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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마리아의 향유 요12:1~8절 2026.6.14. 주일오전

작성자이태현|작성시간26.06.07|조회수18 목록 댓글 0

마리아의 향유 요12:1~82026.6.14. 주일오전

 

*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십자가 은혜

2절에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나사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나사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무덤입니다. 무덤에서 썩고 있어야 하는 것이 나사로입니다. 그러한 그가 지금 살아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는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2: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이 말씀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성도가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에 그것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사로는 바로 예수 안에서 성도에게 되어질 일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덤에 있을 자가 예수와 함께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질 복이며 영광이기에 성도는 이것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연하게 예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심으로 귀한 분이기에 귀함이 보여지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아깝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가룟유다가 시비를 겁니다. 왜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삼백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상당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의 말대로 예수님의 발에 부어서 허비해 버리는 것보다는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실리적이라는 것이 가룟 유다의 판단입니다.

 

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실 일은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것임을 보여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마리아의 행위인 것입니다. 26:1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행동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 예수가 값진 보배로 증언될 삶

마리아가 보여준 행동은 자신에게 예수님은 이 향유보다 더 귀하고 가치있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마리아의 행동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라 무덤에 있는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무덤에 있는 비참한 자로 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마태복음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의 행동도 같이 전파되리라 하시는 것은 마리아가 행한 대로 할 것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망에 있는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심을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삶이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마리아에게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나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은 것을 나무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심으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돈이 아까워서 한 말이었습니다. 6절에 유다는 돈 궤를 맡은 자로서 거기 넣은 것을 훔쳐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다를 도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단순한 공금횡령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지금 우리는 유다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유다가 돈 궤를 맡았다는 것은 유다에게 있는 돈이 자기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즉 유다에게 있는 돈이라고 해서 유다의 소유가 아니라 단지 맡은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돈 궤를 맡은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돈 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그 궤에 돈을 넣어주십니다. 얼마가 되었든 하나님이 넣어주신 것을 우리가 맡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돈 궤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자신만 보인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기보다는 돈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내 소유이기 때문에 내가 지켜야 한다는 마음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돈이 아까울 것입니다. 내 돈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에서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돈을 봤습니다. 평소 돈을 더 소중히 여긴 마음이었기 때문에 돈을 훔쳤던 것이고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향유가 허비되는 것만 봤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돈이 우리를 무덤에서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사망에서 일으키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돈을 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 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가 돈이 있든 없든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고 값진 분임을 보이고 드러내 증언의 삶을 살아야 할 자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도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돈이 많다고 해도 돈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붙들고 의지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한 분임을 증언되는 삶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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