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수업 2 -질문 부분 2005.02.27
정리 및 작성 - 황지윤
마지막으로 오늘의 발표는 아주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장자>를 읽을 때는 역시 곽경번의 <장자집석>을 추천해주고 싶다. 왕숙민의 <장자교석>도 추천할만하다. 중화서국에서 <제자집성>을 출간할 때 왕선겸과 곽경번의 두 가지 판본을 실었는데 훗날 <신편 제자집성>에서 왕숙민의 주석을 실은 바가 있다. 오늘날 비교적 많이 읽는 것 가운데 진고응의 <장자 금주금역>이 있는데 이는 비교적 편리하고 보기 좋다는 장점이 있으며 그 안에 참고한 서적도 꽤 많다. 그밖에 질문 있는가.
곽상이 향수의 주석을 베꼈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는 아주 오래된 문제다. 그 구체적 문제를 구구절절 언급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곽상 본 가운데 향수의 주석이 인용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곽상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부분도 결코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이 연구를 한 적이 있는데 누구는 그래서 향곽주라고도 하고 누구는 그냥 곽상주라고도 한다. 모두 상관없다. 그밖에 질문 있는가.
참고로 아까 발표자가 저자의 생존년대를 따질 때 錢穆의 <선진제자 계년>의 관점을 따랐는데 이 책에 따르면 (풍우란이 초기에 이 견해를 지지한 바가 있었는데-) 노자는 장자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노자가 장자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자로부터 장자에 이르기까지 그 궤도를 잠깐 살펴보자. 이는 물론 굉장히 어려운 고증 작업이지만 보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된다.
즉 노자 이후 노자의 사상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수된다. 하나는 매우 산만한 방식으로서 주로 제나라 학파를 중심으로 한 황로 사상이 이에 속하며 宋형;, 愼到, 尹文과 같은 학자가 대표적이다. 도가는 여기서 황로라는 거대한 사상 체계 안으로 흡수된다. 또 하나는 도가 안에서 사제 관계를 명확히 살펴볼 수 있는 흐름인데 흔히 노자의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文子가 노자 사상의 한가지 줄기를 대변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한대 판본의 <문자>를 통해 노자로부터 문자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사상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으며, 주로 우주 간의 변화와 규칙에 관한 이론을 중시한다는 성격을 갖는다. 이는 노자가 본래 사관으로서 천도에 관한 형이상학을 전개했던 것과 상통하는 맥락으로서 풍우란은 <중국철학사 簡史>에서 노자 철학이 천지와 우주 간의 모종의 규율을 탐구한다고 소개했다. 이러한 사상은 노자로부터 문자에 이르는 발전선상에서 그 방향이 확립되었으며 <關尹子> 역시 이러한 계통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밖에 노자의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또 하나의 인물로 庚桑楚가 있다. <장자> 잡편을 보면 <경상초>편이 실려있고, 또 <사기;노자한비열전>을 보면 嵬累虛와 亢桑子라는 책 이름이 실려있는데 혹자는 항상자가 바로 경상초의 저작이라고도 말한다. 경상초 또한 노자로부터 발전된 사상이지만 전자의 것과 대비해 매우 커다란 차이점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토론을 하게 되겠지만 <장자;천하편>의 저자가 “以本爲精, 以物爲粗, 以有積爲不足, 澹然獨與神明居. 古之道術有在於是者, 關尹老聃聞其風而悅之.(만물의 근본을 정순한 것으로 보고 형체 있는 물건은 조잡한 것으로 보며, 부가 쌓여 있는 것을 부족한 것으로 보고, 담담히 홀로 신명과 더불어 생활한다. 옛날의 도술에도 이러한 경향의 학파가 있었다. 관윤과 노담이 그러한 학설을 듣고 좋아했다)” 라고 했던 구절 및 그 뒤에 “寂漠無形, 變化無常, (생략)” 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자가 경상초의 줄기를 따라왔으며 그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문자에 이르는 계통이 지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문제를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즉 노자로부터 장자에 이르기까지 도가가 발전해온 모습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노자 이후에 문자로 계승되는 관계이며 하나는 노자 이후에 경상초로 발전되는 관계이다. 그리고 장자는 경상초의 계통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까 발표자가 저자의 전반적인 상황을 소개할 때 <노장신한열전>을 인용하면서 그의 저서가 십여만 자에 이르고 대부분이 우언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기>의 三家注(당 張守節 正義, 당 司馬貞 索隱, 송 裴인 集解를 뜻한다, )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여기서 우언이라 함은 허구로 설정한 인물들의 대화라는 뜻으로서 오늘날의 우언고사라는 의미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대화체라는 뜻인데 마치 플라톤이 그러했듯 가상의 대화를 설정함으로써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밖에 질문.
