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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우헌 수필★

들꽃은 들꽃대로

작성자이일배|작성시간26.06.07|조회수47 목록 댓글 0

들꽃은 들꽃대로

 

  강둑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강둑길을 걸으면 맑게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길섶에 피어나는 온갖 풀이며 꽃들을 보는 재미도 내가 강둑을 즐겨 걷는 큰 까닭이다. 물은 물대로 풀꽃은 풀꽃대로 모두 길동무다.

  철마다 다 다른 풀이며 꽃이 피고 지고 하지만, 오늘 강둑길에는 금계국 노란 꽃잎이 하늘거리고, 갈퀴덩굴 환삼덩굴이 우거지고, 쑥대며 큰김의털, 소루쟁이가 머리를 흔들고, 개망초가 큰 키 위에 노란 꽃술 하얀 꽃잎을 앙증하게 피워 내고 있다.

  길섶 강 쪽 가장자리 온갖 풀들이 자욱한 가운데 보일 듯 말 듯 언뜻 보이는 저 붉은 것은 무엇인가. 풀숲에 가려 있어 지나칠 뻔했다. 풀을 헤치고 들어가 보니 마치 접시꽃 모양 붉은 잎을 어여쁘게 펼치고 있다.

  꽃양귀비다. 종이처럼 얇고 넓은 꽃잎을 애교 부리듯 살랑거리고 있다. 눈길이 뗄 수가 없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여인에 비유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전설을 가지고 있는 데는 까닭이 있는 것 같았다. 이 꽃이 왜 이런 풀숲에 묻혀 있을까.

  몇 사람이라도 더 보게 하고 싶고, 나도 가까이 두고 보고 싶다. 꽃도 잎도 뿌리도 상하지 않게 조심조심 캐내었다. 봉지에 잘 싸서 집으로 가져와 화단 한가운데 곱게 심고, 물도 듬뿍 주었다. 옮겨 심어도 꽃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고맙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똑같은 꽃을 또 한 송이 피워 냈다. 쾌재를 부르며 다시 한번 고마워했다. 이웃에게도 보여주었다. 아, 그런데 웬일인가, 아침에 그리 싱싱하던 것이 저녁 무렵에는 잎이 시들시들했다. 물기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물을 촉촉이 주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더 많이 시들었다. 꽃도 고개를 숙이고 폈던 꽃잎을 닫았다. 물을 아무리 주어도 잎도 줄기도 맥없이 시들고 말라 갔다. 내가 무얼 잘못했나 싶어 아린 마음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꽃양귀비는 곧은뿌리 식물로 옮겨 심으면 뿌리가 상해 죽기 쉬워 씨앗을 바로 뿌려서 키운다고 한다. 옮겨 심은 뒤 핀 꽃은 뿌리에 남아 있는 수분과 영양으로 이승의 마지막 꽃을 피워 낸 것 같았다.

  내가 못 할 짓을 한 것 같다. 제자리에 고이 두었더라면 꽃을 몇 송이나 더 피워 냈을 것이고, 꽃을 많이 피우다가 보면 보는 이들의 즐거운 눈길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쇠잔해져 가는 내 기력이 더욱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난병을 다스리는 중이다. 저 시들어가는 꽃과 잎이 내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못 할 짓을 많이 해 몸이 이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저 꽃은 일부러 거두지 않아도 제 씨로 스스로 꽃을 피운다 했으니, 혹 씨가 떨어져 내년 봄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내 고단한 삶을 스스로 못 다스려 고마운 도움을 받고 있다. 고마운 제도가 고마운 분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분의 도움으로 지내던 어느 날, 달걀형의 조그만 잎 위 하얀 꽃받침 속에 붉은 꽃이 피어 있는 꽃분 하나 가져왔다.

사진으로 담아 검색해 보니, ‘행운’, ‘당신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클레로덴트룸Clerodendrum이란 꽃이었다. 아프리카의 어느 청년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은 탈진하여 숨을 거둔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전설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주는 그분의 정성인 것 같았다. 나의 생존만을 보살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도 위안을 주고 싶어 건네준 것 같다. 방 안 책상머리에 놓고 수시로 보며 물을 주기도 하고 보듬기도 하면서 이뻐했다.

  이쁜 모습이 단순한 위안만이 아니라, 내 고적한 삶 속에서 바랄 것이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을 함께 주었다. 그렇게 잘 지내던 어느 날부터 잎이 하나둘 말라 떨어지기 시작했다. 뜻밖의 일이라 안타까워만 할 뿐, 손을 써볼 수가 없었다.

  물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마침내 잎이 거의 다 마르고 말았다. 나를 돌보는 분도 안타까워하며 싱싱한 것을 또 가져오면 되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 했다. 보기 편치 않다며 밖으로 들어내었다. 볕이 쬐면 볕을 받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 시간이 흘러갔다.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내다보니 마른 잎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새순이 돋고 있는 게 아닌가. 본디 잎의 형태를 서서히 갖추어가고 있다. 잎이 제법 어우러지는가 싶더니 하얀 꽃받침이 솟아 나왔다. 곧 붉은 꽃을 솟구쳐내기 위한 준비다.

  내 생기가 돌면서 기력이 소물소물 솟아나는 듯했다. 피어나올 붉은 꽃을 그리니 내 얼굴에도 가슴에도 꽃물이 드는 것 같다. 그렇구나. 제 살 자리가 따로 있구나. 꽃양귀비도 클레로덴트롬도 제 살 자리가 따로 있는 걸 모르고 괴롭히기만 했다.

  내 속만 차렸구나. 그 자리 다시는 빼앗지 않으마. 들꽃은 들꽃대로 두어야 하는 것을!

  내 사는 자리가 돌아 보인다. 내 기력을 다시 일굴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2026.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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