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장자 내편 소요유에 대한 청나라 곽경번의 집석 제1편을 우선 소개해드린 바 있다. 소요유 한 편의 집석만도 상당히 긴 분량이어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 특히 음운이나 한자의 교감 등은 대부분 생략하였다. 한문으로 된 원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면 과연 누가 읽을 것인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이 카페가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임을 감안하여 싣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장자는 우리 동양예술문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정신이다. 20세기 서구문화의 범람으로 우리는 우리의 고유문화나 전통까지도 서구적 개념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가 노자나 장자 등을 왜 읽어야 하는지 통감하게 된다. 장자 집석과 관련하여 장자 원문에 대한 번역이 없는데 이는 김학주의 번역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그간 무수한 번역본이 많으나 그 중 김학주의 번역이 충실하다고 판단되어 추천한다. 또한 장자의 예술관련 책으로는 현대 중국의 미학자인 서복관의 책 '중국의 예술정신'을 추천한다. 문학과 예술비평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라고 생각된다.
이 번에는 곽경번의 집석을 더 올리기 전에 먼저 장자라는 책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소개한다. 이 글은 얼마 전 북경대 미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한 사람은 현재 동 대학원에 재학중인 황지윤이라는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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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책을 직접 저술했는지의 진위 여부 및 각 편의 저작 년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과거의 연구를 살펴보면 대개는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장자> 안의 개념어들을 다른 것과 혼재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선 20세기 들어 이미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단 제자 백가의 저술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맹자>나 <노자>의 경우처럼 단독으로 쓰여진 경우이고 훗날 부분적으로 수정된 경우가 있으나 이가 개인적 저술이란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또 하나의 경우는 <관자>나 <묵자>처럼 하나의 학파의 견해를 대표하는 저술인데 가령 <관자> 안에는 관자가 직접 쓴 것은 없고 모두가 관자의 견해를 대표하는 논술들뿐이며 반대로 <묵자>의 경우는 <장자>와 비슷하게 어떤 부분은 묵자 자신이 썼는가 하면 어떤 부분은 그의 제자들이 구성한 것이다. (선진시기의 책은 저자가 직접 저술한 것이 드물다. <한서 예문지>에 기록된 이름은 저술자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한다. 고서는 보통 한 사람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후에 문자로 기재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주석과 정문이 서로 뒤섞이거나 비평과 평론이 부록의 형식으로 서로 뒤섞였는데 이러한 각종 복잡한 문제로 인하여 진위 파악 여부가 매우 어렵다, 런펑)
<장자>는 장자 자신의 작품과 그의 후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장자가 쓴 부분이고 어떤 부분이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방금 여러분들이 토론을 하였다. 오늘날 대체적으로 공인되는 견해는 내편 7편이 모두 장자의 저술이고 그 밖의 외편과 잡편은 후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코 새로운 견해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연구는 이를 의심할 여지 없는 것으로 기정사실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몇 년 전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딴 리우샤오간은 그의 논문에서 이를 매우 구체적으로 고증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언어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내편에서 가령 精, 神, 道, 德과 같은 몇 가지 구체적인 어휘가 모두 단독으로 쓰였음을 밝혔다. 즉 정신이 아닌 정과 신, 도덕이 아닌 도와 덕으로 쓰이고 있다는 건데 외편과 잡편을 보면 정신, 도덕처럼 연결해서 쓰는 경우가 출현한다. 