<장자>를 읽을 때는 <주역>과 다르게 문자의 해석에 급급할 게 아니라 몇 가지 중심 문제를 이끌어내서 함께 토론하는 방식이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 <장자>를 연구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자구의 죽어버린 의미에 너무 치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업을 시작할 때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경전을 읽는 것과 제자 백가를 읽는 것이 매우 다르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한 학생이 말했듯이 문자 발전의 각도에서 본다면 문자가 생성된 시기에서 가까울수록 그것의 의미는 원래의 것에 가깝고 그 시간이 멀어질수록 그것으로부터 인출되는 간접적 의미의 쓰임이 더 잦아진다. 따라서 글자 하나하나에 너무 과도하게 집중해선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장자>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첫 번째 문제라고 하겠다.
두 번째로는 그렇다고 우리가 <장자>를 너무 산만하게 이해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장자를 시 같은 문학작품으로 읽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장자 안에는 굉장히 명확한 논리적 사고가 전개되어 가고 있다고 본다. 아까도 말했듯이 장자는 매우 독특한 사상적 원류를 갖고 있다. 전국 중기 이후의 사상, 아니 전국 시기를 통틀어 이 시기의 모든 사상은 결코 한대의 것처럼 일가의 학파나 학자로 계승되어 갔던 것이 아니다. 발표자의 자료에 인용된 사마담의 <논육가요지>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마염 이전의 선진 시기의 학파는 결코 분파를 나누지 않았다. 이를 굳이 나눴다고 한다면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이야기될 따름이었는데, 가령 당시에 家라고 불렸던 학파로는 하나는 유가가 있고 하나는 묵가가 있었다. 유가의 경우는 그들이 예를 집행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색으로부터도 한눈에 그가 儒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즉 당신이 한 사람을 볼 때 그가 음양가인지 도가인지를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웠지만 소매의 폭이 무진장 넓은 옷과 커다란 모자를 쓴 사람을 보면 그를 유라고 했던 것이다. 묵가는 그 기원에서 봤을 때 남의 전쟁을 거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협객들이었고 그들만의 단체와 기율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 역시 家라고 불렸다. 이 두 가지 학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子라고 불렸는데 가령 장자니, 노자니, 관자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한 가지 학파로 함께 분류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산발적으로 모두가 子를 지칭했을 뿐이었다. 가령 순자의 문장 가운데 여타 제자 백가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쓴 <非十二子>라는 것이 있는데 보다시피 非六家가 아니라 十二子로 이들을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역시 하나하나의 자들을 겨냥해서 비판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건데, 이는 바로 전국 시대의 사상이 그만큼 매우 자유로웠고 또 그들간에 서로 결합하고 떨어지고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음을 반영한다.
