언어, 즉 역설언어의 대표적인 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가 곧바로 '不然其然'이나 카오스모스의 논리와 상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는 흔히 순환론적 세계관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空이 곧 色이고, 色이 곧 空이라는 것은 空에서 色으로, 色에서 空으로 순환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空이 本質이면 色은 現像이거니와, 本質卽現像 現像卽本質의 논리가 태어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는 無卽有 有卽無의 논리와도 곧바로 상응한다. 不然其然이 其然不然이 되고, 카오스모스가 코스모카오스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거니와, 무엇보다 이는 세계에 투사되어 있는 어떠한 사물이나 생명도 一義的인 내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일의적인 내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의 진행에 따른 변화로부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떠한 존재도 영원할 수 없다는 諸行無常의 가치가 설득력을 갖는 것도 실제로는 사물과 생명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형편에서 비롯된다.
모순언어, 즉 역설언어는 종교적 진리의 언어인 동시에 시의 언어이기도 하다. 정지용의 시 [유리창]에서 엿볼 수 있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엿볼 수 있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등의 구절이 기존의 시에 드러나 있는 대표적인 모순언어, 즉 역설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시사에서 모순언어, 즉 역설언어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이 되는 시인은 萬海라고 해야 마땅하다. 萬海의 시집 {님의 침묵}에 실려 있는 모든 시는 공히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집의 시들이 시적 진리보다는 한층 선적 진리를 감응케 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러한 언어용법과 관련이 있다.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실려 있는 시가 禪僧의 깨달음을 노래한 일종의 悟道頌으로 평가되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만해의 시가 보여주는 이러한 언어용법은 기존의 禪詩가 발전시켜온 언어용법, 즉 不立文字의 언어용법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不立文字의 언어용법이 기본적으로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不立文字, 즉 문자로는 (진리를) 세울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역설이거니와, 不立文字가 언제나 不離文字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不立文字에서 不離文字로, 不離文字에서 不立文字로 순환하는 선의 언어관 자체가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禪의 언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순환논리는 不一而不二 不二而不一의 세계관을 곧바로 반영하거니와, 이는 곧 不字를 생략한 一而二 二而一의 순환논리와도 다르지 않다. 김지하가 水雲의 깨달음을 통해 강조해온 不然其然(其然不然)이나 들뢰즈의 깨달음을 통해 강조해온 카오스모스(코스모카오스) 개념도 실제로는 이처럼 不二의 세계관과 맞물려 있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氣卽理 理卽氣의 순환논리와도 별 차이 없이 통한다.
김지하가 판소리 등 전통 예술을 평가하는 기준을 발전시켜 자신의 미학으로 삼고 있는 '흰 그늘'의 내포도 결국은 이러한 맥락 위에 선다. '흰 그늘'의 이미지는 그의 주장처럼 '빛나는 그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밝은 그늘', '기쁜 어둠', '환한 우울', '즐거운 슬픔' 등의 뜻과 함께 하는 셈이다.
이 '흰 그늘'의 이미지 역시 본질적으로 모순어법, 즉 역설 어법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러한 점에서 '흰 그늘'의 이미지는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정지용의 "외로운 황홀", 김영랑의 시 "찬란한 슬픔"의 이미지와도 서로 통한다. 이러한 지적은 무엇보다 김지하의 미학이 우리 시와 문화의 유구한 전통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준다.
그렇기는 하지만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은 충분히 그 나름의 독자성을 갖는다. '흰 그늘'의 미학은 김지하의 핵심 사상인 不然其然, 카오스모스, 협종 중심의 律呂 등과 일단 그 내포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不然其然, 카오스모스, 협종 중심의 율려 등은 陰을 중심으로 하되 陽을 받아들이는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흰 그늘'의 내포를 살펴보면 이내 '흰'은 陽의 이미지이고, '그늘'은 陰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흰 그늘'의 이미지 역시 陽을 받아들이는 陰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음을 중심으로 하되 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흰 그늘'의 미학적 내용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이 때의 그늘, 즉 陰은 우리 민족의 전통 예술에서 흔히 얘기해온 한이나 설움, 슬픔, 아픔 등의 의미를 망라한다.
