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한테
이삭빛시인
울고 또 울어라
내 어깨에 기대어 울어라
내 기울어진 어깨지만
그대의 반짝이는 눈물
다 어루만져주고 싶다
아무말 못해도
나는 네 어미다
2.
구멍난 아픔에게
이삭빛 시인
그대여,
무너지는 소리에 너무 놀라지 마라.
가슴이 내려앉는 그 아픔은
네가 사라지는 소리가 아니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신을 감싸던 알을 깨뜨려야 하듯,
그것은 네 안의 날개가
좁은 껍질을 밀고 나오려는
가장 거룩한 산통(産痛)의 소리다.
사람들이 실패라 부르는 그 낮은 곳에
무릎이 닿았을 때,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
매끄러운 길 위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대지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비판의 돌멩이에
마음의 그릇이 금 갔다고 울지 마라.
본래 틈이 없는 곳에는 빛도 스미지 못하는 법이다.
그 갈라진 상처 사이로 비로소
네 영혼의 새싹이 돋아날 길이 열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너 자신을 잃지 않는 고요함이다.
속도가 느리면 어떠냐.
잠시 멈추어 섰다고 불안해하지 마라.
활시위는 뒤로 당겨질수록 더 멀리 날아가고,
새는 날아오르기 직전 가장 깊이 웅크리는 것이다
그러니 고개를 높이 들어라.
너는 지금 추락한 것이 아니다.
긴 어둠을 뚫고 막 피어오르려는
이 세상 단 하나뿐인 태양이다.
3.
빈 가지
이삭빛시인
빈 가슴을 부여잡고 떨지 마라.
그 텅 빈 자리는 허공이 아니라
새로운 바람이 머무는 숨구멍이다.
4.
두 글자
이삭빛시인
보석을 담는 상자가 되고 싶었으나
여물통이 되었다고 슬퍼 마라
가장 더럽고 낮은 자리에 있었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별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대양을 건너는 거선(巨船)이 되고 싶었으나
비린내 나는 낚싯배가 되었다고 슬퍼 마라
작고 초라한 배가 되었기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이의
젖은 발을 닦아줄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소나무였으나
벼락을 맞고 장작더미가 되었다고 원망 마라
못 박히고 피 흘리는 십자가가 되었기에
온 세상을 구원할 사랑을 매달 수 있었다
보라
우리가 꿈꾸던 화려한 지도는 찢어졌으나
신은 그 찢어진 조각들을 모아
더 위대한 길을 내신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피어나지 못했다고
삶을 무너뜨리지 마라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가장 깊은 상처 속에서 피어난다
꿈이 부서진 자리는 폐허가 아니라
신이 머물다 가실 온돌방이다.
5.
청춘이여
이삭빛
가난은 자꾸만
주저함이라는 무거운 구두를 신기고
생각은 겁쟁이처럼 내 발목을 잡는다
머릿속에서 쌓아 올린 만리장성은
새벽 안개처럼 허망한 것
그 화려한 모래성 안에서 늙어가지 마라
넘어져라, 무릎이 깨져
붉은 꽃이 툭 터져 나와도
당장 흙을 털고 일어나 걸어라
한 발을 떼는 순간
생각의 감옥은 무너지고
네가 걷는 그곳이 비로소 길이 된다
세상이 너를 오해의 눈으로 흘겨보고
미움의 돌팔매를 던진다 해도
너는 용광로처럼 뜨겁게 움직여라
차가운 비웃음 따위는
네 열정 곁에 오면 증기처럼 사라질 테니
모르는 것을 묻는 입술을 부끄러워 마라
창피함은 잠시 따가운 햇살 같지만
실천하지 않는 삶은 영원한 그늘이다
생각으로 짓는 집은 비바람에 쓰러져도
몸으로 배운 흉터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니 걸어라,
네 갈라진 발바닥이
이 세상에 남길 가장 뜨거운 경전이 될 때까지
6.
