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명시감상

김광섭의 시

작성자이은봉|작성시간04.10.07|조회수348 목록 댓글 0
김광섭(金珖燮)

1905-1977. 함북 경성 출생. 호는 怡山.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 졸업. 중동학교 교사, 민중일보 편집국장, 대통령 공보비서, 경희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27년 {해외문학}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일제 말엔 창씨개명을 반대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해방 후엔 중앙문화협의회 창립을 주도했고, 순문예지 {문학}(1950), {자유문학}(1956) 등을 간행했다. 시집으로 {憧憬}(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성북동 비둘기}(1969), {반응}(1971), {김광섭시전집}(1974) 등이 있다.


고독



하나의 생존자로 태어나 여기 누워 있나니

한 간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의 파동도 있어
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맑은 性 아름다운 꿈은 멀고
그리운 세계의 단편은 아즐타.

오랜 세기의 知層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神經도 없는 밤
시계야 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시원} 2호, 193. 4.


비 개인 여름 아침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나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시집 {동경}, 1938.


전설


황량하던 옛날 산과 들을 거닐다가
거문고 줄을 얻어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

봄바람이 와서 줄을 꼬느더니
노래가 하늘에 퍼지고 뜰에 흩어져서
온 땅이 보슬비같이 마시었다.

그후로는 해마다 해마다 봄이면
대지의 가슴에 다사론 향기가 돌아
푸른 풀이 나고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시집 {동경}, 1938.


마음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문장} 5호, 1939. 6.


사랑


이리로 오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아
저 달이 유난히 빛나면서
고인 듯이 흐르는 푸른 강 위에
자욱한 빛이 꿈처럼 풀려 오른다

물 속의 고기와 산 속의 새와 언덕조차
취한 밤이니 너와 나를 새겨놓고
말없이 저 달을 보낸 뒤에
문을 열고 너는 내 가슴에 불을 켜라

이제로부터 나는 너를 붙잡고 가리니
자연에 遍滿한 사랑과 함께
너와 나 사이에 다시 뜨는 달을 보며
우리는 이루어 새 것을 열리라

아 드디어 돌아갈 날 함께 누우려나
팔을 베개로 아지 못할 표상이 시작되리니
그립다 서울 복판에 걸린 한 조각 하늘을
이름 새기고 갈 낯익은 종이로 삼을까
―시집 {해바라기}, 1957.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월간문학}, 1968. 11.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 등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高山도 되고 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창작과비평}, 1968. 여름호.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집 {성북동 비둘기}, 1969.


이사


신림동에서 돈암동으로 가는 길
성북동에서 미아리로 가는 길
미아리에서 중화동으로 가는 길

첫째 길에서는 아버님을
둘째 길에서는 어머님을
셋째 길에서는 아내를

뱀이 기어간 길 같은 세 길에서
나의 인생 같은 세 분을 여의고 나니
사촌이웃도 없는 서울
천지에 어울릴 데가 없어
보는 체도 않는 별을 데리고 다닌다

넷째 길은 어딜까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모일 곳인가
아니면 별의 침묵에서 나리는
나의 운명의 길일까

인생일대에 가장 완전한 시대는
어린 시절밖에는 없다
애들과 같이 놀다가 배고파
엄마한테 뛰어가
점심밥을 찬물에 말아 팍팍 퍼먹고
달아나가 놀던 때
―시집 {반응}, 1971.


아기


우리 아기 얼굴은
부처님 손바닥
무엇으로 씻는지
날마다 보아도
天眞 그대롤세

아그그 아기가 웃는다
하이얀 웃음
하늘도 같이 웃네

누가 손을 드는가
만지면 물이 되는
야들야들한 손

無限을 쥐고
만물 중에
혼자 누운 새 얼굴
―시집 {겨울날}, 1975.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