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
홍 은 주
핸드폰을 교체했다. 애플 설치와 로그인하기가 귀찮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체형 배터리 수명이 짧아져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핸드폰 가게에서 기본적인 자료를 새 핸드폰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집에 와서 자주 사용하는 애플 로그인을 하려고 하는데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겨우 로그인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새 핸드폰에는 기본적으로 설치된 애플이 60여 개가 넘었다.
은행 애플 중에 클릭하다 보니 <학교 가는 길>이 있어 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눌러 집에서 학교까지 선을 연결해 보았다. 문득 50여 년 전 초등학교 다녔던 꼬불꼬불 들길, 산길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언니와 난 여섯 살 차이여서 언니가 6학년 때 난 1학년에 입학을 하였다. 내 고향은 오지마을이어서 학교까지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언니는 자주 몸이 아팠기 때문에 언니와 함께 학교에 다닌 기억은 나지 않았다.
집성촌인 우리 동네엔 열네 명의 또래가 있어 같은 해에 입학했다. 위, 아래로도 형제간의 터울을 두고 동급생이 십여 명이 되어 학교 가는 길은 아이들로 북적였다. 당시는 자전거도 귀해서 거의 걸어서 다녔다.
방학을 제외하고 우리는 농작물이 자라는 모습과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철마다 피는 꽃들을 꺾어 교실에 꽂아 두고 수술로 힘겨루기도 하였다. 감꽃이 피면 땅에 떨어진 꽃을 주워 풀 대롱에 줄줄이 꿰어 목에 걸고 다녔다. 개구리 소리, 새소리, 고라니 소리를 들으며 내리막길은 볼이 흔들릴 정도로 뛰었다. 바람을 가르며 내달리는 기분은 그네를 굴러 허공 속으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모내기가 끝나면 날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감꽃 먹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감나무에 달린 감이 제법 굵어졌다. 가을에 엄마가 떫은 감을 삭혀서 다디달게 만들어 주던 것을 생각해내서 땅에 떨어진 제법 굵은 푸른 감을 몇 알 주웠다. 길에서 가까운 논 한 곳을 꼬챙이로 파서 나만 알 수 있게 감을 묻어두었다가 사흘 후쯤 꺼내어 먹어보면 달콤한 맛이 났다. 산도라지, 잔대, 개복숭아, 돌배 등 우리들의 먹거리는 지천이었다.
지금도 뱀은 무섭지만 어릴 때 뱀을 보면 기겁을 했다. 남자애들은 뱀을 잡아 여자애들을 겁주기도 했다. 요즘처럼 남녀가 허물없이 지내던 때가 아니었고 약간은 거리를 두었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놀 거리가 부족했던 당시에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어르신들은 산토끼, 고라니, 멧돼지 등이 농작물을 망쳐 놓았다고 하며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셨다. 하지만 다음날 보면 종자 통을 허리춤에 차시고 또 땅에 뿌리셨다. 밭두렁에 있는 나무 위 새들은 저만치 앞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사뿐히 땅에 내려 쪼아먹기 바빴다.
학교 가는 길에는 다리가 놓이지 않은 개울이 두 곳이 있었다. 6월 들어 장마가 며칠 이어지면 물이 불어 흙탕물이 무섭게 흘렀다. 이럴 때는 책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신발을 벗어 양손에 꼭 쥐고 허벅지까지 오는 물살을 온몸으로 버티며 건넜다. 간혹 동네 장정들이 우리를 업고 건네주시기도 하였다.
하굣길에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집에 가면 일을 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 잔디밭에 둘러앉아서 술래잡기도 하고 머리를 땅에 두고 물구나무서기도 하면서 까르르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하였다. 놀다가 배가 고프면 오디를 따먹고 서로 입을 보면서 또 자지러지게 웃었다. 늘 다니던 길이 심심할 때는 산길을 이용해 귀가하기도 하였다.
산길로 가면 이른 봄 온 산을 붉게 물들인 참꽃을 한 움큼 따서 먹었다. 밍밍한 참꽃 맛은 별로였는데, 푸르죽죽하게 물든 입술을 보면서 서로 웃었다. 청미래덩굴 열매와 찔레순도 우리들의 간식거리였다. 자연에서 나는 것들은 먹어도 쉬 배탈이 나는 법이 없었다. 먹거리가 지천인 요즘은 가공이 되어서 나와 편리하지만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한 경우가 자주 있다.
아홉 고개를 넘어 해가 서산에 걸릴 즈음 집에 도착한다. 들일을 가서 부모님이 안 계신 빈집에 도착하면 마당 한쪽에 암탉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분주히 마당을 파헤치고 있다. 토끼장에 토끼가 좋아하는 씀바귀 한 움큼을 꺾어 넣어 주는 일은 내 몫이다. 툭 튀어나온 앞니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고향에서 지내왔던 세월의 두 배 반을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왔지만, 내 정서의 대부분은 고향의 자연을 닮았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유년기 학교 가는 길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같다.