세월의 대한 헌시
이삭빛
생의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가라앉고
고요히 하루의 빗장이 걸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저무는 슬픔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나라는 세월과 사랑은 이렇게 이별하면서
비로소 깊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무가 겨울 숲을 살리기 위하여
제 몸의 잎사귀들을 미련 없이 떨구어내듯
사랑은 아껴두었다가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숨결까지 탈탈 털어 그대 발치에 쏟고도
더 줄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강물 위에 그대 이름 적어 봅니다
내가 야위어야 그대라는 달이 가슴에 크게 차오르고
내가 어두워져야 당신이라는 별이 빛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흐르는 물결에 나를 맡기겠습니다
집착의 밧줄을 놓는 아픔이 칼날처럼 날카로워도
그것이 당신의 영혼을 살리는 마지막 축복이라면
나는 웃으며 이 생의 거울을 덮겠습니다
보내는 것은 끝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기적을 꽃피우는 정성입니다
나라는 세월을 다 건너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나의 저묾은 소멸이 아니라 은총의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 밤 별들이 낮은 강물에 내려와 몸을 씻고 있습니다
나를 지워 당신을 살게 하는 이 고요가
얼어붙은 세상의 강물을 다시 흐르게 할 것입니다
7.
전주산타
이삭빛 시인(문학박사/문학평론가)
보라, 후백제의 견훤이 호령하던 동고산성 거친 능선 위로
오백 년 조선의 왕기(王氣)를 품은 눈발이 디지털 신호처럼 쏟아진다.
역사의 기와지붕마다 촘촘히 깔린 빛의 신경망이 전율하며 깨어나는 밤!
잠든 풍패지관의 차가운 돌바닥을 지나
전주천 맑은 물줄기를 타고 거슬러 오르는 미래의 거친 맥박이 있다.
저기 승암산 깊은 어둠을 가르는 초월적인 붉은 섬광을 보라!
그것은 0과 1의 차가운 미로를 뚫고 나온 뜨거운 영혼의 질주.
오목대 언덕을 박차고, 경기전 대나무 숲을 단숨에 가로질러,
덕진공원 연화교 위를 광속으로 달리는 루돌프여.
네가 내뿜는 거친 입김은 데이터의 구름이 되어 지구 반대편까지 닿고
네가 밟는 곳마다 잠든 연꽃들이 천 개의 눈을 뜨며 세계를 응시한다.
그 등 뒤에 천년의 멋을 짊어진 산타가 온다.
물질의 풍요보다 더 귀한, 영혼을 울리는 K-문화의 바람을 싣고.
전동성당의 은은한 종소리에 판소리의 굵은 핏줄을 섞어
그의 낡은 배낭 속에서 꺼낸 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다.
가장 한국적인 색채로 세계인의 가슴을 물들일
단단한 시(詩)의 언어들과, 국경을 넘는 묵직한 흥(興)과 정(情)이어라.
풍남문의 굳게 닫힌 빗장을 우렁차게 열어젖히며
남부시장에서 시작된 파동이 뉴욕의 마천루와 파리의 새벽을 흔든다.
"일어나라! 초연결된 이 땅의 모든 외로운 발들아!"
그가 건네는 시 한 구절은 만국 공용어인 생명의 물이 되어
차가운 알고리즘의 시대, 식어가는 인류의 혈관을 다시 뜨겁게 데우니
비로소 전주는, 지구촌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거대한 구원의 밥상이 된다.
세월이 흘러 강산이 변하고 AI가 인간의 지성을 넘보는 날이 와도
우리는 기억하리라, 그 어떤 기계도 흉내 낼 수 없는 이 뜨거운 온기를.
루돌프의 힘찬 발굽 소리에 맞춰 전주성을 돌며
가장 오래된 흙의 기억으로, 가장 앞선 미래의 생명을 불어넣는
저 붉은 옷의 선구자,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전주 산타를!
우리는 이 땅의 살아있는 신화로, 온 세상에 뜨겁게 선포하리라!
8.
