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고 사랑은 남았다>
살다 보면 내 잘못이나 실수와 상관없이 예기치 못한 강적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내 삶은 늘 무언가를 향해 뜨겁게 달리는 여정이었다. 어릴 적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인문계가 아닌 여상으로 진학해야 했던 아쉬움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까닭일까. 배움은 끝없는 숙제이기도 하지만, 내 삶의 밭을 가꾸는 씨앗이다.
멈추지 않는 배움의 열정은 한국무용과 불교무용까지 영역을 넓혀 사찰의 크고 작은 행사를 찾아다녔다. 그날도 멀리 담양까지 가야 해서 새벽 5시,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회원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중간 지점인 산청휴게소에 들러 따뜻한 아침 식사를 나눌 때만 해도 우리는 생기가 넘쳤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화장을 고치고 공연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차 안을 감싸던 고요한 정적. 그것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 눈을 뜬 곳은 사방이 흰 벽으로 둘러싸인 진주 경상대학교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시간은 이미 이틀이나 지나 있었고, 내 기억의 필름은 어딘가에서 뚝 끊겨 있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딸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초등학교 교사인 딸은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휴가를 내고 달려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4명이 타고 가던 차가 졸음운전으로 인해 앞서가던 대형 트럭 밑으로 파고들어 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고였다. 다행히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으나 모두 다쳐 여러 병원으로 흩어졌고, 그중 가장 부상이 심했던 나만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마가 터져 뼈가 보이고 찢어진 배로 피투성이가 된 처참한 엄마의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으면서도, 딸은 내게 그 끔찍한 상처들을 차마 말해주지 않았다. 혹여 내가 큰 충격을 받아 앞으로 운전대를 잡기는커녕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까 봐, 피 묻은 옷과 신발을 깨끗이 씻어 숨겨두었던 것이다. 중환자실의 공기는 서늘하고 무서웠다. 의술의 힘을 빌려 꿰매고 짜 맞추고 머리맡 약봉지에 링거 줄을 감고 마취가 풀리면서 느껴지는 직접적인 고통과, 바로 옆 침대의 환자가 급하게 수술실로 실려 나가는 간접적인 공포까지 더해져 아픔은 배가 되었다. 나는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었다. 그 몸부림은 고스란히 곁에 있는 딸에게 투정으로 변해 쏟아졌다. 침대를 올려라, 다시 내려라, 화장실에 가고 싶다, 병원 밥 말고 다른 음식을 가져와라 하며 떼를 썼다. 간호하다 지쳐 간이침대에 웅크려 잠이 든 모습도 뒤로 한 채 내 안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려 그 가녀린 딸아이를 끊임없이 흔들어 깨웠다.
더구나 그해 11월은 딸아이의 결혼식이 잡혀 있었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느라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남편과, 병간호가 서툴 수밖에 없는 아들을 대신해 딸은 스스로 독박 간호를 자처했다.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축복받아야 할 예비 신부였음에도, 엄마 병간호를 하느라 피부 관리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웨딩 촬영을 가야 하는 날 아침에도 병실은 여전히 분주했고, 딸은 오히려 내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 난 괜찮아. 엄마 회복하는 게 무조건 먼저야.”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고 병실을 나서던 딸의 가냘픈 뒷모습에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병실 창문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며, 내 육신의 상처와 딸에 대한 미안함도 강물처럼 흘러서 무사히 지나가게 해 달라고, 그리고 딸아이의 웨딩 촬영도 멋지게 끝나기를 기도했다.
그날 스튜디오에 도착한 딸의 모습은 너무나 소박했다고 한다. 병원 소독약 냄새를 묻히며 엄마를 수발하느라 피부는 거칠어졌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해 촬영기사님은 드레스를 입은 딸을 보며 “웨딩 촬영하러 온 신부 중에 이렇게 수수하고 화장기 없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라며 안쓰러워했다고 한다. 가장 화려하게 빛나야 할 순간에 ‘수수한 신부’가 되어버린 딸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엄마로서의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딸은 불편한 내색 한번 없이 긴 치료의 과정을 묵묵히 동행해 주었고, 그 지극한 효심 덕분에 이후 작은 병원으로 옮겨 통원 치료를 받으며 예전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배움의 열정 오르막에서 숨은 적을 만난 지도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지만 딸에게 가장 아름다워야 할 순간을 놓치게 했다는 빚진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둘이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일 때면 우리는 자연스레 아프고 가슴 저렸던 병실의 기억을 꺼내어 놓는다. “엄마, 나 그때 엄마 치료 안 돼서 평생 꼼짝 못 하고 누워있으면 어쩌나 밤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지금 이렇게 예전처럼 건강하게 여기저기 다니는 모습만 봐도 난 너무 좋아. 치료받느라, 웨딩 촬영하러 힘들었던 기억 같은 건 벌써 다 까먹었어.”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는 딸아이가 눈물겹게 고맙고 대견하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불행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밀어 흉터를 남기기도 한다. 내 삶의 오르막에 훅 치고 들어온 강적은 결국 깊은 사랑으로 이겨냈고, 그 시련은 우리 모녀 사이를 평생 지켜줄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다.
축 치고 들어온
달리던 고속도로 눈뜨니 병실이다
머리맡 약봉지에 링거 줄 몸에 감고
피냄새 온몸에 밴채 젖은 시간 흐른다
의술의 힘을 빌려 궤매고 짜 맞추고
딸아이 여린손목 쉼없이 간호해도
틀어진 뼛조각들이 토해내는 아픔뿐
모두 다 잠든 밤에 남몰래 빌어본다
창 너머 강물처럼 흘러흘러 가고 싶다
오르던 산마루쯤서 숨은 적을 만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