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운이 만난 거인들 <24>] 전두환 전 대통령(상) | ||||||||||||||||||
정재계 총동원 올림픽 유치 ‘대작전’ | ||||||||||||||||||
| ||||||||||||||||||
필자가 제5공화국의 대통령인 전두환 장군을 만난 것은 1968년 김신조의 청와대 기습공격사전과 미 해군함선 푸에블로(Pueblo) 호의 북한해역 나포사건이 이어져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극도로 긴장되어 있을 때였다. 당시 필자는 주영대사관에 근무 중이었는데 대미관계의 중요성 때문인지 몰라도 대미담당 청와대 1급 비서관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1968년 3월 18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귀국해서는 권력 상부의 의견 불합치로(내 추측) 미국담당비서관 자리는 뒤로 미뤄졌고 잠정적으로 경호실보좌관(차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 경호실장은 박종규였고 전두환 중령은 청와대 내곽 경비를 맡은 경복궁 주둔 30대대의 대대장이었다. 외곽 경비는 33대대(대대장 이규환)의 몫이었다. 호걸형의 지휘관이었던 전두환 중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유난히 두터웠고, 박종규 경호실장이 가장 의존하는 지휘관이라고들 했다. 김신조 등 북한 기습조 31명이 세검정까지 진출해 청와대가 위협을 받을 때 전두환 대대장은 박격포를 세검정 사거리에 발사했고, 조명탄 덕에 북한기습조가 놀라 전부 흩어졌다. 이후 공비들을 사살하고 김신조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박격포 사용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앞서 전 중령은 유사시에 대비해 박종규 실장을 통해 박 대통령께 설명한 바 있고 박 대통령은 “30대대에도 박격포가 있는지 몰랐다”고 하며 유사시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 덕을 본 것이다. 이미 그때 전두환 장군은 11기생 중 가장 뛰어나서 다음 경호실장 후보로 지목되어 있었다. 필자와는 자연스레 친해졌는데 박 대통령이 불러서 대기할 때마다 필자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한 시간씩 기다리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 전두환 노태우는 윤필용 사건(1973년)에 연루된 것으로 혐의를 받았다가 박종규 실장이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하여 풀려났고 곧 군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공수단, 월남전 연대장, 사단장,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청와대 경호실을 거쳐 육군 보안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리고 이때 운명의 길이 갈리게 됐다. 한번은 필자와 전두환 대령(당시 육군 참모총장 수석전속부관), 그리고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이민하 동양고속 사장(박종규 실장의 동서)의 초청으로 저녁을 같이 했는데 그 다음날 전 대령에게서 윤필용 사건과 관련 전화가 왔다. 전 대령은 “안기부 동기생 전화에 그런 정보보고가 있었다 하는데 별일 없을 테니 알고만 있으세요”라고 운을 떼었다. 그 후 며칠 안 가서 윤필용은 구속되었다. ‘아 이미 내사 중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이 불거지자 윤필용이 대통령을 만나 해명하려 했지만 이미 차단된 후였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한 박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고 정국이 극도로 혼란 상태에 빠지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즉시 육군본부에서 김재규를 체포하고 김재규의 쿠데타 음모를 분쇄했다. 이어 합수부를 설치해 사태를 수습하고 김재규 정승화 등을 수사하면서 12·12 사태를 거쳐 정승화도 제거하고 김재규 사건을 처리했다.