컴컴한 숲 그늘에
흰 자작나무들 빛나는
흰
외줄기
천지(天池) 가는 길
고개 너머 또 고개 너머
하이얀 외길
하이얀 하늘
예순 다섯에 처음으로
이도백하(二道白河)로부터 끝도 없는
천지 가는 길
천지,
쌔하얀 어둠
민족의 성산(聖山)
안개 속을 구불구불
흑풍구 비바람 속을 가로질러
천문봉 오르는 길
아
천지 가는 길
안개 가리어
천지는 없고
검은 어둠 속
시뻘건 불광(佛光) 한 오리여
저만치 검은 바위 위에 타오르는 불
봉우리 끝의
기이한
눈 못 감는
새하얀 한 밤
두려운 바람소리 소리 속에
외로운 변화의 신(神)의 한 외침소리
옛
시베리아 허공중
고절한 율려(律呂)의 소리
'한!'
'처음!'
'새로운 시작!'
반은 잠들고
반을 깨어
밤새워 홀로
이를 악물고 다짐한다
'산 위에 물이 있음이여!'
수운(水雲) 왈
'山上之有水兮!'
아침에도 여전히 천지는 없고
비바람 흑풍구 가득가득 흰 안개 속에서
아아
누굴까
거대한 손이 하나
뚜렷이
뜬다
아아
누굴까
저기 저
천지 대신
바위들 사이로
뜨는
하나의
거대한 거대한 불광의 불
타는 손
타오르는 백두(白頭)의 한
요령소리에
요령소리에
아
지금 여기 이렇게
신내림이여.
―[천지(天池) 가는 길] 전문
이 시는 민족의 성산(聖山)이라고 일컬어지는 백두산 천지를 여행하는 과정에 도달한 일련의 소식들을 담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소박한 기행시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앞에서 줄곧 논의해온 김지하 자신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사상시하고 할 수 있다.
김지하의 사상 일반을 대표하는 언어적 상징은 주지하다시피 不然其然 혹은 카오스모스이다. 不然其然 혹은 카오스모스는 모순어법, 역설어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거니와, 이 시 또한 그러한 점에서 상호 모순되는 내용이 병치되고 있다. 冒頭의 구절 "컴컴한 숲 그늘에/흰 자작나무들 빛나는/흰/외줄기/천지(天池) 가는 길"에서 '컴컴한 숲 그늘과 흰 자작나무들 빛나는 외줄기 흰 길'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의 상호 충돌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이다.
특히 "컴컴한 숲 그늘 속의 흰 자작나무들 빛나는 외줄기 흰 길"의 이미지는 김지하의 미학을 대표하는 '흰 그늘'의 이미지와 곧바로 통한다. 그로서는 '흰 그늘'의 아름다움을 "예순 다섯에 처음으로/이도백하(二道白河)로부터 끝도 없는/천지 가는 길"의 풍경들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경험하는 "민족의 성산(聖山)" "천지 가는 길"의 이미지 역시 '쌔하얀 어둠', 즉 '흰 그늘'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흰 그늘'의 이미지, 즉 '환한 어둠'의 이미지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안개 속을 구불구불/흑풍구 비바람 속을 가로질러/천문봉 오르는 길"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검은 어둠 속/시뻘건 불광(佛光) 한 오리", 즉 "저만치 검은 바위 위에 타오르는 불"이기 때문이다. '검은 어둠 속의 불광(佛光)'과 '검은 바위 위의 불'의 이미지가 '흰 그늘'의 이미지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형용모순의 이미지, 즉 "새하얀 한 밤"의 풍경 속에서 김지하는 급기야 일련의 소식을 만나게 된다. "두려운 바람소리 소리 속에"서 듣게 되는 "외로운 변화의 신(神)의 한 외침소리"가 다름 아닌 그것이다. 이 때의 신의 외침소리는 不然其然의 내포를 구체화하고 있는 '흰 그늘'의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가 닿는 세계이다. 그런데 '흰 그늘'의 이미지가 탄생시키는 "외로운 변화의 신(神)의 한 외침소리"는 "고절한 율려(律呂)의 소리와 병치되면서 이내 의미의 전이를 낳는다. 물론 '율려 소리'로 의미를 전이시키고 있는 '신의 외침 소리'는 각기 분리되어 있는 양자 택일의 존재가 아니다. '율려 소리'가 곧 '신의 외침 소리'이고 '신의 외침 소리'가 곧 '율려 소리'라는 것인데, 이러한 양가적 내포는 그가 검은 "바위들 사이로/뜨는" 아침 태양을 "거대한 불광의 불"로, "타는 손"으로 "신내림"으로 깨닫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언뜻 허술한 형식의 기행시로도 파악되는 김지하의 최근 시들은 이처럼 그 나름의 깊은 철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들 철학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알고 즐기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점은 기본적으로 최근의 그의 시가 사상을 전경화하는 가운데 예술을 후경화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물론 이러한 형식의 시쓰기에도 김지하 나름의 미학적 방책이 깊이 함유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의 시에 따르면 그것은 "쉽고 허름한 형식에/서늘하고 신령한 내용"으로 요약된다.