한자의 발전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합성어는 후대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장자의 내편은 외편과 잡편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 것임을 단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제자의 자료를 보면 한대로부터 위진 시기에 이르는 여러 판본들이 열거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어느 판본이건 간에 내편이 7편이라는 것만큼은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내편엔 누구나 동일하게 주석을 달고 그 밖의 외편과 잡편은 더러 편수 차이가 있어 한대 사람들이 일찍이 내편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마표와 최선, 향수와 곽상의 편수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모두가 내편 7편을 포함하고 있어 이가 장자의 저작임을 간접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외편의 저작 년대를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 이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는 한나라 초기까지 끌어올리는데 대부분의 편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나라 초기의 언어사용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인데 가령 우리가 어느 문헌을 볼 때 한나라 초기의 흔적이 있다고 해서 이를 바로 당시의 문헌으로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 하면 이 또한 매우 곤란한 부분이다. 선진 말기에서 한대 초기에 이르는 무렵 대규모로 과거의 문헌을 정리하는 작업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구전으로 전수되거나 낱개로 흩어져 다니던 저작들이 당시의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정리, 기재되면서 문집으로 엮이게 되었다. (이는 문자가 통일되지 않은 시대적 배경과도 연관 있음, 런펑) 이 과정에서 한나라 초기의 언어 사용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데 <장자>의 경우도 이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춘추>를 봐도 곡양전, 좌씨전, 공양전의 서로 다른 판본이 있는데 그 가운데 곡양전과 공양전은 대대손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이 한나라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정식으로 책으로 쓰여졌다. 이처럼 문자 상으로 기재되는 과정에서 한나라 초기의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20세기 초에 중국 고대문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일부 疑古派 학자들이 선진 시기의 문헌을 죄다 한나라 이후의 것으로 규정짓기도 하였는데 훗날 사료학의 발전 및 출토 문헌의 증가에 따라 그들의 가설 역시 다시금 부정되었다. 가령 <文子>가 위서라는 견해가 있었는데 훗날 한대의 무덤에서 이가 발굴된 예가 있고, 또 <허관자>가 틀림없는 위서라고 청대 사람들이 확정지은 바 있으나 이 또한 한대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한서 예문지에 이들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적어도 위진시기와 당대의 위서일 것이라고 양계초가 언급한 바 있다, 런펑)
보다시피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대 초엽에 이르는 시기는 매우 복잡한 시기이다. 리우샤오간은 외편과 잡편이 전국시대 말기에 형성된 것이라 추측하며 이를 다시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장자>의 내편에 드러나는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외편의 <추수>, <지악>, <달생>, <산목>, <전자방>, <지북유>와 잡편의 <경상초>, <서무귀>, <즉양>, <외물>, <우언>, <열어구>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는 장자의 사상과 다른 사상이 반씩 섞인 것으로서 외편의 <재유(뒷부분)>, <천지>, <천도>, <천운>, <각의>, <선성> 및 잡편의 <천하>가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로 장자의 사상과 성격이 전혀 다른 부분으로 외편의 <변무>, <마제>, <거qie>, <재유(앞부분)>과 잡편의 <양왕>부터 <어부>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리우샤오간의 내편과 외편, 잡편 간의 관계 및 저작 년대에 관한 위의 분류는 개인적으로 봤을 때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겨진다. 최근 철학과 왕보 선생이 <장자철학>이라는 책을 냈는데 역시 내편을 근거로 해서 장자의 사상을 재구성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만일 장자의 철학과 미학에 관한 논문을 쓴다면 장자의 핵심이 내편에 있음을 자각하고 마땅히 이를 근거로 해야 할 것이다. 방금 학생 여러분들이 <장자>의 저작 진위 여부에 대해 몇 백 년 간에 걸친 여러 쟁점들을 소개했는데, 오늘날의 연구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내편을 전대의 것, 외편과 잡편을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내편이 장자가 생존했던 전국시대 중기에 형성되었다고 보며 외편과 잡편은 전국시대 말기와 한나라 초엽에 걸쳐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상이 오늘의 첫 번째 문제다.