여기서 장자를 살펴볼 것 같으면 그 역시 노자로부터 발전한 사상이지만 그 과정에서 매우 여러 가지 이질적인 사상을 흡수했음을 알 수 있다. <장자> 안에서 안회를 칭찬하는 부분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또한 그의 사상이 안회의 것과 모종의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이러한 관점을 견강부회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 안에는 확실히 당대의 여러 사상들이 변화해간 흔적이 존재하고 있다. 가령 유가와 관련된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심재라는 개념은 이가 유가 사상을 대변한다고 하면 틀린 말이 되겠지만 이는 유가 사상으로부터 진일보하게 발전한 개념이다. 장자가 심재를 언급할 때 어떻게 이야기하였는지 다시 떠올려보자. 고기를 안 먹고 채소만 몇 개월을 먹었는데 이는 제사의 재를 뜻함이지 심재가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세 부분을 보라) 이것이 하나의 단서다. 즉 장자는 유가의 사상을 흡수하는 동시에 이를 다시 진일보한 관점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본문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장자의 친구 혜시가 있는데 알다시피 장자는 혜시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와 반복적으로 변론하고 있고 또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매우 뛰어난 명가의 논리가 역설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하기란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명가와 관련된 각도에서 오늘날 장자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쨌거나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일부 계승한 동시에 유가 학파의 사상을 흡수하고 나아가 명가의 것도 흡수를 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것과 매우 달라서 가령 후대에 내 사상은 유가로부터 온 것이다, 혹은 명가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했을 때는 나의 사상이 그것과 완전히 일치함을 의미한다. 반대로 선진 시기에는 이가 일치하지도 않았고 일치할 수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상대와 서로 변론을 전개해나가는 상태에 항시적으로 처해있었기 때문에, 가령 내가 당신과 변론을 벌이는데 비록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변론을 벌이는 그 문제의식의 공유라는 측면에서는 점차 똑같은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즉 당신이 논리학자와 장시간에 걸쳐 변론을 할 때 비록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그와 똑같은 논리와 언어로서 그를 반박하고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장자의 사상은 매우 창조적이며 여러 다원적인 사상이 결합된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그 안에는 논리적 사고가 매우 분명하게 전개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그렇기에 결코 몸을 통한 체험이나 깨달음만을 강조해서는 <장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이는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한 바가 있으나 여기서도 다시 한번 강조하겠다. 즉 장자를 읽을 때는 문자 풀이에만 치중해선 안 된다는 것이 한 가지. <장자> 안에 내재된 사상은 매우 심오하여 우리가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 철학과에서도 몇 해 전 지캉션 선생님의 지도 하에 한 학생이 제물론을 읽고자 시도한 적이 있으나 철저히 실패한 경험이 있다. 두 번째로는 문학작품을 읽듯이 장자를 읽어선 안 된다는 것, 방금 살펴봤듯이 이 역시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 하겠다.
정리 및 작성 - 황지윤
마지막으로 오늘의 발표는 아주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장자>를 읽을 때는 역시 곽경번의 <장자집석>을 추천해주고 싶다. 왕숙민의 <장자교석>도 추천할만하다. 중화서국에서 <제자집성>을 출간할 때 왕선겸과 곽경번의 두 가지 판본을 실었는데 훗날 <신편 제자집성>에서 왕숙민의 주석을 실은 바가 있다. 오늘날 비교적 많이 읽는 것 가운데 진고응의 <장자 금주금역>이 있는데 이는 비교적 편리하고 보기 좋다는 장점이 있으며 그 안에 참고한 서적도 꽤 많다. 그밖에 질문 있는가.
곽상이 향수의 주석을 베꼈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는 아주 오래된 문제다. 그 구체적 문제를 구구절절 언급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곽상 본 가운데 향수의 주석이 인용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곽상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부분도 결코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이 연구를 한 적이 있는데 누구는 그래서 향곽주라고도 하고 누구는 그냥 곽상주라고도 한다. 모두 상관없다. 그밖에 질문 있는가.
참고로 아까 발표자가 저자의 생존년대를 따질 때 錢穆의 <선진제자 계년>의 관점을 따랐는데 이 책에 따르면 (풍우란이 초기에 이 견해를 지지한 바가 있었는데-) 노자는 장자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노자가 장자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자로부터 장자에 이르기까지 그 궤도를 잠깐 살펴보자. 이는 물론 굉장히 어려운 고증 작업이지만 보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된다.