스무살
내 대학 때
민중민족문학의 사형(師兄)
조동일 교수를
시와시학사 편집실에서
십여 년 만에 만났더니
대뜸
왈,
'어수룩한 시 많이 쓰고
허름한 시 가리지 말고 발표해!'
그래
어김없이
꼭 그랬더니만
평론가란 이들이 모두 다
차마 엉터리란 소린 못하고
죄 입다물어버렸다
백두산 천문봉에 올랐을 때다
안개에 가려 천지는 없고
바위 위에 시뻘건 불광(佛光)만이 타오르는데
가슴 속에서 한 마디가
똑 불광처럼 떠오르는데
'쉽고 허름한 형식에
서늘하고 신령한 내용!'
―[내 시의 스승은 조형 다음에 또 이형] 부분
이 시에 따르면 김지하 나름의 예의 미학적 방책은 "'어수룩한 시 많이 쓰고/허름한 시 가리지 말고 발표해!'"라는 조동일의 권유에 비롯된다. 조동일의 이러한 권유는 좀더 완벽한 작품을 쓰기 위해 붓방아를 찧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적 현존을 채찍질하는데 정작의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시가 찾아오기를 기다려온 김지하에게 조동일의 이러한 권유는 자못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조동일의 권유에서 비롯된 "쉽고 허름한 형식에/서늘하고 신령한 내용"이라는 김지하의 미학적 방책이 다소 소극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붓방아를 찧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러한 미학적 방책으로부터 시인으로서의 프로정신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이러한 미학적 방책이 긍정적으로만 이해되지 않는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예의 미학적 방책과 관련하여 또 하나 불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최근의 그의 시가 지나칠 정도로 예술적 성취보다는 사상적 성취를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과 사상 역시 不然其然의 관계로 존재해야 마땅하리라는 것이 평소의 내 생각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상으로서의 언술방식이 아니라 예술로서의 언술방식을 취하는 것이 시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술을 陰中心으로 하되 사상을 陽中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시의 음개벽의 바람직한 방향이 된다. 시에서는 예술이 前景이고 陰이라면, 사상이 後景이고 陽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의 구현이야말로 不然其然(其然不然)의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김지하가 강조해온 不然其然(其然不然)이나 카오스모스(코스모카오스)의 논리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삶의 진리 일반을 포괄한다. 무엇보다 이는 이분법에 기초한 양자택일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있어 새로운 세기와 함께 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지닌다. 陰을 중심으로 하되 陽을 받아들이는 삶, 동시에 이 때의 陰과 陽이 상호 순환하는 삶으로 보편화된다면 그것 자체로 이미 陰開闢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空卽是色 色卽是空, 不一而不二 不二而不一, 不然其然 其然不然 등의 용어들은 이상에서 줄곧 논의해온 것처럼 그 의미가 상호 호혜적으로 뒤얽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하가 수운의 용어인 不然其然(其然不然)을 고집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이는 동아시아 내부에 중심을 세우기 위한 그의 지난한 노력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를 陰中心으로 하되 일본과 중국을 陽中心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不然其然(其然不然)의 가치를 실천해 나가려는 그의 오랜 理想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중심을 세운다는 것은 당연히 질서를 세운다는 것이 된다. 질서는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양자택일적으로 선택될 수는 없지만 세상의 중심과 관련된 층위조차 없지는 않기 마련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의 상호 분리가 가능치 않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카오스모스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들 사이에 중심을 세울 수밖에 없다면 그것의 층위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김지하의 입장에 따르면 不然其然(其然不然)과 카오스모스(코스모카오스)에서 상대적으로 저층을 형성하는 것은 不然과 카오스이다. 