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애벌레에게
이삭빛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습니다.
열심히 달렸는데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고,
믿었던 길이 갑자기 끊어져
눈앞이 캄캄해지는 그런 날 말입니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조급했던 마음,
잘해내고 싶어 밤새워 앓던 숨소리들이
갈라진 바닥 틈 사이로
소리 없이 흩어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칠게 깨어진 바닥을 가만히 보세요.
단단했던 껍질이 부서져야
그 틈 사이로 새로운 빛이 새어 나옵니다.
인생이 막혔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이
사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라는 신호입니다.
넘어진 그 자리가 오히려
가장 나다운 걸음을 시작하는 출발지가 됩니다.
중요한 건 남들의 속도가 아니라,
내 숨결에 맞추는 것이니까요.
낙심하여 고개 숙인 당신에게
가만히 손을 얹어 위로를 건냅니다.
숨을 크게 한번 고르고,
지나온 길을 향해 따스하게 미소 지어준 뒤,
이제 가장 나다운 걸음으로
다시 한 걸음, 내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 됩니다.
부서진 자리에서 피어날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시평 (詩評)
길이 끊어진 곳에서 시작되는 가장 나다운 보폭
ㅡ 이삭빛의 〈애벌레에게〉를 읽고
시평: 윤정 (문학평론가)
이삭빛 시인의 〈애벌레에게〉는 인생의 가장 어둡고 고독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따스하고 명상적인 치유의 연가(戀歌)이자, 영혼을 깨우는 다정한 각성제이다. 시인은 인생이 막히고 무너졌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이 사실은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단단한 철학적 메시지를 바탕으로, 이를 난해한 수사학 대신 대중의 가슴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위로의 문체로 풀어냈다. 특히 제목에 명시된 '애벌레'라는 상징은 매우 다층적이다. 그것은 당장 날개가 없어 거친 바닥을 기어갈 수밖에 없고, 고치라는 답답한 어둠 속에 갇혀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시인은 이 애벌레의 시간을 '보잘것없는 정체'가 아니라 '눈부신 비상을 준비하는 거룩한 대기(待期)의 시간'으로 재정의하며 시작부터 독자들과 깊고 강렬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시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현대인들이 삶의 도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절망과 조급함의 실체를 가만히 응시한다. 열심히 달렸음에도 늘 제자리인 것만 같은 정체감, 굳게 믿었던 삶의 기반이 하루아침에 끊어져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은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보편적인 영혼의 허기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조급한 마음과 잘해내고 싶어 밤새워 혼자 삼켜야 했던 앓던 숨소리들이 갈라진 바닥 틈으로 허무하게 흩어질 때, 시인은 이를 다그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실의 풍경을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조도로 감싸 안음으로써, 상처 입은 독자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고 깊은 연대감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이 시의 가장 눈부신 문학적 성취와 가치는 '부서짐'과 '막힘'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해석하는 시인의 깊고 입체적인 시선에 있다. 시인은 거칠게 깨어진 바닥과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는 고통을 소멸이나 파멸이 아닌, '새로운 빛이 새어 나오는 통로'이자 '나비가 되기 위한 필연적인 해방'으로 바라본다. 애벌레가 화려한 날개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고치라는 단단한 세계를 스스로 찢어야 하듯, 인생의 막다른 골목은 성장의 끝이 아니라 잠시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르고 따스한 바람에 땀을 식히라는 순리적인 신호라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상투적인 단어를 배제하고 '숨결'과 '그늘'이라는 직관적이고 편안한 일상의 비유를 도입함으로써, 시는 관념적 위로를 넘어 삶의 비극을 희망으로 치환하는 강력한 대중적 생명력을 획득한다.
결어에 이르러 시인은 '속도'와 '경쟁'이라는 세상의 거친 기준을 과감히 내려놓고, 오직 '내 숨결'에 보폭을 맞추어 걸어가라는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이정표를 완성한다. 절망 속에서 주저앉고 넘어진 바로 그 자리가 사실은 가장 나다운 걸음을 시작하는 위대한 출발지가 된다는 이 역설적 선언은 깊은 울림을 준다. 고개 숙인 채 주저앉은 이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주는 시인의 다정한 실루엣은, 지나온 아픔을 향해 미소 지을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함을 선물한다.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마침내 허물을 벗고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이 땅의 모든 애벌레들을 향한 이 전폭적인 축복과 응원은, 읽는 이로 하여금 다시 한번 삶의 나침반을 켜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만의 보폭'으로 걸어 나갈 용기와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