즉 노자 이후 노자의 사상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수된다. 하나는 매우 산만한 방식으로서 주로 제나라 학파를 중심으로 한 황로 사상이 이에 속하며 宋형;, 愼到, 尹文과 같은 학자가 대표적이다. 도가는 여기서 황로라는 거대한 사상 체계 안으로 흡수된다. 또 하나는 도가 안에서 사제 관계를 명확히 살펴볼 수 있는 흐름인데 흔히 노자의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文子가 노자 사상의 한가지 줄기를 대변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한대 판본의 <문자>를 통해 노자로부터 문자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사상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으며, 주로 우주 간의 변화와 규칙에 관한 이론을 중시한다는 성격을 갖는다. 이는 노자가 본래 사관으로서 천도에 관한 형이상학을 전개했던 것과 상통하는 맥락으로서 풍우란은 <중국철학사 簡史>에서 노자 철학이 천지와 우주 간의 모종의 규율을 탐구한다고 소개했다. 이러한 사상은 노자로부터 문자에 이르는 발전선상에서 그 방향이 확립되었으며 <關尹子> 역시 이러한 계통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밖에 노자의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또 하나의 인물로 庚桑楚가 있다. <장자> 잡편을 보면 <경상초>편이 실려있고, 또 <사기;노자한비열전>을 보면 嵬累虛와 亢桑子라는 책 이름이 실려있는데 혹자는 항상자가 바로 경상초의 저작이라고도 말한다. 경상초 또한 노자로부터 발전된 사상이지만 전자의 것과 대비해 매우 커다란 차이점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토론을 하게 되겠지만 <장자;천하편>의 저자가 “以本爲精, 以物爲粗, 以有積爲不足, 澹然獨與神明居. 古之道術有在於是者, 關尹老聃聞其風而悅之.(만물의 근본을 정순한 것으로 보고 형체 있는 물건은 조잡한 것으로 보며, 부가 쌓여 있는 것을 부족한 것으로 보고, 담담히 홀로 신명과 더불어 생활한다. 옛날의 도술에도 이러한 경향의 학파가 있었다. 관윤과 노담이 그러한 학설을 듣고 좋아했다)” 라고 했던 구절 및 그 뒤에 “寂漠無形, 變化無常, (생략)” 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자가 경상초의 줄기를 따라왔으며 그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문자에 이르는 계통이 지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문제를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즉 노자로부터 장자에 이르기까지 도가가 발전해온 모습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노자 이후에 문자로 계승되는 관계이며 하나는 노자 이후에 경상초로 발전되는 관계이다. 그리고 장자는 경상초의 계통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까 발표자가 저자의 전반적인 상황을 소개할 때 <노장신한열전>을 인용하면서 그의 저서가 십여만 자에 이르고 대부분이 우언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기>의 三家注(당 張守節 正義, 당 司馬貞 索隱, 송 裴인 集解를 뜻한다, )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여기서 우언이라 함은 허구로 설정한 인물들의 대화라는 뜻으로서 오늘날의 우언고사라는 의미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대화체라는 뜻인데 마치 플라톤이 그러했듯 가상의 대화를 설정함으로써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밖에 질문.
<장자>를 읽을 때는 <주역>과 다르게 문자의 해석에 급급할 게 아니라 몇 가지 중심 문제를 이끌어내서 함께 토론하는 방식이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 <장자>를 연구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자구의 죽어버린 의미에 너무 치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업을 시작할 때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경전을 읽는 것과 제자 백가를 읽는 것이 매우 다르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한 학생이 말했듯이 문자 발전의 각도에서 본다면 문자가 생성된 시기에서 가까울수록 그것의 의미는 원래의 것에 가깝고 그 시간이 멀어질수록 그것으로부터 인출되는 간접적 의미의 쓰임이 더 잦아진다. 따라서 글자 하나하나에 너무 과도하게 집중해선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장자>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첫 번째 문제라고 하겠다.