<장자>를 읽기 앞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방금 발표자가 한대 이래 판본 변화에 대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한대, 특히 초기에는 여러 문헌에서 장자를 언급하고 있어 일찍이 이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급격히 쇠퇴하여 위진남북조 시기, 즉 서진에 이르러서야 다시 명맥을 잇게 된다. 간단히 말해 동한 말기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장자>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장 사상을 다룰 때 있어 그들의 선후 관계는 언제나 명백하여 일단은 노자, 그리고 장자는 그 다음이기 마련이었다. 탕용통 선생의 위진현학에 관한 연구 논문을 보면 正始(魏 241-249) 년간에 사람들이 중시했던 것이 여전히 <주역>과 <노자>였으며 元康(서진 292-299) 년간, 즉 혜강이나 완적 같은 죽림칠현이 출현할 즈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장자>가 중시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향수, 곽상이 활약했던 시기는 탕용통 선생에 의하면 新莊學이 부흥했던 시점으로서 소위 신장학이라 함은 앞서 발표자의 자료에서도 보았듯이 “곽상이 장자의 주를 달았는가, 장자가 곽상의 주를 달았는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많은 새로운 견해들이 장자의 주석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났음을 가리킨다. 이는 다시 말해 장자 학파의 사상이 처음으로 전수되었던 시기, 그러니깐 전국 초기부터 한대 초엽에 이르는 시점을 제외하고 두 번째로 부흥하게 되는 시기가 늦어도 위진 시기에 다시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부흥, 즉 현학이 한참 유행했던 시점에서 <장자>가 다시금 중시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장자>를 도교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도교에서 <장자>를 중시하고 이를 심지어 도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현상, 그리고 곽상 자신의 <장자> 사상에 대한 현학적 이해와 해석, 나아가 도교적 맥락에서 <장자>를 도교화 시켜낸 것, 후자의 그 구체적 내용에 우리가 뭐라고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실이 존재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즉 당대 이전에 이르기까지 <장자>의 사상은 위진 시기의 재부흥 이래로 크게 두 가지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첫째는 현학적 관점에서 이를 재해석하는 것이요, 둘째는 현학적 연구의 일부 성과가 도교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한대 이래 현학과 도교를 두 가지로 딱 잘라 나눠서 볼 게 아니라 현학의 발전선 상에서 도교를 본다는 뜻이다, 런펑) 도교화의 성분을 점차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현학과 도교 사이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이가 바로 당대 이전의 상황이다.
당대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방금의 자료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당대, 그리고 송대에 수많은 주석서가 출현하는데 그 가운데 왕방의 <남화진경신전> 같은 것은 분명 도교에 속하는 것이다. 그는 왕안석의 아들인데 똑똑했으나 요절했다. 자, 간추려 말하겠다. 당대 이후에는 이처럼 도교적 계통에서 유행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문화라는 전체적인 각도에서 봤을 때 사대부들의 필수적인 교양서적이라고 할 만큼 <장자>가 유행하게 되었다. 만일 누가 <장자>를 안 읽었다고 하면 우리는 문화인이 어떻게 그것도 안 읽었냐고 반문할 것이다. 과거의 사대부들이 <장자>를 안 읽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진다. 여기서 당나라를 기준으로 선을 긋는 것에는 철학적 의미보다는 미학적 함의가 다분하다. 즉 당대 이후로 사대부의 문화 교양은 기본적으로 유교, 불교, 도교가 혼재화되는 경향과 맞물려 표현된다. 물론 한유를 비롯해 송명 이학의 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더러 불교를 배척하고 노장 사상을 업신여겼지만 유종원이나 소식 같은 일련의 사대부들은 기본적으로 유불도 三敎의 모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양을 쌓아갔던 것이다. 이 시기의 <장자>는 거의 모든 이들이 읽었다고 해도 무방한데, 가령 사상적으로 유가의 계통의 속하는 학자가 <장자>의 주석을 달았던가 하면 방금의 자료에서도 보았다시피 감산덕청 같은 중들도 <장자>에 주석을 달았다. 즉 유불도가 일체화되는 경향을 타고 <장자>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일부는 불교 아래 흡수되기도 하고 일부는 아예 선종과 동일시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택후 선생의 莊禪에 관한 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는데 이처럼 莊禪이라는 말이 이 시기에 점차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상의 변화를 다시 정리해보자면 먼저 선진 시기에 소개되었던 장자 학파, 그리고 현학에 의해 재구성되는 단계 및 이를 기초로 도교화되었던 현상, 그리고 유불도가 섞이면서 일종의 수양 방법으로 변화해간 단계 등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이상이 장자 사상의 변화라 할 수 있겠다.
