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타신 예수님 요12:9~19절 2026.6.21. 주일오전
* 구원은 구원인데 어디서 구원인가?
12절에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을 반기는 정도가 아니라 열렬히 환영을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당시 그들에게는 영웅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호산나라는 것은 '지금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를 예수님을 찬양하는 용어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성가대의 이름에 '호산나'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산나라는 용어는 '예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의미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구세주로 본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억압받는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능히 그럴만한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들은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핍박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로 오신 분이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그동안 핍박받아온 눈물의 세월이 끝나고 이제는 모든 나라의 중심에 굳게 설 이스라엘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영웅처럼 환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9절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예수님만 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자신들이 죽어야 할 몸이고, 그러한 자신들을 죄에서 살리실 분으로 발견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결코 아닙니다.
이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을 것이고, 그러한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경외의 시각으로 봤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분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을 꿈꿨던 것입니다. 11절에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그 능력을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열렬히 환영한 것입니다. 그 능력으로 자신들도 로마의 세력에서 벗어나 힘 있는 나라를 꿈꾸며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요19:12절에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하며 유대 무리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예수님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영혼이란 생명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들은 왜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돌변했을까요? 그것은 빌라도 앞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예수는 자기들에게 필요 없기 때문에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예수는 한순간에 전혀 쓸모 없는 자로 전락 되버립니다. 자신들이 기대한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예수이기에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의지해야 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버려버린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는 유대인처럼 하지 말자'라는 각오와 교훈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린 본문에서 유대인이 예수님을 환영했다가 버려버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혹 그러한 잘못된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가졌던 잘못된 기대가 혹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면서 이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못하고 이적을 행하는 그 능력만 선호했습니다. 이적을 행하는 그 능력이 자기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은 능력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달랐습니다. 요6: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육이라는 겉 사람과 영혼이라는 속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은 영혼이라는 생명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우리 영혼이란 속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영혼이 죽음으로 육신도 죽음이란 저주가 시작되어 늙고 병들고 심적으로는 욕심으로 인한 두려움과 염려와 근식과 걱정 미움과 시기 괴롬과 탄식과 불안과 초조로 쉼이 없는 날을 살다가 결국 흙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으로 태어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이 살면 죽신도 살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은 영혼이라는 속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영혼이란 생명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 성령이 역사하는 말씀에 의해서만 살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내 영혼을 살리실 용서이고, 의로서 생명의 주로서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의 생명인 속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육신의 욕심에 사로잡힌 죽은 자요, 전형적인 죄의 사람의 특징인 가시적인 눈에 보이는 육의 문제에 집착해 있는 것입니다. 죄 중에 태어난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고 내 가정, 내 직장 내 나라가 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에 속국 된 자신들의 나라가 어서 독립을 위해 능력자 예수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육신의 도움을 주는 능력의 예수입니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피는 우리 죄를 속량해서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값입니다. 나귀타신 예수는 우리 죄를 짊어지고 피 흘리려 죽음의 현장으로 가는 모습니다. 이 십자가의 피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셔서 죽은 우리 영혼이란 생명이 살게 됩니다. 영혼이란 생명이 살아야 육신도 살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아 예수로 살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