두 번째로는 그렇다고 우리가 <장자>를 너무 산만하게 이해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장자를 시 같은 문학작품으로 읽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장자 안에는 굉장히 명확한 논리적 사고가 전개되어 가고 있다고 본다. 아까도 말했듯이 장자는 매우 독특한 사상적 원류를 갖고 있다. 전국 중기 이후의 사상, 아니 전국 시기를 통틀어 이 시기의 모든 사상은 결코 한대의 것처럼 일가의 학파나 학자로 계승되어 갔던 것이 아니다. 발표자의 자료에 인용된 사마담의 <논육가요지>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마염 이전의 선진 시기의 학파는 결코 분파를 나누지 않았다. 이를 굳이 나눴다고 한다면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이야기될 따름이었는데, 가령 당시에 家라고 불렸던 학파로는 하나는 유가가 있고 하나는 묵가가 있었다. 유가의 경우는 그들이 예를 집행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색으로부터도 한눈에 그가 儒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즉 당신이 한 사람을 볼 때 그가 음양가인지 도가인지를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웠지만 소매의 폭이 무진장 넓은 옷과 커다란 모자를 쓴 사람을 보면 그를 유라고 했던 것이다. 묵가는 그 기원에서 봤을 때 남의 전쟁을 거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협객들이었고 그들만의 단체와 기율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 역시 家라고 불렸다. 이 두 가지 학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子라고 불렸는데 가령 장자니, 노자니, 관자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한 가지 학파로 함께 분류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산발적으로 모두가 子를 지칭했을 뿐이었다. 가령 순자의 문장 가운데 여타 제자 백가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쓴 <非十二子>라는 것이 있는데 보다시피 非六家가 아니라 十二子로 이들을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역시 하나하나의 자들을 겨냥해서 비판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건데, 이는 바로 전국 시대의 사상이 그만큼 매우 자유로웠고 또 그들간에 서로 결합하고 떨어지고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음을 반영한다.
여기서 장자를 살펴볼 것 같으면 그 역시 노자로부터 발전한 사상이지만 그 과정에서 매우 여러 가지 이질적인 사상을 흡수했음을 알 수 있다. <장자> 안에서 안회를 칭찬하는 부분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또한 그의 사상이 안회의 것과 모종의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이러한 관점을 견강부회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 안에는 확실히 당대의 여러 사상들이 변화해간 흔적이 존재하고 있다. 가령 유가와 관련된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심재라는 개념은 이가 유가 사상을 대변한다고 하면 틀린 말이 되겠지만 이는 유가 사상으로부터 진일보하게 발전한 개념이다. 장자가 심재를 언급할 때 어떻게 이야기하였는지 다시 떠올려보자. 고기를 안 먹고 채소만 몇 개월을 먹었는데 이는 제사의 재를 뜻함이지 심재가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세 부분을 보라) 이것이 하나의 단서다. 즉 장자는 유가의 사상을 흡수하는 동시에 이를 다시 진일보한 관점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본문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장자의 친구 혜시가 있는데 알다시피 장자는 혜시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와 반복적으로 변론하고 있고 또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매우 뛰어난 명가의 논리가 역설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하기란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명가와 관련된 각도에서 오늘날 장자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쨌거나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일부 계승한 동시에 유가 학파의 사상을 흡수하고 나아가 명가의 것도 흡수를 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것과 매우 달라서 가령 후대에 내 사상은 유가로부터 온 것이다, 혹은 명가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했을 때는 나의 사상이 그것과 완전히 일치함을 의미한다. 반대로 선진 시기에는 이가 일치하지도 않았고 일치할 수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상대와 서로 변론을 전개해나가는 상태에 항시적으로 처해있었기 때문에, 가령 내가 당신과 변론을 벌이는데 비록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변론을 벌이는 그 문제의식의 공유라는 측면에서는 점차 똑같은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즉 당신이 논리학자와 장시간에 걸쳐 변론을 할 때 비록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그와 똑같은 논리와 언어로서 그를 반박하고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장자의 사상은 매우 창조적이며 여러 다원적인 사상이 결합된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그 안에는 논리적 사고가 매우 분명하게 전개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그렇기에 결코 몸을 통한 체험이나 깨달음만을 강조해서는 <장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이는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한 바가 있으나 여기서도 다시 한번 강조하겠다. 즉 장자를 읽을 때는 문자 풀이에만 치중해선 안 된다는 것이 한 가지. <장자> 안에 내재된 사상은 매우 심오하여 우리가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 철학과에서도 몇 해 전 지캉션 선생님의 지도 하에 한 학생이 제물론을 읽고자 시도한 적이 있으나 철저히 실패한 경험이 있다. 두 번째로는 문학작품을 읽듯이 장자를 읽어선 안 된다는 것, 방금 살펴봤듯이 이 역시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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