不然과 카오스는 陰이다. 물론 이는 其然과 코스모스가 陽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陽보다는 陰이 저층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이 때의 음이 중심이 되어 순환하는 세계가 후천개벽의 실질적인 내포라는 것이다. 이는 6의 律과 6의 呂로 이루어지는 12율려에서 남성 音인 황종(陽音)보다는 여성 音인 협종(陰音)이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각에 의해 陰인 우리나라가 중심이 되어 陽인 일본과 중국이 상호 호혜적으로 연대하는 동아시아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 김지하이다. 이러한 구상은 그의 시 [ANA]에 드러나 있는 "'아시아 민중호혜 관계망' 구상을/발표하기로 돼 있어", "공동체와 집합 대신/호혜(互惠)를 발언해야 하는/한민족의 소명" 등의 구절에 의해서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만들기라고 할 수 있는 김지하의 이러한 구상은 결코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들어 언론에 의해 더욱 불거지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특히 이를 잘 증명해준다. 강제로 고구려의 역사와 유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경우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 전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패권주의의 하나일 뿐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김지하에 의해 구상되고 있는 동아시아 민중연대 역시 이처럼 不然其然(其然不然), 카오스모스(코스모카오스)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동아시아 민중연대를 뒷받침하고 있는 김지하의 이러한 논리가 그 특유의 미학인 '흰 그늘'의 이미지와 그대로 통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다음의 시에 의해서도 그것은 곧바로 증명이 된다.
어둠 속에서 희게 불타는
자작나무 검은 숲에서 숲으로
문득
사슴 한 마리
길 가로지른다
윤동주의 명동학교도
항일유격근거지의 숨은 땅
생태공동체 호혜망의
두레마을도
아아
연길에서 인천까지
기인 긴 서해바다 위
허공에서도
사슴은
끊임없이
길 가로지르고
잠 못 드는
내 마음 속
그 돌아온 밤을
끊임없이 환영인 듯 가로지르고
백두에서 돌아와
한 밤이 가고 한 낮이 또 지나간 지금
지금까지도
―[백두(白頭)에서 돌아와] 부분
이 시에 따르면 동아시아 민중연대의 陰中心인 우리나라는 사슴의 이미지를 갖는다. 백두산 천지에서 김지하는 陰中心인 우리나라, 곧 한민족의 이미지로 사슴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고전에서 사슴은 순결하고 순수한 理想을 상징한다. 일종의 靈物로 받아들여져 온 사슴의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이처럼 미래 세계에 대한 神性스러우면서도 긍정적인 비전을 지닌다.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사슴은 김지하 특유의 미학인 '흰 그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끈다. "어둠 속에서 희게 불타는/자작나무 검은 숲"으로 구체화되어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흰 그늘'이라는 점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사슴 한 마리"가 다름 아닌 "희게 불타는/자작나무 검은 숲에서 숲으로", 곧 '흰 그늘'로 "길 가로지른다"는 점이다. 결국 이들 구절이 내포하는 것은 神性스러우면서도 긍정적인 비전을 담고 있는 '사슴'이라는 영물이 '흰 그늘', 곧 不然其然의 산물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해 앞의 시 [천지(天池) 가는 길]을 되돌아보면 이 시에서 '사슴'은 "신(神)의 한 외침소리", "고절한 율려(律呂)의 소리", "거대한 손", "신내림" 등의 이미지와도 쉽게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 이미지는 靈性을 기초로 하고 있거니와, 다름 아닌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이 시에서의 '사슴'의 내포는 분명해진다. 백두산 천지로 대표되는 한민족의 이미지를 영적 존재인 '사슴'으로 인식하는 데는 무엇보다 우리나라를 陰中心으로 하되 중국과 일본을 陽中心으로 받아들이려는 기획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시에서 "중국은 이제 바람이요/일본이 도리어 우레인가"([교오또 2])라고 되묻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러한 논의와 맥을 함께 한다.