자료를 다시 살펴보면 뒤에 청대 이후의 주석이 몇 가지 열거되어 있는데 사실 청나라 때엔 <장자>에 대한 좋은 주석이 없었다. 곽경번의 <장자집석> 가운데 인용된 곽상의 주와 성현영의 소는 기본적으로 일종의 의리, 즉 사상을 전개해나간 것이고, 이 같은 방식은 <장자>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 때 항상 주류의 위치를 차지했었다. <장자>를 읽을 때는, 여기 자료에 보다시피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주를 이루어” 가령 문자의 풀이에만 치중한다면 감을 못 잡고 그 안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장자>를 읽을 때 자세한 교정 작업이나 고어에 관한 고증 및 해석 작업을 애써 피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청대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복되기 시작했는데, 여기 자료에 인용된 왕선겸 부분을 보면 그의 주석이 문구의 교감과 고자고의의 해석 방면에서 비교적 탁월하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 아래 열거된 참고 서적들을 보면 가령 노문초의 <장자음의고증>, 왕념손의 <독서잡지> 가운데 실린 장자 부분, 그리고 손이양의 <장자찰이>, 유월의 <제자평의>에 실린 <독장자평의> 등이 있는데, 이상의 책들은 청대 사람들이 문자학과 훈고학에 의거해 장자의 저작을 연구한 것이지만 모두가 불완전한 것으로서 합쳐봐야 기껏 몇 줄에 지나지 않는다. (왕념손의 <독서잡지>에 실린 장자에 관한 부분은 약 15페이지 정도 된다, 런펑) 이처럼 청대의 학자들이 문자학과 훈고학에 의거해 장자를 연구했던 기반 위에서 그나마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이 바로 청대 후기의 왕선겸과 곽경번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 책 역시 냉정히 따져본다면 아주 특출하다고 할 만큼 좋은 주석은 아니다. 뒤에 언급된 세 가지 주석, 즉 중화민국 시기의 마서윤과 유문전, 그리고 왕숙민의 저작은 청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다시 진일보한 주석을 달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장자>의 주석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앞서 보았다시피 현학적 관점에서 이가 재해석되었건 선종의 관점에서 이가 다시 받아들여졌건 모두가 의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다분했으며, 따라서 몇몇 선생들이 聞一多의 말을 즐겨 인용하는 것처럼 역대로 <장자>는 “충만한 시의를 가지고 해석” 되어왔다. <장자>에 대한 엄격한 문자적 교감과 훈고학적 각도에서의 연구는 매우 미흡한 실정인데 청대에 이르러 이가 시도된 바가 있으며 모두가 왕선겸과 곽경번의 저작 가운데 잘 반영되어 있다. 20세기 이후 출판된 <장자>에 관한 여러 서적들 가운데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것들이 있으나 여전히 표준적인 텍스트로 삼을만한 것은 없다고 하겠다.
이 번에는 곽경번의 집석을 더 올리기 전에 먼저 장자라는 책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소개한다. 이 글은 얼마 전 북경대 미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한 사람은 현재 동 대학원에 재학중인 황지윤이라는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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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책을 직접 저술했는지의 진위 여부 및 각 편의 저작 년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과거의 연구를 살펴보면 대개는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장자> 안의 개념어들을 다른 것과 혼재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선 20세기 들어 이미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단 제자 백가의 저술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맹자>나 <노자>의 경우처럼 단독으로 쓰여진 경우이고 훗날 부분적으로 수정된 경우가 있으나 이가 개인적 저술이란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또 하나의 경우는 <관자>나 <묵자>처럼 하나의 학파의 견해를 대표하는 저술인데 가령 <관자> 안에는 관자가 직접 쓴 것은 없고 모두가 관자의 견해를 대표하는 논술들뿐이며 반대로 <묵자>의 경우는 <장자>와 비슷하게 어떤 부분은 묵자 자신이 썼는가 하면 어떤 부분은 그의 제자들이 구성한 것이다. (선진시기의 책은 저자가 직접 저술한 것이 드물다. <한서 예문지>에 기록된 이름은 저술자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한다. 고서는 보통 한 사람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후에 문자로 기재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주석과 정문이 서로 뒤섞이거나 비평과 평론이 부록의 형식으로 서로 뒤섞였는데 이러한 각종 복잡한 문제로 인하여 진위 파악 여부가 매우 어렵다, 런펑)
