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낮달
이승에 놓아 둔
무거운 빚을
아직 머리에 이고 계신가요
수척한 산등성이에
숨어 오셔서, 쩔룩쩔룩 숨어 오셔서
핏덩이로 남긴 막내가
배 다른 형제들 틈에 끼여
어떻게 섞여 크는가,
수수깡 울타리 속에서
배곯지 않는가 보려고
핏기 없는 얼굴로
서성거리고 계시군요
뒷마을 대숲에
온종일 칼바람이 울고
우는 막내의 연 끝에
땀밴 은전 몇 닢을
놓고 계시군요
새벽닭 울 때마다 매양
안개 피어오르는 바다 위로
큰 기침하며 버선발로 오시던
우리 한울님을
여전히 모시고 계신가요
불 끄고 한밤중
홀로 눈물 삭히던 울음,
얼음 아래 나직이 들리고
집 나간 지아비 기둘려
발등 찍어 호미날에 묻어나던
복사꽃 상채기,
머언 연기로 보여요.
빈 들이 잠들고
산 하나 經典처럼 누워 있는
무심한 이승에
모처럼 나들이 와 계신가요.
아리랑
진달래 굽이굽이
피는 강이다.
놀빛 울음이 타는
반도 들녘에
밟혀도 밟혀도
일어나는 쑥이다.
보릿고개 넘어
옹기전에 옹기그릇 볼 부비듯
옹기종기 모여 살다가
세금에 쫓겨, 총칼에 쫓겨
왜국으로 징용가고
북간도로 달아나던
괴나리봇짐이다.
숨어 산 속에서
석달 열흘 배를 채우던
어머니가 눈물로 빚은
마른 떡이다.
삼월서 사월로
쓰러진 피 다시 일어나는
아, 잠 못드는 울음이다.
겨울산
날은 저물고
이름 모를
어린 새 한 마리
겨울산을 넘는다.
가파른 벼랑
쉬지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며
장군처럼 버티고 선
겨울산을 넘는다.
집집마다
꽁꽁 문은 잠기고
대추나무 끝에
찢겨져 연이 울 뿐.
어깻죽지로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며
빚더미처럼 쌓인
겨울산을 넘는다.
이고 지고 빈손
사십 한평생
울다 간 울 엄니
해 다 진 겨울 저녁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빈 겨울산을 홀로 넘는다.
눈 쌓이는 날
민들레 씨앗
바람에 불려 뿔뿔이
흩어진 정붙이 살붙이
한 백년 만인가
한 방에 모인다.
돌아가신 어머니
이마를 짚던
아버지의 두꺼비 손
소 같은 눈물도
차례차례 모인다.
남의 아내 되어
주렁주렁 엄마가 된 그니도
문을 밀고 조용히 들어온다.
배 다른 동생이며
젊은 날의 찢어진 일기들이
우, 우, 바람처럼
오랜만에 모여든다.
江岸에서
사금파리에 햇살 놀 듯
유난히 눈물 잦아든
강줄기
노을 속의 杜甫여
그대 실린 배가 보인다.
내 이마에서 눈감은
그대의 새,
날아간 하늘 끝이 보인다.
눈 오시는 날
하늘 땅 가릴 수 없이
뽀오야니 눈 오시는 날
곰나루에 가면
늙은 조각배 하나 지쳐 누운 채
개 두어 마리 나와 꼬리를 흔들 뿐
비인 능금밭에 수런수런
미친 여름날 살 부비던 소리
벌떼마냥 잉잉거리고
뒤채이던 힘줄들이
강바람에 떠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어지러운 발자국 눈에 묻히고
솔밭머리 초가 삼간
불빛처럼 해소 소리 들린다.
겨우 그물 넘어
자취방에서 눈감은 녀석이 사는
공동묘지
이눔아, 일어나 한잔 받어
소주잔도 묻힌다.
하늘 땅 가릴 수 없이
펑펑 눈 오시는 날
뼛속까지 밴 깊은 잠 떨치고
곰나루에 가면
돌아가는 길이 무언가
이제 바늘귀로 비친다.
새벽길
날이 새면
또 백 리는 가야 한다.
병든 어머니가 일어나서
싸주신 주먹밥, 허리에 차고
불끈 주먹을 쥔 채
서리 덮인 오솔길을 맨발로 걷듯
바람 부는 빈 들을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
시린 속 맑은 空腹에
자욱한 안개가
씻은 듯이 개인다.
갈가마귀 날아가는 언덕에는
솔바람소리 울려나고
밟아야 할 길이
길게 누워 있다.
당신 1
동트는 새벽 일어나
알몸으로 당신을
당신이라 부를 수 있음은
내 작은 기쁨입니다.
시냇물이 졸졸
바다로 가서
드디어 스스로를 버리듯
당신 앞에서 나를 지워버립니다.
땅 위의 어떤 꽃으로도
당신을 당신이라 부르지 못하는
슬픔을 아십니까.
무릎 꿇고 엎드려
당신의 香, 당신의 종소리 앞에
모닥불에 눈송이 떨어지듯이
이 몸을 던집니다.
햇살 오르는 계단 하나하나를
평생토록 올라갑니다.
꼭대기의 꼭대기에
당신의 宮이 계십니다.
扶餘行 1
가없는 겨울에
알몸으로 떠도나니
부여에 가면
한겨울인데 비가 내리고
허리 굽은 돌들이
그을린 얼굴로
묵묵히 묵묵히
비에 젖는다.
금방 건져진 미소들이
흙에서 자라
누워서도 웃고 쓰러져서도 웃고
웃는 들녘에
뒤채이는 成忠의 카랑카랑한 기침소리
扶蘇山 솔바람소리,
천년 바랜 바람이
우, 우 일제히 몰려온다.
굳게 닫힌 무덤들은
시뻘건 해 하나씩 낳고
센 머리칼로 피어오르는
연기, 나직하게
한숨처럼 깔리는
일몰의 이마 위에
아, 마른번개
모두 빗장 건
캄캄한 겨울에
휴지처럼 헤매나니
부여에 가면
내가 나를 불러
마디마디 불붙은 뼈를
삭이며 삭이며
비에 젖는다.
長谷寺 가는 길
산 너머 또 산 첩첩
손톱 뽑혀 발톱 뽑혀
찾아가는 길이다.
버릴 것 다 버리고
털린 것 몽땅 털리고
빈손 빈주먹으로
찾아가는 길이다.
가야 만나는 건
바람이지만
구름 아래 떠도는
슬픔이지만
맨발로 허위허위
찾아가는 길이다.
법이 따라오지 않는 곳
피의 사슬이 좇아오다 마는 곳
목마르면 한모금의 옹달샘이 있는 곳
눈멀어 귀먹어
말을 만나면 말을 죽이고
칼을 만나면 칼을 죽이고
찾아, 찾아가는 길이다.
창비시선 42
『겨울의 꿈』
- 지은이 / 조재훈
- 펴낸 곳 / 창작과비평사
- 펴낸 때 / 1984년 7월
조 재 훈
- 1937년 인천 출생(충남 서산에서 성장).
-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으로 『겨울의 꿈』, 『저문 날 빈 들의 노래』, 『물로 또는 불로』 , 『오두막 황제』 등이 있음.
-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출처] 547. 조재훈 -『겨울의 꿈』|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