옛 바람(巽)은 이제 와 중국이요
옛 우레(震)가 오히려
지금은
일본
우레 바람이 함께
우리를,
우리의 창조의 새 길을
보필한다는 새로운 운수이고 보니
―[우레 앞에서] 부분
이 시는 김지하가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쓴 작품이다. 우리나라를 陰中心으로 하되 중국과 일본을 陽中心으로 받아들이는 동아시아 민중연대에 대한 전망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그이다.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김지하의 그러한 전망은 이 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레 바람이 함께/우리를,/우리의 창조의 새 길을/보필한다는 새로운 운수"를 토대로 한다. 우레는 일본을, 바람은 중국을 상징하거니와, 이러한 상징은 그의 시의 "동남방이 우레요/서북방이 바람이라/우레와 바람이 돕는다 하니"([회음(會陰)에 별 뜨듯]) 등의 구절에 의해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陰中心인 우리나라와 관련하여 陽中心인 중국과 일본에 대한 김지하의 이런저런 소회를 담고 작품은 그밖에도 [평등원(平等院)에서] [교오또·1] [사카이에서] [가며 오며] 등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일본 여행은 중국 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명과 평화를,/동아시아에 창조될 새로운 문명의 이름,/생명과 평화의 길을"([사카이에서]) 탐색하는 데 놓여져 있다.
김지하가 자신의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기획이 깨어 있는 동아시아 삼국의 민중연대를 바탕으로 하여 비국가적으로 실천되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의 꿈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새롭게 엮어내려는, 곧 새로운 미래 세계를 열려는 거대한 理想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물론 김지하의 이러한 理想이 동아시아라고 하는 일정한 지역에 갇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전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 그의 이상이거니와, 그것은 [가며 오며] 등의 시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가 "이 땅의 뇌수를 바꾸어/이 땅의 저 큰 힘으로 세계를/후천개벽해야 하리라고/태평양 상공에"서 크게 다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는 세계를 향한 그의 상상력이 얼마나 크고 원대한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질서, 나아가 우주의 질서까지 새롭게 엮어 내려는 김지하의 이러한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강증산의 한 판 굿인 천지공사의 실질적인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1980년대 이후의 그의 사상이 {大巡典經}의 실질적인 저자이며 {종교학 개론} {증산사상의 이해} {민족적 종교운동} {금산다화} 등의 저서를 남긴 이정립의 사상을 발판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김지하의 철학은 김일부와 최수운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강증산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명확하다. 결국 오늘의 김지하는 동학 일반을 새롭게 변주하여 이른바 東道東器(同道同器)로 상징되는 새로운 비전을 세계사에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김지하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있는 이러한 기획이 단지 허황한 몽상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말 그대로의 개벽, 즉 일시에 세계가 달라지는 혁명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강조해온 陰中心, 女性中心, 그늘 중심으로 세계가 이동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중심이동의 실질적인 내용을 가리켜 율려운동이라고 하거니와, 그가 율려운동의 주체로 삼고 있는 神人間의 개념도 이제는 두루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이 서로 통합되어 있는 존재가 神人間이다. 따라서 神人間은 현재의 인간이 아니라 원시시대 혹은 신화시대의 인간이거나 미래의 인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그로서는 새 시대의 인간형을 오늘의 인간형이 아니라 고대의 인간형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재가 항상 과거나 미래를 수렴시키고 귀결시키는 가운데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에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카이 생협에서
생명과 평화의 길 강연을 했다
뒷풀이에서
모두들 강연이 어렵다고 말한다
한 사람
서른 네 살의 유기농하는 농부 기꾸지
기꾸지가 일어나
자기는 다 알아들었다고 말해버린다
그런데 바로 그가
저녁 식사 때
자기에게서 수년간 쌀을 받아 유통시키는
오찌이라는 젊은이에게
정색을 하고
'당신 뭐하는 사람이지?' 라고
심각하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선
꿀먹은 벙어리 얼굴이었다
우스워 모두들 우스워
밤새 웃었다
아마도 생명의 농업이란
익살의 경작인가
남을 웃게 하는
기이한 능력인가
헤어질 때 기꾸지 왈
'강연을 한 마디도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손을 굳게 잡으며
'농사지으면서 늘 철학을 하세요.'
