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빛의 실패에게

작성자코리아|작성시간26.06.21|조회수13 목록 댓글 0

13.

실패에게 
 
​이삭빛 
 
​쏟아지는 빗줄기는
하늘이 내린 거대한 무대. 
 
​세상의 소음이 빗소리에 파묻힐 때
가슴 깊이 묵혀둔 소리를 질러본다.
상처도, 미련도, 무거웠던 미움도
거센 빗방울에 가차 없이 씻겨 내려가도록. 
 
​젖은 옷자락 무겁지 않다
두 팔을 벌려 맘껏 춤을 춘다.
발동작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은
다시 피어날 나의 찬란한 서막. 
 
​이제는 다르게 살아가는 거야 
 
​온몸으로 써 내려간 새로운 다짐이
빗물과 함께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다. 
 
​내일의 태양이 이 비를 말릴 때쯤
나는 전혀 다른 꽃을 피워내리라.
비에 젖은 오늘이
눈부시게 다시 사는 첫날이 되리라. 
 
​[시평] 시련을 서사로 바꾸는
찬란한 치유의 춤
ㅡ 이삭빛의 < 실패에게>을 읽고 
 
시평 윤정 문학평론가 
 
​이삭빛의〈실패에게〉는 절망의 끝에서 길어 올린 강인한 생명력과, 상처를 능동적으로 치유해 나가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담아낸 작품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실패’는 좌절의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강력한 독백의 대상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삭빛의 시 세계는 바로 이 격언이 가진 역동적인 생명력과 맞닿아 있다. 시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실패와 시련을 피하는 대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껴안으며 영혼의 근육을 키워내는 성찰의 과정을 보여준다. 
 
​1. 공간의 전복과 치유의 서막 
 
시인은 쏟아지는 비를 단순한 고난이나 눈물로 바라보지 않고, ‘하늘이 내린 거대한 무대’로 재정의한다.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그 완벽한 고독의 공간에서 시적 화자는 가슴에 묵혀둔 소리를 지른다. 이 외침은 비명이라기보다, 내면의 상처와 미련, 무거운 미움들을 거센 빗방울에 완전히 씻어 보내겠다는 결연한 ‘정화(Catharsis)’의 선언이다. 
 
​2. 고난을 축제로 바꾸는 비유적 역동성 
 
3연과 4연에 이르러 시의 에너지는 절정에 달한다. 여기서 시인은 두 가지 탁월한 비유를 통해 시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첫째로, 빗속에서 추는 춤은 '영혼의 얼룩을 씻어내는 거룩한 세례식'이다. ‘젖은 옷자락’이라는 삶의 무게를 무겁지 않다고 선언하며 두 팔을 벌리는 행위는, 슬픔의 점령기였던 고난의 시간을 환희의 축제로 되찾아오는 주체적 선언이다. 
 
​둘째로, 발동작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은 '어둠을 깨고 솟구치는 찬란한 별빛의 파편'이다. 짓밟힐수록 더 높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역동성은, 실패의 흔적마저도 생의 가장 아름다운 서막으로 바꾸어 놓는 시인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을 증명한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가는 거야”라는 독백은 실패라는 존재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반격이다. 
 
​3. 대지와의 연대, 그리고 부활의 약속 
 
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은 마지막 단락에서 더욱 깊어진다. 온몸으로 써 내려간 다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비명이 아니라, ‘빗물과 함께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생명적 가치를 획득한다. 비가 그친 뒤 떠오를 ‘내일의 태양’과 ‘전혀 다른 꽃’의 이미지는, 오늘 비에 젖어 있는 이 순간이 다름 아닌 ‘눈부시게 다시 사는 첫날’이라는 역설적이고도 감동적인 위로를 건넨다. 
 
​■ 총평 
 
이삭빛 시인의 〈실패에게〉는 실패라는 무거운 주제를 거친 호흡이 아닌, 한 편의 아름다운 무용(舞踊)처럼 시각화하여 치유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에 젖은 오늘을 부끄러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빗속에서 당당히 춤을 추며 ‘새로운 탄생’을 선언하는 이 시는, 지금 이 순간 삶의 폭우 속을 걷고 있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따스하게 감싸 안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빛나는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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