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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감상

조지훈의 시

작성자이은봉|작성시간04.10.07|조회수269 목록 댓글 0
조지훈(趙芝薰)

1920-1968. 경북 영양 출생. 본명은 趙東卓.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1939년 {문장} 지에 시 [고풍의상], [승무] 등이 정지용에 의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1946년 서정주 김동리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했으며, 1950년 문총구국대 기획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고려대 교수로서 말년에는 詩作보다도 국문학 연구에 앞장섰다. 시집으로 {청록집}(1946, 공동시집), {풀잎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餘韻}(1964) 등이 있다.


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珠簾에 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杜鵑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자주 빛 호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線이
스스로 돌아 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雲鞋 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胡蝶
胡蝶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문장}, 1939. 4.


僧舞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문장}, 1939. 12.


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玉座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佩玉소리도 없었다. 品石 옆에서 正一品, 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九天에 呼哭하리라.
―{문장}, 1940. 2.


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상아탑}, 1946. 4.


琓花衫
―木月에게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상아탑}, 1946. 4.


피리를 불면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萬里 구름 길에
학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젖은 풀잎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데

물 위에 바람이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뵈는 紫霞山
열두 봉우리

사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
―시집 {청록집}, 1946.


古寺 1


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어
웃으시는데

西域 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시집 {청록집}, 1946.


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시집 {청록집}, 1946.


山房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 잎은
새삼 치운데

볕바른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 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옴찍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럼 흔들리는
소소리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시집 {청록집}, 1946.


풀잎 斷章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에 깎여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나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시집 {풀잎斷章}, 1952.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에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亡靈인 듯
가련한 거위와 같이

언젠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시집 {풀잎斷章}, 1952.


달밤


순이가 달아나면
기인 담장 우으로
달님이 따라오고

분이가 달아나면
기인 담장 밑으로
달님이 따라가고

하늘에 달이야 하나인데……
순이는 달님을 데리고
집으로 가고

분이도 달님을 데리고
집으로 가고
―시집 {풀잎斷章}, 1952.


桃李院에서


그렇게 안타깝던 전쟁도
지나고 보면 一陣의 風雨보다 가볍다.

불타버린 초가집과
주저앉은 오막살이―

이 붕괴와 灰燼의 마을을
내 오늘 초연히 지나가나니

하늘이 恩惠하여 互全을 이룬 者는
오직 낡은 장독이 있을 뿐

아 나의 목숨도 이렇게 질그릇처럼
오늘에 남아 있음을 다시금 깨우쳐준다.

흩어진 마을 사람들 하나 둘 돌아와
빈터에 서서 먼 산을 보는데

하늘이사 푸르기도 하다.
桃李院 가을 볕에
애처로운 코스모스가
피어서 칩다.
―{문예}, 1952. 1.


빛을 찾아가는 길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 오누나.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紫雲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시집 {역사 앞에서}, 1959.


病에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生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 그려
―{사상계}, 196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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