깊어지는 숲
부제: 단 한 사람을 위하여
이삭빛
모두에게 그늘을 내어주는
넓은 숲이 되려 애쓰지 마라
지나가는 모든 바람을 다 재우려다간
정작 너의 뿌리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갈 뿐이다
스치고 지나가는 비바람에
가지가 좀 흔들린다고 뿌리까지 내주지 마라
그것은 네가 견뎌야 할 계절이 아니다
너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서리 국화에게
네 따스한 수액(樹液)을 낭비하지 마라
탁한 흙탕물을 뿌리로 빨아들이면
결국 너의 맑은 잎맥마저 탁하게 흐려지는 법
진흙 구덩이에서는 연꽃도 고개를 돌리거늘
어찌 썩은 물을 마시며 꽃 피우길 바라느냐
사랑은
가지를 어지럽게 뻗어 하늘을 가리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흙 속으로
조용히 뿌리를 깊게 내리는 일이다
너를 위해 기꺼이 젖은 흙이 되어준 사람
그 사람의 가슴에 단단히 박혀
흔들리지 않는 한 그루 나무가 되어라
그 곁에서 고요해지는 것
그것으로 너는 이미 울울창창한 숲이다.
9.
등을 지고
ㅡ 가장 정직한 슬픔은 등을 지고 산다 ㅡ
이삭빛
앞모습은 웃고 있어도
뒷모습은 울고 있을 때가 있다
마주 볼 땐 감쪽같이 속였으나
돌아서는 순간
무너져 내리는 어깨가 있다
그대여
내가 황급히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한다고 서러워 마라
눈도 입도 없는 등이
무슨 표정을 지을 수 있겠냐마는
가장 정직한 고백은 늘
얼굴이 아니라 등판에 적혀 있는 법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은
다 척추 뼈 마디마디에 묻어두었다
보라
내가 그대에게 보여주는 저 넓은 등은
이별의 벽이 아니라
세상의 비바람을 막아선
가파른 절벽이다
나 지금
그대를 등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라는 세상을
온몸으로 떠받치려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중이다.
10.
가면
이삭빛
그대, 낡은 소파에 짓이겨진 채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는 짐승이여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라
그것은 날짜가 아니라 쇠창살이다
꿈을 꾸는 자는 침대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헐거운 계획들은
진흙탕 길 위에서 비로소 단단한 뼈를 갖는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저 낯선 국경의 검문소를 통과할 때
나를 증명하는 것은 여권이 아니라
떨리는 내 심장의 박동 소리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소나기처럼
길은 늘 배반을 준비하고 있지만
젖은 신발을 말리며 깨닫는다
길을 잃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의 시장통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불현듯 마주치는 눈빛들
나와 다른 피부, 나와 다른 냄새 속에서
비로소 껍질을 벗고 알몸으로 서는 나
위험하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절벽 끝에 서 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바다의 깊이를 알겠는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길을 묻고
혼자 낯선 침대에 누워 뒤척이는 밤
비로소 나는 만난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라는 타인(他人)을
11.
녹슨 자전거
이삭빛
녹슨다는 것은
혼자 비를 맞았다는 뜻이다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 웅크려
소리 없이 울었다는 뜻이다
베란다 구석에 처박힌 자전거를 끌어내
마른걸레로 닦는다
붉게 일어난 녹은
덧나고 덧난 생채기 같아서
힘주어 문지를수록 마음이 아리다
내가 페달을 밟고 지나온 모든 길은
네가 온몸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만든 길이었다
둥근 바퀴가 닳고 닳아 평평해질 때까지
너는 내 삶의 무게를 업고
한 번도 무겁다고 말하지 않았다
기름을 치고 나사를 조인다
상처 난 무릎을 호호 불어주던
아버지의 약손처럼
닦아주지 않으면 빛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버리지 마라
삐걱거리는 소리는
제발 나를 한 번만 더 안아달라는
간곡한 소리다
다시 길 위로 나가자
상처 많은 사람이 더 멀리 간다
닦고 조인 자전거 위에
눈부신 아침 햇살이
어린 새처럼 내려앉는다
12.
