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과 컷이 겹치며 원샷이 투샷으로 바뀌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울역을 지나며 그녀는 마침 비어 있던 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프릴이 살짝 들어간 하얀 롱드레스와 목이 깊게 파인 검은 베이직 티셔츠 위에 역시 같은 톤의 가디건을 걸친 차림으로 서울역 5번 플랫폼에서 전철을 올라타 곧장 내 옆자리로 왔다.
흑인 여성처럼 치렁치렁 아프로펌을 한 긴머리를 단정하게 검은 밴드로 밀어올려 단아한 이마를 드러낸 그녀는 낯설었지만 자연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나란히 앉아 천안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유골함을 닮은 하드케이스의 핸드백 줄에 달린 장식고리를 만지작거리며 가는 내내 맞은 편 차장밖으로 스치는 풍경에 눈을 고정시켰다.
물건을 파는 잡상인이 앞을 지나갔다.
구걸하는 아이를 업은 여인이 지나갔다. 그리고 전단지를 붙이는 여인이 지나갔다. 천안행 급행 열차는 구로역을 지나고 안양역을 지나고......수원을 지나고 병점을 지나고...평택을 지나고 천안에 이르렀다.
기분이 어떠세요. 불편하지 않으세요?
아뇨 너무 편해요
그래요. 저도 동감입니다.
이별의 의식을 치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별의 의식은 잊기 위한 의식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감사해요. 저랑 동행해 주셔서.
나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우린 천안에 내리지만 이 노선은 신창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설국열차를 타고 서로 다른 목적지에 내릴 뿐인 승객이다.
추모공원은 천안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더 들어가야했다.
거의 3시간이 걸리는 여정.
추모공원은 천안을 한참 벗어난 산골짜기 오지에 있었다.
그때가 오후 3시를 지난 시각.
예상과는 달리 공원 초입에 꽃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천안추모공원'이라 쓰인 거대한 표지석 앞에서 잠시 우리는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있는 경비실에
물으니 올라온 길을 조금 내려가면 꽃가게가 있다고 했다.
나는 혼자 다시 내려가 꽃을 샀다.
국화 꽃다발. 주인여자에게 꽃을 받아든 나는 꽃에 물을 좀 뿌려달라고 했다. 잠시라도 싱싱한 꽃을 바치고 싶었다.
주위는 완전 무인지경이었다.
표지석 뒤, 우리가 내렸던 버스정류장에 다시 돌아오니 그녀는 깎아놓은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우리는 두 개의 건물 가운데 뒤편에 있는 건물로 걸어들어갔다. 숲길을 걸어 괴괴한 낭하를 지나 마침내 봉안실로 찾아들어갔다.
우리는 양편으로 줄지어 늘어선 납골당 사이를 걸어들어갔다. 제지하는 사람도 안내하는 사람도 없는 무균실 같은 공간을...
적어온 번호표대로 우리는 찾아갔다.
촘촘이 격자 칸막이가 된 윗쪽의 한 열에서
우라는 마침내 그의 유골함이 봉안된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가져온 꽃을 헌화하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의 봉안실 격자 창 양 옆으로 붙여 놓은 사진을 보았다.
실은 그 사진을 보고 우리는 그게 그의 칸임을 알았다.
야구모자를 쓴 익숙한 그의 프로필 사진. 처음보는 그의 가족사진과 기르던 애견의 사진도 있었다.
그는 다복하게 살았다.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게 그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납골당을 걸어나왔다.
가지고 온 꽃은 로비 헌화대에 두었다.
낭하를 지나 숲길을 걸어나올 때 문득 뒤따라오던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뒤돌아보니 그녀가 멈춰서서 오지 않았다.
그녀와 나와의 사이는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멈춰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고만 있었던가 보았다.
내가 뒤돌아서 다가가자 그녀가 물기가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좀 안아주시면 안 돼요?
그때 나는 그녀의 등 너머로 맞은편 산등성이 위에 펼친 거대한 손을 보았다. 손바닥을 뒤집은, 마치 물에 적셔 꾸긴 창호지를 펼쳐 놓은 듯한 빛바랜 그 손바닥에는 운명의 지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듯 했다. 바다 속 조각공원에 불쑥 솟아난 거대한 손과 같은 그 손바닥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못한다는 것을.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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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적우(온라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3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사즐모 같은 한 '카페'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사랑했던 한 남자를 추모하는 여정이었죠. -
작성자해봉(온라인) 작성시간 26.06.23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시는
작가님이
계시는데 ᆢ
새삼 제 일기가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적우(온라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3 어이쿠 아닙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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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얀 눈꽃(중앙부회장) 작성시간 26.06.23 누군가를 기억하고~
찾아갈 수 있음은
마음속에 깊게 새겨졌음이겠지요~~
저두 그런 사람들~~
만나고 싶어요~~ -
작성자그림과소리(서울사랑방 ) 작성시간 26.06.23 한 편의 단편 영화을 감상하듯
읽어내리는 동안 파노라마처럼 읽혀졌습니다'
역시 일필휘지'
적우 님의 필력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