5·18 이후 국보위가 창설되고 제5공화국의 준비 작업이 시작됐다. 5·16 때도 그랬듯이 사회정화 경제재건 정치개혁 등을 내걸었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즉 3김씨는 체포 연금 은퇴 등의 길을 걷게 됐다. 제5공화국은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와 핵문제, 김대중 처리문제 등을 해결한 후 승인을 받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1년 미국을 방문했다. 필자는 이때 마침 태권도 문제로 미국에 있었는데 뉴욕에서 허화평 대령 일행의 선발대가 찾아와 나에게 협조요청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귀국길에 오르는 전 전 대통령을 하와이에서 만나기도 했다. 전두환 장군은 대구공업 시절에도 축구선수로 활약했고 육사 때는 골키퍼로 축구시합에 출전, 대학축구 준결승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88올림픽 준비 기간에는 선수단의 청와대 만찬도 자주 열기도 했지만 새벽에 수시로 태릉선수촌에 나와 격려하기도 했다. 청와대 상황실에서 갑자기 아침 7시까지 선수촌으로 나오라는 전갈이 오면 그 시각 어김없이 대통령의 방문이 있었다. 참고로 전두환 대통령은 6·25 때는 학도의용군으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스포츠를 무척 장려했는데 그렇다고 처음부터 필자와의 관계가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국보위 시절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필자를 포함해서 태권도 관장들의 사표를 받아갔다. “나도 내느냐?”고 했더니 “내라”고 했다. 심지어 국내 문제와 관련 없는 국제연맹 회장 자리도 내놔야 하느냐고 물어야만 했다. 어쨌든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 태권도 관장들이 사표를 냈는데 조금 후 필자의 사표만 반려되고 관장들 사표는 수리되었다. 이들은 81년 바덴바덴에서 88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후 발언권이 좀 강화된 필자가 이규호 문교장관에게 건의해 회복시킬 때까진 그대로 있어야만 했다. 신군부의 태권도 탄압은 많이 서운했다. 당시 태권도의 세계적인 위상은 정말이지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 가라테의 지류로 불렸지만 룰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어 국기화에 성공하고 세계화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으니 태권도 탄압은 기가 찬 일이었다. 1983년에는 이영호 체육부 장관(연세대 후배)에게 불려가서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는 사임하고 세계태권도연맹만 하라는 권고를 받기도 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쁘게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돼 있다는 말이었다. 이에 대한태권도협회 대의원총회도 못하고 있었는데 2개월 후에 내가 사임을 안 하니 속수무책이었는지 총회를 해도 좋다는 지시가 체육부에서 내려와 겨우 살아남았다. 5공화국이 점차 자리를 잡아갈 때 서울올림픽유치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어려운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려면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이 좋다고 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이때 전두환 대통령은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하여간 노태우 무임소장관에게 지시가 내려졌고, 박종규 사격 회장이 움직이게 됐다. 이규호 장관은 필자에 많이 의존했다. 그때 이규호 장관이 “올림픽 유치가 안 되면 나는 끝이다”고 필자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1981년 9월 30일(서울시각 10월 1일) 바덴바덴에서 기적적으로 52 대 27, 예상을 뒤엎고 서울이 나고야를 꺾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세울”이라고 발표하자 세계가 놀랐고 대한민국은 환호했다. 유치 대표단은 귀국 즉시 김포비행장에서 기자회견만 하고 청와대로 가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격려를 받았다. 각자 한마디씩 했고 필자도 제일 활약을 많이 한 사람으로 한마디하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끝내 사양했다. 전 대통령은 한국 사람들은 잘 되면 다 자기가 잘했다 하는데 이번에는 그러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미덕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올림픽 유치전은 거국적이었다. 박영수 서울시장이 유치단을, 조상호 KOC위원장이 KOC를 이끌었다. 또 노태우 정무장관부터 유학성 정보부장, 박종규 사격연맹 회장과 이규호 문교장관-김운용-정주영 현대 회장 그리고 김택수 IOC 위원 선으로 적극적인 유치공작이 펼쳐졌다. 바덴바덴에서는 측면 지원자로 유창순, 조중훈, 최원석, 김우중, 장성환 등 기업 총수도 총동원됐다. 그 후 서울올림픽이 12년 만에 보이콧 하는 나라가 없는 인류의 최대 종합제전으로서 대성공을 거뒀고 우리국민은 “해냈다” “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표어 그대로 한국이 세계를 향해 비약, 오늘날이 있게 하는 밑바탕이 됐다. 다시 전두환 대통령과 서울올림픽 준비로 돌아가 보자. 1981년 10월 바덴바덴에서 88서울올림픽 유치에는 성공했지만 그 당시 한국은 40개국 정도밖에 외교관계가 없었고(소련 동구권과는 미수교),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입장에다 아직 컬러TV도 없고, 한강이 범람하고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고 있었다. 체육계도 겨우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금메달 1개(양정모)를 땄을 뿐이고, 아시안게임도 치른 적이 없어 국제심판도, 국제연맹 임원도 거의 없었다. 국제연맹에 가입이 안 되어 있는 종목도 있어 현지에서 필자가 아는 국제연맹 회장에게 부탁하고 회비를 내서 카누, 근대 5종, 루지에 가입했다. 회장은 어쩔 수 없이 필자가 모두 맡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들이다. 국가적으로도 한국의 인권문제가 지목을 받고 있었고 남북한 긴장도 여전했다. 시설도 없었다. 한국은 어려운 가운데 7년간의 준비를 해야 하고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유치했다는 것만 가지고 좋아만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올림픽 준비를 7년간 하는 가운데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모든 것을 이룩하고 한국의 발전을 함께 이룩해 나가야 했다. 이 88서울올림픽의 준비기간이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임기 때였다. IOC 전 수석부위원장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