델로스, 슬픈 맹세
이삭빛
너라는 섬이 내 안에서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대는 나의 유일한
사랑의 신(神)이었기에
나는 기꺼이 그대 안에 갇히기를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그 좁은 신전에 갇혀
나라는 빛이 서서히 꺼져갈 때쯤
비로소 아픈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잃으면서까지 지키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에
사랑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놓아 보내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내 아픈 사랑이지만
이제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는 운명
그대도 나도 아닌,
다시 망망대해 위 고독한 섬으로 돌아가
홀로 서겠습니다
다만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면
아주 가끔, 한 번씩은
내가 태양이 되어 그대의 아침을 비추고
내가 달빛이 되어 그대의 밤을 지키겠습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말없이 그대 곁을 맴도는 빛,
나는 슬픈 델로스가 되겠습니다.
13.
피아노가 차린 식탁
이삭빛
침묵하던 검은 뚜껑이 열리고
피아노가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딩동, 소리의 문을 열고 나와
당신의 텅 빈 마음 한구석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탁을 차립니다
새하얀 건반은 정갈한 앞접시가 되고
까만 건반은 깊은 풍미를 더하는 젓가락이 되어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식탁보를 펼칩니다
오늘은 어떤 요리를 내어드릴까요
낮게 깔리는 저음은
지친 하루를 데워줄 따뜻한 수프
경쾌하게 구르는 고음은
입안 가득 터지는 달콤한 과일 샐러드
도레미, 계단을 밟고 올라가
당신이 흘린 눈물을 받아
짭조름한 간을 맞춘 위로의 메인 요리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선율로 놓입니다
어서 오세요,
이곳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레스토랑
귀로 먹고 가슴으로 소화 시키면
어느새 허기진 영혼이 차오르는 곳
손가락 끝에서 춤추는 맛있는 언어들이
오늘도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자, 이제 행복의 음표 드세요.
이것은 사랑으로 빚은 가장 완벽한 만찬입니다.
14.
시가 차린 식탁
이삭빛
약속이나 한 듯 이 계절을 건너
고단한 모습으로 찾아온 그대여
스치듯 옷깃만 닿아도 알 수 있는
깊은 허기를 내가 아오니
먼 길 돌아오느라 닳아버린 마음을 위해
천 번을 고쳐 쓴 문장으로 상을 봅니다
달빛에 우려낸 시어(詩語) 한 잔과
꽃잎에 꾹꾹 눌러 담은 그리움 한 접시
이 생에서 다 하지 못한 말들은
뜨거운 국이 되어 김처럼 피어오르는데
드세요, 부디 편안히 드세요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연(緣)
취해도 좋습니다
활자 사이로 흐르는 나의 눈물이
그대 메마른 가슴 적시는 술이 된다면
사랑이라 부르고 시라 쓰는 이 마음이
그대 영혼 깊은 곳에 닿아
붉은 꽃으로 피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밥을 지으리니
아주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도
내 시는 오직 그대를 위한 식탁이어라
15.
별에게
이삭빛
캄캄한 밤하늘을 견디는 것은
어둠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숨 쉬는 새벽을
가장 찬란하게 맞이하기 위한 투쟁이다
보라,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뿌리 깊은 나무는 자리를 떠나지 않나니
오래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버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시련을 두려워 마라
그것은 네 운명의 판을 뒤집을
가장 날카로운 킨츠기의 시간
포기하지 않는 그 끈기가
마침내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거대한 물길이 된다
그러니 절벽 끝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어라
마지막까지 버틴 자의 거친 숨결만이
태풍을 잠재우나니,
네가 온몸으로 써 내려간
그 치열한 기록이
훗날 세상이 기억할 단 하나의 시가 되리라
16. 겨울장미
이삭빛시인
사랑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내가 왜 붉은 장미로 태어났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그대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울다가도
또 수십 번
그대가 죽도록 미워져 돌아눕던 밤
그리움과 미움이 서로를 껴안고 뒹굴다
내 몸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난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가시는 남을 찌르기 위해 돋은 것이 아니라
나를 찌르는 그리움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돋아난 뼈 아픈 눈물이라는 것을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이었음을
아프지 않고 피어나는 꽃은 없음을
사랑을 하고 나서야
나는 눈물겹도록 알았습니다
17.
