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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와 치마폭 사이 / 이진숙

작성자이일배|작성시간26.06.08|조회수19 목록 댓글 0

차와 치마폭 사이

 

이 진 숙

 

  이찬이가 오는 날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분주히 아침을 연다. 우리는 서둘러 KTX역으로 향했다.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자 남편은 왼쪽 출구, 나는 오른쪽 출구를 맡아 혹여 놓칠세라 목을 길게 빼며 살폈다.

  드디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딸과 다섯 살 외손자의 모습이 보인다. 우린 반가워 손을 흔들었다. 에스컬레이터는 왜 그리도 느린지 그 시간이 하루같이 길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할머니!" 하며 두 팔 벌려 달려올 아이가 오늘따라 시무룩하다. 태어나 처음 타 본 기차가 그만 아이를 주눅 들게 한 모양이다.

  동화책에서 기차 그림을 볼 때면 눈을 반짝이던 아이다. 정작 실제 기차는 아이에게 거대한 괴물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아직 긴장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작은 얼굴은 굳어 있고, 손은 엄마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다. 그때 딸이 아이 앞에 쪼그려 앉더니 아무 말 없이 아이를 품에 안는다.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그 짧은 한마디가 아이에게 따뜻한 위안으로 스며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이 저릿해지면서 오래 잠들어 있던 내 다섯 살 어린 시절이 불현듯 되살아난다.

  내게도 낯설고 커다란 세상과 맞닥뜨린 첫 경험이 있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라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더러 장에 가자 하셨다. 강릉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나는 신이 나서 할머니께 달려갔다. 할머니는 머리를 곱게 빗겨주며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주셨다.

  어머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았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삼십여 분쯤 걸어야 했다. 십 분쯤 걸어 신작로에 들어서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빵!’ 하는 굉음과 함께 시커먼 트럭이 나를 덮칠 것처럼 달려오는 것이었다. 산골에서 자동차라곤 본 적 없어 심장이 멎는 듯 놀라 어머니 치맛자락 뒤로 얼른 몸을 숨겼다. 까만 트럭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허연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길 위를 뒤덮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여름 한낮 먼지는 마치 하늘에서 밀가루가 쏟아지는 것처럼 날렸다. 갈아입은 새 옷은 순식간에 먼지 옷을 덧입었다. 어린 나는 무서움과 낯섦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말없이 안아주셨다. 땀 섞인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잠시 안도감을 주었다. 버스정류장에는 작은 상점이 있었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얘가 우리 셋째 딸이래요."

  "아이 고 녀석 피부는 뽀얗고 눈은 새까만 게 참 곱게도 생겼네."

  아주머니는 내게 하얀 눈깔사탕 하나를 쥐여 주셨다. 달콤한 향이 입안에 퍼지기도 전에 또다시 커다란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버스였다. 덜컹거리며 들어서는 그 큰 물체 앞에서 나는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엔진의 요란한 소리와 땅이 울릴 만큼의 크나큰 진동은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운전기사는 괜찮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끝내 버스에 발을 올리지 못했다. 울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버텼다. 결국, 어머니는 나를 버스정류장 가겟집에 맡기고 장에 가셔야 했다.

  나는 아주머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아주머니는 어린 내가 안쓰러웠던지 과자와 사탕을 내어주셨다. 나는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며 어머니가 오시기만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버스가 다시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에서 내리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달려가 안겼다. 그 품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엄마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우리 진숙이 안 울고 잘 있었구나" 하시며 나를 끌어안으셨고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셨다. 내 다섯 살 첫 경험은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어머니 품속에서 느꼈던 작은 안도감으로 남아 있다. 외손자 이찬이가 처음 기차를 타고 두려움에 떨던 모습은 바로 그때 나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다정히 말했다.

  “할머니는 다섯 살 때 버스가 무서워 타지도 못하고 울었어. 우리 이찬이는 버스보다 훨씬 큰 기차도 울지 않고 탔으니 정말 용감한 거야."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할머니는 버스가 무서웠어요? 저는 버스는 안 무서운데, 기차는 너무 빨라서 무서웠어요."

  아이의 말 속에는 두려움과 동시에 호기심이 공존했다. 그 마음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딸은 아이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아이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지금의 두려움이 손자에게 먼 훗날 또 하나의 기억으로 남았을 때 그것은 두려움만이 아니라, 언젠가 꺼내어 볼 수 있는 추억 속 훈훈한 이야기로 남겠지.

  며칠 후, 다시 기차에 오르는 아이의 작은 어깨는 여전히 굳어 보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 용기가 담겨 있었다.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울리고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자는 창가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었다. 우리 부부도 기차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그랬듯이, 다섯 살 인생의 첫 경험, 나의 다섯 살과 외손자의 다섯 살이 서로 다른 시간 위에서 닮은 모습으로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손자를 통해 나의 유년과 어머니의 젊은 날도 만났다. 기차는 떠났지만, 남겨진 건 이별이 아닌 이어짐이다. 어머니의 치마폭, 그 안에서 아이는 자랄 것이다. 그렇게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첫 경험’. 그 모든 걸 감싸 안는 건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넓은 사랑이 아닐까.

  엄마가 된 딸아이를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가슴으로 배운다. 내게서 딸에게로, 딸에게서 다시 손자에게로, 하나의 끈이 되어 흐른다. 살다 문득 꺼내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면으로 남게 되길. 말로 다 전하지 못한 마음들이 그날의 온기처럼 오래 머물러 우리 삼대의 시간을 조용히 이어주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언젠가 또 다른 두려움 앞에 서게 될 때, 그 아이도 누군가를 품에 꼭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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