<장자>는 장자 자신의 작품과 그의 후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장자가 쓴 부분이고 어떤 부분이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방금 여러분들이 토론을 하였다. 오늘날 대체적으로 공인되는 견해는 내편 7편이 모두 장자의 저술이고 그 밖의 외편과 잡편은 후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코 새로운 견해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연구는 이를 의심할 여지 없는 것으로 기정사실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몇 년 전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딴 리우샤오간은 그의 논문에서 이를 매우 구체적으로 고증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언어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내편에서 가령 精, 神, 道, 德과 같은 몇 가지 구체적인 어휘가 모두 단독으로 쓰였음을 밝혔다. 즉 정신이 아닌 정과 신, 도덕이 아닌 도와 덕으로 쓰이고 있다는 건데 외편과 잡편을 보면 정신, 도덕처럼 연결해서 쓰는 경우가 출현한다. 한자의 발전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합성어는 후대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장자의 내편은 외편과 잡편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 것임을 단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제자의 자료를 보면 한대로부터 위진 시기에 이르는 여러 판본들이 열거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어느 판본이건 간에 내편이 7편이라는 것만큼은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내편엔 누구나 동일하게 주석을 달고 그 밖의 외편과 잡편은 더러 편수 차이가 있어 한대 사람들이 일찍이 내편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마표와 최선, 향수와 곽상의 편수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모두가 내편 7편을 포함하고 있어 이가 장자의 저작임을 간접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외편의 저작 년대를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 이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는 한나라 초기까지 끌어올리는데 대부분의 편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나라 초기의 언어사용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인데 가령 우리가 어느 문헌을 볼 때 한나라 초기의 흔적이 있다고 해서 이를 바로 당시의 문헌으로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 하면 이 또한 매우 곤란한 부분이다. 선진 말기에서 한대 초기에 이르는 무렵 대규모로 과거의 문헌을 정리하는 작업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구전으로 전수되거나 낱개로 흩어져 다니던 저작들이 당시의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정리, 기재되면서 문집으로 엮이게 되었다. (이는 문자가 통일되지 않은 시대적 배경과도 연관 있음, 런펑) 이 과정에서 한나라 초기의 언어 사용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데 <장자>의 경우도 이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춘추>를 봐도 곡양전, 좌씨전, 공양전의 서로 다른 판본이 있는데 그 가운데 곡양전과 공양전은 대대손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이 한나라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정식으로 책으로 쓰여졌다. 이처럼 문자 상으로 기재되는 과정에서 한나라 초기의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20세기 초에 중국 고대문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일부 疑古派 학자들이 선진 시기의 문헌을 죄다 한나라 이후의 것으로 규정짓기도 하였는데 훗날 사료학의 발전 및 출토 문헌의 증가에 따라 그들의 가설 역시 다시금 부정되었다. 가령 <文子>가 위서라는 견해가 있었는데 훗날 한대의 무덤에서 이가 발굴된 예가 있고, 또 <허관자>가 틀림없는 위서라고 청대 사람들이 확정지은 바 있으나 이 또한 한대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한서 예문지에 이들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적어도 위진시기와 당대의 위서일 것이라고 양계초가 언급한 바 있다, 런펑)
보다시피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대 초엽에 이르는 시기는 매우 복잡한 시기이다. 리우샤오간은 외편과 잡편이 전국시대 말기에 형성된 것이라 추측하며 이를 다시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장자>의 내편에 드러나는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외편의 <추수>, <지악>, <달생>, <산목>, <전자방>, <지북유>와 잡편의 <경상초>, <서무귀>, <즉양>, <외물>, <우언>, <열어구>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는 장자의 사상과 다른 사상이 반씩 섞인 것으로서 외편의 <재유(뒷부분)>, <천지>, <천도>, <천운>, <각의>, <선성> 및 잡편의 <천하>가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로 장자의 사상과 성격이 전혀 다른 부분으로 외편의 <변무>, <마제>, <거qie>, <재유(앞부분)>과 잡편의 <양왕>부터 <어부>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리우샤오간의 내편과 외편, 잡편 간의 관계 및 저작 년대에 관한 위의 분류는 개인적으로 봤을 때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겨진다. 최근 철학과 왕보 선생이 <장자철학>이라는 책을 냈는데 역시 내편을 근거로 해서 장자의 사상을 재구성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만일 장자의 철학과 미학에 관한 논문을 쓴다면 장자의 핵심이 내편에 있음을 자각하고 마땅히 이를 근거로 해야 할 것이다. 방금 학생 여러분들이 <장자>의 저작 진위 여부에 대해 몇 백 년 간에 걸친 여러 쟁점들을 소개했는데, 오늘날의 연구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내편을 전대의 것, 외편과 잡편을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내편이 장자가 생존했던 전국시대 중기에 형성되었다고 보며 외편과 잡편은 전국시대 말기와 한나라 초엽에 걸쳐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상이 오늘의 첫 번째 문제다.