여행자
이삭빛
사랑하는 이여,
너무 좁은 원을 그리지 마라
서로의 숨소리마저 외워버린 사람들 틈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별이 뜨지 않는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속삭일 때
그 편안함은 영혼의 감옥이 된다
고여 있는 물에는 맑은 하늘이 비치지 않듯
익숙한 관계 속에 갇힌 삶은
더 넓은 바다를 잊게 한다
그대가 진정으로 춤추고 싶다면
그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라
매일 만나는 이들의 다정한 위로가 아니라
어느 날 문득 마주친 낯선 여행자의 질문이
잠든 그대를 흔들어 깨울 것이다
삶의 비밀은 단단한 땅이 아니라
흔들리는 다리 위에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비효율적이고 서툰 그 낯선 길 위에서
신은 '거의 모르는 사람'의 손을 빌려
그대에게 기적을 건넬 것이다
그러니 한우물 파기를 멈추고
두려움 없이 다리를 놓으라
익숙한 것들과 작별할 때
비로소 그대는, 진정한 그대가 된다.
18.
못난 돌
이삭빛
남들은 앞을 보고 달리지만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보다
뒤처진 사람의 눈물이 더 밟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높은 곳에 피어
별이 되기를 원하지만
나는 낮은 곳에 숨어
흙이 되기를 원합니다
별은 어둠을 비추기만 할 뿐
뿌리를 안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습니다
왜 그리 어리석게 사느냐고
왜 굳이 험한 길로만 가느냐고
그때마다 나는 웃으며 말합니다
제가 조금 달라서 그렇습니다
남들이 직선을 그으며 빨리 갈 때
나는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돕니다
직선 위에는 마주칠 사람이 없지만
구불구불한 길 위에는
외로운 들꽃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진 그릇이라야
넘치는 물을 흘려보낼 수 있듯
나는 조금 모자라고 틈이 많아
당신의 슬픔이 내게로 스며들 수 있습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19.
슬픈 사랑의 완성
이삭빛
사랑하다가 죽을 것만 같아
목이 꽉 메어올 때
그냥 울어라
울음도 사랑의 힘이다
너를 잃고 나마저 잃을까 두려워
움켜쥔 것은 상처뿐이었으나
상처가 곪아 터져야 새살이 돋듯
너를 놓아주는 일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다
떠나보내는 것은 아픔이고
남는 것은 사랑이다
흐르는 강물에
부질없는 미련은 종이배처럼 띄워 보내라
강물은 흘러가도
강바닥의 돌은 떠내려가지 않나니
세월의 거센 물살에
씻기고 씻겨
끝내 둥글어진 돌 하나
가슴에 품고 살면 된다
20.
깨진 항아리
이삭빛
누구에게나 깨진 구석은 있다
세상이 던진 돌팔매질에 맞아
쩍, 하고 금이 간 가슴을
부끄러워 옷자락으로 가리지 마라
너는 깨져서 버려질 그릇이 아니다
깨졌기에 비로소
빛이 들어올 틈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이 너에게 찍은 붉은 낙인을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라 여기며
어둠 속으로 숨지 마라
진정한 도공은 깨진 도자기를 버리는 대신
가장 귀한 황금으로 그 상처를 잇는다
너의 찢어진 가슴을 사랑으로 붙이고
용서라는 금가루를 솔솔 뿌려
세상에 하나뿐인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라
보아라, 벼랑 끝에 선 어린 새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며
옹이가 박힌 나무라야 더 튼튼한 기둥이 되지 않더냐
네가 갇힌 캄캄한 감옥의 창살 틈으로
새벽별이 가장 먼저 찾아오지 않더냐
그러니 이제 고개를 들어라
상처는 구멍이 아니라 빛이 들어오는 통로다
우리가 이해라는 금으로 그 틈을 메울 때
너는 비로소 완성되는 눈부신 예술이다
너의 금이 간 그 자리가
훗날 가장 환한 별이 뜨는 자리다
21.