그리고 붙여 또 한마디,
'아마도 그러면 평생토록 남에게
웃음을 주게 될 것 같구려.'
기꾸지 얼굴이 순간
교오또의 저 미소짓는 보물
미륵반가사유상이 되었다.
―[기꾸지] 전문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인 '기꾸지'는 익살로 가득 차 있는 긍정적인 인물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不然其然보다는 其然不然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不然의 부정보다는 其然의 긍정을 앞세우는 것이 기본적인 그의 생활태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꾸지의 생활태도로부터 神人間의 구체적인 형상을 유추할 수 있다면 神人間 또한 "미소짓는 보물/미륵반가사유상"의 표정을 지니고 있으리라고 보인다. "자기에게서 수년간 쌀을 받아 유통시키는/오찌이라는 젊은이에게//정색을 하고/'당신 뭐하는 사람이지?' 라고/심각하게" 묻는 것으로 주위 사람들을 "밤새 웃"게 만든 "익살의 경작"자가 다름 아닌 기꾸지이기 때문이다. "남을 웃게 하는/기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기꾸지이거니와, 그의 이러한 능력이 저급한 개그맨이나 코미디언의 자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김지하의 이러한 발상에 따르면 신인간 또한 陰을 중심으로 하되 陽을 받아들이는 '흰 그늘'의 존재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렇게 기준을 삼고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신인간의 범주에 들 가능성이 훨씬 크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강증산이 강조한 바 陰開闢의 세계 또한 여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거니와, 김지하의 페미니즘은 다름 아닌 이러한 점에서 서구의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변별된다.
뭔가를 꼬옥
맹세해야만 하겠기에
맹세하였다
맹세,
'아내에게
충실하리라!'
'기껏 마누라냐?'
'그렇지 않다'
아내는 민족,
아내는 마고(麻姑),
아내는 지구,
아내는 그 옛날의
삼신천문(三神天文),
지구 중력권의
직녀성(織女星)과
태양계의
남두육성(南斗六星)과
은하계의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직렬(直列)했던 만 사천년 전
지구와 우주만물의 근원적인 평화에로
돌아가는 다물(多勿)
율려(律呂)자리의
옛, 옛, 옛
새로운 여율(呂律)에
충실하리라,
아내에게
―[윤동주 앞에서] 부분
이 시는 "용정의 명동학교자리/전시장 맨 끝 사진 속의/윤동주 앞에서" "아내에게/충실하리라!"는 김지하의 맹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맹세는 단지 그가 그동안 자신의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의 태도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의 생략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아내는 다가오는 날들의/이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陰開闢을 세계 전환의 발판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에게 "아내는 민족,/아내는 마고(麻姑),/아내는 지구,/아내는 그 옛날의/삼신천문(三神天文)"인 것이 당연하다. 그에게 아내는 이제 "지구와 우주만물의 근원적인 평화에로/돌아가는 다물(多勿)"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율려(律呂)자리의/옛, 옛, 옛/새로운 여율(呂律)"인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면 그 자체로 일종의 난센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김지하의 시에 나타나 있는 페미니즘은 陰을 중심으로 하되 陽을 받아들이는 陰開闢의 세계사적 대전환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서구에서 수입된 그동안의 페미니즘과 김지하의 페미니즘이 변별되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기인한다. 이 또한 不然其然 혹은 카오스모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니와, 다름 아닌 이러한 점에서도 그의 모순어법, 즉 역설어법의 논리는 보편성을 갖는다.
김지하의 이러한 사상이 앞으로는 좀더 생생한 시적 성취와 함께 하길 빌며 여기서 글을 맺는다.({시와사람 200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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