<장자>를 읽기 앞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방금 발표자가 한대 이래 판본 변화에 대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한대, 특히 초기에는 여러 문헌에서 장자를 언급하고 있어 일찍이 이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급격히 쇠퇴하여 위진남북조 시기, 즉 서진에 이르러서야 다시 명맥을 잇게 된다. 간단히 말해 동한 말기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장자>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장 사상을 다룰 때 있어 그들의 선후 관계는 언제나 명백하여 일단은 노자, 그리고 장자는 그 다음이기 마련이었다. 탕용통 선생의 위진현학에 관한 연구 논문을 보면 正始(魏 241-249) 년간에 사람들이 중시했던 것이 여전히 <주역>과 <노자>였으며 元康(서진 292-299) 년간, 즉 혜강이나 완적 같은 죽림칠현이 출현할 즈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장자>가 중시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향수, 곽상이 활약했던 시기는 탕용통 선생에 의하면 新莊學이 부흥했던 시점으로서 소위 신장학이라 함은 앞서 발표자의 자료에서도 보았듯이 “곽상이 장자의 주를 달았는가, 장자가 곽상의 주를 달았는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많은 새로운 견해들이 장자의 주석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났음을 가리킨다. 이는 다시 말해 장자 학파의 사상이 처음으로 전수되었던 시기, 그러니깐 전국 초기부터 한대 초엽에 이르는 시점을 제외하고 두 번째로 부흥하게 되는 시기가 늦어도 위진 시기에 다시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부흥, 즉 현학이 한참 유행했던 시점에서 <장자>가 다시금 중시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장자>를 도교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도교에서 <장자>를 중시하고 이를 심지어 도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현상, 그리고 곽상 자신의 <장자> 사상에 대한 현학적 이해와 해석, 나아가 도교적 맥락에서 <장자>를 도교화 시켜낸 것, 후자의 그 구체적 내용에 우리가 뭐라고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실이 존재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즉 당대 이전에 이르기까지 <장자>의 사상은 위진 시기의 재부흥 이래로 크게 두 가지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첫째는 현학적 관점에서 이를 재해석하는 것이요, 둘째는 현학적 연구의 일부 성과가 도교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한대 이래 현학과 도교를 두 가지로 딱 잘라 나눠서 볼 게 아니라 현학의 발전선 상에서 도교를 본다는 뜻이다, 런펑) 도교화의 성분을 점차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현학과 도교 사이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이가 바로 당대 이전의 상황이다.