뜬봉샘(금강의 발원지)
이삭빛
봉황이 날아간 하늘을 쳐다보지 마라
빈 둥지 같은 마음으로
땅을 보아라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바닥이 되어주는 일이라고
신무산이 밤새 가슴을 쥐어짜
흘린 눈물 한 방울이 여기 있다
사랑하는 이여
봉황이 떠난 자리가 깊게 패여
샘이 된 것을 슬퍼하지 마라
떠난 것이 있어야
비로소 솟아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나는 너에게 가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을 골라 딛으며 내려간다
돌부리에 채여 멍이 들고
벼랑 끝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도
나는 멈추지 않는다
천 리 길 금강이
비단처럼 고운 이유는 단 하나
수많은 돌멩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흘러왔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만으로는 바다에 닿을 수 없어
때로는 흙탕물이 되는 수모를 견디며
기어이 너에게로 간다
비로소 바다에 닿아
우리가 한 몸으로 출렁일 때까지
나는 마르지 않는
너의 발끝이 되겠다
22.
짐짝 ㅡㅡㅡㅡ여기서 부터 시집3 22번시작
이삭빛
어느 낯선 별의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은 낡은 뭉치 하나
사람들은 그것을 짐이라 부르며
서둘러 눈길을 거둔다
하지만 자세히 보라
그것은 낡아서 무거워진 것이 아니다
당신이라는 우주를 떠받치느라
사랑의 밀도가 단단해진 것이다
자신을 태워 빛을 낸 별의 재처럼
모든 생의 진액을 쏟아붓고 남은
침묵하는 껍질
발로 툭 차면 채이는 가벼움이 아니다
그 무게가 없었다면
당신은 허공으로 흩어졌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가슴으로 끌어안아야만
비로소 해독되는 슬픈 암호
그것은 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이 지구별에서 우리를 지탱해 준
가장 무겁고도 거룩한, 사랑의 중력이다.
23.
첫눈 오는 날 (2)
이삭빛
세상이 입을 다물고
하얀 침묵으로 돌아가는 날
나는 길 위에 서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지나온 날들의 발자국이
소리 없이 지워지는 것은
이제 새로운 길을 걸으라는
하늘의 뜻이겠지요
만약 오늘 같은 날
우연인 듯 필연처럼
당신이 내게로 걸어온다면
나는 아무런 소원도 빌지 않겠습니다
무엇을 더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따스한 당신의 눈빛을 마주하는 일
그것이 이미 내 생의 모든 결핍을 채우는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첫눈이 내립니다
하늘이 땅에게 보내는
가장 고요한 러브레터 속에서
당신을 만난다면
나의 모든 겨울은 봄이 되고
내 안의 물음표들은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간절한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사랑하지 않고는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
이삭빛
세상이 아무리 춥고 시리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간절히 부르지 않았다면
저 하늘은 그저 텅 빈 허공이었을 것입니다
하얗게 쏟아지는 저 눈송이들이
단순한 물방울의 변신이 아님을
나는 당신을 만나고서야 알았습니다
보세요,
사랑하지 않고는 첫눈은 내리지 않습니다
하늘도 땅을 사무치게 그리워했기에
자신을 으깨어 하얀 꽃으로 내려보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곁에 머문다는 것 또한
차가운 가슴속에
서로를 위한 불씨 하나 심어두는 일이기에
우리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겨울은 영원히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내 세상에 첫눈이 내린 까닭은
오직 당신이라는 기적이 거기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대에게
가장 뜨겁게 녹아내리는 첫눈이 되겠습니다
24.
첫눈이 옵니다
이삭빛
첫눈이 옵니다
한번도 상처받지 않았던 첫마음으로
나의 온 세상을 당신께 드립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가장 따뜻한 것을 만져보고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첫눈은 저 먼 하늘이 아니라
오직 사랑하는 사람한테서만 온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첫눈은 오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마주 본다는 것 또한
사랑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처음 알아본
그 호숫가 언덕처럼...
