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실패에게
이삭빛
쏟아지는 빗줄기는
하늘이 내린 거대한 무대.
세상의 소음이 빗소리에 파묻힐 때
가슴 깊이 묵혀둔 소리를 질러본다.
상처도, 미련도, 무거웠던 미움도
거센 빗방울에 가차 없이 씻겨 내려가도록.
젖은 옷자락 무겁지 않다
두 팔을 벌려 맘껏 춤을 춘다.
발동작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은
다시 피어날 나의 찬란한 서막.
이제는 다르게 살아가는 거야
온몸으로 써 내려간 새로운 다짐이
빗물과 함께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다.
내일의 태양이 이 비를 말릴 때쯤
나는 전혀 다른 꽃을 피워내리라.
비에 젖은 오늘이
눈부시게 다시 사는 첫날이 되리라.
[시평] 시련을 서사로 바꾸는
찬란한 치유의 춤
ㅡ 이삭빛의 < 실패에게>을 읽고
시평 윤정 문학평론가
이삭빛의〈실패에게〉는 절망의 끝에서 길어 올린 강인한 생명력과, 상처를 능동적으로 치유해 나가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담아낸 작품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실패’는 좌절의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강력한 독백의 대상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삭빛의 시 세계는 바로 이 격언이 가진 역동적인 생명력과 맞닿아 있다. 시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실패와 시련을 피하는 대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껴안으며 영혼의 근육을 키워내는 성찰의 과정을 보여준다.
1. 공간의 전복과 치유의 서막
시인은 쏟아지는 비를 단순한 고난이나 눈물로 바라보지 않고, ‘하늘이 내린 거대한 무대’로 재정의한다.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그 완벽한 고독의 공간에서 시적 화자는 가슴에 묵혀둔 소리를 지른다. 이 외침은 비명이라기보다, 내면의 상처와 미련, 무거운 미움들을 거센 빗방울에 완전히 씻어 보내겠다는 결연한 ‘정화(Catharsis)’의 선언이다.
2. 고난을 축제로 바꾸는 비유적 역동성
3연과 4연에 이르러 시의 에너지는 절정에 달한다. 여기서 시인은 두 가지 탁월한 비유를 통해 시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첫째로, 빗속에서 추는 춤은 '영혼의 얼룩을 씻어내는 거룩한 세례식'이다. ‘젖은 옷자락’이라는 삶의 무게를 무겁지 않다고 선언하며 두 팔을 벌리는 행위는, 슬픔의 점령기였던 고난의 시간을 환희의 축제로 되찾아오는 주체적 선언이다.
둘째로, 발동작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은 '어둠을 깨고 솟구치는 찬란한 별빛의 파편'이다. 짓밟힐수록 더 높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역동성은, 실패의 흔적마저도 생의 가장 아름다운 서막으로 바꾸어 놓는 시인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을 증명한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가는 거야”라는 독백은 실패라는 존재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반격이다.
3. 대지와의 연대, 그리고 부활의 약속
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은 마지막 단락에서 더욱 깊어진다. 온몸으로 써 내려간 다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비명이 아니라, ‘빗물과 함께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생명적 가치를 획득한다. 비가 그친 뒤 떠오를 ‘내일의 태양’과 ‘전혀 다른 꽃’의 이미지는, 오늘 비에 젖어 있는 이 순간이 다름 아닌 ‘눈부시게 다시 사는 첫날’이라는 역설적이고도 감동적인 위로를 건넨다.
■ 총평
이삭빛 시인의 〈실패에게〉는 실패라는 무거운 주제를 거친 호흡이 아닌, 한 편의 아름다운 무용(舞踊)처럼 시각화하여 치유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에 젖은 오늘을 부끄러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빗속에서 당당히 춤을 추며 ‘새로운 탄생’을 선언하는 이 시는, 지금 이 순간 삶의 폭우 속을 걷고 있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따스하게 감싸 안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빛나는 이정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