당대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방금의 자료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당대, 그리고 송대에 수많은 주석서가 출현하는데 그 가운데 왕방의 <남화진경신전> 같은 것은 분명 도교에 속하는 것이다. 그는 왕안석의 아들인데 똑똑했으나 요절했다. 자, 간추려 말하겠다. 당대 이후에는 이처럼 도교적 계통에서 유행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문화라는 전체적인 각도에서 봤을 때 사대부들의 필수적인 교양서적이라고 할 만큼 <장자>가 유행하게 되었다. 만일 누가 <장자>를 안 읽었다고 하면 우리는 문화인이 어떻게 그것도 안 읽었냐고 반문할 것이다. 과거의 사대부들이 <장자>를 안 읽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진다. 여기서 당나라를 기준으로 선을 긋는 것에는 철학적 의미보다는 미학적 함의가 다분하다. 즉 당대 이후로 사대부의 문화 교양은 기본적으로 유교, 불교, 도교가 혼재화되는 경향과 맞물려 표현된다. 물론 한유를 비롯해 송명 이학의 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더러 불교를 배척하고 노장 사상을 업신여겼지만 유종원이나 소식 같은 일련의 사대부들은 기본적으로 유불도 三敎의 모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양을 쌓아갔던 것이다. 이 시기의 <장자>는 거의 모든 이들이 읽었다고 해도 무방한데, 가령 사상적으로 유가의 계통의 속하는 학자가 <장자>의 주석을 달았던가 하면 방금의 자료에서도 보았다시피 감산덕청 같은 중들도 <장자>에 주석을 달았다. 즉 유불도가 일체화되는 경향을 타고 <장자>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일부는 불교 아래 흡수되기도 하고 일부는 아예 선종과 동일시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택후 선생의 莊禪에 관한 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는데 이처럼 莊禪이라는 말이 이 시기에 점차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상의 변화를 다시 정리해보자면 먼저 선진 시기에 소개되었던 장자 학파, 그리고 현학에 의해 재구성되는 단계 및 이를 기초로 도교화되었던 현상, 그리고 유불도가 섞이면서 일종의 수양 방법으로 변화해간 단계 등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이상이 장자 사상의 변화라 할 수 있겠다.
자료를 다시 살펴보면 뒤에 청대 이후의 주석이 몇 가지 열거되어 있는데 사실 청나라 때엔 <장자>에 대한 좋은 주석이 없었다. 곽경번의 <장자집석> 가운데 인용된 곽상의 주와 성현영의 소는 기본적으로 일종의 의리, 즉 사상을 전개해나간 것이고, 이 같은 방식은 <장자>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 때 항상 주류의 위치를 차지했었다. <장자>를 읽을 때는, 여기 자료에 보다시피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주를 이루어” 가령 문자의 풀이에만 치중한다면 감을 못 잡고 그 안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장자>를 읽을 때 자세한 교정 작업이나 고어에 관한 고증 및 해석 작업을 애써 피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청대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복되기 시작했는데, 여기 자료에 인용된 왕선겸 부분을 보면 그의 주석이 문구의 교감과 고자고의의 해석 방면에서 비교적 탁월하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 아래 열거된 참고 서적들을 보면 가령 노문초의 <장자음의고증>, 왕념손의 <독서잡지> 가운데 실린 장자 부분, 그리고 손이양의 <장자찰이>, 유월의 <제자평의>에 실린 <독장자평의> 등이 있는데, 이상의 책들은 청대 사람들이 문자학과 훈고학에 의거해 장자의 저작을 연구한 것이지만 모두가 불완전한 것으로서 합쳐봐야 기껏 몇 줄에 지나지 않는다. (왕념손의 <독서잡지>에 실린 장자에 관한 부분은 약 15페이지 정도 된다, 런펑) 이처럼 청대의 학자들이 문자학과 훈고학에 의거해 장자를 연구했던 기반 위에서 그나마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이 바로 청대 후기의 왕선겸과 곽경번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 책 역시 냉정히 따져본다면 아주 특출하다고 할 만큼 좋은 주석은 아니다. 뒤에 언급된 세 가지 주석, 즉 중화민국 시기의 마서윤과 유문전, 그리고 왕숙민의 저작은 청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다시 진일보한 주석을 달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장자>의 주석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앞서 보았다시피 현학적 관점에서 이가 재해석되었건 선종의 관점에서 이가 다시 받아들여졌건 모두가 의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다분했으며, 따라서 몇몇 선생들이 聞一多의 말을 즐겨 인용하는 것처럼 역대로 <장자>는 “충만한 시의를 가지고 해석” 되어왔다. <장자>에 대한 엄격한 문자적 교감과 훈고학적 각도에서의 연구는 매우 미흡한 실정인데 청대에 이르러 이가 시도된 바가 있으며 모두가 왕선겸과 곽경번의 저작 가운데 잘 반영되어 있다. 20세기 이후 출판된 <장자>에 관한 여러 서적들 가운데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것들이 있으나 여전히 표준적인 텍스트로 삼을만한 것은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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