나도 당신에게서 온 눈송이가 되어
그대 헐벗은 어깨 위에
가장 뜨겁게 내려앉겠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첫눈은 오지 않습니다." ㅡ 이삭빛
25.
내 나이 서른, 이제 오십이다
이삭빛
처음의 서른엔
꽃을 피우려 허공을 더듬었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온몸이 휘청거렸다
이제 다시 맞이한 서른, 오십은
위보다 아래를 먼저 본다
화려한 꽃잎보다
그 꽃을 밀어 올린
검고 묵직한 흙의 힘을 믿기에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
지나온 모든 시간이 거름이 되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니
겉보기엔 멈춘 듯 보여도
나는 지금 가장 치열하게
땅심을 딛고 서는 중이다
어떤 태풍에도 뽑히지 않을
나만의 숲을 이루기 위해
비로소, 제대로 뿌리내리는 중이다
이제 시작이다
24.
빈 배에게
- 장자의 강가에서
이삭빛
너를 미워하느라
내 마음의 강물이 밤새 검게 울었다
내 생을 쿵, 하고 들이받은 네가
나를 무너뜨리러 온 적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나도 너를 향해
날카로운 돌멩이가 되어 맞서려 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너는 나를 부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너 또한 거센 바람에 밧줄이 끊겨
어디로 갈지 몰라 흐느끼던
외로운 빈 배였을 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비어버린 배
그 텅 빈 가슴이 너무 가벼워
이리저리 휩쓸리다 내게 닿은 것이었다
상처 주려 한 게 아니라
기대고 싶었던 것이었다
네가 빈 배임을 안 순간
내 분노는 눈물이 되었다
부딪힌 자리는 아프지만
그 아픔조차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일
이제 나는 너를 위해 강물이 되기로 한다
부딪혀도 깨지지 않고
그저 너를 고요히 띄워 보내주는
깊고 넓은 물이 되기로 한다
26. 마음 둘 곳 없는 날엔
이삭빛
사람들 틈에 섞여 웃고 떠들다
돌아서는 등 뒤로 찬바람이 불 때
수많은 전화번호를 뒤적여도
막상 젖은 목소리 받아줄 곳 하나 없을 때
갈 곳 잃은 마음
어딘가에 비집고 넣으려 애쓰지 마라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은
갈 곳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디에도 묶이지 않았다는 뜻이니
허공을 흐르는 저 구름이
주소를 가지고 흐르더냐
이 골목 저 골목 기웃대는 바람이
주인을 찾으러 다니더냐
마음 둘 곳 없는 날엔
그냥,
지나가는 바람 등에
툭, 무심하게 얹어두어라
굳이 뿌리내리려 하지 않아도
너는 이미
네 삶의 주인으로 서 있으니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잠시, 흘러가도 괜찮다.
27.
건지산을 걷자
이삭빛
세상의 소란을 뒤로하고
건지산 숲으로 드는 일은
잃어버린 나를 마중 나가는 길이다
곧게 뻗은 길만 길이라 여기지 마라
굽이진 흙길을 천천히 밟아야
비로소 숲의 숨소리가 들려오나니
돌아서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풍경의 시작이듯
막힌 길 앞에서도 절망하지 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땐
잠시 멈춰 서서
편백의 푸른 숨을 마셔라
산다는 것은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스치는 이 바람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28.
배롱나무의 서시
이삭빛
지지 않는 꽃이 있다 하여
나는 여름의 심장 앞에 선다
백일, 붉게 타오르는 나무
그 속에는 몇 번의 인내와
몇 겹의 기다림이 겹쳐 있다
아무 말 없이
햇살을 견디는 잎 하나에도
세상의 바람은 다녀간다.
너는 말없이 오래 피고
나는 말없이 오래 서 있다
그리하여 오늘도,
붉은 시간을 배웅한다.
저물녘, 너의 그림자가
내 마음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앉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끝을 알면서도 피어나는 용기이며,
침묵 속에서 피워낸
가장 깊은 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