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04]
2022. 06. 18(월)
망각하면 안 될 세 문장
성서에도 사람은 겸손하기가 참 어려운 동물이라고 여러 곳에 기록했다. 한여름의 잡초처럼 매일 같이 발로 꾹꾹 밟아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웃자라 버리는, 그것이 잡초의 성질이고 사람의 교만이다.
평생을 머리 조아리다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사람이 돈 좀 벌었다고 거덜대고, 작은 감투 하나에 큰 벼슬이라도 한양 목에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우쭐되는 걸 보면, 교만만큼 인간의 본성이 뚜렷한 것도 없어 보인다.
교만이 ‘일만 악의 뿌리’이고 ‘패망의 앞잡이’란 가르침이 끊이질 않지만, 인류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의 흥망성쇠가 교만의 악순환에서 비롯됨이니, 사람이 언제라야 창조주의 뜻에 맞추어 겸손해 질까?
사람의 겸손과 교만은 말하는 것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자기 말만 앞세우고 남의 말을 무시하거나, 박수를 치는 것보다 박수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겸손하다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교만과 겸손을 구분하는 방법은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좀 더 다가설 수 있다. 짧은 생을 살다가는 인생임을 아는 사람은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나대지 않으니까.
말에는 묘한 힘이 있고 향이 나는 말이 있다. 라틴어에는 그러한 철학적 의미를 함의한 문장이 많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엔 때리고 때려도 솟아오르는 두더지처럼 뿌리가 뽑히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20년은 족히 지났을 기억 하나가 있다. KBS-TV1 <도전 골든벨>에서 최후의 1인이 된 학생에게 마지막 50번 문제가 주어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고대 로마에서 승리를 쟁취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장군 뒤에서 계속 외쳐대는 라틴어는?”
“메멘토 모리!”
우와~! 학생들의 함성과 함께 영예의 골든 벨이 울리는 짜릿한 순간을 아들과 함께 지켜보았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묘한 뜻을 지니고 있다.
유래는 2000년 전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에서 비롯되었다.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였다. 백마 네 마리가 끄는 전차를 타고 개선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이다. 영웅이 탄 마차가 연도를 메운 로마 시민의 환호 속을 헤치고 행진하는 장면은 장쾌했다.
그러나 화려한 금빛 마차에는 열광 속에 가린 ‘숨은 그림’ 하나가 있다. 개선장군이 손을 들어 시민들에게 화답하는 동안, 장군 뒤에 탑승한 사람이 큰소리로 계속 외쳐대는 장면이다. 대중의 환호소리가 커지면 커진 만큼 그의 목청도 따라 커지는 외침이 있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승리에 도취된 장군을 향해 준엄한 하늘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승전한 영웅 그대여! 영광의 이 순간에도 유한한 인간의 본분을 잊지 말지니! 교만한 인간의 관성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장치 하나를 둔 것이다.
로마 최고의 환대 물결 속을 가르면서 행진하는 시간에도, 모두가 너를 향해 열광하는 순간에도, 그림자처럼 죽음이 뒤따르는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에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를 담았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현재에 충실하라!’라는 것이다. 이 세 경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획 하나 가감 없이 들어맞는 처세훈이자 삶의 태도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이를 강조했다. 췌장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잡스가 연단에 올라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격찬했다. 죽음이 없었으면 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제한된 나에 주어진 시간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듯이 낭비하지 말라”라며 “오로지 자신을 믿고, 열정으로, 집중하십시오.”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 스탠퍼드 학생들에게 혼신의 힘을 실어 일렀다.
메멘토 모리와 함께 자주 인용되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본래 이 말은 오만하지 말고 ‘현재를 가치 있게 살라’라는 뜻으로, 오늘을 즐기며 살라는 것으로도 읽힌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언뜻 보면 다른 뜻 같아 보이나, 늘 함께 짝을 이루어 역사의 물결을 타고 사람들에게 속살거린다.
우리에게도 ‘花無十日紅’이라는 같은 맥락의 문장이 있다. 열흘 가는 꽃이 없듯이 ‘한 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는 이치를 꿰뚫고 있다. 트롯 가수 김연자가 불러 유명한 ‘아모르파티’도 일맥상통한다.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와 운명을 뜻한 ‘파티’를 합성한 라틴어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을 지녔다.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이 되는 삶의 태도로, 니체가 처음 사용했다.
메멘토 모리의 처세훈은 미국 남서부에 거주한 나바호족에서도 찾을 수 있다. “네가 세상에 울면서 태어날 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는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삶을 살라.”
마음을 휘어잡는 짧은 문장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파티>, <화무십일홍>까지 모든 문장은 한결같이 겸손한 삶을 이르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 상기해야 할 본분임을 깨친다.
생명이 너의 코에 달려 있다. 날숨 한 번 뱉었다가 들이키지 못하면 죽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똥 하나를 피하지 못하는 게 연약한 사람이다. 그러니 교만하지 말고 매 순간 삶을 성찰하며 살라고 이른다.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고 오늘에 충실하라고...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